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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젊은시인 집중조명/김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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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64회 작성일 08-02-29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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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기

길․1


길들이 나를 달린다 나를 달리는 길들은 이제 자동이다 달리다 깨면 자식이고 한잠 자고 나면 마누라고 또 한잠 자고 나면 환자다 소백산에 어둠 깔리고 인적 뜸해지면 쭈그러진 공처럼 허름해진 길 하나 뒷골목을 달린다 마침내 단골 정종 집 아줌마를 달리고 정종 집 아줌마는 나를 달리고





길․2


오랫동안 머금었던 습기를 잔뜩 쏟아냈다 곪고 꼬이고 얽혔다 여기는 주정뱅이 아비 때문에 저기는 자살한 동생 때문에 바람난 어미 때문에 시샘 많던 이복동생 때문에 혼자 풀어보려 고1 때 가출하여 칼로 긋기도 하고 담뱃불로 지져보기도 했다 그럴수록 앞은 뒤를 물고 뒤는 또 앞을 물고 늘어졌다
창밖엔 하나둘 불이 켜지고 있다 이맘때면 한껏 치장을 한 길들이 중앙통으로 몰려든다 자세히 보면 옷 사이로 상처들이 삐죽이 나왔다 한쪽에선 깔깔대고 또 한쪽에선 운다 횟집 여자가 탁자 위에 기름진 웃음 한 접시와 소주를 놓고 간다 단숨에 상처 위에 소주를 들이 붓는다 불빛 아래 제 상처들을 펼쳐놓고 혀가 꼬부라지도록 말린다 모든 길들은 지금 자가 치료 중이다






비․1


올해 몇 번 큰비가 왔어도 그냥 지나가더니 오늘은 한꺼번에 밀려온다. 창문을 닫아도 닫아도 따라오는 축축함, 그 생소한 언어에 놀라 거리로 뛰쳐나온 차들은 불길한 주문처럼 경적을 울려댄다. 내 마음속 어디 산(山 )하나 위험한데 환자들은 꾸역꾸역 저기압 전선을 몰고 온다. 두어 평 공간엔 짜증스런 기압골이 서로 부딪친다.

책상 앞 백기가 제법 붉다.







비․2


주점에 들러 적절한 농도의 우산을 쓰고 피해버리든지 아니면 이유 없이 허허벌판에 내몰려 수직의 주먹질에 흠뻑 얻어맞든지
너무 일방적 이었다 아무리 도망가도 골목엔 비가 오더라 끝까지 소곤소곤 스며오더라
자세히 보니 그건 전생에 일찍 이사 간 순이다 어릴 때 아무도 없는 집에서 낮잠 자다 깨어 울던 무서운 하늘이다 어릴 때 몰래 보았던 엄마의 속살이다 엄하기만 하던 아버지의 회초리다
비는 익숙하지 않은 내 언어의 두드림이다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유일한 대화법은 그저 견디는 것이다





검은 열차


보살복 차림의 여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아버렸고 창밖을 욕심껏 핥는 초췌한 사내의 눈길 이내 그의 눈꺼풀도 힘없이 내려졌다 화장실을 가며 준비 안 된 나의 인사는 잠시 안도했지만 일순 뚝 하며 되받는 노크 사내는 터무니없이 과대 포장된 생식의 항암효과에 대하여 이온수의 효능에 대하여…… 힘없는 내 끄덕임에 그의 빈 메아리 줍기는 얼마간 계속된다 나는 두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검은 열차를 내렸지만 30분 후 안동역에서 또 한 번 그 검은 열차는 서겠지만 아마도 두 사람은 마지막 역마저 놓칠 것이다 검은 열차는 철로 없는 철길을 달려가다 여자는 어디쯤 덜컹 내동댕이쳐질 것이고 사내는 혼자서 인도의 어느 작은 마을까지 갈 것이다 먼 길 노자라도 줄 걸 그랬다 검은 열차는 지금 속력을 더 낼 것이다 기적소리는 허공을 맴돌며 이승의 번뇌를 큰 글자로 쓰고 있을 것이다 아.프.지.나.않.았.으.면.좋.겠.어.요.





변두리에서


첫 키스의 뜨거움이 지난 곳은 하얀 속살의 두근거림이 사라진 곳은 모두 변두리다 변두리는 끝이 없어 결국 사람들은 변두리에서 태어나 변두리에서 죽는다
강 건너 불야성을 중심이라며 사람들은 오늘도 달려간다 그 불빛이 손에 잡힐 때 그만 가난해져 행복이라 부르지만, 또 맹목적일 만큼 멀게 꿈꿀 만큼 짧게 달아나며 사람들은 또 다시 변두리가 된다 그래서 변두리에 하루는 늘 목이 마르다
그래도 변두리가 좋다 아니 변두리어서 좋다 오늘 나는 오들오들 떨고 있을 두만강쯤 한 여자가 그립다 신기루 이글거리는 사막 같은 그 눈동자 속에 잠깐 빠져 죽고 싶다 한 폭의 이승이라 부르며 엉켜서 자글자글 타오르며 




하얀 고무신


응급실 바닥 위에 던져져 있는
병원장인 아들과 쇠똥 묻은
고무신 한 켤레
늘 도망갈 생각만 하던 고무신이
후배 의사가 와도 간호사가 와도
강렬히 제 주장을 하고 있다

아버지 뇌진탕은 이제
위험한 고비도 지났다
응급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생각나는 대로 주섬주섬
쇠똥 묻은 고무신 속에
아버지의 일생을 주워 담는다





시작노트


비만 오면 여지없이 흠뻑 젖어서 내게 전화하는 친구가 있다. 마침 나도 젖고 있던 차에 둘이는 배짱이 맞아 또 단골집을 찾게 되고, 서로의 축축함을 말리며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한다. 단골집은 삼겹살집인데 천막으로 추녀를 늘여 떨어지는 빗소리는 오가는 술잔에 흥을 더해 준다.
비가 무엇이기에 매번 우리를 그 자리로 불러낼까? 그 의미를 말하자면 불립문자(不立文字)에 대한 도전이며 무모하고 불온하다. 이 불립문자는 가끔 한 부분 제 속살을 보여준다. 언어로 형상화된 그 속살은 결국 내 마음속 풍경일 뿐이다.
밥도 되지 않는, 때로는 지치지만 매우 익숙한 이 작업은 왜 끝없이 지속되는 것인가. 내 속에 꿈틀대는 무수한 불립문자들은 얼마나 더 나를 술집으로 불러낼 것인가. 이 글을 쓰고 나는 또 친구에게 전화를 할 것이다. 봄비가 오고 있다.



김승기․
2003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어떤 우울감의 정체>

추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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