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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특집/김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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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신자유주의와 문화
스크린쿼터제의 필요성에 대한 재검토
김현정|영화평론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유럽 영화가 국제 시장을 주도했으며 프랑스, 이탈리아, 덴마크가 주요 수출국이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수입하는 영화의 60~70퍼센트는 프랑스 영화였다. 미국영화사들은 자국 시장 내에서 유럽영화 상품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했는데, 과도기 동안에 상대적으로 성공적인 영화 제작사들이 번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국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많은 수가 여전히 유럽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국 영화산업은 이런 결과에 주목했으며, 그 해 ≪영화 세계 Motion Picture World≫와 함께 확립된 영화업계 전문 잡지들은 종종 수입 영화들의 낮은 품질에 불만을 토로했고, 동시대의 소재를 다루는 외국 영화들에 대해 스토리를 이해하기 어려우며 더욱 나쁜 것은 비미국적인 가치를 다루고 있는 점이라고 비판했다.”
1. 들어가며
스크린쿼터제가 위기상황에 봉착해 있다. 스크린쿼터제가 존폐의 위기에 몰린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겨운 상황에 처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크린쿼터제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은 주지하다시피 한미FTA이다. ‘스크린쿼터 축소 없이 한미FTA의 체결은 있을 수 없다’는 미국의 공언 앞에 스크린쿼터제는 논의의 여지도 없이 축소해야만 하는 존재로 전락하였고, 국무회의의 신속한 처리절차를 거쳐 73일로 반 토막이 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태의 원인제공자라 할 수 있는 한미FTA를 이야기하지 않고 스크린쿼터제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를 총체적으로 뒤흔들 가히 메가톤급 핵폭탄이라 일컬을 수 있는 한미FTA의 허와 실을 짧은 지면을 통해 요소요소별로 세밀히 분석하는 것은 어려우니만큼, 이번 글에서는 스크린쿼터제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특히 한미FTA 체결을 위해 도매금으로 결정해 버린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과정에서 어느새 사라져버린 스크린쿼터제의 필요성 여부에 대한 논의를 진행해 봄으로써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정책이 과연 옳은 것이었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2. 스크린쿼터제에 대한 논란
스크린쿼터제는 그간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정책으로 손꼽힐 만큼 한국영화계의 공통분모로 자리매김해 왔다. 또한 스크린쿼터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분석에서도 드러나듯 스크린쿼터제는 한국영화 발전에 일정 부분 기여해 왔으며, 한국영화계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역할도 담당해 왔다. 초기에는 단지 경제적, 산업적 목적으로 부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스크린쿼터제가 점차 산업적 영역을 넘어 문화적 담론을 주도하는 위치까지 확장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한미투자협정(BIT) 체결을 저지함으로써 미국을 중심으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체제에 일정 부분 생채기를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스크린쿼터제의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영화계 내부에서 조차 스크린쿼터제를 둘러싼 다양한 이견들 또는 문제제기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스크린쿼터제에 대한 여론 역시 이전과는 달리 호의적이지만은 않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국영화산업과 이를 둘러싼 환경들이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변하고 있는 만큼 스크린쿼터제에 대한 시각 역시 고정되어 있을 수는 없지만, 이렇듯 달라진 스크린쿼터제에 대한 관점은 한미FTA라는 요인과 함께 현시점의 스크린쿼터 유지 싸움을 힘겹게 하는 또 하나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시점에서 스크린쿼터제는 과연 필요한 것인가? 이에 대해 최근의 여론에서 제기되고 있는 몇 몇 핵심적인 논점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보도록 하자.
1) 스크린쿼터제와 문화다양성
스크린쿼터제에 대한 비판적 여론의 대부분은 먼저 스크린쿼터제가 궁극적인 목표로 내세우고 있는 ‘문화 다양성’이라는 영역과 연관되어 있다. 일례로 스크린쿼터제 축소 또는 폐지론자들은 문화 다양성을 위해 스크린쿼터제를 유지해야 한다면 한복착용의무제 역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인가? 등의 주장들을 제기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실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문화라는 용어가 빚어낸 혼돈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문화는 영어단어 중에서 가장 난해한 몇 개 단어 중 하나’라고 이야기한 레이몬드 윌리엄즈의 말처럼, 문화라는 말에는 상당히 폭넓은 범주의 의미들이 함께 담겨져 있다. 즉, 문화는 지적․정신적․심미적인 계발의 일반적 과정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가 하면, 한 인간이나 시대 또는 집단의 특정 생활방식을 가리키기도 하고, 지적인 작품이나 실천행위, 특히 예술적인 활동을 일컫기도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스크린쿼터제 옹호론자들이 사용하는 ‘문화’라는 용어는 일차적으로 세 번째의 의미를 겨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대중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영화의 다양성을 구축함으로써 더 나아가 생활방식으로서의 문화의 다양성까지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스크린쿼터 유지론자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전 세계 영화시장의 85%를 차지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독점으로부터 한국영화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스크린쿼터 비판론자들은 두 번째의 생활양식으로서 문화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그 비판의 초점이 다소 엇갈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문화 다양성과 관련하여 스크린쿼터 비판론자들이 제기하는 주장은 영화인들이 겉으로는 문화 다양성을 외치면서도 실제로 영화를 제작할 때에는 산업적인 논리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영화는 태생적으로 산업과 문화라는 이중적인 속성을 함께 지니며 발전해 왔다. 영화를 발명한 뤼미에르 형제들이 자신의 영화를 10편씩 묶어 2프랑의 입장료를 받고 상영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또한 막대한 자본이 투여되고, 수십 또는 수백 명의 집단적 노력이 요구되는 영화제작의 특성상 영화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산업적인 논리의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기도 하다. 반면, 영화는 탄생의 순간부터 인간의 삶과 상상력을 재현해 왔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문화적 산물로서의 속성을 지녀왔으며, 프랑스의 뉴벨바그 운동 등에서도 보여지 듯 감독을 작가로 영화를 하나의 예술로 승격시키기 위한 노력들 역시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물론 영화인들이 자신들의 상황에 따라 유리하게 한쪽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영화의 이중적인 속성을 활용했던 부분도 어느 정도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영화의 투자사, 제작사들이 영화의 예술적, 문화적 측면보다는 영화를 통한 이윤 추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 역시 부인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스크린쿼터제는 이들로 하여금 영화의 문화적 측면에 좀더 관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만드는 일종의 지렛대와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본다. 즉 영화인들로 하여금 문화의 다양성에 대해 스스로 외치게 만듦으로써 스크린쿼터제는 그들에게 ‘문화적 다양성’을 지향하도록 하는 사회적 책무를 부과하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는 것이다. 가령 메이저 영화사들이 ‘CJCGV의 사회공헌 4대 문화 프로젝트’와 같은 사업을 확대해 나갈 수 있도록 강제해나갈 수 있고, 한국영화인들이 해외로 진출할 시에도 타국가의 문화 다양성을 존중하도록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문화냐 산업이냐는 이분법적 논리로 스크린쿼터제의 축소 또는 폐지를 주장하기보다는, 스크린쿼터제를 통해 향후 문화의 다양성을 더욱더 강화해 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는 것이 궁극적으로 문화의 공공성을 확대해 나갈 수 있는 현명한 전략일 수 있다.
2) 한국영화산업의 경쟁력
둘째, 스크린쿼터 비판론자들이 스크린쿼터 축소․폐지의 이유로 내세우는 것은 한국영화산업의 경쟁력이다. 실지로 1990년대 중반 이래로 한국영화산업은 국내 및 세계시장에서 선례 없는 성장을 경험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1991년 15.9%에 불과하던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은 1999년 8년이 채 지나지 않아 두 배가 되어 39.7%에 이르렀으며, 2005년에는 59%를 기록하였다. 또한 <올드보이>, <빈집>, <사마리아> 등의 영화들이 베를린, 칸, 베니스 등의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성과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최근의 한류 열풍이 상징하듯이 한국영화의 해외 수출 역시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영화의 외형적 성장세만으로 한국영화의 경쟁력을 섣부르게 진단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한국영화가 할리우드 영화산업에 대항하여 발전을 지속할 수 있는 구조적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부문이 배급․상영임을 고려해 볼 때 한국영화산업의 경쟁력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한국영화산업이 배급․상영적인 측면에서 할리우드영화산업과 경쟁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따져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영화산업의 배급․상영부문의 경쟁력은 할리우드와 비교하여 월등히 떨어진다고 할 수 있는데, 배급력의 우위를 좌우하는 영화제작 및 배급편수, 다양한 배급망의 확보 여부 등에 있어서 두 나라는 매우 큰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경우 2003년을 기준으로 총 593편의 영화가 제작되었고, 459편의 영화가 배급․상영된 반면, 같은 시기 제작, 배급․상영된 한국영화는 각각 80편, 65편에 불과하다. 물론 CJ엔터테인먼트가 <브로크백 마운틴>과 같은 할리우드 영화를 배급한 사례와도 같이 한 나라의 배급사가 반드시 자국의 영화만을 배급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1985년의 제1차 한미영화협상으로 외국영화사의 국내영화업이 허용된 마당에 굳이 흥행 가능한 자국의 영화를 직접 배급하지 않을 할리우드 배급사는 거의 없다고 할 것이다. 이로 인해 수백 편의 영화작품을 보유한 할리우드 직배사는 한국의 배급사와 비교하여 극장주들에게 보다 폭넓은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극장주들의 요구에 따라 끊이지 않고 영화를 공급할 수 있다. 평균 10편 중 1편만이 흥행에 성공한다는 통계치에서도 보이듯 수요의 불확실성이 그 어느 산업보다도 높다고 할 수 있는 영화산업 내의 극장주들은 흥행이 되지 않는 영화를 재빨리 대체할 수 있는 다수의 영화 편수를 보유하고 있는 배급사를 당연히 선호하게 되고, 콘텐츠의 양에서 열위에 있는 한국영화 배급사는 할리우드 배급사와의 싸움에서 역학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더욱이 할리우드는 수평적 통합을 통해 극장뿐 아니라 위성방송, 공중파․케이블방송, 인터넷 등의 배급망을 전 세계적으로 확보하고 있다. 특히 1910년대 말경에 이미 산업화의 토대를 굳건히 구축한 할리우드의 영화사들은 해외에서 자신들을 대신해줄 에이전트를 고용하거나 해외 배급을 관장할 지사를 만듦으로써 전 세계의 영화산업을 포괄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할리우드 영화산업은 단순히 제작된 영화를 수출하는 단계에 있는 한국영화산업의 실정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해외마케팅을 구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볼 때 한국영화가 객관적인 배급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선전을 하고 있는 것은 역으로 그나마 스크린쿼터제가 한국영화시장 내에서 배급력의 균형을 맞추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영화인들이 “스크린쿼터제가 무너질 경우 <왕의 남자>와 같은 영화는 나올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일정 부분 타당한 예측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스크린쿼터제가 축소 또는 폐지될 경우 미국의 극장업 진출 역시 활발해질 수 있음을 생각해볼 때, 한국영화와 할리우드 영화산업 간의 구조적 경쟁력은 더욱더 큰 격차로 벌어질 수 있다.
3) 누구를 위한 스크린쿼터제인가?
마지막으로 스크린쿼터 비판론자들이 종종 이야기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로 영화산업 내의 양극화 문제를 들 수 있다. 다시 말해 스크린쿼터제를 통해 이득을 보는 것은 일부 메이저 영화사들과 소수의 스타급 배우들뿐이라는 주장이다. 실지로 메이저 영화사들이 수백억 원대의 회사로 성장하고, 스타급 배우들이 한해에 수억에서 수십억의 소득을 올리는 동안 영화 스텝들의 평균 연봉은 천만 원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대다수의 독립영화, 저예산 영화들 역시 배급․상영의 통로를 찾지 못해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당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를 이유로 스크린쿼터제 무용지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해결의 처방전을 잘못 내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으로 한번 되물어보자. 스크린쿼터제가 없어지면 영화 스텝들의 처우는 더 나아질 수 있는가? 또한 독립영화, 저예산 영화들은 지금보다 더 안정된 배급․상영 통로를 보장받을 수 있는가? 답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스텝들의 처우개선운동은 영화의 산업화 정도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노동조합 설립 등 미국영화 스텝들의 권리확보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던 시기가 미국영화산업이 산업적 체제를 완성했던 1920년~1930년대였다는 것은 우연의 일이 아니다. 일정 정도 영화의 산업화가 구축되어야 그에 따른 합리적인 노사관계 및 스텝들의 권리 역시 선명하게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스크린쿼터제가 무너지고 한국영화산업 전체가 흔들릴 경우 스텝들 역시 일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기에 스텝들은 지금보다 더욱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독립영화, 저예산․예술영화 역시 영화의 산업화와 동떨어진 범주에 있지 않다. 일례로 미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주요 독립 영화들의 유통은 20세기 폭스, 파라마운트, 소니 픽처스, 워너 브라더스 등의 굴지의 메이저 스튜디오들의 배급망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독립영화, 저예산․예술만을 취급하는 인디레이블을 가지고 있고, 2005년 골든 글로브상을 수상한 <사이드 웨이>나 <이터널 썬샤인> 등의 작품들이 이러한 배급망을 타고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물론 스크린쿼터제가 유지되고 한국영화가 산업화의 꼴을 갖춘다 할지라도 스텝들의 처우개선과 독립영화, 저예산․예술영화의 활성화가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 영화스텝들의 노동조합인 IATSE(국제영화및연극노동자연합/International Alliance of Theatrical Stage Employees), DGA(미국감독조합/ Directors Guild of America), WGA(미국작가조합/ Writers Guild of America)가 오늘날같이 영화산업 내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갖기까지는 수차례에 걸친 파업 등의 지난한 싸움의 과정이 있어왔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파라마운트 판결(Paramount Case)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미국 독립영화의 번영은 메이저 스튜디오들의 독과점을 해체하고자 했던 독립영화인들의 무수한 대항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스탭들의 생존권 확보 싸움과 독립영화의 활성화 방안도 전체 영화산업이 무너진다면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더불어 스크린쿼터제의 축소․폐지 여부는 단지 영화계 내의 상황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미무역대표보고서를 보더라도 미국은 스크린쿼터제뿐 아니라 방송쿼터, 공영방송 및 위성방송, 케이블방송의 외국자본 참여 제한 등의 규정을 모두 철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스크린쿼터제가 축소 또는 폐지된다면, 다른 문화 분야의 개방 역시 도미노식으로 급속히 진행될 것이다. 특히 디지털기술의 발전으로 영화와 방송 간의 매체융합이 가속화되고, 영화와 방송 간의 경계선이 모호해지는 상황에서 스크린쿼터제가 무너진다면 방송쿼터제 등 역시 존재할 수 있는 명분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3. 나오며
미국의 한국영화 시장에 대한 개방 압력은 20년이 넘게 지속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1985년과 1988년 두 차례에 걸쳐 열린 한미영화협상의 결과, 이미 영화상영의 스크린쿼터제를 제외한 한국영화의 전 부문은 개방이 완료된 상황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한미투자협정(BIT)을 빌미로 그나마 남은 스크린쿼터제마저도 축소해야 한다고 해마다 공세를 가해 왔고, 그 것이 여의치 않자 한미FTA의 선결조건으로 스크린쿼터의 축소를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이러한 미국의 행태는 한국영화 시장에 대한 미국의 개방 압력이 여기에서 멈추지 않을 것임을 충분히 예측케 한다. 현재는 대내외적인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쿼터 일수의 반만을 축소하자고 이야기하지만, 스크린쿼터 일수가 73일이 되는 순간 미국은 또 다른 이유를 붙여 이를 완전히 없애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의도는 오랜 세월을 거쳐 전 세계에서 보이는 할리우드의 다양한 시장 개방 공세 속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혹자는 스크린쿼터제도를 실시하는 국가가 전 세계적으로 한국을 포함해 11개 국가에 불과한데, 왜 굳이 스크린쿼터제를 고집하느냐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나라에 스크린쿼터제도가 없는 것은 그것이 불필요한 제도여서라기보다는 미국의 압력으로 이를 시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일례로 1920년대 프랑스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자국의 영화산업을 할리우드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스크린쿼터제를 시행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국은 1946년 전쟁 채무국인 프랑스의 채무를 삭감해준다는 조건으로 스크린쿼터제의 완화를 요구하였고, 이를 관철시켰다. 또한 멕시코 역시 1993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로 스크린쿼터제를 폐지하게 된 국가이다. 캐나다와는 달리 ‘문화적 예외’ 조항을 두지 못했던 멕시코는 30%의 자국영화 스크린쿼터 비율을 매년 5%씩 축소하여 1998년에는 완전히 폐지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연간 약 100여 편의 영화를 제작했던 멕시코 영화산업은 1995년 연간 4편을 제작하는 상황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또한 자국의 영화산업을 부활시키기 위해 티켓 한장당 1페소의 영화지원기금을 부과하려 했던 멕시코인들의 시도조차 북미자유무역협정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실현되지 못하고 무산된 바 있다. 이렇듯 미국은 전 세계 곳곳에서 다른 나라의 영화 시장을 전면 개방하려는 다양한 공세를 펼쳐나가고 있다. 이러한 공세는 미국영화가 전 세계 영화시장의 100%를 장악하는 날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며 한국 스크린쿼터제 역시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자명한 사실은 스크린쿼터제가 축소․폐지될 경우, 스크린쿼터 비판론자들이 스크린쿼터 축소․폐지의 이유로 내세웠던 문제들은 더욱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스크린쿼터가 축소․폐지될 경우, 한국영화계는 더욱 치열해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금보다도 강화된 산업적인 논리에 따라 영화를 만들려고 할 것이고 결과, 문화의 다양성을 위한 노력들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또한 스크린쿼터제가 축소․폐지될 경우 한국영화산업의 양극화 역시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일부 메이저 영화사, 소수의 스타급 배우들은 할리우드 자본에 유입되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는지 몰라도, 전반적인 한국영화산업이 무너진 상황 속에서 영화 스텝들과 독립영화 및 저예산․예술 영화인들은 더욱더 열악한 위치로 전락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현정․
(사)영화인회의 정책연구원(2002년)
․(사)스크린쿼터문화연대 정책팀장(2003년~ 2004년)
․동국대 대학원 영화과 박사과정․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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