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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신작시/조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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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석
눈물나다
며칠 오른 눈에서 생각난 듯, 찔금찔금 눈물이 고였다가 스르르 흘렀다 텅 빈 하늘 한켠 구름을 올려다보아도, 지나는 바람 손끝에 처진 눈꼬리 스쳐도, 슬그머니 떨어졌다 고층빌딩 얼어붙은 회색 벽과 마주쳐도, 흐릿한 술집 불빛 아래서도 번뜩이는 눈물의 손톱에 눈이 가끔 찔렸다
그리웠던 사람과 마주앉아 있어도 그랬다, 가슴 떨려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이, 헐거워진 수도꼭지 주둥이, 가늘게 떨어지거나 새는 물처럼 불현듯, 찍어내듯 조각난 눈물이 떨어졌다, 얼어붙을 수도 있었을 텐데
저주하고픈 것들, 그래서 가끔 보고픈 것들 너무 많아 눈물이 나오는 건 아닌가, 잠시 생각했지만, 딱히 그런 것은 아니라고, 흐린 기억을 통과한 시간이 머리를 뒤흔들어주었다, 짜지 않은 눈물, 맹물 같은 슬픔, 기억이 구불구불 지나간 자리에 겨우내 얼었다 녹아내리는 것은 아닌지…
눈물 흘리고 다니던 달포 동안, 잠자고 일어나면 덕지덕지 눈곱도 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왼 눈도 만만치 않았다, 보고픈 사람 꿈에서도 보지 못한 탓이리라 되뇌었지만, 지난밤에는 된통 잠 안 오고 눈이 더 쓰라려 밤새 뒤척거리다 잠깐 잠든 새 벌겋게 부어서인지, 눈도 떠지지 않았다
거울 앞에 서서 오른 눈 위를 까뒤집었다, 싯노란 상사병처럼, 동그랗게 곪은 두 곳의 종기, 중 하나를 짓눌러 터뜨렸다, 나머지 하나는 너무 깊어 손톱 끝도 들어가지 않아 그 주위 눈썹만 속시원하게 뽑아버렸다, 하루
지나고 예전보다 적게 눈물이 가끔, 나왔다 이제, 밖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눈물이 눈을 찌르고 광대뼈 위로 마른 시냇물 자국 남기던 동안, 그 선을 경계로, 그 마른 눈물을 두고 아린 가슴 안과 밖이 뒤섞였는데, 눈물의 딱지에마저 가려지는 그리움은 지금 어디에 있었을까
덤벼든다
살며시 떠진 눈으로 겨우 일어나 창 밖을 본다
스모그인지, 안개 때문인지 북한산은
웅크린 짐승 같은 등허리만 보여주고
창가 책상에 놓인 향 하나 피우고
맨손체조 가볍게 한 후 담배 피워 문다
곧 얼어붙은 해가 곧 뜨리라
새벽 철문 앞에서 밤새 졸던 신문을 들고
차가운 변기 위에 앉아 하루를 시작한다
한 모금 물 마시고 소화시키는 것도
얼음 배인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도,
어제 먹은 음식들을 배설하는 것도
다 힘이 들어가야 하는 일인가 보다
거품 많은 샴푸로 머리와 몸 닦고
깔끄럽게 자란 수염마저 말끔히 밀어버린다,
벌거벗은 나를 되비추는 거울 옷장을 열고
고민 없이 붉은 줄무늬 팬티와 검은 양말을 신고
검은 바지와 검은 티셔츠 위에 검은 니트를 입는다
식탁 의자에 걸었던 오래돼 낡은 가죽점퍼를 걸친다
낡은 소가죽가방 비끄러맨다, 핸드폰도 챙긴다,
간밤 잠든 사이의 문자 메시지나 부재중 전화를 확인한다
아무것도 없다, 이런 일도…, 벌써 오래되었다,
이 땅에서 나는 추방당했다, 아니 유배되었다,
혼자인 내가 당신들을 철저하게 소외했다
비밀번호가 숨어 있는 문을 잠그고
종합병원 회랑 같은 침묵이 뒹구는 긴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선다, 차가운 관 같은 엘리베이터 서서히 올라온다
문이 열리고 나는 다른 세상으로 나갈 것이다
잠깐의 공간 이동으로 사방 180센티미터의 사각 관에서
철문을 바라보던 시선이 열리고 막 발을 내딛는 순간
비린내가 진하고 역한 도저히 맡을 수 없는 냄새가 덤벼든다
역시 바깥은 치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였다
발을 떼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진한 피비린내
몸이 마비되는 듯하다… 성급하게 닫힘 버튼을 누르고
견고한 철문이 닫히는 걸 본다, 마른 침을 몇 번씩 삼킨다
길고 긴 복도의 침묵은 내 발자국 소리에도 몸서리친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감옥 같은 차가운 철문을 잡아당긴다
서둘러 가방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던지고
가죽점퍼를 벗고 겉옷과 속옷 다 벗고
양말까지 다 내팽개치듯 벗고 소파에 드러눕는다
오늘도 나갈 수 없군… 잠시 일어나 컴퓨터를 켠다
부팅이 되는 동안 소파에 눕는다,
잠깐의 외출 준비가 나를 개 패듯 했는지 눈이 감긴다
조현석․
서울 출생 ․198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스케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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