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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박성우 작품론/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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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889회 작성일 08-02-29 02:33

본문

|박성우 작품론|


말(言)로 그린 그림

김남석|문학평론가


1.
내가 박성우의 시를 처음 본 것은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호에 실린 「도원경」이었다. 솔직히 젊어 보이는 사람이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는 점에 깜짝 놀랐다. 어지러운 현실을 어지러운 언어로 묘사하는 것에 익숙하다고 할 수 있는 요즘 젊은 시인들에 비해, 그의 시는 무언가 다른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 이 한 편의 시로 나는 그를 주목하게 되었고, 그의 시가 지닌 요체를 꿰뚫어본 것 같은 희열도 느끼게 되었다.
그 이후 각종 문예지를 살피면서, 간혹 그의 시를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시는 여타의 젊은 시인들과 확실히 달랐다. 그의 시는 동요하는 물상과 어지러운 세상에 좀처럼 휩쓸리지 않는 괜찮은 미덕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세상을 등지고 자신을 세상 바깥으로 위치시키는 도피성 고고함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는 세상의 물결 속에 있되, 그 물결에 함부로 떠밀리지 않았고, 세상과 거리를 두되 그 거리 안에는 세상에 대한 동정과 이해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덕은 그의 시를 고전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고전적이라는 어사는 이 시대에서 그리 융통성 있는 칭찬으로 인정받지 못한 지 오래이다. 그의 시가 지닌 따뜻함과 구수함은, 세련과 유행과 변화와 파격이라는 새로운 문화적 충격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보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기 때문이며, 잘못된 세상을 함부로 나무라지 않는 겸손이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것의 가치를 알고 이를 묵묵히 실현시킬 수 있기 때문이며, 가난하고 나약하고 잊혀진 것에 대한 동정과 포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그의 이러한 마음과 안목을 잘 보여준다.
나는 그의 시가 21세기 한국 문단에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2000년대 중반에 다가가는 시점에서 한국 시단을 돌아볼 때 빼놓을 수 없는 성과로 기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그의 언어가 세련되지 않으면서도 세련된 품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시가 단지 우울과 감상과 감정적 독백과 자신만이 읽은 세상에 대한 수음이 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일러주기 때문이다.

2.
그의 신작시를 읽기 전에, 과거 그가 보여주었던 시세계를 점검한다는 의미에서, 그의 시 「도원경」을 읽어보겠다. 그의 시와 이에 잇대어진 나의 분석 역시 이미 기존의 글을 통해 발표되었던 것임도 아울러 밝혀둔다.

뻘에 다녀온 며느리가 밥상을 내온다
아무리 부채질을 해도 가시지 않던 더위
막 끓여낸 조갯국 냄새가 시원하게 식혀낸다
툇마루에 나앉은 노인이 숟가락을 든다

남은 밥과 숭늉을 국그릇에 담은 노인이
주춤주춤 마루를 내려선다 그 그릇 들고
신발의 반도 안 되는 보폭으로 걸음을 뗀다
화단에 닿은 노인이 손자에게 밥을 먹이듯
밥 한 숟갈씩 떠서 나무들에게 먹인다

느릿느릿 빨간 함지 쪽으로 향하던 노인이
파란 바가지 찰랑이게 물을 떠다가
식사 끝낸 나무들에게 기울여준다
손으로 땅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주는 노인,
부축하고 온 지팡이가 다시 앞장을 선다
어슬렁어슬렁 기어온
고양이 한 마리가 나무 밑동으로 스며든다
툇마루로 돌아와 앉은 노인이 예끼, 웃는다

군산시 옥도면 대장도리 1-5번지에는
무릉도원에 닿아 있는 아흔의 노인이 산다.
―박성우 「도원경(桃源境)」, ≪창작과비평≫, 2004년 여름

뻘에 나가 일하던 차림으로 며느리가 시아버지로 보이는 노인에게 밥상을 차려준다. 노인은 더위에 시달리다가 ‘막 끓여낸 조갯국 냄새’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 더위가 물러가는 것을 느낀다. 맛있게 한 끼 식사를 마친 후 그는 남은 음식을 주섬주섬 모은 후, 마당을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느릿하고 둔한 걸음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거의 전진하지 않는 듯 앞으로 나가는 형국이고, 남은 음식을 모은 국그릇도 위태하다. 그래도 노인은 어디론가 가고 있다. 힘겨운 여정의 끝은 화단이다. 그리고 노인은 화단의 나무에게 밥을 먹인다. 한 숟가락씩 떠서 정성들여 나무에게 밥을 먹인다.
노인은 나무가 배고플까봐 밥을 먹이고 식사 잘 하라고 물도 먹인다. 손자를 돌보듯 자연스러운 몸짓이다. 고양이 한 마리가 나무의 밥을 먹겠다고 다가오면, 나무가 굶을까봐 걱정도 한다. 그러나 차마 배고픈 고양이를 크게 나무랄 수 없는지, ‘예끼’ 하고 웃고 만다. 아마 고양이를 내쫓고 싶지만 인자한 마음에 그렇게 할 수 없는 눈치이다. 그에게는 고양이도 소중한 식구이다.
식구(食口)는 한 집안에서 함께 살며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사람’이라는 말이 걸리기는 하지만, 이쯤 되면 이 노인의 나무는 식구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가구(家口)는 될 듯하다. 노인은 자애의 마음으로 나무를 돌본다. 그에게는 나무도 가축이고 손자이고 식구이다. 살아있는 것들에게 보내는 애정에는 차이가 없다.
이 시는 노인의 마음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만물을 향한 차등 없는 노인의 사랑은, 곧 살아있는 것들을 향한 경외심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자신에 대한 감사이며, 자신을 낮추는 행위이다. 이러한 노인의 마음 씀씀이는 각박한 우리네 삶에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충격이 있다. 사실 노인의 행동에는 비정상적인 소지가 있다. 노인의 착한 마음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 이에게는 골치 아픈 행동일 수 있다. 음식 썩는 냄새가 진동할 것이고, 고양이들이 들락거리면 신경이 쓰일 것이라고 머리를 흔드는 식구들이 있을 수 있다. 특히 며느리가 있다면 시아버지의 치매에 가까운 행동을 나무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시에서 며느리는 조용히 묵인하고 있다. 시는 며느리의 시선을 조용하게 누그러뜨렸지만, 며느리는 이런 시아버지의 행동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쓰다달다 한마디 말이 없다. 그런 그녀의 침묵이 왠지 나에게는 그녀가 평화롭게 웃음 짓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인은 이 집을 무릉도원에 견주고 있다. 무릉도원은 평화가 있고 고통이 덜한 이상적 삶의 공간이다. 노인은 나무를 사랑하고 만물을 평등하게 아낀다. 며느리도 이러한 노인을 이해하고 적어도 자신의 불만을 터뜨리지 않는다. 서로 이해하고 상대를 아끼는 마음이 감돌고 있다. 그래서 이 집은 도원경에 부럽지 않다. 이 집 나무는 어쩌면 참 행복한 나무일 수도 있다.
이 시는 어떤 노인과 그의 며느리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박성우 시의 특징이 이러한 인간에 대한 소묘이다. 박성우는 개인적인 서정, 그러니까 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세상의 모습, 특히 어떤 개인의 인상을 그려내는 데에 익숙하며 그곳에 큰 묘미가 있다.
박성우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그리고 그의 시가 가치 있게 느껴지는 대목이 여기이다. 그는 여타의 시인들이 버리고 간 자리에 있는 느낌이다. 다른 시인들이 도시화된 풍경, 인간 사회의 내적 욕망, 여행지의 화려함과 감회 혹은 시인 자신의 감정적 동요 심지어는 자연의 풍광과 아름다움에 집착할 때, 사람, 이웃, 그것도 타인이라는 대상에 집중하고 있다. 그의 시는 그 중심인물의 표정과 행동, 그 인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의 양태를 ‘언어로 그린 그림’이다. 신작시 8편의 시적 성향도 이러한 맥락을 따르고 있으며, 설령 삶의 풍경이 어떤 인물보다 부각된 경우라 해도, 중심인물 덕분에 삶의 풍경이 더욱 의미 있게 그리고 아름답게 그려졌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3.
「도원경」과 가장 비슷한 정서를 전하는 시는 「동행」이다. 「도원경」이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관계와 풍경이었다면, 「동행」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관계이자 풍경이다.

멈추어 있는 듯
움직이는 리어카 더얼컹,
지푸라기 낀 바퀴는 굴러
관촌 주천들녘 농로 돌아
살얼음 낀 오원천(烏院川)
주천다리에 멈춘다

손잡이 놓은 여자는
콧물 훔친 목장갑 벗고는
봇짐처럼 실려 온
여자아이의 볼을 비벼준다
킁, 해도 가만있는 아이
물코를 닦아 몸빼바지에 닦는다

다리 위의 두 여자는
조용조용 중얼중얼
들판을 보고 먼 산을 본다
짐칸에 탄 아이가
고개 끄덕이자 몸빼바지는
허리를 굽혀 리어카 당긴다

리어카 끌고 마을로 가는
몸빼바지 며느리도
아이가 된 시어머니도
된서리 맞은 허여 볏단머리다
―「동행」 전문

시인은 제법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리어카가 서서히 움직이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몸빼바지를 입은 초로의 여인이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있고, 리어카에는 소녀로 보이는 작은 몸집의 여자아이가 앉아 있다. 아마 쭈그려 앉아 있었던 듯, 소녀의 모습은 정확하지 않다. 멈추어 있는지 움직이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던 리어카가 그만 덜컹 한다. 무엇인가에 걸렸을까. 아니면 너무 낡은 바퀴에 문제가 생겼을까. 바퀴는 이미 험한 길을 통과한 듯 지푸라기가 묻어 있다.
몸빼바지의 여자는 뒤에 탄 여자가 걱정되는 듯, 리어카를 멈추고 목장갑을 벗고는 뒤로 가서 소녀를 살핀다. 소녀의 볼이 얼어있는 것이 안 되었다는 듯 콧물 훔친 목장갑을 벗고 소녀의 뺨을 쓰다듬는다. 언 뺨이 풀어지라고 살살 비벼준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시인은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연상한다.
내리사랑만이 통용되는 시대에, 자신의 딸이 아니면, 그 추운 겨울날 장갑을 벗을 리도, 리어카에 태우고 조심스럽게 길을 갈 리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리 앞에서 무서워하는 아이를 달래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를 달래는 엄마의 모습.
이 시가 매력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4연에 배치된 반전 때문이다. 모두들 ‘내리사랑’의 정겨운 풍경으로만 알게 했던 두 모녀의 관계가, 사실은 전도된 고부관계였다니. 우리가 알았던 몸빼바지 여인은 며느리였고, 그 뒤의 작은 소녀는 시어머니였다. 우리가 소녀로 알았던 몸집이 작은 여인은, 며느리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던 시어머니였다.
이러한 반전은 이 시가 3연까지 간직했던 온기를 더욱 따뜻하게 만든다. 어머니와 딸의 관계로 알았을 때도, 이 시에는 잃어버린 온정을 잘 구현했다는 평가가 가능했는데, 그 관계가 고부간의 관계로 전도되면서, 우리 사회에서 잊혀진 하나의 미풍양속을 상기시키는 효과도 거두게 된다. 이것은 박성우의 시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점잖은 충고이자 사려 깊은 전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매정한 우리 사회를 준열하게 비판하기보다는 가만히 끌어안는 포용과 미덕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4.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삶을 묘사한 작품으로 「장산도 가시내」, 「피싱따위에」, 「기왓장」 같은 시를 들 수 있다. 「장산도 가시내」는 장산도에서 왔다는 소리 공부하는 여자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고, 「피싱띠위웨」는 ‘나시족 여자 리쓔우쌍(李秀香)’이 ‘거우스웬(口琴)’을 연주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며, 「기왓장」은 기와를 옮기는 인부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박성우의 시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들을 연속해서 읽으면, 우리가 어떤 마을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마을에는 장산에서 소리공부 하겠다고 온 ‘가시내’가 살기도 하고, 중국 나시족 여자의 구금 소리가 나기도 한다. 또 기왓장을 허물고 새로 공사하는 기척이 들리기도 한다. 마치 이웃 마을의 풍경을 보는 듯한 친근감이 서려있다.
이것은 박성우 시가 지닌 시선과 언어의 힘이다. 박성우는 무심결에 지나칠 만한 풍경을 사람을 중심으로 포착하여, 잃어버린 기억 속의 한 장면으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편 사이에 연계 다리를 놓아, 마치 어떤 마을을 구경하는 듯한 인상을 전한다. 그의 시는 그가 그려낸 이웃들이 살아가는 마을이자 공간이고 여백이자 집인 셈이다.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 시편들이 이것과 유사하다. 서정주는 질마재 마을의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시로 초대하여 그들에게 말하게 하였다. 어떤 때는 그들의 입을 대신하고 그들의 노래를 대신하고 그들의 삶을 대신하여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한 시선 속에서, 그들의 말을 대체하는 발화 속에서, 서정주의 시는 아름다운 세상의 한 구석을 만들어내었다. 그 마을은 분명 현실 속에서 보기 힘든 마을이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공유하고 기억하고 싶은 마을이다.
혹, 박성우도 그러한 시 작법을 이루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가 언어를 다루는 방식은 서정주와 다르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보고 사람들을 보고 시로 그들을 포착하는 방식은 서정주와 비슷하다. 그것은 박성우가 서정주를 사숙했기 때문만은 아니다.(나는 그가 서정주를 사숙했는지 알지 못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보인다. 그것은 박성우가 바라보는 세상과 서정주가 바라보았던 세상이 궁극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박성우는 잃어버린 사물의 세계를, 이미 잊혀진 세상의 한 구석을 펼쳐 보임으로써 시적 시안을 견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장산도 가시내」를 읽어보자. 별다른 설명 없어도 이 시는 절창이 될 수 있다.

전라도 신안 장산도서 온 가시내
갯벌 같은 사투리 질퍽질퍽 쓰는 가시내
소리공부 헌답시고 도망쳐 나온 가시내
뭍에 나가 헐 짓거리가 그리 읎다더냐
소리 배와서 기생질헐라고 그라냐
아부지와 인연 끊은 독헌 가시내
밥상머리 떡 허니 밀고는 소리를 헌다
춘향가도 수궁가도 흥보가도 아닌
무신 청승이 나서 상여소리를 헌다
어노 어노 어나리 넘차 어노
밥상머리에 앉은 사람들 어안이 벙벙하다
지 아부지 눈감았다는 소식 듣고서야
소리공부 접고 장산도로 들었다는 가시내
아부지 살아생전 한번도 못 들려준 소리
꽃상여 타고 먼 길 갈 적에야 상여잡고
첨이자 마지막 소리 울렸다는 가시내 그 소리가
상여소리였다고 소짝새처럼 우는 가시내
죄다 물 범벅으로 울려 놓고
지 혼자 해죽해죽 섧게 웃어쌓는 장산도 가시내
―「장산도 가시내」 전문

이 시는 장산도라는 외딴섬에서 흘러온 여자의 소리를 듣는 청중의 입장에서 쓰여졌다. 여자는 고생을 많이 한 듯하다. 그것도 마음 고생을 많이 해서, 그녀의 소리에는 애절함이 배어 있다. 많은 듣는 이들은 그녀의 사연과 함께 소리를 들었고, 그녀의 소리에 취해 버렸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바로 그 서러움에 대한 동정이었다.
문제는 마지막 행의 반전이다. 여자는 다른 이들을 울려 놓고, ‘지 혼자 해죽해죽’ 웃는다. 시인은 섧게 웃었다고 했지만, 실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을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서럽다고 느꼈을 뿐.
그녀의 삶을 언어로 그려내는 박성우의 힘은, 이 마지막 행에서 빛을 발한다. 왜냐하면 슬픔의 정서, 한의 정서를 어둡고 우울하고 적막하고 관념적으로 밀고 가지 않고, 그 안에 반대되는 감정, 웃음의 정서, 허탈의 여유로, 초연의 미학을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의 시는 보통 사람들의 애환을 끌어안되, 그 안에서 철벅거리며 끌려 다니지 않고, 그들의 애환을 지켜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게 된다.
‘지 혼자’ 우울하게 소리하고, 그 소리를 듣는 청중들까지 한없이 우울하게 묘사했다면, 그것은 삶의 우울함이 아닌, 시인의 관념적 우울함밖에는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5.
박성우에게 세상은 공부해야 할 대상이다. 박성우는 세상을 산다는 것을 일종의 공부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시를 겸손하게 만든다. 또 그가 접하는 세상과 그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경외감을 갖게 만든다. 시 「장 담그기」에는 이러한 시인의 태도가 잘 녹아 있다.

짚으로 묶어 띄운
메주 씻어 채반에 널었다
주둥이 큼지막한 독을 골라
찌끼 우려내어 닦아 두고는

빨간 함지에 감천 약수를 붓고
천일염 한 됫박씩 되어 녹였다
달걀이 엽전 크기만큼 떠올라서
널찍한 덮개 닫아 먼지 막았다

병술년 음력 정월 스무닷새
말날[午日] 아침에 장 담근다

꽃망울 툭 불거진 매화나무집
장독대에 독을 걸고 메주 안친다
무명천에 거른 맑은 소금물
독 어귀까지 남실남실 채운다 둥실
떠오른 메주에 소금 한줌 더 얹히고
참숯 두 개 고추 대추 여섯씩 띄운다

장독대 식구가 셋이나 늘어
왼새끼 꼬아 금줄을 친다
장 담는 공부 가르쳐 주는
쥔집 할매의 잔소리가 여기서야 그친
―「장 담그기」 전문

이윤택의 희곡 「어머니」에 보면, 어린 딸에게 옷감 짜는 법, 장 담그는 법, 반찬하는 법을 가르치는 아버지가 나온다. 그 아버지는 학교를 보내달라는 딸에게, 사는 게 공부이며, 딸이 우선 배워야 할 것은 한 가정을 건사하는 아낙으로서의 도리라고 말하고 있다.
위의 시를 읽으면서 연극 「어머니」(손숙 분)에서 할머니가 된 여인이 과거의 친정아버지의 말을 회상하는 대목이 생각났다. 위의 시도 지금은 공부가 아닐 수 있는 ‘장 담그기’를 공부라고 말하고 있다. 요즘 젊은 여성들에게 장을 담그는 절차는 삶의 필수적인 행위가 아니다. 귀찮고 어려운 일이며 비경제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장 담그는 일’이 우리의 관심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이 널리 퍼져있다.
그런데 시인은 시 문면 가득 장 담그는 절차를 묘사하고 있다. 솔직히 나도 이러한 절차를 구경한 적이 없어, 구체적으로 시적 정황을 파악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시인의 생각을 읽을 수는 있다. 시인은 우리 곁에서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린 장 담그기에 묘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그 가치는 그의 시를 고전적인 지혜로 만들고, 그러한 시를 읽은 이들에게 세상살이에 대한 보다 확장된 화두를 던져준다.
어째서 장 담그기가 공부가 될 수 있을까. 그냥 노동이나 놀이가 아니고. 장 담그기는 무한한 인내력을 필요로 하는 행위인 것 같다. 옛날에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다시 말해서 음식을 만들기 위한 유일한 그리고 필수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의 시대에서 과거의 음식 조리법을 그대로 따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인내이고 호기심이고 가치 수호이다. 쉽게 말하면, 자기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행위이자 선택이 되어버렸다.
살아오던 방식을 고수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나의 가족의 일원이 되어버린 장독에 대한 애정을 품는다는 것은, 삶에 대한 예의이고 가정에 대한 사랑이며 모두에 대한 배려이다. 장을 담그는 행위는 주인집 할머니의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귀찮은 절차이지만, 그 일에서 자신의 삶과 내 주변인의 삶에 대한 이해와 외경심을 한꺼번에 경험하게 된다.
박성우의 시작 태도는, 최선을 다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에게 남에게 평범한 것이 새로워 보이는 것도 다 그러한 까닭일 것 같다. 이러한 태도는 다른 시에서도 확인된다. 「모내기」의 5연을 보면, “물 뿜어대는 양수기가 요란케 바쁘다/밥벌이 일터 동료와 나도 이래저래/고꾸라지고 나엎어지면서 일손 보탠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구절은 논일과는 무관한 시인이 삶의 현장에 참여한 소회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도 시인의 태도는 주목된다. 시인은 멀리서 모내기의 목가적인 풍경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발을 담그고 이리저리 넘어지면서 일을 하고 있다. 모내기를 하나의 공부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수양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모내기는 시인에게 일단 노동이지만, 자신의 삶을 시험하는 놀이이고, 그 놀이를 통해 인생을 경험하는 공부가 될 수 있다. 물론 그 공부는 그의 가장 중요한 활동인 시쓰기(글쓰기)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세련된 수사와 특이한 체험을 읽는다는 뜻도 있지만, 시인이 세상과 인간에 대해 가지는 깊이 있는 이해를 읽는다는 뜻이다. 박성우가 그려내는 시세계의 가장 커다란 미덕이 이것이다. 나 밖의 세상을 물리치지 않고 애정을 갖고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삶의 도리와 이치를 깨달아가는 것, 이것이 그가 시를 쓰는 이유이고 그의 시를 읽을 만한 것으로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6.
박성우의 신작시 「필봉 굿판」은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다. 간결하면서도 꼼꼼한 묘사가 돋보이는 시로, 한 판의 굿을 언어로 묘사한 풍속화 같은 느낌을 준다. 각 장(이 시는 7개의 절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편의상 각 절편을 ‘장’이라고 칭하자)은 굿의 절차 하나하나를 포착한 그림 같은 인상을 주어, 전체를 통독하면 마치 7폭 병풍을 훑은 듯하다. 세상에 7폭 병풍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나, 그의 시는 분명 병풍처럼 읽는 이의 마음을 감싸는 힘이 있다. 1장을 보자.

1. 세한도(歲寒圖)

전라도 임실 필봉(筆鋒),

세한도 밤새 그린 붓끝이 희다

수묵에서 나온 촌로들이
싸리비로 거친 획 획획 그어 굿판 길을 낸다

입춘 가고 이레 지나 우수다

시인은 굿이 벌어지기 전의 정경을 묘사하고 있다. 깨끗하게 쓸린 길과 경건한 행동들이 마치 세한도의 정경과 닮았다는 입장을 취한다. 주목되는 구절은 ‘수묵에서 나온 촌로’들이다. 그런데 시인이 바라보는 노인들은 늙고 추레한 안색의 중늙은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추사의 지고한 정신이 담긴 세한도에 막 나왔을 것 같은 같은 현자의 모습을 닮아 있다. 노인에 대한 박성우의 외경심은 비단 이 시에서만 엿보이는 것은 아니다.
가령 박성우의 「노인」이라는 시를 보면,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로서의 노인이 아니라 가족들을 위해 무언가를 지키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려는 능동적인 존재로서의 노인이 그려져 있다. 「필봉 굿판」의 ‘세한도’에 나오는 노인은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오랫동안 마을을 지키고 굿판을 지킨 터줏대감답게 굿을 준비하고 신을 맞을 준비를 하는 이들은 노인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마을과 이웃 그리고 자신들의 마음을 위해 길을 청소하고 부정한 것을 물리치며 한판 굿을 기대하고 있다.
싸리비로 길을 쓰는 것은 ‘쓰는’ 행위의 일종이다. 붓으로 글을 쓰는 행위처럼 마음 속의 무언가를 정화하고 정리하는 일이다. 촌로들의 자세는 단순할 수 있는 청소가 어떻게 명상과 수양의 방식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성스러운 길 쓸기를 포착하는 시인의 눈이다. 시인은 필봉 굿판의 시작이 정화와 정리에 있음을 알았기에, 간결한 묘사로 그러한 깨달음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이 시의 2편과 3편도 무척 재미있다. 지면 관계상 일일이 옮기지는 않겠지만, 굿판의 분위기와 생동하는 마을 사람들의 행동이 잘 어울려 하나의 축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축제는 흥겨움과 느긋함을 전한다. 시가 절망과 슬픔의 정조를 앞세우는 것에 비한다면, 이러한 축제 분위기를 그리는 것은 분명 이질적이다. 문제는 이러한 이질적인 분위기 안에서도 시어가 살아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흥겨움은 신경림의 「농무」와도 그 맥이 닿아 있는 듯해서, 무척 보기 좋다.
가장 역동적인 장은 4장 ‘당산제’이다. 옮겨 보겠다.

길굿 가락 타고
대포수는 껀둥껀둥
조리중은 왜틀비틀
양반은 허청허청
화동은 팔딱팔딱
할미는 깐닥깐닥
각시는 사뿐사뿐
창부는 촐랑촐랑
돌탑 봉긋한 당산나무에 닿았네
당산에 문안이요, 필봉 큰 어른이
술 올리고 축문 읊고 절 올리니
당산가지 잔설이 녹아내렸네
화동, 예히! 흥취한 상쇠가
꽹맥 꽹맥, 부들상모를 돌렸네
풍물잽이도 허드잽이도 술잔 돌리던
잘름발이 총각도 삥글삥글 돌았네
시루떡 막걸리 명태포 문어발까지
오사게도 푸지게 나눠 돌리다가
발광 난 구경꾼들 삥글, 아주 돌았네

등장인물들의 양태가 절묘하게 수식되고 있다(부사어). 굿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해 구체적인 정합성을 따지기는 힘들지만, 시인의 수식어구는 일반적인 극(무극, 巫劇)의 보편성에 비추어볼 때 매우 적절해 보인다.
전통 연희에서 탈춤 혹은 무극의 등장인물은 그 인물이 속한 신분과 다른 인물들과의 역학 관계에 따라 특징적인 면모를 부여받는다. 포수는 대개 건방지고, 중은 세상과의 불화 때문인지 단정하지 못하다. 양반은 허세가 있고, 할미는 동작이 크면서 징그럽고, 각시는 상대적으로 색정적인 측면이 강하다. 이러한 정황은 시인의 눈에 간단한 수식어구로 통합되고 있다. 이러한 언어 사용은 한국어의 아름다움과 시어 구사의 정확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모자람이 없다.
더구나 시인이 사용하는 부사는 일반적인 듯하면서 해당 지역의 토속적인 느낌을 잃지 않고 있다. 시어는 분명 일상어의 변형이다. 하지만 시어가 일상어에 머물 때, 시는 그 구체성과 개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시인 중에 오태환이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잘 사용하고 있는데, 박성우의 언어 사용도 이에 못지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시는 기본적으로 당산에 올라 제를 드리는 길놀이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행렬들이 지나가면서 각 등장인물의 재롱 섞인 몸짓이 이어지고, 당산나무 아래에 도착하면 제례가 진행된다. 제례는 일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제례를 통해 이웃들 간에 번져가는 웃음과 나누어 먹은 음식이다. 그날만은 의관을 파탈하고 예의를 벗어던져도 되고, 무엇보다 이웃들끼리 체면 돌보지 않고 서로 어울려도 된다.
이 시는 당산제의 흥겨움과 자연스러운 어울림을 위해 전반부는 간략한 언어로, 그 이후에는 주술구조를 갖춘 언어로 구성하고 있다. 이것은 속도감을 달리하는데, 특히 뒷부분으로 갈수록 늘어지고 느려지는 효과를 거둔다. 그것은 불콰하게 취해 오는 사람들의 얼굴과 달아오르는 마음의 여유, 그리고 흥겨워지는 굿판의 분위기와 맞물려 있음에 틀림없다.

7.
시 「필봉 굿판」의 마지막 장은 ‘7. 판굿, 달을 품다’라는 제명을 지니고 있다. 굿이 마무리 될 무렵의 정경을 노래한 것으로, 시간대가 저녁(밤)으로 접어든 무렵을 묘사한 시편이다. 「필봉 굿판」의 의미적 매듭에 해당하는 시편이다.

헛간 볏단 위를 거니는 고양이와
토방에 엎드린 백구의 눈이 반짝,
달빛 굿마당으로 가는 길에는
외양간 암소가 있어
껌뻑껌뻑 보름달이 떠올랐다
필봉산과 여시밭동과
섬진강 물길로 열린 판굿 마당

판에 총총 닿은 사람들은
굿머리 채굿 호허굿
방울진 미지기영산굿 가진영산굿
뭔 굿이 뭔 굿인지 간에 환장하고 덤빈다
참굿 노래굿 춤굿 등지기굿
수박치기 도둑잽이 탈머리굿
거침새 없는 풍물패도 날뛰는 구경꾼도

대보름 굿판이 아니라 대보름 살판이다

궁따 궁따, 설장구치는 장구잽이에
시집 못 간 처녀 애간장이 녹고
채상모 쓴 소고잽이의 자반뛰기
두 발 날려 달빛을 감아 돌린다

개운한 술국에 막걸리도 넉넉하여
흥에 취해 마당 돌고 술에 취해 마당 돈다
덩실 더덩실 달집 태우다가

정월대보름, 복(福) 달을 품는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시편이다. 1연에는 사람들과 함께 밤을 맞이한 동물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양이와 백구의 눈빛은 달빛을 받아 반짝인다. 멀리 암소의 모습도 보인다. 모두 달빛에 취한 듯 평온한 분위기이다. 동물들도 그날의 축제에 심정적으로 동참했는지 예사롭지 않는 정경을 이루고 있다. 더 멀리 마을을 둘러싼 산과 강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고, 그 틈새로 사람들의 소리가 새어나가고 있다.
2연은 굿에 취하고 판에 취하고 노래와 연기에 취한 사람들이 흐느적거린다. 사람들은 오랜만에 맞이하는 놀이와 춤에 흥분한 기색이다. 이제 굿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 목적을 잊었다. 신을 불러 제화초복을 강조하는 의례라기보다는, 그동안 억눌렸던 마을 사람들의 즐거움과 기쁨을 만족시키는 ‘살판’나는 놀이터가 되어 있다(3연). 4연에는 설장구와 소고 등이 어우러진다. 설장구치는 장구잡이도, 시집 못 간 처녀도 그날만큼은 마음껏 설레도 괜찮다.
5연은 가장 역동적인 연으로, 하늘과 땅이 돌고 그 사이에서 사람들이 도는 풍경이 펼쳐진다. 흥은 이제 사람들을 춤의 세계로 인도했다. 6연에서 시인은 그날의 축제를 ‘복’이라고 칭했다. 한없이 정겹고 평화로운 그날은 시인에게 복된 날이었던가 싶다.
어떤 시인이 ‘살아있는 날들은 날마다 축제’라고 한 바 있다. 이 말은 마음에 두고두고 남는데, 판굿이 벌어진 이날은 필봉 사람들에게는 날마다 축제여야 할 삶의 원형이 되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이것을 받아들이는 시인이다. 시인은 그들과 함께 그들의 삶의 원형인 축제를 만끽하고 있다. 시가 좋은 시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있는데, 기쁨 역시 그 조건이 될 수 있음을 시인은 알고 있는 듯. 그의 시는 따뜻함으로도 정겨움으로도 기쁨과 행복과 축제 같은 마음으로도 좋은 시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 의미에서 박성우는 더욱 큰 가치를 지니는 시인이다.

9.
박성우의 신작시 7편을 읽으면서, 그의 미덕과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그의 시는 일단 사람냄새가 나는 시이다. 도시의 우울이나 욕망의 지나친 모험을 핑계 삼아 사람들이 사라진 시가 득세하고 있는 세상에서, 그의 시는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을 되찾아주고 있다. 아니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되찾아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는 자신이 내세우는 시적 세계를 편협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도 주변의 장삼이사들을 관찰하고 그 사이에 숨어있는 인간관계를 감동적으로 그려낼 줄 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이웃에 대한 사랑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그의 시는 시어의 정련 과정이 모범적으로 나타난 경우이다. 그의 시 세계가 다채로운 마을 풍경을 그리고 있는 듯해도, 그 마을 풍경을 포착하는 언어의 조합은 대단히 간결하고 효과적이다. 그는 적은 언어로 많은 세상을 그려낼 줄 아는 시인이다. 「필봉 굿판」의 네 번째 절편에서 보여준 부사어의 활용 방식은, 그가 한국어의 어울림과 시의적절함을 두루 사용할 줄 아는 시인임을 증빙한다.
마지막으로 박성우는 주장하거나 외치지 않는다. “우리는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라는 연극의 오랜 명제를 그는 시인의 입장에서 잘 이해하고 있다. 그가 가진 생각에 비추어본다면 현대사회 특히 도시문명은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으로 타인의 삶에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 그는 소박하게 보여줄 뿐이다. 언성을 높이지도 않고 안목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우리 바깥에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삶과 사람에 대해서 들려줄 뿐이다. 그의 시는 이러한 겸손을 내장하기 때문에 더욱 보기 좋다. 그가 시로 그린 사람과 세상 속에 따스함이 흐른다면 그것은 시인이 가진 겸손함도 단단히 한몫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남석․
1973년 서울 출생
․199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 󰡔비평의 교향악󰡕 등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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