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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신작단편/유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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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단편|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유시연
담배에 불을 붙여 물며 그는 지평선을 바라본다. 거대한 얼음섬에 갇힌 육지가 푸른 냉기를 뿜어내며 더께처럼 내려앉은 짙푸른 고독을, 예의 그 적막과 침묵으로 견뎌내고 있다. 대기는 언제나 추웠다. 마을로부터 꽤 떨어진 이곳의 정적은 오랜 고립감이 가져온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거무스름한 벌판 너머에는 얼음 두께 2,620미터의 바다가 있다. 천혜의 장소를 얻은 그는 한국에서의 작업장을 떠올리며 멀리 하늘을 향해 치솟은 빙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무공해의 얼음벽에 칼을 들이대는 일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그로서는 흥분을 가눌 수 없다. 그러나 감정의 들뜸이나 방심은 금물, 대충 스케치를 마치고 숨을 돌린다. 그의 첫 작품은 아네(aniu)에게 헌정될 것이다. 허가구역이 통과되면 아네와의 약속대로 에스키모 원주민의 원시 가옥을 만들 것이다. 틀링깃 인디언의 전통가옥 마을처럼.
푸르스름한 협곡으로 어떤 물체가 구체적인 형체를 띠며 그의 시선 속으로 살아나고 있었다. 긴 시간 그의 가슴속에서 퍼득이던 그 형체는 날개 달린 짐승이었다. 그 짐승은 깃을 활짝 펼친 채 저 아득한 빙원 끝으로 날아올랐다. 그는 대칼을 집어 들고 전체적인 도안을 머릿속에 그리며 방금 사라진 큰 새의 그림자를 쫓았다. 오래 전 그가 집을 떠나면서부터 구상해둔 모형이었다. 어쩌면 카빙에 맹목적으로 빠져들던 그 순간부터일지도 모르겠다. 고희연이나 호텔에서 치러지는 축제의 소모품으로서가 아닌 제대로 된 작품을 가슴속에 담아둔 일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이다. 그것은 어딘가를, 그가 갈 수 없는 먼 곳을 바라보는 버릇이 깃든 소년 때부터일 것이다. 그는 봉황이나 용을 주로 조각했다. 주문이 밀릴 때는 공장 창고에서 밤을 새는 일이 예사였다. 냉동창고에 보관된 작품들을 바라보노라면 항상 뿌듯함과 아쉬움이 교차되곤 했다. 완성된 작품은 거짓 없는 투명함이었다. 얼음 창고에서 살다시피 하며 연습한 결과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그 허망함의 극치는 그가 카빙에 깊이 빠져들수록 텅 빈 공허와 함께 찾아왔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대칼을 집어던진다. 얼굴과 손과 옷자락에 들러붙는 얼음알갱이가 그의 몸에 파고들어 작업을 더디게 한다. 전기톱으로 단 십여 분이면 기초 도안이 끝날 일인데 수작업이라 더 더디다. 주인집 남자의 공구함에서 나온 톱은 작은 크기임에도 의외로 날카롭다. 얼음의 잔해가 발치에 흩어진다. 귀와 코가 얼얼하게 얼고 등허리에는 땀이 배어 나온다. 얼음 조각이 흩어질 때마다 견고한 세월이 긴 침묵을 깨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히말라야 꼭대기에서 발견한 조개껍데기처럼 빙하의 협곡에 갇혀 지낸 암모나이트나 새우, 해초줄기들이 몇억 년의 바람을 뚫고 햇빛 속에 드러나면서 비로소 그들의 과거를 풀어놓는다.
그린란드만에서 차고 거친 바다를 건너온 바람이 공격할 태세를 잠시 멈추고 숨을 죽인다. 봄이 오는가 싶다가도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며 바람은 사정없이 몰아친다. 톱을 내려놓고 다시 대칼을 잡아 기초 도안을 뜬다.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중간 칼로 금이 가지 않도록 스케치하는데 십여 분, 세부적인 다듬기로 들어가기 전 담배를 한대 핀다. 꽤 운이 좋았다. 얼음 골짜기를 찾아내기까지 한 계절이 지났지만 개의치 않기로 한다. 우윳빛 바다 밑으로는 물곰의 자맥질이 한창일 것이다. 얼음판의 숨구멍으로 휘파람 소리가 길게 난다. 바람이 차다. 용암이 식어 거대한 바위계곡으로 변한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두 개비째의 담배를 문다.
그는 몸을 한층 더 웅크리고는 적도의 태양을, 아열대지방의 잦은 비와 햇볕에 사철 푸르고 싱싱한 활엽수를 생각한다. 춥고 건조하고 황량한 풍경에 질린 그는 사우나 굴뚝에서 솟아나는 연기를 보며, 푸칵 바의 난로에서 지펴지는 불꽃을 보며, 주전자의 김을 보며 따뜻함에 기대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지난 생일날, 그는 처음으로 떠나온 집과 한 여자의 환영을 떠올렸다. 팍팍한 빵과 토마토소스를 뿌린 샐러드를 포크로 찍으며 그가 그리워하는 건 된장국이나 미역국 따위가 아니라 스스로 가슴 안에 집어넣은 단단하게 결빙된 덩어리를 녹여줄 그 무엇이라는 것을 느낀다.
지축이 흔들린다. 소리의 진동이 평원을 지나 해면과 지평선 끝자락을 돌아 길게 이어진다. 날씨가 서서히 풀리면서 빙산이 떨어져나가는 소리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빙산이 통째로 떨어져나간 사건이 있었다고, 예전에 없던 일이라며 어두운 표정을 짓던 그녀, 아네의 심각한 얼굴이 스쳐간다. 아네는 1998년 2월 초, 하얼빈의 국제 얼음조각대회에서 만났다. 그녀는 하버드의 박사과정 중에 있었고, 에스키모의 전통가옥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이글루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97년 삿뽀로 대회에서 대상을 받긴 했지만 몇 번의 수상도 시시해졌고, 고작 연회용으로, 파티의 주변장식에 머무는 작품을 보며 스스로 참담해지는 기분을 추슬러야 했다. 제대로 된 얼음을 구하지 못해 초조감에 사로잡힐 때마다 원시의 얼음 골짜기, 무공해의 설원이 눈앞에 가물거렸다. 그런 낭만적인 생각을 할 때만 해도 지금의 그를, 지구 최북단의 땅에서 추위를 견디는 자신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얼음 조각사들은 모두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함께 일하던 동료는 아예, 양평 어디쯤으로 옮겨가서 목공예에 손을 대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는 시린 발을 동동거리며 시계를 본다. 오후 2시 13분. 택시기사와의 약속시간은 아직 넉넉하게 남아 있다. 보온병 뚜껑을 열고 커피를 따라 마신다. 저 협곡 보이죠, 원래는 초목이 우거졌던 자리예요. 빙산과 초목이라니, 그는 아네의 말을 떠올리며 희부연 평원을 바라본다. 날이 풀리면 아네와 킹 연어 낚시를 가거나 하루 40불짜리 렌터카를 빌려 남동부지역을 순회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네는 휴학 중에 있고, 새로운 일에 열심이다. 사냥라인을 잘 지키지 않는 외지인들의 사진을 찍어 벌금을 물게 하거나 감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추위 때문인지 관광객도 뜸하다. 한낮에는 딱딱하게 굳어 있던 진흙땅이 고분고분해진다. 봄은 햇빛에 질척거리는 진흙땅으로부터 오고 있다. 겨울 사냥을 즐기는 사람들이 간혹 공항에서 택시를 대절해와 모텔에 묵으며 내륙을 순회하거나 고래 떼나 연어 떼가 몰려오는 먼 바다로 나가는 것을 제외하곤 마을은 변화가 없다. 그가 이곳에서 할 줄 아는 유일한 소일거리는 낚시이다. 에스키모들이 몇천 년 동안 해오던 방법은 빙판에 구멍을 뚫어 낚싯줄을 늘어뜨리는 일이다. 인조낚싯밥을 문 물고기들이 매달려나와 빙판 위에서 퍼덕대다가 뻣뻣해지면 회를 떠서 초고추장에 찍어먹기도 한다. 그의 방 창문턱에는 철사에 아가미를 꿰인 채 꾸덕꾸덕 말라버린 물고기 두름이 매달려 있다. 그것을 끄집어내어 포켓용 칼로 베어 먹거나 매운탕을 끓여먹는다. 고추의 매운 맛은 그의 기억을 차츰 소생시켜서 오래 전 그가 속했던 집과 골목과 공장과 얼굴들을, 그들과의 조금은 번잡하고 친밀했던 관계들을 복원시킨다. 그는 매운 맛이 입안에 아직도 남아있는 듯 입맛을 다시고는 침을 삼킨다.
그는 장갑 낀 손을 폈다 오무렸다 반복하며 손가락의 가려움을 참아낸다. 작은 기온의 변화에도 피부는 검붉게 변하며 민감해진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섰을 때의 막막함이 다시 한번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한국을 떠나 처음 미국에 도착해서 만난 외국인이 헬렌이었다. 헬렌과의 기억은 도무지 남아 있지 않다. 일년이라는 시간이 길거나, 그렇다고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닌데도 그러한 걸 보면 그녀와의 관계란 장거리 여행길에 잠시 들르는 중간 기착지 같은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한다. 헬렌과 헤어지고 나서 버스로 캐나다 밴쿠버를 경유하여 프린스 조지, 도오슨, 화이트 호스를 거쳐 앵커리지에 도착하려고 450불을 지불하고 편도요금을 끊었었다. 나흘이 걸리는 그 여행에서 그는 시애틀을 벗어나기도 전에 차멀미로 엄청 고생했다. 버스투어를 취소하고 직항편 비행기를 탔다. 부쉬 플레인(bush planes). 외딴 지역을 운항하는 전세비행기였다. 주요 항공사들이 폭풍이나 안개로 이착륙을 못할 때도 부쉬 플레인은 위험부담을 무릎 쓰고 이륙하는 바람에 모험가들 사이에 주로 이용되었다. 겨울의 심장부, 영하 50도의 바람이 통째로 삼킬 듯 후려칠 때 그는 지금 발 딛고 선, 이곳에서 살고 싶은 본능이 솟구쳤다.
“저 벌판으로 계속 달리면 초원에 다다를까요.”
가끔 아네는 뜬금없이 불쑥 엉뚱한 말을 지껄여댔다. 할머니가 말한 베네티타 씨앗을 찾아 심을 거라는 아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에스키모들은 대지가 잠든 사이 달이 곡식과 열매와 자신들의 영혼을 살찌운다고 믿었다. 아직 얼음이 땅을 덮지 않았고 푸른 수목이 지구의 폐활량을 자랑하던 시기였다. 어느 날 달이 조금씩 기울어지더니 어두운 세상이 왔다. 베네티타 나무에 제일 먼저 변화가 일어났다. 일년 내내 달콤한 즙을 달고 있던 열매는 팩팩해지고 맛이 변했다. 달은 점점 야위어갔고 부족회의가 소집되었다. 마을 처녀들은 제물로 바쳐졌고, 제물이 바쳐진 후에는 달이 조금씩 불어났지만 얼마 안 가 다시 홀쭉해졌다. 청년들은 달을 뜯어먹는 괴물을 퇴치하러 길을 떠났다. 그러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방한화를 뚫고 파고드는 차가운 기운이 관자놀이와 몸의 혈관을 수축시키며 서서히 옥죄어온다. 그는 목도리를 여미다말고 흠칫 놀란다. 그림자 하나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 그림자는 미희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네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이대로 얼음미이라가 되는 건 아닐까, 그는 신산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려 머리를 한 번 흔들고는 작업에 집중한다. 빙산이 떨어져나가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햇빛이 밝은 날 여기저기에 흰 요트처럼 떠 있는 유빙 조각들. 수억 년을 바다에 갇힌 채 유랑하고 있는 유빙 덩어리는 어쩌면 운명에 갇혀버린 자의 영혼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네에게 도움을 받은 이후 그는 그녀를 생각하는 날이 많아졌다. 이곳에서도 택시로 서너 시간이나 걸리는 오지의 오두막에서 그녀는 혼자 살고 있다.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은 다소 거칠어 보였고, 청바지에 무릎을 덮은 밤색 부츠는 낡아서 몇 대를 물려 신은 그들 가문의 유물 같았다. 누런 피부와 작은 키, 까만 눈의 아네는 영락없는 토종 원주민이었다. 그녀는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 번 하얀 십자가의 길을 지나 편의점과 택시 승강장, 모텔이 마주 보이는 공터에 개썰매를 끌고 나타난다. 회오리바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그녀와 마주 앉아 따뜻한 홍차를 마시고 싶다. 푸칵 바에서 몇 번인가 어깨를 웅크리고 언 손을 비비며 찻잔을 감싸 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푸칵이란 식수로 쓰는 눈을 뜻한다고 인디언계인 주인이 말했었다. 아네가 카메라를 들이대며 물고기를 찍던 날, 그는 일찌감치 낚시도구를 챙겨 집으로 가고 있었다. 술 한잔 할래요? 아네가 말했고 그는 먼저 가서 기다리라고, 나중에 가겠다고 하고는 십여 분 뒤 바로 들어갔다. 아네는 위스키 한 잔을 청해놓고 유리창 밖으로 펼쳐진 설원을 내다보는 중이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위스키를 시켰다. 바람이 거칠게 창틀을 잡아 흔들었다. 바람 부는 들판에 오도카니 그녀가 홀로 서있는 장면이 환상처럼 지나갔다.
그는 그날 아네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여자를 사랑했고, 그 때문에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있으며, 도망치듯 미국으로 갔고, 다시 막막한 심정으로 알래스카를 찾아왔노라는 말에 아네는 그의 눈을 조용히 응시했다.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그녀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는 것을 보며 먹먹한 슬픔이 지나갔다. 그가 과거의 그늘에 잠겨 침통해하고 있을 때 아네의 말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그는 꿈을 꾸는 듯 몽환적인 눈빛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빙하기는 여름에 시작되며 언젠가는 너른 빙원을 지나 푸른 수목을 찾아갈 거라고 말한 것 같다. 메사베르데 메사베르데……, 그녀가 나직하게 혼잣소리로 그렇게 읊조린 것 같다.
잔을 비우고 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 툰드라 모텔 앞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게 보였다. 편의점에서 아네가 구입한 물건들을 실어주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뒤돌아보니 모자를 푹 눌러쓴 아네의 모습이 마을 밖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아네가 까만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무슨 일인가 들여다보았다. 모텔 안에서 자살한 인디언 시체가 있었다. 사람들이 마을 밖의 공동묘지에 인디언의 시신을 내려놓고 쌓인 눈으로 덮어주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눈의 잔해가 덜그럭거리며 십자가 사이로 반짝였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끝났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시간은 무의미했다. 어둠 저편으로 사라지는 유쾌하지 못한 기억처럼 그는 흔들리는 과거의 일들을 밀어내고 고요히 흐르는 시간의 물결에 자신을 내맡겼다. 그는 그들의 눈빛에서 삶의 지루함과 권태를 발견했다. 삶의 중압감에 짓눌려 사는 그와 너무나 대조적인 그들을 보며 그는 여전히 불안정한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갈매기가 없는 바다. 한밤중에 푸칵 바를 어슬렁거리거나 일몰을 보러 바다를 향해 충동적으로 달려 나가던 그의 욕구가 또 꿈틀댄다. 아네에게 구출되던 날 술을 마시고 무작정 바다를 향해 걸어간 일은 취기였을까. 어렴풋이 그 일이 떠오른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독한 술을 많이 마셨던 것 같다. 그는 매서운 바람을 견디며 걷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른다. 술이 깨고 턱이 덜덜 맞부딪칠 때에야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자신을 발견했다.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십 분쯤 왼쪽으로 걸어갔다가 다시 원점으로, 다시 오른쪽으로 걸으며 그는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몸은 굳어지는 것 같았다. 잠이 쏟아졌다. 졸음에 빠지지 않으려 발을 구르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때 개짓는 소리가 들려왔다. 있는 힘껏 소리쳤으나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눈만 내놓은 그림자가 장갑 낀 손을 내밀었을 때 그는 긴장이 풀리며 주저앉아버렸다. 잠시 정신을 놓은 것도 같았다. 아네의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개들의 울부짖음이 밤의 어둠을 가르며 퍼져갔다. 그는 안도의 숨을 쉬며 그녀의 옆자리에 웅크린 채 머리를 담요에 파묻었다. 그녀에게서 그을음 냄새와 나무냄새가 훅 끼쳐왔다.
“죽기로 작정했어요?”
어디선가 환청처럼 그 말이 들려왔다. 눈이 떠지지 않았다. 그는 겨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보았다. 청회색 하늘과, 그 하늘빛을 닮은 희뿌연 설원, 거뭇거뭇한 잡초무더기와 지평선 끝에서 날아오르는 새들, 그는 차츰 동공이 회색빛으로 얼어붙는 환영에 사로잡혔다. 그는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러나 바람소리만이 그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죽기로 작정했어요? 그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눈을 감았다. 목소리는 아네였다가, 그 다음에는 헬렌이었고, 그리고는 미희의 소리였다가 다시 바람소리로 바뀌었다. 고개를 쳐들었다. 아네가 코앞에서 바짝 얼굴을 들이밀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술에 취한 모양이라고 그는 중얼거렸다. 미희라니, 그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지나온 길이 어디에서부터였는지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멀리 검은 갈대 숲과 끝없는 지평선이 들어왔고 그곳 어디에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미희를 생각하자 김민성의 말이 어제 일인 듯 들려온다. 형, 나 곧 결혼하게 될지도 몰라. 경리실의 윤미희 씨 있지? 작업이 끝나고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던 끝에 상기된 얼굴로 김민성이 말했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누르며 말없이 소주를 들이켰다. 김민성과 헤어진 후 혼자 자리를 옮겨 소주를 몇 병 더 마셨다. 그날 밤 집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다음날 사무실에서 본 미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북어국을 끓여놓고 기다렸다고 말했다. 형, 우리, 결혼하면 이민 갈지 몰라요. 미희 씨가 뭐랬는가 하면, 공장장의 비밀금고번호만 알아내면 이민을 가재요. 하하, 농담이에요. 미희는 공장장의 비서 일도 겸하고 있었다. 사건이 터지고서야 그는 그녀가 만나는 남자들이 한둘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미희와 공장장의 사체가 병원차에 옮겨지는 장면이 되살아나며 그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살아난 듯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냉동창고 안에서 꽁꽁 얼어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한 것은 교대 근무를 나온, 지금은 양평으로 간 조각사였다. 냉동실의 문은 밖에서 잠겨 있었다. 미희가 그 시간에 왜 거기 있었는지, 그는 혼란스러운 심경을 추스르며 그녀가 죽기 전날의 일을 떠올렸다. 미희는 분명히 휴일을 맞아 노모와 동생들에게 가봐야겠다고 말했고, 그는 잘 다녀오라고 말한 뒤 사우나로 향했다. 사우나에서 나와 늦은 저녁을 먹고 한 달 후에 있을 대회준비와 연장손질을 위해 작업실로 향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두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니. 그들이 발견된 건 다음날 아침이었다. 서로 껴안은 채 공포에 질려 고통스러운 낯빛을 하고 있는 그들의 몰골은 처참했다. 그는 김민성을 쳐다보았다. 놀람과 혼란이 뒤섞인 김민성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과거의 어두운 기억을 떠올리자 그는 우울해진다. 그때부터일 것이다. 가슴에 들어와 박힌 거대한 빙산이 그의 몸을 서서히 얼리며 흐르고 있는 것이……. 손가락은 거의 마비 상태이다. 이곳은 마을에서 오 리쯤 떨어져 있으며 짐승의 발자국도, 인간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외딴 골짜기이다. 방대한 국립야생동물보호구역 안에 자리한 협곡은 기묘한 바위형상을 한 얼음 모형이 병풍처럼 빙하기의 침묵을 겹겹이 껴입은 듯 펼쳐져 있었다. 마치 신기루를 본 것 같았다.
아네에게 한번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고서도 벌써 보름이 지나가고 있다. 기온이 뚝 떨어졌는지 몸이 으스스 떨린다. 사우나 생각이 간절하다. 마른 쑥과 갈대묶음이 걸린 벽, 장작이 쌓여 있는 아궁이 입구에서부터 후끈한 열기가 달아오르던 사우나가 아른댄다.
그는 배낭 귀퉁이에 쑤셔 박은 작은 가방을 헤집는다. 크기에 따른 평칼 세 개, 삼각칼, 마무리용 손칼이 포개져 있다. 영하 2도. 작업을 하기에는 견딜 만한 날씨였다. 소칼을 들고 부분 조각을 한다. 살점처럼 얼음이 떨어져나간다. 부분 조각은 좀 더 신중을 요한다. 몸통에서부터 머리, 날갯죽지, 다리와 꼬리 순서로 차근차근 다듬어나간다. 오랜만에 하는 작업이라 손이 뻣뻣하다. 그는 가죽장갑을 벗어들고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본다.
세세한 부분만이 남았다. 무늬를 넣는 것은 개인 취향이다. 작업장에서는 간지를 넣는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무늬를 넣는 일을 말한다. 그는 주로 얼음 속에 갇힌 해면의 출렁거림을 떠올리며 하나하나 작업에 집중한다. 흐르지 못하고 갇힌 채 떠도는 바다의 짙은 고독을, 그 외로움을 차가운 칼끝이 겨누고 있다. 푸른 입체감과 생동감을 넣어주는 것이야말로 그가 표현해야 할 부분이다. 마치 혈액이 실핏줄을 따라 흐르며 움직이는 근육과 같이 표면이 살아나야 하는 것이다. 삼각 칼끝을 세운다. 잘 얼린 얼음은 금속성이 닿으면 금이 가기 쉬워서 적당히 녹아 물방울이 스며 나올 때 칼을 대야 작업하기가 좋다. 투명한 얼음을 위해 공기를 빼는 것은 기본이다.
그는 근육의 부위를 살려 고랑을 만들고, 주름을 포개어 넣는다. 푸른 바다빛이 도는 겉면은 부드럽지만 힘찬 약동을 보여준다. 눈알에 물을 조금 축인다. 섬뜩한 느낌. 차고 매끄러운 표면을 따라 힘줄이 돋고, 금방이라도 피가 돌 것 같은 날렵한 몸짓이다. 마지막으로 부리를 정돈한다. 적절히 휘어진 부리의 날카로움을 표현하느라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하늘은 금세 어두운 잿빛이다. 시계를 보니 3시 25분. 곧 어두워질 시각이다. 깃을 활짝 편 독수리는 금방이라도 땅을 박차고 날아오를 것만 같다. 민속마을을 완성하지 못하면 어떠랴. 독수리는 언제까지나 원주민 곁에 남아 그들을 지켜줄 것이다.
통장의 잔고는 바닥이다.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 택시에서 내린 그는 배낭을 어깨에 멘 채로 보안관 사무실을 향한다. 난로 옆에서 팔짱을 낀 채 하품을 하던 보안관은 악수를 하면서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훑어본다. 사냥총을 신고하고 허가 구역 안에서의 사냥에 대해 유의 사항을 듣는다. ANWR(야생동물보호구역)에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 알고 있죠. 주먹을 쥐는 보안관의 표정은 곧바로 감옥행이라구, 하는 경고가 담겨 있다. 문득 물고기의 환상에 사로잡힌다. 보안관의 두툼한 감색 점퍼 앞가슴에 달린 동물뼈 목걸이 때문일 것이다. 그는 물고기의 환상을 털어버리고 보안관에게 인사를 하고는 사무실을 나온다.
푸칵 바에 들러 혼자 술을 마시려던 그는 주유소 앞에서 기름이 떨어졌다며 석유통을 들고 나오는 주인집 사내와 마주친다. 주인사내는 방금 아네가 그의 방 앞을 기웃대더라고 말한다. 그녀가 어디로 갔느냐고 묻자 주인사내는 팔을 뻗어 설원을 가리키며 아니우, 아니우를 반복한다. 눈벌판, 눈세상을 뜻하는 원주민의 방언이다. 그녀와 길이 어긋나다니, 아차 싶다. 그는 취기를 털어내듯 몸을 흔들고는 사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마을 밖으로 달려간다. 벌판 끝에 거뭇거뭇한 물체가 움직이더니 곧 지평선 쪽으로 사라진다. 공동묘지 앞을 지나며 그는 아네의 나무 벽에 걸린 백인 남자의 사진을 떠올린다.
그는 모자를 깊이 눌러쓴다. 냉동창고에서 눈을 부릅뜨고 죽은 미희와, 시애틀에서의 악착스러운 장사, 헬렌과의 위장결혼이 까마득한 대양 저편에서 일어난 일처럼 가물거린다. 미희가 죽은 후 김민성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는 그대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쩌면 이웃들 중 누군가에게 미희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들켰을 수도 있었다. 경찰의 탐문수사는 결국 그를 추적할 것이고 알리바이를 입증하지 못하면 꼼짝없이 걸려들고 만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영주권을 얻기 위해 저축해둔 전 재산을 알선책과 헬렌에게 지불했다. 헬렌은 김치를 잘 먹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여자였다. 헬렌은 계약 조건에 침대를 같이 쓸 것을 요구했고 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미희를 잊기 위해 밤마다 헬렌을 탐하고 집착했다. 거의 매일 밤 헬렌은 달링을 외쳐댔다. 일년이 넘자 헬렌은 그에게 넌더리를 냈다. 헬렌과 헤어지고 우연히 슈퍼에서 그녀와 마주쳤을 때 헬렌은 건장한 체구의 흑인남자 팔짱을 낀 채 그를 보고 하이, 하며 웃었다. 그는 낯을 찌푸렸다. 헬렌과 덩치 큰 흑인의 등판을 바라보며 그동안 미뤄두었던 알래스카로의 여정을 실행에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편의점에 들러 오랜만에 배추를 사며 그는 휘파람을 분다. 마늘가루와 생강가루도 병째 집어든다. 아네에게 김치를 만들어 줄 참이다. 한국식 샐러드라고 설명하자 아네는 까만 눈을 반짝이며 기대감을 표시했었다. 깡통 통조림과 인스턴트로 대충 살아온 일 년 동안 몰라보게 허리둘레가 굵어졌고 벨트가 뻑뻑했다. 편의점에서 나오자 원주민의 가옥에서 벽난로를 피우는지 지붕 위로 연기가 흩어진다.
그는 집에 들러 언 몸을 녹일 사이도 없이 외출준비를 한다. 편의점에는 비행기가 결항되어도 몇 개월은 끄떡없을 물품이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비행기가 오지 않으면, 술이 오지 않으면, 캔음료와 통조림 식품이 오지 않으면, 에스키모들은 다시 사냥을 할지도 모른다. 라면과 빵과 버터와 스프, 각종 야채를 배낭에 집어넣고 택시 승강장으로 빠른 걸음을 내딛는다. 담배를 꼬나물고 시동을 걸고 있던 운전사는 손을 내젓는다.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위험하다는 것이다. 다른 운전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거부할수록 아네에게 가야겠다는 조급함은 가라앉지 않는다. 그는 체인을 감고 있는 폴란드계 남자에게 말을 붙이며 그의 주위에서 떠나지 않는다. 예전에 한번 폴란드 남자는 바웬사 이야기를 하며 그의 부친이 바웬사와 같은 노조에서 일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었다. 노동자 출신의 대통령을 뽑았다는 사실에 폴란드 운전사는 할말이 많은 듯했다.
택시 승강장에서 가까운 호프집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으며 그는 아는 택시기사라도 만날까 실내를 둘러본다. 실내에는 에스키모 남자 몇 명이 둥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카드놀이를 하고 있다. 짠 새우젓 냄새와 닭똥냄새와 싸구려 향수가 뒤섞여 실내를 떠돌고 있다. 그들은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꽉 끼는 무거운 엉덩이를 소파에 디밀고 포커게임에 열중하는 에스키모 옆에서 주인인 듯한 남자가 테이블에 코를 박고 곯아떨어져 자고 있다. 그때 문이 열리고 폴란드계 미국인 택시 운전사가 들어온다. 모자 끝에 잔고드름이 달려 있고 수염에도 얼음이 매달려 대롱거린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대다가 그를 발견하고는 손을 들어올린다. 운전사는 터무니없이 요금을 세 배로 불렀지만 감히 깎자는 말을 못한다. 배낭을 뒷좌석에 싣는다. 정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채우고 출발하기까지 소요된 삼십여 분이 북극의 밤처럼 지루하다. 동상의 전조 증세가 나타나는지 장갑 낀 손이 몹시 가렵다. 택시 안은 따뜻하다. 운전사가 느긋하게 휘파람을 분다.
바람이 택시의 몸체를 두들기며 지나가자 그의 몸에 상처가 남는 것처럼 아릿하다. 운전사는 계속 불만을 터뜨리며 금방이라도 되돌아갈 듯 낯빛을 일그러뜨린다. 몇 번인가 빙그르르 돌아버린 택시는 속도를 낮춰 조심스럽게 미끄러진다. 파카의 깃털 속에 머리를 깊이 묻고 눈을 감는다. 지구 최북단의 기류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족 이야기에 열을 올리던 운전사가 입을 다물자 사위는 적막에 싸이고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이 들린다. 시속 30에서 40키로. 운전사는 핸들을 움켜쥔 채 조심스럽다. 속도를 올렸다가는 차가 제멋대로 달아나다가 크레바스 같은 틈새에 바퀴가 빠지거나 해안가로 곤두박질 칠 게 틀림없다. 꽤 긴 시간이 흐른 것 같다. 늑대 울음소리에 운전사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카스테레오의 볼륨을 높인다. 그는 뒷좌석의 배낭에서 드링크 캔을 꺼내어 운전사에게 내민다. 운전사는 단숨에 음료수를 비운다. 전방에 검은 형체를 띠고 엎드린 아네의 오두막이 보인다. 운전사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어리고, 다소 안정을 되찾은 그가 옆으로 돌아보고 웃는다. 무려 네 시간을 달려오느라 운전사의 이마가 땀으로 번질거린다. 계산이 끝나자 운전사는 서둘러 가버렸다.
침엽수림지대가 검은 띠를 두른 듯 끝없이 이어져 있다. 마른풀이 서걱대는 소리가 끊임없이 나고, 큰 새의 날갯짓 소리도 들린다. 순간 그는 얼음 밑 저 아득한 땅속에서 움이 트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군데군데 말라버린 건초더미에서도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두막은 비어 있다. 문을 열자 촛불이 일렁인다. 불을 피우지 않아 썰렁한 실내를 둘러보던 그는 초조해진다. 아네, 아네, 아네……. 그녀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른다. 그를 찾아왔다가 그냥 돌아갔다는 주인 사내의 말이 걸렸다. 함께 긴 여행을 떠나지 않겠느냐고 묻던 그녀의 까만 눈동자도.
“고래가 유목생활을 한다는 말 들어봤어요?”
그녀의 말이 바람 속에서 웅웅거린다. 언젠가 남부 유럽의 해안에 고래 떼가 몰려와 죽어가는 장면을 뉴스에서 본 것을 기억하며 그는 바다가 움직이는 거겠죠라고 대꾸를 했다. 지구상의 가장 작은 섬나라 투발루. 인구 일만 명의 작은 나라 대통령이 전 세계 지도자들을 향해 자국민을 받아달라고, 바다가 그들의 땅을 삼켰다고 울면서 호소한 적이 있었다. 투발루의 국민들은 모두 뉴질랜드 정부에서 받아들였고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섬나라는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그는 아네가 그토록 기다리는 초원지대가 두터운 얼음 속에서 움을 틔우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한다. 63빌딩 수족관에서 본 다리 달린 물고기를 떠올리며 바다에서 산이 솟았다거나 빙원이 초원으로 이동하는 이야기에 덧붙여 그는 말한다. 그것들은 우리의 상처, 우리의 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당신과 나의 매 순간이 수억 년, 혹은 수십만 년을 지배한다고.
밖으로 나가자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인정사정없이 그에게 달려든다. 해안 쪽으로 걸어가며 그는 애써 불안감을 떨쳐버리려 구시렁거린다. 이십여 미터도 못 가 뼛속을 갉아내는 추위에 숨이 막힌다. 4월의 밤 기온은 급격히 떨어져 바람 끝이 맵다. 뿌연 얼음 평원에 백곰이 어슬렁거리며 포효한다. 캄캄한 어둠 속, 수많은 길과 어둠을 뒤로한 채 차가운 밤이 깊은 바다골짜기로 깊숙이 몸을 담그고 있다.
처음 미국에 건너와서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며 배앓이에 시달리던 일이, 일본인 종묘 가게에 들러 큼지막한 농약병을 사들고 어수선한 거리를 배회하던 장면이 느린 화면으로 지나간다. 고사리가 밀밭처럼 펼쳐진 언덕에 바람이 분다. 물결처럼 밀려가는 고사리들. 농약병 뚜껑을 열자 독한 약 냄새가 마취제처럼 쏟아진다. 순간적으로 약병을 떨어뜨린다. 덤불 사이로 숨어버린 약병을 끝내 찾지 못하고 기어 나온 일들이 슬픔의 방울처럼 피어오른다. 환상처럼 얼음의 골짜기가 나타난다.
지평선 쪽에서 그림자가 움직인다. 그는 팔을 내저으며 안타깝게 외친다. 아네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는 자신 안에 희미한 불꽃이 깜박거리고 있음을 본다. 그때 되울려오는 작은 소리를 들은 것 같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몇 걸음 움직이자 북극곰이 새끼를 데리고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그는 어두운 지평선을 응시한 채 꼿꼿이 서있다.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북극곰이 사라지고 적막이 무거운 쇳덩이처럼 내려앉는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비칠거리며 오두막 안으로 돌아온다. 그는 나무침대에 걸터앉아 있다가 난로에 불을 지핀다. 바닥에 흩어진 주간지를 찢어 성냥을 그었다. 난로 안에는 타다만 나무토막이 숯덩이로 변한 채 널브러져 있다. 불이 조금씩 살아나자 그는 구석의 장작더미에서 마른 장작 서너 개를 난로에 더 넣는다. 생수병 뚜껑을 따고 주전자에 물 한 병을 들이붓는다. 주전자를 난로 위에 올리고서야 비로소 집안을 둘러본다. 바닥에는 술병이 어지러이 널려 있고 주간지 겉장이 뜯어진 채 흩어져 있다. 잡지의 표지에는 예복을 입은 신랑신부의 사진이 박혀 있고 그들은 행복한 듯 미소 짓는다. 신랑의 얼굴을 어디서 본 듯하다. 돌아서려다 백인남자의 액자사진이 침대 밑 모서리에 떨어져 있는 게 보인다. 액자 유리는 금이 가 있다. 아네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사진 속의 남자 얘기를 할 때만 해도 사인이 들어 있어서 영화배우이거나 연예계 남자인 줄로만 알았다. 남자는 눈썹이 짙었고 잘생긴 외모였다. 워낙 덤덤한 표정으로 지나가듯 말했기 때문이었다.
꽤 시간이 흐르고, 주전자에 김이 오른다. 그는 홍차 티백을 잔에 담그고 집안을 서성거리며 이 상황을 차분히 정리해본다. 그러나 머릿속은 더욱 엉켜든다. 사위는 금방 어두워지고 북극의 밤이 위협적인 태세로 다가오고 있다. 깨어진 유리조각을 쓸어 모아 쓰레기통에 담고 빠져 나온 액자 틀을 책상 위에 세운다. 비워진 잔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아네와의 밤이 바람 속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바람이 심하게 요동쳤었다. 오두막에서 삼백여 미터 떨어진 거리였다. 아네가 얼음 벌판에 석고처럼 서있었고 그가 다가갔을 때 이미 몸은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아네를 들쳐업고 급하게 오두막으로 달렸다. 침대에 눕힌 후 마사지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는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었다. 심각한 상태였다. 거의 동사 직전에 이른 아네의 몸은 쇳덩이 같은 냉기가 돌았다. 꽤 긴 시간이 흐른 후 아네의 호흡이 돌아왔다. 땀에 젖은 그녀의 몸을 수건으로 닦아주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어떻게 된 거요?”
그녀는 말없이 웃었다. 그 웃음에 수줍음이 묻어났다. 뜨거운 홍차를 건네받는 아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네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으며 허리를 꼭 껴안았다. 당신은 내 어린 시절의 그 남자아이와 닮았어요. 이담에 크면 자기 색시가 되어달라고 말했던 애였죠. 당신을 처음 본 날 그 아이가 돌아온 줄 알고 많이 놀랐어요. 추위가 지긋지긋하다고 따뜻한 나라를 찾아 떠났는데 소식을 몰라요. 나지막한 아네의 말이 그의 가슴에 종소리처럼 울려왔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자세를 바꿔 아네 얼굴 가까이 입술을 가져갔다. 부드러운 감촉이 혀끝에 잡혔다. 아네가 두 팔로 그의 어깨와 등을 감싸 안는 바람에 담요가 흘러내리며 아네의 동그란 젖가슴이 드러났다. 아네의 가슴에 입술을 대자 심장소리가 들렸다. 아네는 더욱 가슴을 밀착시키며 그에게 파고들었다. 아네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바람이 창을 흔들어댔다. 바람소리는 낮은 음을 냈다가 거친 음으로 바뀌며 밤새 불어댔다. 바람 속에 그들은 누워 있었다. 한 덩어리가 된 그들 위로 두렵고 안타까운 시간들이 밀려나고 있었다. 창문을 흔들던 바람이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리는 듯했다.
바람이 잦아드는지 적막이 다시 찾아왔다. 아네는 그에게서 떨어져 나와 시트로 몸을 감은 채 커피를 가지러 찬장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갔다. 그는 담요를 몸에 두르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서 아네를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알던 사이처럼 친근감이 느껴졌다.
“할머니는 언젠가 메사베르데를 찾아가라고 당부하셨죠. 눈을 감을 때 메사베르데를 연달아 부르고는 숨을 거두는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잊혀지지 않아요. 그 눈빛에는 간절한 그 무엇이 담겨 있었으니까요.”
밝은 톤으로 말하는 아네의 볼이 난로 불빛을 받아 발그레해졌다.
“메사베르데, 무슨 뜻이죠?”
“녹색의 땅이라는 뜻이지만 동족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어요. 벌써 십 년째 눈이 내리지 않았어요. 할머니는 다시 녹색의 땅으로 돌아갈 징조라며 좋아하셨죠.”
이곳에 다시 초목이 생겨나기나 할까. 어쩌면 눈이 녹아 질척한 4월의 진흙투성이 땅에서 관광객이 떨구고 간 과일 씨앗이 움을 틔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막의 지나가는 여우비에도 꽃을 피우고, 수정과 열매맺기를 번개같이 해치우고는 짧은 생을 마감하는 식물이 있는 것을 보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다소 황당한 생각을 했다.
적막이 거미줄처럼 내려앉았다. 밤의 적막은 공포스러웠다.
“이런 곳에서 혼자 어떻게 살죠?”
그가 경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자 아네는 미소 짓더니 원래는 온난 습윤해서 일년 내내 열매가 달려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게 언젯적 이야기일까. 그는 그녀가 타주는 커피를 마시며 히말라야 여행을 떠올렸다. 히말라야 꼭대기에서 조개껍데기가 발견되기까지 사람들은 예전에 그 산이 바다였다는 걸 믿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신생대에 살고 있는 거겠죠.”
아네가 두 잔째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로라시아 대륙과 곤도와나 대륙 사이에 있던 바다가 테티스해였던가. 그러나 그 바다는 사라지고 없다. 빙하기에 사라진 사람들과 동식물들. 그들이 해빙기 때 어딘가에서 다시 나타난다면 대부분의 삶을 이동하는 데 소모했으리라. 그는 열네 살 때 처음으로 집을 떠났고, 대부분의 시간을 유랑하는 데 허비했다. 빙하기 대부분의 대형동물을 씨 말리며 살아남은 인간이기에 그 안에는 생존에 대한 집요함과 치열한 본능이 숨을 쉬고 있었다. 몇억 년에 걸쳐 살아남은 동물들이 멸종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일천이백이십구 년이었다.
인류가 이동한 흔적은 빙하기와 맞물려 있었다. 마지막 빙하기 때 수면은 일백이십 미터나 낮아졌다. 육지가 드러나자 인간은 재빠르게 이동했고 아메리카 인류는 알래스카로 스며들었다. 아프리카에서 아시아 유럽, 그곳에서 다시 아메리카로 이동한 인류는 십만 년 전, 최후의 빙하기 때 지금의 대륙으로 정착되었다. 죽을 작정으로 찾은 땅, 그런데 그는 하루하루 그의 시간을 유예하며 살아왔다. 생명이 살 수 없는 땅, 추위와 짐승의 울부짖음과 따뜻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그는 생명에 대한 본능이 부화하는 것을 느꼈다. 살고 싶은 본능에 사로잡힐 때마다 언뜻언뜻 파고드는 어두운 기억이 그림자를 길게 남기며 그를 침식시켰다.
“다신 그러지 말아요.”
“외로움을 이겨나가는 나만의 방식이에요.”
나만의 방식이에요……. 허공에서 아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짙은 남빛과 청회색 지평선이 맞닿아 있는 밤 속에서 커다란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한밤중 짐승이 울부짖는 벌판에 나가 한바탕 혹한과 맞서 싸움으로써 외로움을 이겨나간다는 아네의 말이 바람처럼 그의 가슴을 두드린다. 노을을 보러 광활한 지평선을 달려나가던 그의 무모함과 무엇이 다른가.
전철역으로 향하는 미희의 가방을 들고 택시를 잡아준 그날, 하늘은 스모그로 뒤덮여 있었다. 미희와 헤어지고 사우나에서 시간을 보낸 후 그는 사무실에 들러 서랍 안의 카메라를 갖고 나올 생각이었다. 삿뽀로에서 찍은 작품의 필름 현상을 미뤄왔으나 다음 작품의 구상을 위해 필요해서였다. 미희의 책상 서랍을 열고 카메라를 꺼낸 후 칸막이 너머 공장장 자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돌아서려는 그의 눈에 언뜻 휴대폰이 보였다. 휴대폰은 유리 재떨이와 신문 옆에 놓여 있어서 금방 눈에 띄지 않았다. 아직 퇴근을 안 한 건가, 잊어버리고 안 가져갔겠지, 생각하며 문을 닫고 자재창고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중에 냉동창고 안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다가가 문을 밀어보았다. 문은 쉽게 열렸고, 안에서는 사람의 기척이라곤 없었다. 안에 아무도 없어요? 그는 소리쳤으나 역시 아무 대답이 없는 것을 알고 입구 벽의 전기 스위치를 내리고 문을 닫았다. 육중한 쇠문은 기름칠이 잘 돼 있어서 쉽게 닫혔다. 그리고는 빗장을 가로질렀다. 형, 미희 씨가 공장장을 만난다는 소문이 사실이에요? 김민성의 말이 바람처럼 질러갔다.
그는 매서운 바람에 목을 움츠리고 옷깃을 여미며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를 듣는다. 스스로를 거대한 얼음 감옥에 내동댕이치고 싶어 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밤마다 환청처럼 밀려오던 바람소리, 거친 폭풍이 건물들을 무너뜨리고 나무뿌리를 뽑아내며 들려오던 그 소리가 다시 덮쳐온다. 가슴에 들어와 박힌 거대한 빙산이 무너져내리며 흔들린다. 흔들리며 어디론가 흘러간다. 얼음 두께 2,620미터. 깊이 묻힌 십만 년 전의 이야기가 바람 속에 회오리친다.
달을 뜯어 먹는 괴물을 퇴치하러 떠난 사람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네에게 들은 원주민의 전설이 기억의 휘장을 들춰내고 또렷이 살아난다. 아네……. 그는 팔을 내밀고 소리친다. 소리는 바람 속으로 사라진다. 주위는 다시 적막에 휩싸인다.
유시연․
2003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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