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1호 계간평/장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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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김경미, 「한 줄짜리들-맥락 없음에 바침」
―황병승, 「사산(死産)된 두 마음」
―김종미, 「혼혈아의 조국 방문」
―진은영, 「푸른 셔츠의 남자」
―김행숙, 「더 작은 사람」
―신해욱, 「여름에서 여름으로」
―최동호, 「도시의 폭주족은 새벽을 향해 달린다」
―이현승, 「아이스크림과 늑대」
―임보, 「그대 지금 어디쯤 오시는가」
―허수경, 「풍장의 얼굴」
젊음, 늙음 그리고 새로움, 낡음
장석원
1. 열 편의 시 속의…… 맥락 없음에 바친다
시 열 편이 있다. 내가 읽은 작품들의 서로 다름이 즐거움과 고통을 발생시킨다. 시가 살아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열 편의 시를 집합시켜 그들의 공통점을 추출한 후, 그것에 대표 명사를 부여하는 일은 폭력일지도 모른다. 나의 글 역시 맥락 없음에 의해, 사라진 맥락에 의해 결정될지도 모른다. 작품을 따라간다.
아래의 시는 시의 비평을 시로 옮겨 놓은 재미있는 시도로 씌어졌다. 김경미 시인의 열 편의 시 중에서 한 줄씩 뽑힌 좋은 구절들이 우연과 맥락 없음에 의해 새로운 작품‘처럼’ 읽히는 신기한 경우를 시인은 불편한 마음으로, 동시에 즐거운 마음으로 탄생시킨다. 비평 위의 시를 본다. 시인들이여, 그대들은 창조의 권능을 지녔으니 비평의 혀와 눈을 무시하시라. 비평을 따라다니는 시는 결코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겹텍스트를 만드는, 상호텍스트가 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시인의 경쾌한 시도가 즐겁다. 유쾌한 랠리가 아닐 수 없다.
*고난이야말로 매혹의 우단 벨벳 검은 미망인 기품으로
다 쓴 이쑤시개처럼 봄 햇빛들 쏟아지는
내 사랑 겉묘엔 선혈의 망치못들, 잔디떼들의 잔못질들
버드나무 같이 휘어진 노을
허공을 파나가는 광부나비
코끼리처럼 펄럭대는 내상에의 치정
탁구공처럼 짧은 흰색스커트
초코시럽 같은 밤
새하얀 소금들 저녁연기처럼 피어날 때*
열 편의 시 속의 한 행들
맥락 없음에 바친다
맥락 없는 만남이 꼭 시 같다 맥락 없음에 바친다
**한 시인이 나의 열 편의 졸시에 대한 해설글 속에서 추려놓은 것이 순전히 외형적으로 한 편의 시처럼 <보여서> 그대로 옮겨왔다.
―김경미, 「한 줄짜리들-맥락 없음에 바침」 전문(문학마당 2005. 겨울)
2. 서른여섯 살의 악마가 다가와 열두 살의 나를 지목할 때까지
땅속에 거꾸로 처박힌 광대처럼
열두 살, 사탕을 너무 먹어서
두 발은 계속 허공을 걷는다
시간은 좀도둑처럼 어둠 속에서
딸꾹 딸꾹 조금씩 죽어가고
참새들은 그것을 재밌어 한다
서른여섯 살의 악마가 다가와 열두 살의 나를 지목할 때까지
(딸꾹거리며)
검은 칼을 든 악마가 열두 살의 내 목을 내리칠 때까지
불안에 떠는 광대처럼
(딸꾹, 딸꾹거리며)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이 땅속의 자식아!
흙 속에 처박힌 열두 살,
귓속의 매미는 잠들지 못한다
― 황병승, 「사산(死産)된 두 마음」 전문(≪문학사상≫ 2005. 12.)
바뀌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살아남기 위해 바뀌어야 한다. 황병승의 시를 읽기 위해 전통의 서정시를 폭파시켜야 한다면? 아니 전통이나 서정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나’를 파괴시켜야 한다면? 다른 시들에 비해 비교적 온건한(?) 그의 이 작품은 과격하지만 과격하지 않다.
열두 살의 ‘나’가 서른여섯 살의 악마와 만난다. 어린 화자는 서른여섯의 자신을 쳐다본다. 둘은 서로에게 적이다. “검은 칼을 든 악마가 열두 살의 내 목을 내리칠 때까지” ‘나’는 대결한다. 서른여섯의 ‘나’가 열둘의 ‘나’를 “흙 속에 처박”는다. 과거의 ‘나’는 흙 속에 그렇게 처박혀 있고, 현재의 ‘나’는 과거의 처박힌 ‘나’를 지켜본다. 현재에 의해 과거가 “딸꾹 딸꾹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과거의 총합이 이룬 현재가 반대로 과거를 살해한다. 현재와 과거는 분리된다. 아무 상관이 없다. 황병승의 ‘나’는 과거와 절연된 존재이다. ‘나’는 어쩌면 돌연변이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요즘 시인들은 과거와 분리된, 과거를 살해한, 과거를 폭파한 존재들일지 모른다. 아니 과거 자체가 없는지도 모른다. “참새들은 그것을 재밌어 한다”에서 킬킬거리는 화자를 본다. 자신을 악마라고 지칭하면서 열두 살 ‘나’의 죽음을 쳐다보면서 희죽거리는 화자를 나 역시 즐겁게 본다. 왜 사탕을 너무 먹어서 “두 발은 계속 허공을 걷는”지를 알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은 시인의 독특한 시선을 이해하려는 지성이 아니다. 시가 무슨 퍼즐인가. 시가 무슨 논문인가.
과거와 현재를 열둘의 ‘나’와 서른여섯의 ‘나’로 분열시켜 놓은 이 시의 출발점은 익숙하다. 익숙한 만큼 과격하다고 볼 수 없다. 황병승의 과격함은 분열된 과거와 현재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딸꾹거리며” “딸꾹, 딸꾹거리며” 지켜보고 있는 ‘악마’ 같은 장난기에 숨겨져 있다. 과거와 전통은 이 젊은 시 앞에서 무력하다.
3. 그것은 손이 닿기도 전에 우는 손풍금
사회와 역사와 전통과 집단을 거세시킨 황병승의 시와 이 시의 차이는 크다. 감각과 언어 모두 다르다. 황병승이 감정를 철저하게 조롱한다면, 김종미는 그 반대이다. 이 시인은 감정적이다. 아니 감상적이기까지 하다. ‘익숙한, 너무 밝아 오히려, 질기고 질긴, 오래도록, 은밀한, 어지러운’ 등의 수식어들은 감정의 열도를 표현하는 중요한 거점들이지만 시인이 감상적 목소리를 은폐하지 못했다는 단서를 제공한다.
시력을 잃은 채 봅니다 식욕을 잃은 채 먹습니다 청각을 잃은 채 귀 기울이고 후각마저 잃은 채 냄새를 맡습니다 이상해요 이렇게 익숙한 첫 경험 그리고 이 어둠은 너무 밝아 오히려 익숙하지 않습니다 질기고 질긴 이 핏줄은 고탄력 아무리 구겨도 되살아나 외면하고 있는 당신의 몸 마디마디를 만져봅니다 그것은 손이 닿기도 전에 우는 손풍금 내 마비된 오감의 첫 저음이 열립니다 나도 처음 듣는 소리입니다 오래도록 소금밭을 헤매다 돌아온 바람, 머리를 풀며 구름침상에 몸을 눕힙니다 유리관을 열고 날아오르는 흰나비 떼의 눈부심, 얼핏 당신의 은밀한 곳을 본 듯 죽은 신경들이 예민해집니다 물결은 어지러운 장식음을 달고 내 몸을 빠르게 흘러갑니다 해석되는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느껴질 뿐인 당신의 피, 차마 손이 데일 것 같은 피를 밟고 오늘, 여기 왔습니다
―김종미, 「혼혈아의 조국 방문」 전문(≪서정시학≫ 2005. 겨울)
혼혈아를 시의 제재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이 시는 현실적이다. 현실적이기에 황병승의 시만큼 새롭다. “질기고 질긴 이 핏줄”에 담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문제는 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선다. 우리는 작품을 읽으면서 현대사를 떠올린다. 역사가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던 시대로 회귀한다. 시의 화자에게 과거는 단절된 것이 아니다. 과거는 폭파되지도 않는다. 화자는 근원을 향해 귀환하였다. 그가 찾은 뿌리, 그가 돌아온 모국은 이성과 논리를 넘어선다. 그것은 생의 기원을 찾아 과거를 거슬러 오르는 근본적인 투쟁의 문제이다. 돌아온, 귀국한 화자에게 조국과 부모는 “아무리 구겨도 되살아나”는 신비한 대상이다. “그것은 손이 닿기도 전에 우는 손풍금”이고, 그 소리에 “내 마비된 오감의 첫 저음”이 열린다. 돌아온 화자는 마침내 “유리관을 열고 날아오르는 흰나비 떼의 눈부심”을 목격한다. 시간이 응축된다. 과거와 현재가 한순간에 뒤섞인다. 시간의 “물결은 어지러운 장식음을 달고 내 몸을 빠르게 흘러”간다. 혼혈아의 조국 방문은 “해석되는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다만 느껴질 뿐인 당신의 피”에 대한 시이다. 근원에 대한, 핏줄에 대한 회귀를 노래하는 시가 감정적이라 해서 나쁠 것은 없다. 감정적이기 때문에 좀더 시의 근원을 되묻게 만든다. 읽기만 해도-손이 닿지 않아도-저절로 울리는 감정의 울림 역시 시의 한 가지 큰 힘이 아닐까.
정치와 현실이 시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시는 ‘나’의 언어이고, ‘나’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그런 점에서 황병승과 김종미는 오늘의 시가 얼마나 다양한 양상을 펼쳐 보이는가를 예증하는 대척점에 위치한다. 현재와 과거의 내면을 까발리기 위해 방기된 무의식과 통제를 거부하는 언어의 채찍, 현실의 무참함을 아름답게 변형시키는 직정적 언어의 세련된 감각 세포, 그리고 이 두 시인들의 차이를 읽는 즐거움.
4. 활짝 벌어진 옆구리의 상처를 두 팔로 휘저으며
내가 느낀 다른 즐거움이 여기 있다. 순간에 집중하는 시인이 있다. 시간을 멈추게 하는 시인의 권능이 있다. 푸른 셔츠를 입은 남자가 하늘에서 떨어진다. 시인은 그를 공중에 멈추게 한다. 그는 지금 공중 정지비행중이다. 잠자리처럼 하늘거린다.
한참 떨어지다
공중에 걸려 있다
이 나뭇가지는 여리고 부드럽다
그녀는 곧 부러질 것이다
둘이서, 또는 따로
추락의 투명하고 긴 허리를 애무하며
녹색 장미꽃잎같이
활짝 벌어진 옆구리의 상처를
풀려난 두 팔로 휘저으며
아래로
아래로
―진은영, 「푸른 셔츠의 남자」 전문(≪세계의문학≫ 2005. 겨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투신자살한 남자가 텍스트의 위에서 아래로 검은 선을 그으며 휙 떨어진다. “한참 떨어지다/공중에 걸”렸다. 시인은 2연에서 ‘이 나뭇가지의 여리고 부드러움’을 끌어들인다. 사내를 공중에 매단 나뭇가지. 나뭇가지는 곧 부러질 듯하다. 푸른 셔츠의 남자를 알고 있는 ‘그녀’ 역시 “곧 부러질 것”이다. 3연에서 나뭇가지는 부러진다. 그녀 역시 부러진다. 두 남녀는 같이 추락한다. “추락의 투명하고 긴 허리를 애무하며” 그들은 지금 한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한없이 투명해지려는 듯 오래 떨어져내린다. 공중에 빨려들면서 그들은 점점 지워진다. 죽음을 향해 날아가는 그들의 “활짝 벌어진 옆구리의 상처”가 눈에 들어온다. 시인은 그들을 건져 올리지 않는다. “녹색 장미꽃잎” 같은 상처를 “풀려난 두 팔로” 서로 휘젓는 그들. 떨어지면서, 허공에 기록되면서, 마치 날아오르려는 듯이 날갯짓을 하는 남녀가 있다. 그녀는 푸른 셔츠의 투신자살을 땅에 서서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남자를 구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지상에서 영원으로 길 가는 그의 짧은 여정에 동행하면서 시인은 “아래로 아래로” 빨려들 수밖에 없는 생의 비극을 정지시킨다. 영원히 멈추게 할 수 없고, 완전히 되돌릴 수도 없다. 시인은 푸른 셔츠를 입은 그 남자의 생이 새겨놓은 허공의 긴 비행운을 우리에게 읽게 만들었다.
5. 찡그린 표정은 내 모든 주름에 스며 있어요. 인상적인 것, 빛, 고통,
작아지기 시작할 때까지만 작아지려고 해요. 나는 작은 사람, 더 작은 사람, 개, 고양이, 한 개의 손가락, 성냥개비,
나는 한 방향을 고집스럽게 바라봤어요. 찡그린 표정은 내 모든 주름에 스며 있어요. 인상적인 것, 빛, 고통,
처음으로 숨을 쉰 이후로 계속해서 숨을 쉬게 됐어요. 점점 빠르게. 더욱 거칠게. 시작은 그런 것이죠. 엄마, 하고 첫 발음으로 불러봤댔자 소용없어요. 아버지라면 오 마이 갓!
작아지기 시작하면 시작된 거죠. 나는 더 작은 사람, 더 작은 개, 더 작은 도마뱀, 작은 목소리, 파동의 간섭, 만져지지 않는 하늘,
그리고 파동의 굴절, 만져지는 빗방울, 빗방울, 더 굵은 빗방울, 나는 돌풍과 함께 지나가는 소나기예요. 세계처럼 우산이 뒤집어진 작은 사람들, 유리창에 잠시 달라붙어서 나는 더 작은 동그라미들,
유리창 안쪽에서는 세 명의 아이들이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규칙과 역할을 정하고 있어요. 한 아이는 손바닥을 쫙 펼치고 사라진 동전에 대해 신비로운 거짓말을 늘어놓고
나는 끝까지 다 듣지 못했
―김행숙, 「더 작은 사람」 전문(≪현대문학≫ 2006. 1.)
김행숙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 시의 ‘더 작은 사람’은 무엇보다 더 작다는 것일까. 알 수가 없다. 알려고 하는 순간 시인에게 함몰된다. 시인이 제작한 미로는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작아지기 시작할 때까지만 작아지려고 해요”는 무슨 말인가. “나는 작은 사람”인데 “더 작은 사람”이기도 하다는 말 역시 논리를 거부한다. 시를 만드는 언어 자체가, 비유의 메커니즘 자체가 논리와는 거리가 멀다. “내 마음은 호수요”가 말이 되는 소리인가. 왜 내 마음이 호수인가. 논리로는 말이 안 되는데, 시에서는 말이 된다. 왜 이해되지 않으면 어려운 시이고, 잘 못 쓴 시가 되어야 하는가. 김수영의 「꽃잎․2」와 이상의 「선에 관한 각서」 연작은 어떻게 읽을 것인가. 논리의 세계, 이해의 정도를 무시하는 김행숙의 시는 이 점에서 비의(秘意, 非意)적이다. 아니 논리와 이해의 영역을 포기한 자만이 이 시를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1연의 ‘더 작은 사람, 개, 고양이, 한 개의 손가락, 성냥개비’의 유관성은 무엇일까. ‘나’보다 더 작은 것은 개와 고양이이고, ‘나’처럼 서 있는 ‘나’의 손가락 하나가 있다. 그래서 손가락은 성냥개비를 닮았을까. 왜 2연에서 화자는 “한 방향을 고집스럽게 바라”봐야 하는가. 4연의 도마뱀과 작은 목소리의 관계는?
연과 연,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연관성이 희박한 김행숙의 시는 그러나 즐겁다. 서로 충돌하면서 시인의 언어는 독자를 긴장시키고, 언어의 물질성 자체를 잘근잘근 씹게 만든다. 생각을 멈추게 하고, 논리를 무시하게 만들고, 이미지의 향연으로 초대한다. 아무런 연관이 없는 듯한 이미지의 연쇄와 비약을 경험하면서 독자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 무한히 작아진다. 작아지고 작아져서 마침내 분해된다. 한 방울 물방울이 되어 세상을 날아다닌다. 마침내 “유리창에 잠시 달라붙어서 나는 더 작은 동그라미들”이 된다. ‘나’가 ‘동그라미들’이 된다. 화자 ‘나’는 착륙하는 비행기처럼 유리창을 미끌어지면서 ‘나는 더 작은 동그라미들’이 되기도 한다. 문법을 일탈하여 의미의 충돌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구절 때문에 마지막 연의 아이들 셋이 무슨 이유로 가위 바위 보를 하는가는 문제되지 않는다. 더 작아져서 물방울이 된 ‘나’는 유리창 안의 세계를 엿볼 뿐이다. 시가 의미의 노예인가? 의미를 생산해내야 하고 그것을 갱신시키는 것이 시의 “규칙과 역할”인가?
김행숙의 이 시에서 의미와 논리를 말하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짓일지도 모른다. 나의 말을 전부 회수한다고 하더라도 풀리지 않는 신비가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줄곧 언어의 물질성을 생각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나는 김행숙의 시를 읽으면서 기표와 기의가 분리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실재와 언어 기호 사이의 치환 불가능성을 회의하게 만드는 김행숙의 시가 재미있는 이유는 과연 이것일까.
6. 여름과 여름 사이로 다른 여름이 간다. 가볍고 끔찍하게
젊은 시인들은 요설적인가. 그들은 정녕 ‘외계인’인가.
신해욱의 시는 요즘의 젊은 시인들과 다르다. 시의 길이면에서 우선 두드러진다. 시가 짧은 만큼 말하고자 하는 것도 미시적이다.
# 기차가 있다
기차는 길다.
기차가 자꾸만 길어져서
햇빛이 모자란다.
태평양과 룩셈부르크는 창백하고
나는 지구를 실감한다.
나는 멀다.
# 나는 사람이다
나의 웃음과 함께
시간이 분해되고 있다.
그런데 왜 나는 나로
사람은 사람으로
환원될 수 없는 걸까.
# 나는 기차를 이해한다
기차는 자꾸만 길어진다.
그림자는 더더욱 길고
바지는 바닥에 끌린다.
여름과 여름 사이로
다른 여름이 간다. 가볍고
끔찍하게.
―신해욱, 「여름에서 여름으로」 전문(≪문학과사회≫ 2005. 겨울)
이 시는 극미의 세계를 다룬다. 이곳에서 “나의 웃음과 함께/시간이 분해”되고 있다. 빛에 의해 사물이 뭉개진 여기에서 ‘나’와 타인은 분간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미 사물이 되어버렸기에 시간의 공격에 속수무책이다. 우리는 바스러져갈 뿐이다. 시인은 “나는 나”로, “사람은 사람으로” 환원될 수 있는 가능성을 묻는다. 그렇기 때문에 시의 두 번째 중간 제목처럼 “나는 사람”이라는 전언에 무게가 실린다. 이 표백된 세계에는 ‘나’만이 존재한다. 기차는 길고, 기차는 “자꾸만 길어”지고 있고, “나는 기차를 이해”한다. 여름날, 더위에 늘어진 사물들이 ‘나’를 포위한다. 갇힌 ‘나’는 서서히 분해되고 있고, ‘나’의 그림자는 “더더욱 길”어진다. 부서지는 시간, 뭉개지는 사물, 그것을 목도하는 ‘나’가 존재하는 이 화면은 여름과 여름의 ‘사이’에 정지되어 있다. 그 ‘사이’로 “다른 여름이 간다. 가볍고 끔찍하게” 흘러간다.
신해욱의 추상화된 공간은 젊은 시인들이 발 딛고 있는 일그러지고 부서진 세계와 변별된다. 이 세계는 아주 견고하고 편평하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다. 분해되어 환원되지 않는 세계가 펼쳐진다. 분화되기 이전의, 뒤섞이기 이전의, 태어나기 이전의 근원을 향해 열려 있는 이 분자적인 세계의 메마른 언어들은 또다른 젊은 개성임이 분명하다.
7. 아스팔트 위에서 한순간에 해탈해 버린다
폭주족을 다루는 시들은 많다. 너무나 시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시가 되기 어려운 제재를 해탈과 연결시킨 아래의 시에는 쥐와 고양이가 등장한다. 폭주족의 오토바이가 내뿜는 굉음과 도둑고양이와 덫에 걸린 쥐가 도시의 어둠을 사실적으로 재현한다.
평생 덫을 피해 살아온 눍은 쥐의
충혈된 눈동자처럼 처처에 드리운 어둠에
붉은 가로등이 점등된다
야행성 동물들이 졸음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맹수처럼 눈뜰 무렵 타오르던 노을은
검게 물들어 불빛의 배경이 되어 사라지고
폭주족들이 굶주린 늑대처럼 떼 지어
굉음을 마구 내쏘면서 광활한 대로를 질주하자
갑작스런 불빛에 집 잃은 괭이가
아스팔트 위에서 한순간에 해탈해 버린다
괭이 울음소리는 털가죽을 벗고 막다른
골목길에서 튕겨 나온 빈 깡통처럼 날아다닌다
덫에 걸린 늙은 쥐가 발가락에 피 흘리며
어둠 속에서 빠져나오려고 할 때
새벽 괭이는 먹이를 찾아 담을 뛰어 넘는다
―최동호, 「도시의 폭주족은 새벽을 향해 달린다」 전문(≪신생≫ 2005. 겨울)
늙은 쥐의 충혈된 붉은 눈동자와 ‘붉은 가로등’이 유사성에 의해 동일화를 진행시키는 첫 연의 비유는 비유되는 두 대상 간의 거리가 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의 선명함이 새로운 감각을 환기시킨다. 인적이 끊긴 도시의 뒷골목에 가로등이 켜져 있다. 쥐가 움직인다. 어둠을 파먹는 붉은 가로등과 어둠의 바닥을 훑고 다니는 쥐가 겹쳐진다. 도시가 어둠에 잠기고 있다. 이때 폭주족들이 굶주린 ‘늑대처럼’ 대로를 질주한다. 어둠을 가르는 폭주족과 늑대는 인접성에 의해 표현 형태와는 다르게 환유적으로 읽힌다. 3연 2행까지 이 시는 시간, 공간, 이미지 등의 인접성에 의거하여 속도 있게 전개된다. 그런데 3연 3행에 “집 잃은 괭이”가 나타난다. 3연과 4연으로 행간걸침된 행위 주체 ‘괭이’가 갑자기 “아스팔트 위에서 한순간에 해탈”한다. 행간걸침에 의해 의미가 연결되고 있기는 하지만 3연과 4연의 단절과 비약은 이 시가 지니는 파괴적 힘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해탈’이라는 종교적 단어가 폭주족과 아스팔트와 괭이 사이에서 빛을 발하는 이유 역시 격절에 의한 의미의 비약 때문이다.
나는 시인에게 창조주의 권능이 부여되어 있다고 믿는다. 이 시인은 폭력적이다. 의미의 연결고리를 과감히 잘라버렸다. 집 잃은 괭이가 폭주족들의 굉음 소리에 휘발되듯이 해탈한다. 이것은 죽음의 이미지이면서, 홀연한 사라짐의 이미지이다. 모든 것을 제압해버리는 폭력적 굉음의 근원과 종말을 더 큰 힘으로 시인이 한순간에 압도한다. 그리고 이 힘의 배후에 생멸을 휘감는 거대한 존재의 침묵이 숨겨져 있음을 시인은 가리킨다. 폭주족의 굉음이 사라진 후에 들려오는 “괭이 울음소리”가 “골목길에서 튕겨나온 빈 깡통” 소리 같다. 이 자극적인 대비 앞에서 ‘해탈’이 지니는 벗어남의 의미가 오롯이 감각으로 느껴진다. 이 시는 고요하다. 늑대 같은 폭주족이 도시를 쓸고 다닌다. 해탈과 폭주족과 고양이와 깡통 사이를 시인의 허정(虛靜)한 시선이 관통한다.
8. 잠시 흔들렸다가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오는 물주름
늑대가 아이스크림과 충돌하여 사라짐의 이미지로 바뀌는 순간을 보자. 아이스크림처럼 스르르 녹아 사라지는 것, “동물원을 탈주한 늑대처럼” 맹렬하게 사라지는 것의 차이.
도망을 이해하려면 말야
아이스크림을 봐
표정을 바꾸는 변검술사의 손놀림처럼
재빠르게, 혹은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있지
아이스크림이 녹지
아이스크림은 포효하고
아이스크림은 분노하고
아이스크림은 자살협박을 하고
아이스크림은 녹아내려
아이스크림은 도망을 이해할 수 있지
동물원을 탈주한 늑대처럼
아이스크림은 도주하지
아이스크림은 사라지지
가령, 날렵한 혓바닥은
흔적을 지우면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꼬리 같아
도망을 이해한다면 당신은 늑대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눈을 밝히겠지
늑대들은 새빨간 혓바닥으로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처럼 아이스크림은 녹아내리지
잽싼 손놀림을 가질 수 있다면
나는 완전히 투명에 가까워질 수 있지
잠시 흔들렸다가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오는 물주름
어느 날 위치가 바뀌어 있는 책상 위의 물건들처럼
혹은 아이스크림처럼, 또 늑대처럼 나는 사라지지
―이현승, 「아이스크림과 늑대」 전문(≪현대시문학≫ 2005. 겨울)
나는 도주하고, 포효하고, 분노하고, 자살 협박하는 아이스크림을 본 적이 없다. 이현승의 아이스크림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이다. 그것은 감정에 반응하고 스스로의 행동을 이해하는 존재이다. “표정을 바꾸는 변검술사의 손놀림처럼/재빠르게, 혹은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움직이는 아이스크림과 대립하는 늑대는 아이스크림에게 자신의 구체적 특성을 인도했다. 포효하고, 분노하고, 자살 협박하는 아이스크림의 형상은 실상 늑대의 행동 특성에서 빌어온 것이다. 아이스크림은 2연에서 늑대가 된다. “동물원을 탈주한 늑대처럼” 아이스크림은 도주한다. 시인은 아이스크림과 늑대를 뒤섞어 이질적인 두 대상을 하나로 만든다. 아이스크림과 늑대라는 어울릴 수 없는 두 대상을 하나로 만드는 이상한 마법을 시인은 자재롭게 구사한다. 잠시 흔들렸다가 원래의 모양을 획득하는 물주름처럼, “어느 날 위치가 바뀌어 있는 책상 위의 물건들처럼”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고 사라지고 투명해지는 사물들의 이상한 질서를 시인은 낯선 두 사물 아이스크림과 늑대를 병치시켜 표현한다. 비유란 멀리 있지 않다. ‘내 마음은 호수요’도 비유지만 ‘아이스크림과 늑대’는 더 새로운 비유이다. 어울리지 않는 두 명사의 인접만으로도 비유는 획득된다.
사라짐, 돌아옴, 탈주, 회귀에 대한 엉뚱한 방정식 같은 이 시를 읽으면서 낯선 것, 이질적인 것이 시의 새로움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젊기에 획득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시는, 시인은 얼마나 젊어져야 하는가. 다시 생각하건대, 새로운 시는 방법적 파괴로도 획득되지만 “잠시 흔들렸다가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오는 물주름”처럼 삶의 구체성에 뿌리를 내린 미시적이고 날카로운 시선과 감각에 의해 달성되는 경우가 더 많은 듯하다. 늑대처럼 맹렬하게 사라지는 것이나, 아이스크림처럼 스르르 녹아 스며들어 사라지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너무나 달라서 오히려 너무나 비슷한 속성을 지니는 이질적인 아이스크림과 늑대의 당돌한 병치 앞에서 동사 ‘사라지다’의 물질성을 느낀다면 과장일까. ‘나’는 어느 날 “아이스크림처럼, 또 늑대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
9. 은백의 명주를 풀어 밟으실 길 위를 맑게 하고
낮이라면
열두 무지개를 그대의 머리 위에 화한으로 걸고
밤이라면
은하의 천만 성운을 끌어다 등불로 밝히고저
소심 보세 일만 그루의 난초밭에 꽃을 피우고
천년 침향 일만 향로에 불을 붙여 향을 피우고저
은백의 명주를 풀어 밟으실 길 위를 맑게 하고
취옥의 생황을 울려 허공의 바람도 재우고저
오시기 전에 기별을 주소서
바람결에라도 그대 음성을 실어 미리 알리시고
구름결에라도 그대 향기를 담아 미리 보이소서
오늘도 날은 하염없이 저무는데
그대 지금 어디쯤 오시나요.
―임보, 「그대 지금 어디쯤 오시는가」(≪현대시학≫ 2006. 1.)
요즘 시들과 너무나 달라서 당황스러운 작품이다. 21세기의 분열된 ‘나’가 시를 점령하고 있는 이 시대에 임을 애절하게 기다리는 여성 화자의 등장은 낯설다. 예순을 훌쩍 넘긴 시인이 임이 돌아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수동적 여인의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충격적이기도 하다. 다분히 김소월의 정조에 닿아 있는 전통적 발화법이 황병승과 김행숙과 신해욱과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이 나는 그저 신기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화법과 정서는 퇴행적인 것인가? 나는 이 시를 읽고서 낡고 초라한 개념인 ‘진정성’을 떠올린다. 이 시에 호출된 오래된 한자어들과 ‘~소서’ 서법이 익숙하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오히려 낯설어 새롭게 느껴진다. 임을 향한 애절한 그리움에 동반된 시어들. 열두 무지개, 등불, 일만 그루 난초, 천년 침향, 은백의 명주, 취옥의 생황. 감정과 정조에 의지하는 이 시의 익숙한 작법은 시인의 진지한 태도에 빚지는 것이 많다. 완벽하게 가면을 바꿔 쓰기에 이 시의 화자가 내뿜고 있는 기다림과 그리움의 강렬도가 획득된다. 화자 ‘나’는 그대가 지금 어디쯤 오시는지 알 필요가 없다. 그대가 돌아오는 길에 이미 ‘나’는 나가 서 있다. 없는 그대, 돌아오지 못할 그대를 ‘나’는 환영처럼 만들어내어 맞이한다. 불가능을 처절하게 부정하는 주체 ‘나’의 간절한 바람이 죽은 임을 소생시키고, 없는 임을 새로 태어나게 한다. 이것이 김소월이 아름다운 이유이고, 김소월의 전통적 화법이 아직도 주체의 강력한 원(願)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법으로 애용되고, 김소월의 시가 여전히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전무후무한 시로 애송되는 이유일 것이다.
이 작품의 계보는 김소월이나 황진이나 출처가 밝혀지지 않는 민요 등등 우리가 지니고 있는 수많은 유산들에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전통은 낡은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다. 이 시의 내용은 새롭지 않지만, 이 시를 쓰게 만든 시인의 그리움은 많은 것들 중의 적은 것, 큰 것 중의 작은 것이어서 오히려 새롭다. 없었던 것을 만드는 것만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있었으나 지워졌고, 있어야 하나 아무도 찾지 않는 것을 다시 시의 장으로 가져오는 일 역시 새로움이고, 새롭기에 그것은 진정한 시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0. 이 도시에 당신의 얼굴이 돋아나요
낯선 것과 익숙한 것의 화학 결합을 본다. 시와 노래의 결합을 본다. 남자와 여자가 거리에 서 있다. 시인은 도시의 거리를 훑는다. 시인의 말 사이로 노래가 흘러든다. 바람이 지나간다. 시인은 도시의 남자와 여자의 입을 빌어 말을 하려고 하지만 시인은 멈칫거린다. 입술을 우물거리지만 입 밖으로 말할 수 없다. “아직 아직은 아니에요”라며 시인은 노래한다. ‘나’는 아직 노래 부를 수 없다. 노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내 기타는 구월이 지나야 잠을 깨”고, “내 기타는 피아노와 함께 술을 마”신다. 시인은 아직 취할 수 없다. 취해서는 안 된다. 이 시 사이를 흐르는 노래는 시인의 노래가 아니다. “내가 취한 게 아니라 내 피아노가 취”했다. ‘나’는 노래하지 않는데 ‘나’의 몸은 노래를 받아들인다.
한 여성이 거리에 서 있다 신호등을 건너기 위해서 그녀가 입은 붉은 재킷, 숲 한 채가 그녀의 등에 앉아 있다 미진하다 아직 저 욕망이 그녀를 풀어놓을 때까지 한 두릅의 숲이 더 있어야 한다 울고 가는 기러기들의 나날 아직 도시로 항구는 도착하지 않았다 밥을 먹는 식구들에게는 더 이상 입이 없다 아 아 망해버릴까, 고 신호등은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 아직은 아니에요
이 도식에 당신의 얼굴이 돋아나요
저 창문에는 커다란 플라스틱 팔찌를 낀 아가들이 커튼처럼 걸려 있어요
사랑해요, 아직은 아니에요
한 남성이 거리에 서 있다 서울로 온 지 삼십 년이 된 남성에게 이제 더 이상 갈 곳은 없다 비행기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오면 허공이었고 아론시럽을 아침마다 실어 날았던 단풍나무는 어디에도 없이 허공을 빠져나오니 또 공항이 있었다 아 아 네 귀를 열어 엉뚱한 만화들을 집어넣을까 헤엄치는 집이 있는 해안을 지나 얼음이 녹아가는 북극에서 같이 녹아버릴까,고 언뜻 전광판을 바라본다
아직 아직은 아니에요
헐떡거리며 지나가는 버스를 보아요
난국의 테러리스트들이 전범의 손을 머리에 달고 저 버스를 폭파해버릴 거예요
인권운동가들을 불 속으로 집어던져버릴 거예요
신문이 좌판에 꽂혀 있다 몸에 칼을 꽂은 신문들, 경계경비를 서던 붉은 남자들이 가두어져 있는 곳, 중환자실로 피를 보내는 곳, 숲으로 숲으로 지폐를 보내는 곳, 난민수용소로 어여쁜 배우를 보내는 곳, 돌멩이를 던져 신문의 심장을 깨고 싶다,고 동물원에서 원숭이가 모스부호로 타전을 보내는 곳
아직 아직은 아니에요
낯선 곳을 지나온 바람들이 더 낯선 곳으로 가요
이 지구에 있는 낯선 곳, 그곳은 당신의 심장이지요
사랑해요, 심장을 닫아두세요
영구차가 지나가면서 찌르레기 떼들을 성자들이 사는 탑으로 부려놓는다 도시의 차들이 내뱉는 숨보다 더 많은 검은 탄산가룰 같은 새 떼들 도시에서 사는 늑대들이 폐차장에서 놀고 있다 헌 바퀴에서 컹충, 나무들이 솟아나오고 있다 삶긴 이파리들, 이빨을 단 이파리들, 이빨을 갈며 다 잡아먹어버릴 거야! 그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뒷모습을 보이며 우는 이파리들
내 기타는 너를 먹고 유순해져요
내 기타는 구월이 지나야 잠을 깨지요*
내 기타는 피아노와 함께 술을 마셔요
내가 취한 게 아니라 내 피아노가 취한 거**,라구요
* Green day, .
** Tom Waits, .
―허수경, 「풍장의 얼굴」 전문(≪실천문학≫ 2005. 겨울)
바람에 장례 지낸다. 바람이 이 도시를 갉아낸다. 풍화(風化)되고…… 침식(浸蝕)되고……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사라지려는 순간을 정지시킨 시인은 한 여성을 신호등 앞에 세워놓는다. 이어 시인은 한 남성을 거리에 멈춰 세운다. 여자와 남자의 삶을 통해 자신을 말하고 싶은 시인은 바람의 연대기를 기록하려는 듯이 그들과 우리의 삶에 환상을 부여한다. 그녀의 등에 앉은 숲 한 채와 헤엄치는 집이 있는 해안은 이렇게 해서 도시의 우리에게 쥐어진다. 도시의 일상적인 풍경을 낯설게 하는 시인의 표현은 환상적이지만 그 환상의 공통점은 이룰 수 없는 것들, 빼앗긴 것들, 파괴된 것들, 잡아먹힌 것들의 슬픈 자화상이라는 것. 그것을 시인은 한 남자와 여자의 입을 빌어 말하려고 하지만 결국 말로 옮기지는 못한다. 1, 3, 5연의 말미에 ‘~까,고’로 이어지는 부분에서 여자에게 신호등이 말을 걸고, 남자는 언뜻 전광판을 바라보고, 원숭이는 모스부호로 타전을 보낸다. “아직 아직은 아니”기 때문에 시인은 사랑한다고, 사랑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들은 풍장되고 있다. “이 도시에 당신의 얼굴이 돋아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바람에 부식되는 사랑을, 사랑하는 당신을 어쩔 수 없어서 “어깨를 들썩이며 뒷모습을 보이며 우는 이파리”가 ‘나’이다. ‘나’는 노래 부른다. 그런데 그 노래는 ‘나’의 노래가 아니다. “내 기타는 너를 먹고 유순”해졌지만 ‘나’는 아직 노래 부를 수가 없다. 어쩌면 이 노래는 영원히 불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람의 장례만이 기록될 것이다. ‘나’는 “낯선 곳을 지나온 바람들이 더 낯선 곳으로 가”는 광경을 다만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시인은 그렇게 풍장되는 얼굴들을 바라볼 뿐이다.
텍스트와 텍스트가 만나고 있는 이 시는 결국 노래에 대한 시이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시이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시이다. 시는 결국 ‘나’와 ‘너’와 ‘우리’를 한 자리에 불러 모은다. 이것이 내가 읽은 열 편의 시를 구분할 수 있는 한 가지 기준이다. 새로움과 낡음, 젊음과 늙음은 ‘우리’의 삶 앞에서 대립되지 않는다.
장석원․
2002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저서 아나키스트 김수영 시의 수사학 등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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