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2호 젊은시인 집중조명/박성우
페이지 정보

본문
박성우
필봉 굿판
1. 세한도(歲寒圖)
전라도 임실 필봉(筆鋒),
세한도 밤새 그린 붓끝이 희다
수묵에서 나온 촌로들이
싸리비로 거친 획 휙휙 그어 굿판 길을 낸다
입춘 가고 이레 지나 우수다
2. 동청마당
논배미로 트인
동청마당가에 화덕이 걸린다
늙은 아낙들은
장작불 사납게 일으켜
두부김칫국 남실남실 끓인다
큰 차 대절하여 내려온
도회지사람이나
논마지기와 밭뙈기
죽자사자 부치는 농사꾼이나
삼색 띠 몸에 두른 풍물잽이와
익살로 굿판 달굴 허드잽이,
어중이떠중이
몰린 곁다리들까지 섞여
뜨건 국물에
밥 한 주걱씩 말아 훌훌 넘긴다
3. 기굿
동청마당에 세워놓은 깃발 속에는
발톱 날카로운 청룡이 날고 있다
깜장도포 나발수가 나발을 분다
벅적벅적 왁자지껄 구경꾼 탓에
나발소리는 굿판이고 나발이고 도통 안 들린다
개갱 갱 갱 갱, 능란한 상쇠가
오진 어름굿으로 굿패 어른다
굿머리 가락 야무지게 쳐대는 굿패들,
쇠잽이 징잽이 부들상모는
까슬까슬 붙는 바람 보들보들 털어내고
장구잽이 북잽이 소고잽이 고깔은
노랑 빨강 하양 꽃 덩기덩기 터트린다
뒤따르는 채상소고잽이
종이 오리로 먼 산 휘돌아 온다
농자천하지대본이 들썩들썩 펄럭이고
긴 장대 움켜쥔 청룡은 마을 위로 치솟아
석 잔 술에 삼배를 받는다
언죽번죽 깝죽깝죽 허드잽이들
거침없는 흥을 몰고 다닌다
4. 당산제
길굿 가락 타고
대포수는 껀둥껀둥
조리중은 왜틀비틀
양반은 허청허청
화동은 팔딱팔딱
할미는 깐닥깐닥
각시는 사뿐사뿐
창부는 촐랑촐랑
돌탑 봉긋한 당산나무에 닿았네
당산에 문안이요, 필봉 큰 어른이
술 올리고 축문 읊고 절 올리니
당산가지 잔설이 녹아내렸네
화동, 예히! 흥취한 상쇠가
꽹맥 꽹맥, 부들상모를 돌렸네
풍물잽이도 허드잽이도 술잔 돌리던
잘름발이 총각도 삥글삥글 돌았네
시루떡 막걸리 명태포 문어발까지
오사게도 푸지게 나눠 돌리다가
발광 난 구경꾼들 삥글, 아주 돌았네
5. 샘굿
발목 푹푹 빠지는 눈길을
굿패 꽁무니 따라 나섰는데요
귀엄나무 감나무 개오동나무 대추나무
튼실한 밭두렁 아래 샘이 있었어요
아따 그 물 좋구나, 아 글씨 상쇠가
물 한바가지 그득 퍼서는 내미는데요
알짱알짱 노는 대포수더러 마시라는데요
물바가지 얼결에 건네받은 대포수는
손사래를 치는데요 이놈의 샘굿 땜시
보름은 족히 앓겄다고 엄살을 떨더니요
마시는 척허다가는 화동에게 내밀고요
화동은 아까서 못 먹겄다고 할미를 찾았어요
오냐 잘되얐다, 할미가 물을 받아드는데요
오냐 잘되얐어, 이 물 먹고 젊어져 시집 가야겄다
할미는 벌떡벌떡 물 들이켜는 시늉만 허는디요
상쇠가 할미 흉내를 쇠가락맛으로 받아치더니요
굿패 끌고는 샘을 빠져나갔어요
물을 왜 안 먹을까이, 샘에 내려가 봤는데요
아 글씨 죽었다 깨나도 먹을 물은 아니더만요
지 아무리 콸콸 솟는 맑은 샘물도요
안 퍼내고 안 쓰면 고이고 썩는 법이라고요
아 긍게, 지 아무리 잘 치고 잘 노는 굿판도요
안 치고 안 이어지면은요 말짱 헛것이랑게요
6. 마당밟이
야무진 풍물 소리 먼저
돌담 위로 넘겨 넣은 굿패가
쥔쥔 문 여소, 상쇠는 집 쥔을 부른다
돌담길 언덕배기집 처마 낮은 서까래는
들썩들썩 꺼져 내릴 지경인데
갱 갱 갠지갱 개갱 갠지 갠지 갱,
기잽이 앞세운 상쇠는
쇠잽이 징잽이 장구잽이 북잽이 소고잽이
끌고 들어와 질퍽질퍽 마당굿을 친다
대포수 조리중 양반 화동 할미 각시 창부 뒤엉켜
벅신벅신 들어선 허드잽이들,
쌩글뺑글 들썩들썩 마당을 쑤셔댄다
지신 성주신 조왕신 철륭신
헐 것 없이 안부를 물어감서
집안 구석구석 복굿을 쳐댄다
실쭉샐쭉 기웃대던 액(厄)들이
액막이타령 한가락에 쌔근발딱 쫓긴다
7. 판굿, 달을 품다
헛간 볏단 위를 거니는 고양이와
토방에 엎드린 백구의 눈이 반짝,
달빛 굿마당으로 가는 길에는
외양간 암소가 있어
껌뻑껌뻑 보름달이 떠올랐다
필봉산과 여시밭동과
섬진강 물길로 열린 판굿 마당
판에 총총 닿은 사람들은
굿머리 채굿 호허굿
방울진 미지기영산굿 가진영산굿
뭔 굿이 뭔 굿이든지 간에 환장하고 덤빈다
참굿 노래굿 춤굿 등지기굿
수박치기 도둑잽이 탈머리굿
거침새 없는 풍물패도 날뛰는 구경꾼도
대보름 굿판이 아니라 대보름 살판이다
궁따 궁따, 설장구치는 장구잽이에
시집 못 간 처녀 애간장이 녹고
채상모 쓴 소고잽이의 자반뛰기
두 발 날려 달빛을 감아 돌린다
개운한 술국에 막걸리도 넉넉하여
흥에 취해 마당 돌고 술에 취해 마당 돈다
덩실 더덩실 달집 태우다가
정월대보름, 복(福) 달을 품는다
동행
멈추어 있는 듯
움직이는 리어카 더얼컹,
지푸라기 낀 바퀴는 굴러
관촌 주천들녘 농로 돌아
살얼음 낀 오원천(烏院川)
주천다리에 멈춘다
손잡이 놓은 여자는
콧물 훔친 목장갑 벗고는
봇짐처럼 실려 온
여자아이의 볼을 비벼준다
킁, 해도 가만있는 아이
물코를 닦아 몸빼바지에 닦는다
다리 위의 두 여자는
조용조용 중얼중얼
들판을 보고 먼 산을 본다
짐칸에 탄 아이가
고개 끄덕이자 몸빼바지는
허리를 굽혀 리어커 당긴다
리어카 끌고 마을로 가는
몸빼바지 며느리도
아이가 된 시어머니도
된서리 맞은 허연 볏단머리다
장산도 가시내
전라도 신안 장산도서 온 가시내
갯벌 같은 사투리 질퍽질퍽 쓰는 가시내
소리공부 헌답시고 도망쳐 나온 가시내
뭍에 나가 헐 짓거리가 그리 읎다더냐
소리 배와서 기생질헐라고 그라냐
아부지와 인연 끊은 독헌 가시내
밥상머리 떡 허니 밀고는 소리를 헌다
춘향가도 수궁가도 흥보가도 아닌
무신 청승이 나서 상여소리를 헌다
어노 어노 어나리 넘차 어노
밥상머리에 앉은 사람들 어안이 벙벙하다
지 아부지 눈감았다는 소식 듣고서야
소리공부 접고 장산도로 들었다는 가시내
아부지 살아생전 한번도 못 들려준 소리
꽃상여 타고 먼 길 갈 적에야 상여잡고
첨이자 마지막 소리 올렸다는 가시내 그 소리가
상여소리였다고 소짝새처럼 우는 가시내
죄다 물 범벅으로 울려 놓고
지 혼자 해죽해죽 섧게 웃어쌓는 장산도 가시내
경칩
봇물 드는 도랑에
갯버들이 간들간들 피어
외진 산골짝 흙집에 들었다
새까만 무쇠 솥단지에
물을 서너 동이나 들붓고
저녁 아궁이에 군불 지폈다
장지문도 솥뚜껑도
따로 닫지 않아, 허연 김이
그을음 낀 벽을 타고 흘렀다
대추나무 마당에는
돌확이 놓여 있어 경칩 밤
오는 비를 가늠하고 있었다
긴 잠에서 나온 개구락지들
덜 트인 목청을 빗물로 씻었다
황토방 식지 않은 아침,
갈퀴손 갈큇발 쭉 뻗은
암수 개구락지 다섯 마리가
솥단지에 둥둥 떠 굳어있었다
아직 알을 낳지 못한
암컷의 배가 퉁퉁 불어
대추나무 마당가에 무덤이 생겼다
피싱따위웨
나시족 여자
리쓔우쌍(李秀香)이
거우스웬(口琴)을 연주했다
입 속 나드는
거문고 소리는
희고 검은 밤,
깊은 골 양떼를
몰아 올 것만 같았다
피싱따이웨
피싱따이웨
피싱따이웨 동여 입은
몸을 떨고 있었다
피싱따이웨(披星戴月),
별을 헤치고 달을 인다!
그 옷 이름이 시여서
내 몸도 움찔 떨려왔다
새벽별 헤치고 나가
해지고 뜨는 달
일 마친 머리에 이고
온다는 중국 나시족 여자,
리쓔우쌍의 등 시위가 팽팽했다
피싱따이웨
피싱따이웨
모내기
소나무아랫골 못자리에
고무장화 당겨 신고 든다
모쟁이와 못줄잽이와
모잽이도 없이 늦모내기하려고
황톳물 이는 모판을 뗀다
볏모뿌리 안 뜯기게 모를 쪄서
지푸라기로 묶어내던 시절은
거머리 떼며 논두렁국수를 말던
할부지 할매를 따라간 지 오래여서
농기계수리소 다녀온 이앙기가
서래질 끝난 논둑에 대신 나와 있다
걷는 걸음걸음 초록발자국이 찍히는
이앙기의 발가락은 몇이나 될까
흙 범벅 트럭에 모판을 옮겨 싣고
아득바득 우겨 지나가는 논둑길,
물 뿜어대는 양수기가 요란케 바쁘다
밥벌이 일터 동료와 나도 이래저래
고꾸라지고 나엎어지면서 일손 보탠다
물꼬에 술렁술렁 손 헹구던 만석댁,
솔밭 길 바삐 거슬러 집으로 가니
무논에 걸음을 끌던 햇발도 서녘으로 든다
닭장엔 실한 암탉이 한 마리 줄고
만석양반 코 고는 소리가 하늘 들쑤셔,
별들이 말똥하다
기왓장
기와지붕이 헐려
골목 가득 기왓장이 들어찼다
막다른 집으로 드는
좁다란 골목길에서 사내는
리어카 바퀴 눌리게 기왓장 실어
차가 드는 길가로 옮겨 내고 있었다
없는 힘 보태 골목을 들락거렸다
늙은 사내가 사이다 두 병을 사와
한 병씩 나눠 마시고 헤어졌다
기와 댓 장 얻어다 마루 밑에 두었다
집에 놀러온 역사 선생은
왜놈들이 지붕에 얹고 살았던
해방 전의 일본식 흙 기와라 했다
방치해 두었던 기왓장
깨끗이 씻고 닦아 방에 들였다
이 빠지고 귀 나간
기왓장 재떨이, 함부로
굴려 써도 좀처럼 깨지지 않았다
그 재떨이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었다
장 담그기
짚으로 묶어 띄운
메주 씻어 채반에 널었다
주둥이 큼지막한 독을 골라
찌끼 우려내어 닦아 두고는
빨간 함지에 감천 약수를 붓고
천일염 한 됫박씩 되어 녹였다
달걀이 엽전 크기만큼 떠올라서
널찍한 덮개 닫아 먼지 막았다
병술년 음력 정월 스무닷새
말날[午日] 아침에 장 담근다
꽃망울 툭 불거진 매화나무집
장독대에 독을 걸고 메주 안친다
무명천에 거른 맑은 소금물
독 어귀까지 남실남실 채운다 둥실
떠오른 메주에 소금 한줌 더 얹히고
참숯 두 개 고추 대추 여섯씩 띄운다
장독대 식구가 셋이나 늘어
왼새끼 꼬아 금줄을 친다
장 담는 공부 가르쳐 주는
쥔집 할매의 잔소리가 여기서야 그친다
시작노트
지인이 선뜻 집을 내줘 전주 한옥마을 은행나무 골목에 터를 잡았다. 얼핏 보면 낡고 허름해 보이는 오래된 풍경들은 웬일인지 시금털털한 내게 새로운 맛을 더해주기 시작했고 나는 그 맛에 끌려 이곳 한옥마을 단풍나무집에 두해 째 살고 있다. 안채와 행랑채로 나눠진 집에는 나말고도 내가 따르는 그림쟁이 선생이 살고 있는데 그는 안채에서 먹물로 그림을 그리고 나는 행랑채에서 괴발개발, 말로 그림을 그린다. 해서, 일터에 나가 밥벌이 할 때를 제외하고는 각자 ‘낯설게 오래된 풍경’에 끌려 나돌고 돌아와 제각기 집채에 든다. 언제부턴가 술을 멀리하니 방은 고요한 늦밤을 주거나 곤한 잠을 청해주곤 했다.
박성우․
1971년 전북 정읍 출생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거미
․산문집 남자, 여행길에 바람나다 등
- 이전글22호 박성우 작품론/김남석 08.02.29
- 다음글22호 신작단편/유시연 08.02.2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