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2호 김승기 작품론/우대식
페이지 정보

본문
|김승기 작품론|
의사 프로이드 씨가 본 생의 그늘
우대식|시인
그의 시에는 정신과 의사로서 바라본 세계, 즉 환자들의 정신 상태 혹은 그 투영이 짙게 배어 있다. 그러한 경향은 첫 시집 어떤 우울감의 정체 곳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M환자에게」, 「K환자의 의존심, 「와사증」, 「제3의 병동」, 「영원한 구강기」 등등 많은 시편들이 환자들의 생의 그늘에서 확인되는 상처들을 들추어낸다. 물론 이 상처는 단순히 환자들의 것만은 아니다. 그 상처 속에 자신의 불우함을 함께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점에서 그가 환자를 관찰하는 과정은 밥벌이의 고통스러움이기도 하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한 까닭으로 그는 ‘맨날 떠난다고 입버릇처럼 말을 하지만/끝내 떠나지 못하는 섬 하나’(「정거장」 부분)로 남아 있다. 그것은 그가 어떠한 경우든 세계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쓸쓸한 웃음’이라는 역설 속에 세계에 대한 김승기 시인의 태도가 담겨져 있다.
김승기 시인이 긍정하는 세계는 저자거리다. 시장이라는 공간은 삶의 잡다성과 생명의 싱싱함이 혼재하는 곳이다. 그에게 시장의 생명력이야말로 생의 절정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이 작은 도시에서/바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사람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저마다 바람떼를 데리고 모여든다’(「시장」 부분). ‘햇살이 금은방 유리창에 미끄러질수록/주름진 손 근육은/싱싱한 지느러미처럼 푸드덕댄다’(「파장」 부분). 프로이드(김승기 시인)는 찾아온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치유시켜 시장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자신의 과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번 특집 시편들도 그 연장에 있기도 하고 더러 그 궤도로부터 일탈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면 여지없이 대상에 대한 관찰적 태도를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어쩌면 유마거사를 꿈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앓는다. 그의 시를 읽는 것은 앓는 세상과 그 자신의 상처를 확인하는 일이다.
오랫동안 머금었던 습기를 잔뜩 쏟아냈다 곪고 꼬이고 얽혔다 여기는 주정뱅이 아비 때문에 저기는 자살한 동생 때문에 바람난 어미 때문에 시샘 많던 이복동생 때문에 혼자 풀어보려 고1 때 가출하여 칼로 긋기도 하고 담뱃불로 지져보기도 했다 그럴수록 앞은 뒤를 물고 뒤는 또 앞을 물고 늘어졌다
창밖엔 하나둘 불이 켜지고 있다 이맘때면 한껏 치장을 한 길들이 중앙통으로 몰려든다 자세히 보면 옷 사이로 상처들이 삐죽이 나왔다 한쪽에선 깔깔대고 또 한쪽에선 운다 횟집 여자가 탁자 위에 기름진 웃음 한 접시와 소주를 놓고 간다 단숨에 상처 위에 소주를 들이 붓는다 불빛 아래 제 상처들을 펼쳐놓고 혀가 꼬부라지도록 말린다 모든 길들은 지금 자가 치료 중이다
―「길․2」 전문
그가 보기에 세상은 온통 상처투성이다. ‘습기’란 인간의 내면 저 깊은 곳에 고여 있는 상처의 다른 이름이다. 프로이드 식으로 말하면 무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의식의 저편에 고여 있던 욕망의 좌절은 스펀지처럼 의식의 배면에 고여 있다가 어느 날 쏟아져 나온다. ‘주정뱅이 아버지’ 그리고 ‘바람난 어미’, ‘자살한 동생’, ‘시샘 많던 이복동생’은 어린 날 불우했던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상처들은 성인이 된 페르조나 속에 교묘히 감추어져 있지만 그 내면에서는 카오스의 상처로 뒹굴고 있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그러한 상태를 ‘자세히 보면 옷 사이로 상처들이 삐죽’ 나왔다고 진술하고 있다. ‘옷’이야말로 무의식을 감추는 에고(ego)이며 페르조나의 전형적인 상징이다. 그는 늘 감추어진 상처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로 ‘길’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이 길들은 웃고 운다. 이것은 사실 보편적 상상력이다. 술이야말로 인간의 의식을 죽음에 가깝게 만드는 매개물이다. 술을 마시는 행위를 그는 상처를 말린다고 말하고 있다. 이 시의 절창은 ‘모든 길들은 지금 자가 치료 중이다’라는 부분이다. 상처받은 모든 인간들의 굴절된 삶의 양식들을 그는 ‘길’이라고 지칭한다. 그 길들은 진창의 이 세상에서 스스로 치료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길’이 지닌 상상력은 김승기 시인의 시에 있어서 한 축을 형성한다.
길들이 나를 달린다 나를 달리는 길들은 이제 자동이다 달리다 깨면 자식이고 한잠 자고 나면 마누라고 또 한잠 자고 나면 환자다 소백산에 어둠 깔리고 인적 뜸해지면 쭈그러진 공처럼 허름해진 길 하나 뒷골목을 달린다 마침내 단골 정종 집 아줌마를 달리고 정종집 아줌마는 나를 달리고
―「길․1」 전문
‘길’은 그의 의식에 내재한 자타동체(自他同體)의 상상력으로 작동한다. ‘길’이 나를 달리고 내가 ‘길’을 달리는 의식의 저편은 긴박한 그의 심리를 대변한다. ‘길’이라는 추상성은 ‘자식’, ‘마누라’, ‘환자’ 등 구체적인 존재로 환원된다. 앞에 언급한 카오스의 상태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어둠’이 깔리면 그의 인식은 보다 구체적이고 솔직하다. ‘뒷골목’은 어쩌면 긴박한 그의 의식이 거주하고자 하는 쓸쓸하지만 따뜻한 공간인지도 모른다. ‘정종집’으로 의미되는 골목 안 주점이라는 공간은 그의 상상력의 발원지이며 종점이기도 하다. 앞에서도 말했듯 술은 우리의 의식을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끌고 간다. 그는 주점에서 생의 부조리를 고통스러워하고 그것으로부터 구원을 꿈꾸기도 하는 것이다. 자타동체의 상상력은 다른 시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주점에 들러 적절한 농도의 우산을 쓰고 피해버리든지 아니면 이유 없이 허허벌판에 내몰려 수직의 주먹질에 흠뻑 얻어맞든지
너무 일방적이었다 아무리 도망가도 골목엔 비가 오더라 끝까지 소곤소곤 스며오더라
자세히 보니 그건 전생에 일찍 이사 간 순이다 어릴 때 아무도 없는 집에서 낮잠 자다 깨어 울던 무서운 하늘이다 어릴 때 몰래 보았던 엄마의 속살이다 엄하기만 하던 아버지의 회초리다
비는 익숙하지 않은 내 언어의 두드림이다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유일한 대화법은 그저 견디는 것이다
―「비․2」 전문
‘비’는 그에게 무의식 또는 과거를 회상하게 하는 매개물이다. 그는 ‘수직의 주먹질’을 그저 견디어낼 수밖에 없다. 골목길로 도망을 간다 하더라도 그 비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러한 점에서 ‘주점’ 역시도 사실은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쏟아지는 빗속에 그가 떠올리는 것은 ‘전생’이며 ‘아무도 없는 집에서 낮잠 자다 깨어 울던 무서운 하늘’이다. 선험적 공포와 두려움이 지배하는 세계를 떠올리는 것이다. 이 같은 병리적인 현상은 사실 인간 누구에게나 내재한 증상이다. 다만 대개의 인간들이 외면하고 망각하며 살아갈 뿐이다. ‘어머니의 속살’, ‘아버지의 회초리’ 등은 프로이드의 심리학에서 콤플렉스로 구조화된 바 있듯이 좌절된 동일화의 절망을 보여준다.
문제는 내리는 ‘비’가 그에게 ‘언어의 두드림’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의 시의 발원지가 심리적 측면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에 대한 ‘유일한 대화법’이 그저 견디어내는 것이라는 사실은 시적 방법론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시를 전체적으로 보면 가공이나 인공의 측면을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어쩌면 순간적 스케치나 내면의 기술이 시의 주요한 방법론으로 비추어지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 보인다. 즉, 그가 시를 쓴다는 것은 무의식에서 쏟아지는 ‘비’를 그저 맞으며 견디는 일이다. 고통에 대한 명징한 인식의 미학적 반응이 그에게는 시이다. 다음 시에서도 동일한 인식을 발견할 수 있다.
올해 몇 번 큰비가 왔어도 그냥 지나가더니 오늘은 한꺼번에 밀려온다. 창문을 닫아도 닫아도 따라오는 축축함, 그 생소한 언어에 놀라 거리로 뛰쳐나온 차들은 불길한 주문처럼 경적을 울려댄다. 내 마음속 어디 산(山) 하나 위험한데 환자들은 꾸역꾸역 저기압 전선을 몰고 온다. 두어 평 공간엔 짜증스런 기압골이 서로 부딪친다.
책상 앞 백기가 제법 붉다.
―「비․1」 전문
한꺼번에 밀려오는 ‘큰비’는 그의 마음에 일어난 파동의 크기를 의미한다. 「비․2」에서 비가 익숙하지 않은 ‘언어의 두드림’이라고 한 것과 동일한 의미로 위 시에서는 ‘비’와 축축한 물기는 ‘생소한 언어’라고 그는 명명한다. 생소함은 고통스러움을 반영하지만 그 순간이야말로 그가 시를 건져 올리는 순간이다. 불길한 주문 같은 ‘경적’은 그의 의식에 쏟아져 내리는 과거의, 혹은 무의식에 내재된 좌절된 욕망의 실체들이다. 이 시에서 그의 고통은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는 위험한 산으로 상징되는 자신의 심리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상태와 유사한 환자들과의 만남이다. 사실 자신의 고통의 근원을 시인 자신도 분명히 모른다. ‘내 마음 속 어디’로 지칭되는 공간 어딘가에 고여 있다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고통이기 때문에 시인을 더욱 괴로운 상태로 몰고 간다. 그는 그 고통을 그저 견디어내야만 한다. 그것은 시를 쓰는 일. 그러나 자신의 고통과 거의 동일한 상태의 ‘저기압 전선’을 몰고 오는 환자들을 바라보는 일은 그를 고통의 절정으로 이끌고 간다. 어찌 보면 그것조차도 그에게는 견디어내야 할 ‘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승기 시인의 시편들에서 도드라지게 드러난 인물군들은 서민들이다. 화가 박수근의 화법을 연상케 하는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불우한 인간들에 대한 연민의 눈길을 담고 있다. 「검은 열차」에 등장하는 ‘보살복 차림의 여자’와 ‘초췌한 사내’가 그러하고 「하얀 고무신」에 나오는 ‘고무신 한 켤레’가 주는 이미지 또한 그러하다. 「변두리에서」의 ‘두만강쯤’에 사는 ‘한 여자’의 이미지도 역시 이승의 힘든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면서 동시에 이승은 아닐 것 같은 아스라함을 동시에 담고 있다.
(전략)검은 열차는 철로 없는 철길을 달려가다 여자는 어디쯤 덜컹 내동댕이쳐질 것이고 사내는 혼자서 인도의 어느 작은 마을까지 갈 것이다 먼 길 노자라도 줄 걸 그랬다 검은 열차는 지금 속력을 더 낼 것이다 기적소리는 허공을 맴돌며 이승의 번뇌를 큰 글자로 쓰고 있을 것이다 아.프.지.나.않.았.으.면.좋.겠.어.요.
―「검은 열차」 부분
어디쯤 내동댕이쳐질 여자와 인도의 어느 작은 마을까지 갈 남자에 대한 시적 화자의 바람은 ‘아.프.지.나.않.았.으.면.좋.겠.어.요.’라는 연민의 마음이다. 그가 끝까지 버리지 않는 인간에 대한 애정은 냉철한 관찰 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어쩌면 사내가 가고 있는 인도의 어느 작은 마을에 그도 동행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게 이승은 번뇌의 땅이다. 해탈이나 초월이 없는 까닭에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만이 부조리한 이 세계를 뚫고 가는 힘이다. 첫 번째 시집에서 보여주었던 저자거리에 대한 긍정은 이번 특집 시 가운데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첫 키스의 뜨거움이 지난 곳은 하얀 속살의 두근거림이 사라진 곳은 모두 변두리다 변두리는 끝이 없어 결국 사람들은 변두리에서 태어나 변두리에서 죽는다
강 건너 불야성을 중심이라며 사람들은 오늘도 달려간다 그 불빛이 손에 잡힐 때 그만 가난해져 행복이라 부르지만, 또 맹목적일 만큼 멀게 꿈꿀 만큼 짧게 달아나며 사람들은 또 다시 변두리가 된다 그래서 변두리에 하루는 늘 목이 마르다 (후략)
―「변두리에서」 부분
해 아래 새 것은 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변두리’야말로 생생한 삶의 현장이다. ‘첫 키스’의 기억은 그리 오래 가는 것은 아니다. 인간들은 중심을 향하여 달려가지만 중심에 서자마자 그곳은 변두리가 된다. ‘변두리에서 태어나 변두리에서 죽는’ 인생에 대한 긍정은 궁극적으로 그의 시를 휴머니즘을 노정하게 한다. 하여 병원에서 열차에서 시장에서 사람을 만나고 주점에 들러 술을 마신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김승기 시인의 인식은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닿아 있다. 끝내 이 세계의 현상들과 본체에 대해 유한자인 인간은 알 수 없다는 인식이 그에게 뿌리내려져 있다. 프로이드가 칼 융의 집단적 무의식의 층, 즉 인간 영혼의 중심부에서 빛나는 신성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과 같은 생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것이 의학적으로는 하나의 편견이 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시인으로서 김승기에게 인식의 바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변두리’, ‘그늘’, ‘허허벌판’ 등의 공간은 그가 마주한 경험의 소산이다. 사실 불가지론적 사고란 한편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다른 방식의 사유체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그가 경험하고 인식한 생의 그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시가 보여주는 순간적 직관이 보편적 세계의 이면을 더 정면으로 꿰뚫으려는 의지로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감성과 새로운 형식이라는 이분법이 주류를 이루는 시단에 전혀 새로운 시의 미학을 보여줄 수도 있으리라 본다. 그 싸움의 전위에 서 달라는 말이다.
우대식․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 이전글22호 신작시/허형만 08.02.29
- 다음글22호 젊은시인 집중조명/김승기 08.02.2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