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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계간평/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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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이경자 장편소설, 계화(생각의 나무, 2005)
―은미희 소설집, 만두 빚는 여자(이룸, 2006)
‘맺힘과 권태’에서 ‘풀림과 신명’으로
고명철
1. 상처를 근원적으로 치유해내는 ‘살림의 언어’
내 책상 위에는 두 권의 소설책이 놓여 있다. 이경자의 장편소설 계화(생각의 나무, 2005)와 은미희의 소설집 만두 빚는 여자(이룸, 2006)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지난 해 세밑과 새해 시작 무렵에 발간된 두 여성 작가의 소설을 읽노라면, 가는 해와 오는 해의 틈새에서 인간의 삶과 관련한 어떤 비의성(秘義性)을 다시 한번 숙고하게 된다. 그들에 의해 섬세히 포착된 우리들 삶은 지극히 남루하고 세속적이되, 천박하거나 하찮지 않고, 아름다우면서도 탈속적인 삶의 지경을 살포시 보여준다. 비록 온갖 고달픔과 애달픔으로 상처투성이의 박복한 삶을 살고 있을지언정 그들의 소설 속 인물들은 오히려 그 상처투성이의 박복한 삶을 사랑하며 견디는, 하여 우리로 하여금 삶의 외경심을 갖도록 한다. 그토록 비속하고 내팽개치고 싶고 저주받은 삶들로 꽉 채워져 있건만, 바로 그 삶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불씨를 지핀다.
내림굿의 전 과정을 소설의 언어로 되살려내고 있는 계화와 일상에 대한 권태로운 풍경 속에서 곤혹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인물들로 이루어진 만두 빚는 여자는, 얼핏 보면 서로 전혀 다른 색채의 작품들로 비쳐진다. 전자가 우리의 무속적 전통에 젖줄을 대고 있다면, 후자는 무속과 전혀 상관이 없는 영역에서의 일상적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그렇다. 분명, 이 두 작품은 관심을 두는 영역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닌다. 하지만 앞서 잠깐 얘기한바 작품의 세부 형상화 면에서 차이를 갖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이 두 작품 모두 세계로부터 훼손된 실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상처를 근원적으로 치유해내는 ‘살림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죽임 혹은 방기의 언어’로부터 벗어나 ‘삶 혹은 구제의 언어’를 치열히 모색하고 있다. 그들의 이러한 서사적 특장(特長)은 모든 생명을 따뜻하게 감싸안으며, 불모성의 대지를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케 하는 모성의 언어, 그 특유의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뜩이나 1990년대 이후 여성 작가들의 주류적 성향이 모성의 힘을 재발견하는 데 있기보다 탈근대적 여성의 자의식에 대한 맹목화로 인해 모성 자체를 혐오 내지 부정하려는 속성이 노골화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이경자와 은미희의 이번 작품들은 저간의 주류적 성향의 여성작가의 작품들과 차이를 갖고 읽힌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터이다.
2. 자기 구원과 관계의 해원: 이경자의 계화
계화는 소설이되, 소설의 경계에 갇혀 있지 않다. 다시 말해 계화는 근대적 부르조아지의 서사시인 소설의 외양새를 갖추고 있되, 이 외양새로만 판단해서는 곤란하다. 비록 작가 이경자는 내림굿의 전 과정을 소설이란 예술 형식을 빌어 속속 재현해내고 있지만, 재현 과정에서 ‘근대적 예술형식-소설’과 길항하는 ‘전근대적 예술형식-무가(巫歌)’의 관계를 통해 계화만이 갖는 독특한 ‘내용형식’을 보증한다. 계화를 통해 우리는 근대의 문명 세계로부터 망실되어가는 굿의 진정성을 대면한다. 이경자는 흔히들 미신이라 치부하는 굿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면서 우리들 각자의 삶에 어혈진 한을 한바탕 신명난 굿거리로 풀어낸다. 하여 그가 각별히 주목한 대상은 바로 굿의 주관자인 무당이다. 그는 작품 곳곳에서 무당의 존재를 언급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은 무당의 존재를 집약하여 이해시키기에 충분하다.
“너를 낳은 사람은 너의 어머님이다. 그러나 신의 세계로 너를 들여놓은 나는 너의 신어머니가 되는구나. 부디 큰만신이 되어라. 행복하려고, 남보다 잘 살려고, 유명해지려고, 남에게 복수하려고 해서 안 된다. 무당이 애 고달픈 줄 아느냐? 무당은 행복한 사람들을 볼 수가 없다. 불행해서 널 찾아왔다가도 행복해지면 침을 뱉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서러워도 하지 말고 노여워도 하지 말고 원망도 하면 안 된다. 무당은 아픈 사람, 억울한 사람,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태어났다. 한시도 그런 마음이 더렵혀지지 않도록 늘 긴장하고 신명님께 빌어라. 너를 위해 살지 않도록 도와주십사고 비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은 이 사회에서 가장 멸시받는 직업을 가진 같은 처지의 동기간이다. 모르는 것 서로 가르치고 콩 반쪽이라도 나눠 먹도록 하여라. 힘들고 어려운 일, 고통도 나누고 서로 어루만져라.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될 날이 있을 거다. 신의 부리가 무엇인지, 느끼게 될 것이다. 아무쪼록 자중자애 하거라…….”(93쪽)
이렇듯 무당이란 늘 타인의 불행을 위무하는 존재다. 자신의 행복을 갈구하지 않는다. 행복을 욕망하는 것은 무당이 아니라 무당을 찾아온 사람들이다. 무당은 그저 굽이굽이 맺혀 있는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고, 그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신명을 북돋워주면 되는 것이다.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 아니면서 귀신이어야 하는 게 무당”(24쪽)인바, 무당은 “평생 신과 사람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떠돌이로 살다 쭉정이가 되지 않으면 다행”(27쪽)이다. 바꿔 말해 무당은 ‘반신반인(半神半人)’ 혹은 ‘비신비인(非神非人)’의 존재로서의 숙명을 견디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러한 무당의 숙명을 소설 속 인물 연주도 자신의 그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혹독한 무병(巫病)을 앓은 후 연주는 내림굿을 통해 비로소 무당으로 갱생한다. 계화는 연주의 입무식(入巫式)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만큼 내림굿의 세밀한 과정이 풍부히 형상화되고 있다. 연주의 이러한 입무식을 보면서 우리는 다양한 굿거리에 참여하게 된다. 그 중 우리의 오감각을 바짝 곤두서도록 하는 대목은 단연 작둣날을 타며 추는 춤사위와 세상 사람들에게 내뱉는 공수의 마디마디에 배어 있는 삶의 진실과 만나는 일이다. 내림굿의 절정인 작둣날 위에서 하는 연주의 공수를 들어보자.
“신어머니! 그동안 참 많이도 고생하셨습니다. 모진 수모도 잘 견디어내셨습니다. 신의 동기들. 아직 부족한 햇병아리 한 마리 생긴 거 반겨주세요. 어떤 경우에도 견디고 참아내고 본분을 잊지 않도록 때려주세요. 여러분 길지 않은 인생. 미워하지 말고 악하게 하지 말고 욕심 쓰지 말고 편안하게 함께 살아요. 우리가 누구의 자손입니까. 저 하늘, 이 땅 저 나뭇가지 위의 우짖는 새, 개미, 지렁이, 어느 하나 필요 없이 생긴 목숨 없습니다. 누가 누구보다 더 잘나고 못나지 않았습니다. 몸은 하나 나고 죽는 거 한 번뿐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자손입니까. 그걸 잊지 마세요. 여러분. 있지도 않은 거 만들어서 그 속에 꽁꽁 매여서, 콱! 갇혀서 누굴 탓하고 원망하고 그러지 마세요. 있지도 않은 허물, 죄에 스스로 떨고 경계하지 마세요.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신명님 받들고 돌보세요! 명도 복도 자기 안의 신명님에게 있습니다. 저는 이 부드럽고 따뜻한 작둣날 위에서 그걸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부디 자기 자신 용서하시고 존중하시고 사랑하세요!”(274쪽)
세상의 뭇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것, 아니, 세상의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것, 하여 자신만의 욕망의 미궁에 갇히지 않는 것, 이것들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비루한 삶을 비루하지 않게, 천박한 삶을 천박하지 않게, 그리고 증오의 삶이 아니라 사랑의 삶으로 살게 하는 신명을 북돋우는 삶의 태도라 해도 손색이 없다. 시퍼런 작둣날 위에서 연주의 공수는 이렇게 굿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물론, 연주의 이 공수는 연주의 내림굿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닐 터이다. 비록 굿에 참여를 하지 못했지만, 신과 인간 사이의 매개 역할을 해주는 무당으로서 거듭나는 경이적 순간에 연주의 공수는 세상을 향해 들려주는 진실의 전언과 다를 바 없다. 그렇기에 굿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과 외경심은 새로운 무당의 출현에 힘입어 개별자의 한 맺힘이 풀리는 데서 밀려드는 한없는 감격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동시에 그동안 각자의 욕망의 미궁에 갇힌 채 세상 사람들의 삶에 무관심했던 자신들의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로부터 비롯된 생의 감각과 인식에 연유한다.
이러한 연주의 내림굿으로부터 우리는 굿과 관련한 편협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계화를 통해 읽을 수 있듯, 굿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말 그대로 삿된 게 결코 아니다. 소설 속 신어머니인 계화와 다른 무당들도 그런 것처럼 연주 역시 그녀의 박복하고 기구한 삶은 굿을 통해 놓여난다. 굿을 통해 그녀는 생의 고통으로부터 풀려나 그녀의 상처를 치유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의 상처마저 치유할 수 있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맺혀 있는 한을 풀어줌으로써 말이다. 고부간의 대립이 원만히 해결하지 못한 채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연주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고부간 양측으로부터 원망을 사고 있는 연주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연주의 내림굿 속에서 해원(解寃)된다. 즉 내림굿은 연주에게는 이와 같은 가족의 불화 속에서 피폐해진 그녀 자신의 영육을 스스로 구원해내는 것이되, 또한 불화의 가족들 사이에 맺힌 한을 풀어주는 해원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연주의 내림굿을 지켜보며, 연주네 가족의 해원은 물론, 우리들 각자의 가족과 사회, 더 나아가 국가, 인류와 맺는 불화의 관계를 치유해내는 어떤 보편적인 힘을 욕망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굿이 지닌 범민족적․범인류적․범우주적 공존 및 상생의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경자의 계화는 ‘근대적 예술형식-소설’과 ‘전근대적 예술형식-무가’의 창조적 만남을 통해 서구식 근대가 빚은 세계의 악무한으로부터 난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세계로 거듭나기 위한 미적 고투의 산물이 아닐까. 계화를 단순히 민족적(혹은 민속적) 구비 문학(서사무가)이나 연행 예술(굿거리)만의 의미로 국한시킬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다.
3. 지리멸렬한 삶을 견디는 시간의 힘: 은미희의 만두 빚는 여자
은미희의 만두 빚는 여자는 그녀의 첫 소설집이다. 이미 세 권의 장편소설을 발표한 바 있는 그녀에게 첫 소설집의 존재는 각별할 터이다. 모두 10편의 단편들로 묶인 이 소설집에는 세계를 바라보는 은미희의 웅숭깊은 시선을 만날 수 있다. 그 시선은 은미희의 단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상처를 발견하고 그것을 치유하는 과정에 스며 있다. 상처들은 제 각각이다. 하지만 상처들의 원인을 곰곰 생각해보면, 어떤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상처를 지닌 인물들은 하나같이 ‘지리멸렬한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삶에 강한 의욕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들의 삶은 무미건조할 따름이다. 그들은 무엇을 애타게 욕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어떤 결핍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제 나름대로의 기구한 사연을 지니고 있는 것은 물론, 그로부터 어떤 결핍 상태를 심하게 경험한 적이 있으며, 지금도 결핍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아차 하면, 이 결핍 상태는 미래까지 지속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핍을 강하게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지리멸렬하고 권태로운 삶의 영역이 누군가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데 대해 두려워하는가 하면(「다시 나는 새」), “언제부턴가 아니다, 그렇다, 라고 명확히 선을 긋지 못하고 에둘러 말함으로써 자신을 감추고, 타인들의 편가르기로부터 안전하게 숨”는가 하면(「새들은 어디로 갔을까」, 84쪽), “엽렵하게 세상 속으로 편입해 들어가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는”가 하면(「편린, 그 무늬들」, 176쪽), 형의 경제 형편이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요구로 동생의 막대한 사업 빚을 갚아주기로 한다(「새벽이 온다」).
이렇듯 은미희가 애착을 갖고 있는 소설 속 주요 인물들은 하나같이 권태롭고 지리멸렬하고 엽렵하지 못한 삶을 살아간다. 은미희에게 삶의 한 축은 이처럼 불가항력적인 그 무엇인지 모를 일이다. 삶의 이러한 측면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녀의 인물들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터이다. 가령, 「만두 빚는 여자」에서 만두를 빚는 여자는 그녀와 함께 살아갈 남자를 욕망한다. 하여 그녀는 공사판 목수를 사랑하였으나 목수는 치매 걸린 그녀의 어머니의 존재와 그녀 자신을 돌보지 않는 데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그녀를 떠난다. 떠나는 목수를 그녀는 애써 붙잡을 수 없다. 목수를 붙잡을 만큼 그녀는 엽렵하지 않다.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세상 사는 일도 만두 빚는 일과 동일하다고. 세상일을 싸잡아서 무리 없이 제 안으로 끌어안는 것. 조심하지 않고 조금만 힘을 줘도 여기저기 만두피가 찢어지고 내용물이 쏟아져서 먹음직스럽게 빚어지지 않듯 세상일도 그렇다.”(「만두 빚는 여자」, 66쪽)는 사실을. 하여 그녀는 목수를 그렇게 떠나보낸다. 목수를 향한 지나친 사랑은 목수를 떠나게 했던 셈이다. 그녀가 조금만 엽렵했다면, 목수를 떠나보내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만두를 적당한 힘으로 빚듯 목수를 더는 붙잡지 않는다. 목수가 그녀의 삶에서 놓여남으로써 또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녀가 거부할 수 없는 지리멸렬한 우로보로스와 같은 원환(圓環)의 삶이 아닌가.
그런데 이와 같은 우로보로스의 삶에 은미희의 인물들이 얽매어 있지는 않다. 분명, 그녀의 인물들은 “꿈도 없이 점점 박제가 돼 가는 여자”(「다시 나는 새」, 16쪽)가 대부분이고, 삶의 무기력증에 걸린 남자가 다수를 차지한다. 하지만 그녀의 인물들은 이 불가항력적인 삶에 속수무책으로 놓여 있지만은 않다. 비록 개별자의 미약한 힘으로 광막한 삶에 맞서 싸우는 것은 힘들지만, 그 싸움 자체를 쉽게 포기할 수만은 없다. 삶은 싸움의 피를 머금고 삶의 활기를 되찾기 때문이다.
다소 희극적 상황을 연출한 감이 없지 않으나, 종수는 그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 조문을 하러 간 친구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놓고, 젊었을 적 사회정의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사적인 욕망만을 채우기에 급급한 친구들을 향해 일갈한다. 종수의 현재적 삶은 친구들에 비해 경제적 궁핍 상태를 벗어날 수 없지만, 도저히 친구들의 그 엽렵한 삶의 타락성에 대해서는 눈감을 수 없던 것이다(「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한 한국전쟁 무렵 북에 아내와 친자식을 두고 월남한 송씨는 북측의 아내를 주기 위해 금반지를 소중히 간직해 왔으나, 그 반지를 현재 함께 살고 있는 아내의 손가락에 끼워주기 위해 집으로 들어간다. 현재 송씨와 함께 삶을 살고 있는 남측의 아내가 곁에 있기에, 송씨는 살아 있음의 소중함을 새삼스레 깨달았기 때문이다(「나의 살던 고향은」). 그리고 어머니를 모시는 일에 극구 반대해온 아내의 의견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를 모시겠다며 아들은 다짐을 다잡는다(「갈대는 갈 데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은미희가 불가항력적 삶을 이처럼 견디는 데에는 그녀만의 독특한 해법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시간의 힘을 적극 활용하는 일이다. 은미희의 인물들이 지닌 생의 고통과 상처는 과거의 힘을 뒤로한 채 오직 현재적 삶의 힘만으로 극복하고 치유하는 데서 생겨난 문제점에 기인한다.
지금의 나는 그 과거 위에 서 있거든. 과거를 지워 내면 현재의 내가 있을 수 있겠니. 지나치게 과거에 함몰돼 사는 것도 위험하겠지만 반대로 과거를 무시하면서 사는 것도 문제일 것 같아.
은자는 체증을 느꼈다. 과거라는 시간이 자신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양 그렇게 앞만 보고 살아온 은자였다. 잠시라도 해찰을 한다면 이 빛나는 세상에서 밀려날까 봐 한눈도 팔지 못한 채 그렇게 눈 치켜뜨고 코앞에 난 길만 보고 달려온 시간들이었다. 한데, 이 아이는 일그러진 자신의 과거를 주춤주춤 뒤돌아보며 살아왔노라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니었다. 은자 역시 과거의 시간들을 제 삶에서 소거해 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의도적인 방기였을 뿐이었다. 결코 유쾌하지 않았던 시간들, 그 시간 속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그저 유령처럼, 너겁처럼, 그렇게 현재의 시간 위를 떠돌았을 뿐이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자에게 미래는 어떤 의미인지. 과거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 자에게 과연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지금은 그때 기억마저도 아름답게 느껴지곤 해. 그때의 아픔이 내겐 큰 힘이야. 현실의 어떤 난관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지니 말이야. 하긴 내가 나이를 먹기 먹은 모양이야. 옛날이 그리운 것이. 왜 그런다지 않니? 나이가 들면 추억의 힘으로 살아간다고.(「낡은 사진첩을 꺼내 들다」, 330쪽)
우리는 현재가 과거의 반석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은연중 망각하고 있다. 오직 ‘지금, 이곳’의 삶을 중시한 나머지 현재의 삶을 맹목화하고 있다. 물론 현재의 삶은 중요하다. 하지만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 지닌 힘을 소홀히 해서 안 될 것이다. 과거의 퇴적층이 곧 현재를 이루며, 현재는 또 다시 과거의 퇴적층 속으로 스며들고, 또 다른 현재는 또 다른 과거의 퇴적층 속으로 스며든다. 말하자면 과거는 현재의 태반인 셈이다. 그렇다면 무미건조하고, 지리멸렬한 현재의 삶을 견디기 위해서는, 과거의 시간들 갈피에 숨쉬고 있는 ‘추억의 힘’을 발견해내어야 한다. 사실, 소설이란, 이 ‘추억의 힘’을 발견해내고 재구성해내는 데 적합한 서사 장르가 아닌가. 소설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의식 저편에 오롯이 자리하고 있는 삶의 어떤 풍경과 순간을 되살려냄으로써 현재의 불모화된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삶의 비의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와 길항하는 과거의 어떤 순정한 힘이야말로 현재적 삶의 상처를 치유해내는 구원의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4. 인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소설
이경자의 장편소설 계화와 은미희의 소설집 만두 빚는 여자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삶의 고통에 대한 연민의 소중함을 되물었다. 이경자는 작가의 말에서 계화를 쓰도록 영감을 준 무당 김금화가 “소설가도 비슷하네. 인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게.”라는 말을 빌리고 있다. ‘인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소설이 포기해서는 안 될 금과옥조(金科玉條)라고 말한다면, 나의 지나친 간섭일까.
이경자와 은미희는 모두 ‘지금, 이곳’의 인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작가들이다. 계화의 곳곳에 삽입되어 있는 무가와 굿거리의 온갖 춤사위, 그리고 그 숱한 공수들은 소설 속 인물들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소설 바깥의 우리들 삶의 영역으로 번져오는 굿의 신명들이다. 굿의 신명 속에서 우리는 영육에 어혈진 한을 스스럼없이 풀어낸다. 그리고 굿의 신명 속에서 우리는 모두 신명나는 세상을 갈구한다. 증오가 없는 세상, 사랑을 나누는 세상,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세상, 주체와 타자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존재를 구원해주는 세상, 즉 세계의 고통을 말끔히 씻겨주는 것이 바로 우리 굿의 신명이다. 하여 굿의 신명을 당당히 근대적 소설의 형식을 넘나들며 북돋워주는 이경자는 ‘소설가-무당’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터이다.
어떻게 보면, 은미희 역시 동궤에 놓인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과거의 시간을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는 서사의 독특한 힘을 통해 우리들 현재적 삶의 고통을 치유해주고 있다. 하여 예전에 “여자는 자신 안에 고인 광기를 풀어낼 길이 없다. 길이 없어 아예 방기해버린 삶.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므로 여자는 더욱 답답하고 울울하고 그래서 삶이 더욱 지루하기만 하다.”(「다시 나는 새」, 17쪽)라는 삶의 미궁으로부터 자유롭게 훌훌 벗어날 수 있으리라.
두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우리 모두 낡고 고루한 것을 말끔히 씻겨내면서 새로운 봄의 기운으로 충만되기를 빌어본다.
이제 산 자와 죽은 자들 사이의 풀리지 못했던 불행과 미움과 그리움의 오랏줄이 풀렸으며 회한도 녹아들었다. 굿당은 하바탕 해일(해일)을 넘긴 뒤의 새로움이 봄기운처럼 감돌기 시작했다.(계화, 253쪽)
고명철․
1970년 제주출생
․저서 '쓰다'의 정치학 등
․광운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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