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1호 |산문|詩가 있는 풍경/최동문
페이지 정보

본문
숨쉬는 풍경의 비밀
최동문|시인
과수원
내가 만난 과수원은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탱자나무 울타리다. 그 봄에 탱자나무는 파란 새순을 탱자나무 가시 사이에서 일으켰다. 탱자나무꽃이 지면 벌과 나비가 사라졌다. 울타리 곁에는 작은 탱자들이 송송 영글기 시작했다. 내가 통과할 수 있는 과수원의 비밀통로는 없었다. 탱자나무 울타리 밖에서 본 과수원은 호기심 속에서 신비에 쌓여있었다.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일까? 어떻게 살아갈까? 오랫동안 몰랐다.
그 시절 과수원은 내게 오만으로 토라진 거대한 미지였다. 오만은 버려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내 마음 속 과수원 문은 어느 가을날 노란 탱자가 떨어져 수북하게 울타리 아래에 쌓였을 때 열렸다. 나의 방문은 싱겁게도 과수원지기의 허락으로 이루어졌다. 과수원은 넓었다. 과수원 안에서 탱자나무 울타리를 따라 한 바퀴 돌다 보면 해는 서쪽으로 한 뼘 이상 흘러가 있었다. 중세의 수도원처럼 작은 두 개의 문은 남북으로 있었다. 문을 두드려볼 걸 그랬다. 과수원을 동경할 때는 과수원에 가면 어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참새떼들이 탱자나무 울타리 곁을 잉크가 물속으로 번지듯 날아다녔다. 그 곁에서 나는 울타리 속을 거닐면서 어울릴만한 친구가 생기면 얼마나 신이 날까, 기대에 찬 궁금증을 품었다. 어린 그리움으로 몸과 마음이 붉었다. 시간은 생각의 늪에 푸른 잎을 입혔다. 구하면 나타나듯 친구는 어느 날 환상을 벗고 내 앞에 서 있었다.
과수원지기의 아내가 죽었다. 오랜 투병 끝에 죽은 여자라고 했다. 그 때 기억 속에는 왜 과수원의 실과는 보이지 않았을까? 기억의 시선은 온통 돌담벼락이 탱자나무 울타리와 마주한 곳에 쌓인 링거병에 멈춰 있었다. 그 풍경은 아릿한 밤꽃 냄새같이 적응하기 힘든 후각으로 다가왔다. 과수원은 사람을 죽이는 곳이기도 했다.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사람은 죽으며, 죽음은 차갑다는 것. 까마귀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 뒤에 오는 정적에 쌓인 오후에는 불현듯이 공포가 밀려올 때도 있다는 것. 비둘기 소리와 꿩의 퍼덕이는 날개 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안심시킨다는 것. 죽음의 냄새를 맡은 이후에 나는 한동안 과수원을 방문할 수 없었다.
하루는 마당에 비둘기가 떨어졌다. 비둘기는 우물가로 세숫대야에 머리를 처박고 물을 마시더니 정신을 차리고 한참만에 날아갔다. 비둘기는 과수원지기가 놓아둔 새잡이 약을 먹은 모양이었다. 과수원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튼튼한 성벽을 가지고 있었다. 날짐승이라도 성벽 앞에서는 예외란 없는 것 같았다. 그건 과수원이 가질 수 있는 생존의 최소형식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신의 경계를 결정하지 않으면 종종 혼돈 속으로 빠지듯이 과수원도 울타리를 치지 않으면 원하지 않는 외부자의 침입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종종 개들이 개구멍을 내어 과수원을 들락거렸지만 호기심 이상은 아니었다. 과수원은 나에게 비둘기나 개가 느끼는 성채가 아니었다. 과수원을 거닐며 자라난 풀을 보았다. 풀은 뽑혀 퇴비가 되었다. 풀 뽑힌 곳에는 콩밭과 땅콩밭이 생겼다. 콩의 연두색 싹이 날짐승의 먹이로 쪼이곤 했다. 빗물을 받을 콘크리트로 만든 웅덩이가 있었다. 우물과 양수기도 있었다. 아릿한 풍경이었다. 과수원 서쪽에는 오래된 성터 같은 돌무더기도 있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친구가 된 과수원집 아들과 자주 놀았다. 현실은 소설처럼 또래의 소녀를 때맞춰 보내주지는 않았다. 역시 실재는 동화가 아니다.
과수원은 누구를 키우는가? 사과나무는 끝없는 가지치기를 통해 사과를 생산했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양계장 닭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뒤에 알았다. 벌과 나비가 없는 철이면 사과나무꽃은 수분을 사람의 손길에 맡겼다. 규정지어진다는 것. 그 숨소리는 자연의 사과나무였지만 자연스럽지 않았다. 하얀 사과나무꽃이 눈부시게 핀 봄이면 사과꽃향기가 탱자나무 울타리를 넘고, 우리 집 담을 넘어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왔다. 그 향기를 맡은 지 몇 해가 지나고 과수원집 친구는 나이가 들고 나도 나이가 들었다. 우리는 헤어질 운명이었다. 과수원지기는 이사를 갔다. 늦은 가을이었다. 과수원은 도시계발 구획정리 속에서 들어갔다. 그렇게 두 해가 지났다. 사과나무는 더 이상 굵은 사과를 맺지 않았다. 작고 볼품없고 찌그러진 열매만 맺었다. 사과나무는 돌보아주지 않으면 풍요를 상실했다. 일종의 불행이었다. 나는 떨어진 사과를 밟으며 가을 과수원길을 산책하며 고독을 탐닉했다. 발밑에서 씁쓸한 사과의 단내가 났다. 단내로 코가 아렸다.
과수원은 사람이 만든 작품이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어서 노동의 시간을 대가로 지불하지 않으면 수확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요즘도 어느 때 어느 곳에서 과수원을 만나면, 과일은 사람의 노동이 낳은 땀을 먹고 자란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우리가 자신의 과수원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면 그건 자신이 가꾸어야 할 열매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연은 때로 불공평한 듯하지만 최소한 자연스럽다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생명은 어지러운 듯하지만 자체로 진실하다. 내가 과수원을 떠났을 때 과수원의 울타리도, 그 울타리가 지킨 사과나무들도, 그 사과나무를 돌보던 과수원지기의 집도 사라졌다. 그 위에 길이 나고 새 집들이 들어섰다. 과수원은 기억 속에서만 본 모습을 지켰다. 나는 씁쓸하고 단내가 나는 사과 썩는 과수원 흙길을 오랫동안 걸은 적이 있다.
풀꽃
꽃을 훔쳐 꽃잎으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을 안다. 훔친다는 것은 꽃잎을 꽃의 허락 없이 딴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은 자신이 키운 꽃잎으로 아름다운 장식을 엽서에 붙여 높은 가격으로 시장에 팔기도 한다. 어떤 풀꽃들이 처한 현재의 단면이다. 나는 행진하는 풀꽃무더기를 알고 있다. 안다는 것은 그들과 한몸이 되었다는 뜻이다. 동시대에 만난 풀꽃과는 교감을 넘는 통정이 있다. 풀꽃은 키가 작다. 나는 엎드리거나 비스듬히 줍는다. 풀꽃이 피는 계절은 주로 봄이어서 졸음과 더불어 풀꽃 곁에서의 합방은 마냥 가는 시계 초침을 의미 없게 만들곤 한다. 가까이서 눈을 크게 떠야 풀꽃을 볼 수 있다. 섬세한 풀꽃 잎이 만든 간격이 보인다. 풀꽃이 담아낸 우주의 기호들 하나하나가 바람에 나부낀다. 풀꽃이 옆으로 눕는다. 나도 비스듬히 누워 춘곤증을 안고 풀꽃 속에서 잠이 든다. 풀꽃은 나를 몽상가로 만든다. 종교예식보다 몽롱한 계절이다. 나는 풀꽃과 한몸이 된다.
새벽노을
춤을 본다. 어제는 밤을 지새고 동녘의 춤을 보았다. 오늘은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새벽노을 춤을 본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거나 지구 스스로 돌아가기에 새벽노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천문학 밖에서 새벽마다 춤은 태어난다. 만 가지 세상사가 일어나는 동쪽에서 너는 일어난다. 일찍 일어나는 새처럼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일찍 일어나는 춤을 만날 수 없다. 무대는 따로 없다. 관객은 스스로 정해진다. 춤은 자족한다. 춤판은 더 넓어 지구 어느 곳에서도 만날 수 있는 길이를 갖는다. 연출 과정이 생략된 춤이다. 새벽노을은 아름다운 백치가 무희였을 때 춘 춤이다.
이 춤을 보고 화가는 화폭을 떠올리리라. 화가에게 생존은 입안에 가득 찬 건빵처럼 팍팍한 것이다. 나는 새벽노을 속에서 내가 만든 작품 이전에 나의 생존을 발견한다. 그 다음에 나의 삶 위에 조심스럽게 옮겨놓는다. 새벽노을은 대가를 요구하는 대신 질문을 던진다. 새벽노을이 담긴 그림 속에서 새벽노을은 화가에게 창조를 경험하게 한다. 한 폭의 그림에 대해서 새벽노을은 모르고 있다. 거친 시야를 가진 이에게는 거칠게, 고운 사람의 시선 속에서는 곱게, 그렇게 스민다. 스며서 아침에 일어나는 사람들은 심상에 노을 그림을 물들인다. 볼 수 있는 눈동자 속으로 들어간 뒤에는 미련 없이 사라진다. 이런 새벽노을의 행동은 예언자답다. 저녁노을은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지만 새벽노을은 일찍 일어난 사람들만이 볼 수 있다.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새벽노을을 만나면서 그 속에서 태어나는 태양의 깊은 원형 속에서 새벽노을은 자체로 예언이다.
자연은 언제나 자체보다도 크게 사람들에게 꿈꾸어진다. 우리는 예언을 푸는 해몽가가 된다. 새벽노을은 변화한다. 명멸하면서도 좋다. 스러지지만 멸망하지 않으며 내일이라는 약속을 가진다. 희망이다. 빛의 반사작용이라기에는 눈길을 빼앗는 품이 자못 놀라운 새벽노을이다. 이제는 그 변화가 사람을 깨운다. 일찍 일어날 때 나는 새벽노을을 볼 수 있다. 노을은 아침을 타고 공기 속에서 산화한다. 구름이 되어 하늘로 퍼지며 떠난다. 이것이 새벽노을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실존이다.
들짐승 단상
족제비는 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겉으로 보기에는 돌담 위를 뛰어가는 족제비들의 발놀림이 경쾌한 음악같이 느껴졌지만 실은 아니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가운데 나에게 너는 너무나 아름다운 몸이다. 까만 눈과 도드라진 입과 긴 몸통과 갈색 꼬리가 새끼들을 데리고 돌담 우리를 달려갔다. 토끼 새끼 세 마리가 죽었다. 토끼 피를 주둥이에 묻힌 채 도망친 족제비 가족이 떠났다. 흰 염소의 허벅지도 물렸다. 족제비의 이빨자국이다. 나의 기척에 놀라 달아난 족제비는 한동안 외양간을 찾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가까운 강가에서 들쥐사냥을 할지도 모른다. 족제비 가족의 발자국이 악보처럼 눈 위에 남았다. 감추어진 뜀박질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마른 갈대숲으로 사라지기 전에 그들 가족은 내 머릿속에서 법고를 치고 있었다. 고저장단으로 혹은 느리다가 점점 빠르게.
덫을 두더지가 갈 만한 길목에 놓은 적이 있다. 두더지를 잡아 껍질을 벗겨 구운 적이 있다. 어른들은 두더지를 흙에서 난 삼이라 하여 토삼이라 불렀다. 신령한 땅의 기운이 두더지를 덮고 있었다. 두더지는 눈은 퇴화했다. 땅 아래 세상을 잘 알고 있다. 단지 무논에 구멍을 내고. 텃밭을 휘저어놓는 게 문제다. 비 온 날에는 자신이 지나간 흔적을 추상화처럼 땅 표면에 새기며 돌아다닌다. 두더지는 죽을 때까지 땅 속을 파헤치는 운명을 가진 짐승이다. 사람이 아무리 두더지를 잡아 죽여도 두더지는 깊은 땅 굴에서 사랑하고 새끼를 낳고 키운다. 대를 잇는다. 잘 보이지 않는 두더지는 지렁이나 다른 먹이를 찾아 흙 속을 개밥풀처럼 떠돌아다닌다. 그럼에도 자신의 길을 잊지 않고 만들어나간다.
회색들쥐는 억새숲에 집을 짓는다. 그 집은 멀리서 보면 마치 새의 둥지처럼 보인다. 그것을 헤쳐 보면 운 좋게 꼬물거리는 새끼를 만날 수도 있다. 그들은 나처럼 한 집에 혼자 사는 법이 없다. 그들은 짝짓기를 많이 한다. 많이 낳고 많이 죽는다. 그 중에 몇몇은 어른 회색들쥐가 된다. 우리는 회색들쥐가 얼마나 빨리 사는지 그 속도를 알기 위해서는 전공서적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만큼 그들의 생존주기는 빠르다. 다 자란 회색들쥐를 만나면 인사를 하고 먹다 남은 빵을 나누어 주어도 좋을 것이다.
유기견도 들짐승일까? 상처 입은 들짐승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이 얼마나 이기적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유기견보호소를 방문해서 때가 자르르한 버려진 개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버려진 개는 내가 만난 혼자 사는 고라니가 느끼는 경계심과는 다른 공포를 눈 속에 담고 있었다. 고라니는 들과 산의 경계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러다가 낯선 기척에 놀라 숲으로 사라진다. 버려진 개는 도시의 숨을 만한 골목과 죽음 사이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나는 두려움에 떠는 그들의 눈빛을 보았다. 어떤 사람들도 때로는 버림받는다. 그래서일까? 나는 버려진 개와 숲으로 떠난 고라니를 잊을 수 없다.
동물원은 패배한 도시인이 새긴 그림자다. 세계 각처에서 잡혀온 짐승을 구경한 다음에 사람들은 훈련된 돌고래와 고래, 그리고 물개과 원숭이가 부리는 재주를 본다. 그 짐승은 박제된 영혼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박수를 친다. 웃는다. 유쾌함마저 느낀다. 그냥 재미있어 한다. 즐거울 다름이다. 그것뿐이다. 가볍다. 목숨을 가진 존재는 언제나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진실을 알아차린다면 아무도 행복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동물원은 하루를 마감한다. 그것이 행복이라 믿는다.
길 위의 여행가
길을 떠나면 내가 움직인다. 같은 시간에 길도 움직인다. 길을 떠나는 행동은 나를 확인시키는 기제다. 가끔 죽음을 만날 때 더욱 그렇다. 국도를 걸으면서 길에서 납작하게 말라 널브러진 동물의 사체를 만날 때가 그렇다. 안락하지 않은 혼자만의 여행은 자아에 대한 질문 그 자체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무엇을 하느냐? 그 의미는 무엇이냐? 너는 어디서 왔느냐? 지금 어디에 있느냐? 어디로 가느냐?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여행을 환기시키는 쉽지 않은 자신을 향한 질문이다. 두 발로 걸어 나가는 것. 스스로 만든, 길 떠남을 외부인들은 자동차로 소외시키곤 하지만 대수롭지는 않다. 혼자는 미지를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경험으로 족하다. 혹 너를 만나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거냐고 묻고 답한다. 지금 여기에서 나는 여행을 넘어, 사람이 길지 않은 길을 가는 나그네라는 걸 깨닫는다. 너를 만나 같은 방향이면 같이 걷는다. 혼자 걷는 여행은 규칙을 따로 두지 않으므로.
최동문
․1967년 경주 출생
․1996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즐거운 거지 등
- 이전글21호 계간평/고명철 08.02.29
- 다음글21호 외국문화탐방/전용갑 08.02.2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