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1호 신작시/천세진
페이지 정보

본문
천세진
망가진 정원에서
꽃들이 짓밟혀 있는
어느 망가진 정원에 서있었다
언제 목 꺾이고 허리 잘렸는지
두려움에 떠는 꽃들은 증언하지 않았다
떠받칠 천장을 잃은 정원의 기둥들은
단 하나의 꽃순도 틔워내지 못하는
검은 구름을 대신 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괴소문 같은 현기증만 피어올랐고
짓밟힌 정원의 역사를 증언하려는
한 떼의 무리가 달려왔으나
손을 잡으려 하자 모두 실종되고 말았다
벽에 붙어 비에 젖고 있는 실종된 얼굴들은
무거운 돌이 되어
다시 떠오를 수 없을 만큼
남은 이들의 가슴속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가라앉은 돌은 햇살이 들어도 기화하지 못하고
天刑처럼 들러붙어 있을 것이다
보기 좋게 늙은 자들이 흘린 회한의 눈물에서는
독담쟁이 덩굴이 피어올라 벽을 뒤덮었고
망가진 정원의 아픔을 기억하겠다던
紙上의 슬픈 말들은 더러운 협잡으로 밝혀졌다
망가진 정원에서는 누구나
독한 약을 먹고 나서야 잠들 수 있다
그나마도 언젠가는 면역이 되어
극약이 아니고서는 잠들 수 없을 것이다
禁書
길을 걷다 우연히 헌책방을 발견했다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싶었는데
눈에 뜨인 것도 반갑고 해서
주식투자기법 책자쯤이나 찾아볼 요량으로
책방으로 들어섰다
누군가의 흔적들로 덧입혀진 책들 사이를
눈길 머무는 곳 없이 휘휘거리다
한때 금서였던 낯익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넘기는 책장 사이로 이제는 불편하게도 느껴지는
해묵은 기억들이 불거져 올랐다
오래된 그 책을 덮자
갈피 사이로 희뿌연 먼지바람이 새어 나왔다
새어 나온 바람은
바닥에 무겁게 떨어지더니
금세 세상 끝으로 스멀스멀 흘러 나갔다
철자 하나하나에 녹아들었던 不穩이
이제야 막 놓여난 것처럼!
어느 시절,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불온이
어두운 골방을 전전하며
눅진한 공기로 몸피를 부풀리며
용도 폐기의 시대까지 흘러왔는가
헌책방 구석에 묻혀있을 동안에도
식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피의 약속도
먼지와 함께 놓여났으리라
환한 빛의 거리로 다시 나섰다
더는 불온함이 멋져 보이지 않는 시대
이제 불온함은 머리통 속이 아니라
사타구니에 죄다 몰려 있다
천세진․
충북 보은 출생
․2005년 ≪애지≫로 등단
- 이전글21호 리토피아 신인상 당선작품/최명진 08.02.29
- 다음글21호 신작시/양아정 08.02.2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