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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계간평(연극)/이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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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연극
―<왕세자 실종사건>(한아름 작, 서재형 연출)
―<육분의 륙(戮)>(유지태 원안, 이해제 각본․연출)
―<강풀의 순정만화>(강풀 원작, 이선희 각색, 정세혁 연출)
―<이(爾)>(김태웅 작․연출)
발견 없음의 육하원칙(六何原則)
―2005년 하반기 연극 경향에 대한 소고
이경숙
1. 발견(發見), 발각(發覺) 그리고 육하원칙(六何原則)
발견이 없다. ‘발견 없음(no discovery)’이라는 단정적 수사에서는 상황의 구체성을 찾아내기가 힘들다. 그러나 2005년의 연극계에서 공통적으로 이러한 ‘발견 없음’이 발각(detection)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한다면, 그것이 상황의 절멸성(絶滅性)을 표지하는 통찰의 단언(斷言/端言)임을 예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육하원칙(六何原則)’이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의 여섯 단어를 하위 부속으로 삼은 용어로서, 지난 해 한국 연극계를 진단하는 모든 평론가가 주지하고 있는 개념어를 말한다. 진단하는 사람도 진단받는 사람도 알고 있는 이 여섯 개의 단어는, 여기서 2005년 연극 무대 위에 균형적으로 실현되지 못한 사항들의 분류 주제어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발견 없음의 육하원칙(六何原則)’이란 이 글에서 취하고 있는 일종의 서술 도식을 지칭한다. ‘무엇을’이 강화되면 구태의연해지고, ‘어떻게’가 확장될 때면 구멍 난 텍스트와 조우하게 만드는 과잉과 결핍의 연극적 변주. 그 차거나 모자라는 2005년의 연극계를 육하원칙의 틀에 넣는 것. 이것이 이 글 「발견 없음의 육하원칙」을 지탱해주는 서술의 원칙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관용 문구로 표현되곤 하는 2005년 연극계의 ‘풍요’와 ‘빈곤’을 촘촘히 찾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 생산과 결실의 연극적 정비례는 무엇을 담보로 할 때 얻어지는지 이 도식의 경직성을 뛰어넘는 유연함을 기대하며 조망하도록 한다.
2. 비어있는 하이쿠(俳句)-어떻게?:<왕세자 실종사건>
하이쿠(俳句)는 5․7․5, 17음절 안에 시인의 모든 정서를 담아야 한다는 제약 속에서 진정한 시적 자유를 찾아 나선다. 그것은 정형성을 유지한 채 다채로운 삶의 깊이를 보여줘야 한다는 측면에서 연극의 무대 매커니즘과 닮아 있다. 시간적 한계와 공간의 정형을 뛰어넘어 한정된 물적 재화까지 극복해야 한다는 연극 형상화의 고됨에 이르러서는, 5․7․5의 각박함을 체화한 채 문학적 성취도를 추구하는 하이쿠 시인들의 어려움마저 빛이 바래는 느낌이다. 거기다가 ‘모습을 먼저 보이고 마음은 뒤로 감추라’는 하이쿠 시인 바쇼(松尾芭蕉)의 작법 조언까지 은유적으로 연극 속에 수용하고자 한다면, 이미지를 전시화(展示化)하는 동시에 그 속에 담긴 의미까지도 표출하고자 하는 무대 작업은 언뜻 매우 난해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부실한 극적 서사를 얽어매어 관습화된 방식으로 진행되는 연극을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인 동시에 일일이 두드려보고 건너야 할 돌다리가 만연한 급류 위에서 연극적 작업을 수행하겠다는 선언이라고 할 것이다.
‘자유젊은연극’ 시리즈 <왕세자 실종사건>(한아름 작, 서재형 연출,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2005.10.11~23)은 이런 면에서 연극적 하이쿠를 추구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이쿠를 추구한다는 것이 문학의 시적 서정성을 지향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보다 정확히 말해, 이것은 모습을 먼저 보이고 마음을 뒤로 감추어야 부언 과잉의 시적 너덜함(tatters)을 벗어날 수 있다는 바쇼의 말을 극적(劇的)으로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며, ‘설명의 연극’을 ‘스타일의 연극’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내부적 추진(推進)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즉, 2005년 하반기의 <왕세자 실종사건>은 ‘무엇’을 ‘서술’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어떻게’를 보여주려고 노력한 ‘HOW 지향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바쇼의 저 말 속에는 ‘마음’에 대한 찬의(讚意)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먼저 보이라고 한 ‘모습’도 결국에는 숨겨진 ‘마음’을 위한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참된 하이쿠는 풍경의 전주곡(前奏曲)이 흐르는 저만치 뒤에 온전히 숨쉬는 삶의 정서를 살려낼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을 잃어버린 하이쿠는 바쇼의 대표적 작품인 <古池(ふるいけ)や 蛙(かわず)飛(と)びこむ 水(みず)の音(おと)>에서 개구리의 존재를 지워버린 오래된 연못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소리가 잠자는 가운데 연못이 홀로 제 음을 내는 경이의 찰나가 사라진 단순한 ‘그림’일 뿐, 시가 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연극 <왕세자 실종사건>의 진정한 ‘실종’은 하이쿠의 ‘마음’, 즉 극적 제언을 잃어버린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이미지(풍경)의 현현은 ‘신개념’이라는 날개를 달고 비상하지만 관객에게 닿지 않는다는 한계를 지닌 채 낙멸(落滅)한다. 서재형의 연출은 분명 젊지만 그것이 관객의 시각적 만족만이 아닌 통찰의 영역에까지 온전히 전해질지는 의문이다. 극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설명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무대가 닫힌 후, 연극에 대한 ‘부가 설명서’를 읽지 않는다면 관객은 그들의 전언을 해석해 내기 힘들다. 설명하고자 하는 전의(戰意)를 애초에 사그렸던 작품을 연극을 만든 사람들의 설명을 통해 이해해야 하는 아이러니는 17음절을 읽었는데 결국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해독해낼 수 없는 하이쿠의 허망함과 닮았다.
그들의 후발(後發) 설명서를 십분 수용해보겠다는 타협과 양보 아래 다시 이야기를 시도해 본다고 해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왕세자 실종사건>의 서사를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이것은 일종의 웹서핑(web-surfing)형 서사 구조를 띄고 있는 ‘왕실 픽션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가상 궁궐에서는 왕세자가 사라지고 그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숨은 이야기가 하나하나 드러난다. 중전(박선주 분)의 몸종 자숙(홍성경 분)과 내시 구동(이혁열 분)의 사랑, 왕(장우진 분)의 성은을 입어 임신한 자숙, 자숙의 임신을 구동과의 관계 결과라고 믿고 싶은 중전, 이에 구동의 화자(火者) 여부를 검증해야 한다는 -왕세자의 실종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에 집착하는 궁중 사람들. 이 서사는 마치 자신이 정작 검색하고자 했던 인터넷 정보와는 관계없는 내용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목적 실종의 판국과도 같다. 왕세자를 찾는 ‘본질적인 문제’에 홀로 집중하고 있는 보모상궁의 절규는 그런 면에서 유일하게 ‘왕세자 실종사건’답다.
제시된 매뉴얼에 따르면 위의 설명은 작가가 서사 밖의 관극 상황에서 노리는 의도적 상위 컨텍스트(context)이다. 그들의 그럴듯한 매뉴얼은 실체를 뛰어넘고자 한다. 문제는 이러한 탁월한 해몽-혹은 탁월하고자 하는 노력-이 관객에게 작품의 본질로 설득될 수 있을지에 있다. 해석의 난해도와 관객의 이해도 사이의 상관관계가 확보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관객’이 연극을 성립시키는 주요 3요소 중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자못 시사적이다. <왕세자 실종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관객이 시대를 앞질러온 영화의 신천지를 알아보지 못했거나 영화가 대중의 일반 감성에 너무 앞서 완성됐다고 여기며, 당대의 대중성과 미래에서 온 작품성 사이의 간극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운명론’으로 2005년 비쥬얼텔링 영화들(<형사>, <주먹이 운다>, <달콤한 인생>, <친절한 금자씨> 등)을 평하는 영화계의 목소리에 귀기우려 볼 필요가 있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연극 역시 관객의 박수 없이는 그 존재 이유를 확보하기 어려운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연극의 강점을 부정하기만 할 필요는 없다. 풍경의 확실한 전시(展示)는 (그것을 ‘많이 보여주려는 욕망’이라고 경계하는 시각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아마츄어리즘보다 낮게 평가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왕세자 실종사건>의 무대는 다중적으로 이동하는 희곡 공간의 급작스런 편차를 자연스럽게 연계해준다. 특기할 만한 설치가 의도적으로 배제된 정방형의 무대는 배우의 동선과 연출의 설정에 따라 살구나무 밑에서 중전의 방까지 모두 아울러 낼 수 있다. 또한 전체적으로 강한 스포트를 쓰지 않는 어두운 조명은 벽면을 그림자로 채우거나 배우 감정에 적합한 색 조명을 사용함으로 무대를 다면화하는 효과를 창출한다. 특히 노출되는 조명의 명도를 조절함과 동시에 그 면적을 전체적으로 넓게 사용하여 연극에서의 조명이 예각화되지 않으면서도 전체의 분위기를 압도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흔히 도외시될 수 있는 무대 좌측과 우측의 벽면을 ‘작품의 것’으로 거두어가는 조명 연출의 세심함은 높게 살만하다.
소리의 활용 역시 독보적이다. 청각적 효과를 단순한 극의 부속품으로 활용하는 연극들에 비해 <왕세자 실종사건>의 소리는 제2의 주체로 실용화되고 있다. 연기를 ‘위해’ 종속되는 소리가 아니라 소리에서 시작해 소리 자체로 존재감을 주는 장면이 많은 점은 부인되기 어려운 강점으로 보인다. 배우들이 내는 동물 소리는 그 자체로 배우의 캐릭터를 표지할 뿐만 아니라 극 전반부의 분위기를 생성해 내는데 크게 이바지한다고 하겠다. 이중적 의미로 활용되는 살구나 항아리, 술잔 등의 소품들 역시 각각 상징성이 부과되면서 작가와 연출가가 나누었을 진지한 고민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장치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출적 새로움은 정형화될 때 그 생명력을 잃게 마련이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무대 미학의 색감을 <왕세자 실종사건>의 전작인 <죽도록 달린다>에서부터 확인시켜준 이들의 감각이 자신들에 의해 관습화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이쿠가 하이쿠일 수 있는 것은 5․7․5, 17음절의 정형성에도 있지만 그 안에 무한한 자유를 찾는 끊임없는 자기 극복의 의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습을 보여줄 때는 늘 새로우며, 그 속에 담겨있는 문학적 마음은 숨기되 제대로 숨쉴 수 있게 하는, 그들만의 ‘어떻게’ 연극이 되길 기대한다. 마음의 본질이 소거되어 있는 스타일의 연극은 남은 다섯 개의 원칙들을 소급할 수 없는 비어 있는 개체일 따름이다. 바쇼가 하이쿠의 본령이 ‘마음’에 있는 것을 체화했던 것처럼, 서재형․한아름의 작품 세계 역시 비어 있는 연극의 본령을 극화할 수 있는 기회를 또 한 번 마련할 수 있길 기대한다.
3. 그래도 발견이고 싶다-무엇을?:<육분의 륙(戮)>
이 연극은 ‘죽이는’ 연극이다. 총 획수 15의 한자 ‘륙(戮)’이 ‘죽이다, 육시하다, 형, 형벌’을 의미하는 것처럼, 연극 <육분의 륙(戮)>(유지태 원안, 이해제 각본․연출, 사다리아트센터 네모극장, 2005.12.01~2006.01.01)은 ‘죽이는 게임’을 통해 육분의 육(六)의 확률로 삶의 비릿한 욕망을 들춰내고자 하는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 2005년의 한국 영화계가 ‘비쥬얼텔링’의 홍수를 경험하고 있을 때, 한국 연극계 역시 ‘무엇을(What)’을 말하기 보다는 ‘어떻게(How)’ 만드는가에 주력했던 한해로 평가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현상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을 놓치지 않은 작가 이해제의 2005년 막바지의 열의는 주목할 만했다.
무대는 가로 대 세로가 3:1의 비율로 이루어진 직사각형의 닫힌 공간이다. 사용되는 음악은 한정적이며 절제되어 있다. 공간의 수직적 활용을 거세한 채 수평적 동선만으로 채워지는 이 평면의 무대는 그러므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재벌 3세이자 경제연구소 연구원 장민부(장현성 분)의 펜트하우스는 기호적 생략과 상징의 여백이 없는 흔한 무대 위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무대 미학의 발견이라고 평가되기는 어렵다. 검푸른 벽면에 10여 개의 핀 조명이 나란한 수직으로 꽂혀 드리워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화려한 그의 펜트하우스를 오히려 감옥 창살에 갇힌 상자처럼 보이게 한다는 점을 느낄 즈음에 연극은 시작된다.
비어 있던 정사각 탁자 주변의 의자들은 등장하는 인물들에 의해 하나씩 채워진다. 무대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이 ‘게임의 공간’은 각 인물의 욕망을 끌어들이는 구심점이다. 이곳에 ‘입장’한 욕망은 파멸한다. 파멸을 향한 입구는 있되 탈출할 출구가 없다는 측면에서 이 공간은 사각(四角/死角)의 무대를 그대로 은유하고 있다. 서로를 증오하는 6명의 등장인물은 이 공간에 모여 4가지 종류의 게임을 벌인다. 포커, 마이티, 부루마블, 러시안 룰렛. 대한민국 상위 3%에 속한 이들이 벌이는 게임의 속성은 놀이보다는 도박에 가깝고 도박보다는 살육과 닮았다. 러시안 룰렛은 이러한 살육적 게임의 정점으로서 6개의 탄창에 하나의 총알을 넣고 육분의 일의 확률로 스스로를 쏘아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총성 전후에 그들이 느끼는 환희와 긴장은 삶의 지리멸렬함을 극복하는 위험한 방법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 게임을 통해 서로를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게 된다.
이 모든 게임의 질서 위에 정민부가 서있다. 자신을 억압하는 꼭짓점이자 자신을 위협하는 혈육들의 발원체인 아버지의 49제에 그는 친인척 4명과 자신의 애인(김현수 분)을 초대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가르쳐준 삶의 방식 그대로를 이용해 죽음의 계획을 실행한다. 곤충에 기생하며 숙주의 뇌를 조종하고 결국 숙주 스스로가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게 만드는 ‘네마토모프’ 이야기는 작품에서 흘려놓은 소재인 동시에 주인공 정민부의 행동을 예상할 수 있게 해주는 복선 장치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천적 문어가 있어야 생선들이 상품이 된다.”고 말해 왔다. 이제 그는 게임이라는 방식을 통해 ‘생선이었던 자신’의 ‘문어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게임의 끝에 다다를수록 흉물스런 문어를 상대해 오느라 어느새 그들보다 더 잔인한 괴물 생선이 되어있는 정민부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모든 살육 뒤 무대 위에 남은 것은 ‘파멸의 탁자’ 뒤편에 놓여 있던 피라니아(piranha) 수족관과 그 위에 놓인 작은 컵 속 핏빛 금붕어뿐이다. 원주민의 말로 ‘이빨이 있는 물고기’를 뜻하는 식인 물고기 피라니아가 깨질듯 약해 보이는 컵 속의 금붕어의 추락을 기다리고 있다. 극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이 장면은 이제 ‘문어와 생선의 시대’보다 더 위태로운 미래가 도래할 것을 예고하는 듯 보인다. 모든 문어를 죽임으로써 그는 이제 더 이상 문어의 질서에 시달려야 하는 약한 생선이 아니다. 그러나 정민부를 기다리고 있는 다음 세계는 문어보다 더 잔혹한 피라니아의 천국일 뿐이다. 관객들의 긴장 속에 광포하게 터져 나오던 리볼버의 총성은 피라니아 떼를 강렬한 움직임의 향연으로 인도했었다. 그 경기(驚起) 같은 움직임이 단순한 놀람이 아닌 더 잔혹한 게임에 대한 환영과 흥분으로 보였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이 연극이 지니고 있는 ‘무엇’의 매력이 발견된다. 삶의 질서에 대한 낭만적 위안도, 경악스러운 이 세계의 광기에 대한 나약한 자기 교화(敎化)도 아닌, 삶은 국면마다 위태롭고 살수록 잔혹하다고 말하는 이해제의 희곡은 이 연극의 미덕이자 발견이라고 할 것이다. 잔인하고 씁쓸한 이 세상을 더 잔인하고 씁쓸한 방식으로 살아내야 하는 남겨진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삶의 지독함을 배운다. 지독하게 ‘죽이는’ 이 연극은 우리가 딛고 서있는 이 삶의 지독함의 무게를 ‘죽이게’ 살려내고 있다.
4. 아버지와 아들, 전환 매체의 상상력-왜?:
<강풀의 순정만화>, <이(爾)>
‘전환(adaption)’이라는 용어는 흔히 ‘각색’이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각색’이라는 말이 관습화됨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단순한 용도 변경’의 일환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이는 문학과 연극, 영화, 텔레비전극, 만화 콘텐츠의 현장에서 ‘각색’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생산물들이 정전화된 원전의 함량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평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음에 기인한다. 이에 볼프강 가스트(Wolfgang Gast)가 주장한 ‘전환(adaption)’이라는 개념이 주목된다. 이것은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이 말하는 “‘잘된 전환’이란 원전의 실체를 ‘언어’와 ‘정신적 측면’ 모두에서 재생산해냈을 때에 비로소 그 이름을 얻을 수 있다.”는 지적과도 상통한다. 가스트(Gast)는 크로이처(Kreuzer)의 ‘전환(adaption)’ 개념을 분석하는 자리에서 그것을 단순한 ‘소재 얻기’에서부터 ‘해석적 변형’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위계질서를 지닌 채 점차 상승하는 것으로 유형화한다.
그의 유형학에 따르면 연극 <강풀의 순정만화>와 <이(爾)>는 ‘언어’와 ‘정신적 측면’에서 각각 반쪽의 발견을 얻어낸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 <강풀의 순정만화>는 매우 문학적인 성격의 만화가 실로 연극적이라 할 재치로 재무장한 사례이며, 영화 <왕의 남자>는 연극 <이(爾)>가 가진 문학적 이념을 대중적으로 전환한 예시라고 할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그들의 연계가 그 고리를 부정하지 않고도 독립된 개체로 설 수 있을지는 전환 매체에 녹아든 주체적 상상력의 여부에 달려 있다.
4-1. 아버지를 놓친 아들, 연극 <강풀의 순정만화>
강풀(강도영)의 다음(Daum) 미디어 연재만화 <순정만화>를 재구성한 연극 <강풀의 순정만화>(강풀 원작, 이선희 각색, 정세혁 연출, 신연아트홀, 2005.10.14~12.31)는 ‘순정코믹멜로드라마’를 지향하고 있다. ‘순정’인데다가 ‘코믹’이고 게다가 ‘멜로’이고도 싶은 이들의 욕망은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기발하고’ 또한 ‘아날로그적’이고도 싶은 욕심까지 포함한다. 이 연극은 원작과의 상업적 고리를 최대한 노출시키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기획됐다. 1일 하루 최고 2백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2004년도 ‘독자만화대상’ 온라인 투표에서 대상을 수상, 인터넷 순위 조사 사이트 랭키닷컴에서 2년 내내 만화부문 1위를 차지한 히트만화와의 친연성을, 극의 대중적 성공을 목표로 하는 그들이 간과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이에 연출자와 각색자, 배우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만화를 어떻게 ‘연극적 언어’로 재생산할 것인가로 모아진 것으로 보인다. 상대적으로 ‘정신적 측면’의 재구성에 대한 열망은 주요하지 않아졌다.
그러나 이것을 ‘잘못’이라고 평가할 필요는 없다. ‘전환’의 논점은 결코 이데올로기적 자기 선언이나 정치적 해석, 각색자의 주석, 휘황찬란한 미학적 변형을 그 짐으로 지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신적 측면을 주체적으로 변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탓하기보다는 이 연극이 매체 변이의 ‘어떤’ 화법을 이용해 ‘만화’를 ‘연극’으로 형상화했는가를 말하는 것과, 그것의 극적 효과를 가늠해 보는 것이 더욱 생산적일 것이다.
연극의 무대는 만화와 닮았다. 검은 크레파스로 도화지에 집을 그리고 색칠을 한다. 투박하고 정감 있는 그 선을 남겨둔 채 그대로 오려내고, 만들어진 평면의 조형물을 무대 바닥과 직각이 되게 세운다. 못을 박은 후 분홍색 커튼을 달고 있는 아기자기한 창문을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집은 무대의 왼편에 세워진다. 그 옆으로는 작은 벤치가 놓여있고 키 작은 나무가 그 뒤를 지키고 서있다. 아파트를 상징하는 그림 구조물들을 무대 오른편에 설치해 놓고 무대 중앙에는 문이 없는 엘리베이터를 채워 넣는다. 엘리베이터 안쪽 면은 차갑고 딱딱한 느낌의 철제 벽면이 아닌 구름이 지나다니는 하늘의 푸르름으로 그려진다. 구석진 자리에서 혼자 놀고 있는 가로등의 불빛이 귀엽다. 뿌옇게 노란 조명은 봄날의 볕같이 눈부시다. 덩달아, 밝고 경쾌한 음악마저도 못내 따듯할 정도다.
순정만화의 배경 같은 무대 위로 만화 속 주인공들과 빼닮은 배우들이 차례차례 등장한다. 30살의 연우(이재호 분)는 바쁜 출근길 엘리베이터 앞에서 18살의 수영(박은희 분)을 만난다. 용띠 띠동갑 연우와 수영은 서로에게 순수한 사랑을 느끼는 관계로 발전한다. 매일 같은 벤치에서 홀로 담배를 피우는 하경(김지현 분)은 10살 연하의 강숙(이신성 분)에게 끊임없는 애정 공세를 받는다. 이유를 모른 채 헤어진 옛 애인을 잊지 못하는 그녀에게 숙의 치기는 버겁되 감동적이다.
서사의 맥락은 ‘멜로’적이지만 그 공간을 채워나가는 코드는 ‘코믹’에 가깝다. 핸드폰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연우가 느릿느릿 써가는 문자를 시각화해서 보여주는 방법은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의 장치와 닮았는데 이것이 엄지족 세대인 수영의 빠른 문자 ‘날리기’ 솜씨와 잇달아 보여지면서 웃음을 자아낸다. 연극적으로 처리되기 어렵지만 만화 속에서는 손쉽게 해결되었던 장면들은 새롭게 고안된 제7의 배우(서승원 분)를 활용함으로써 재치 있게 해결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첫눈 위를 걸을 때 나는 ‘뽀드득’ 소리를 그리워하자 숙은 얇게 싸인 눈을 얼어가는 두 손으로 모아가며 그녀만을 위한 ‘뽀드득 길’을 만들어준다. 이 길 위에 제7의 배우가 등장해 누웠을 때, 그리고 이 배우 위를 하경이 걷고, 제7의 배우가 구어로 ‘뽀드득’ 소리를 직접 내었을 때의 관객석의 반응은, 만화가 연극적 상상력과 제대로 만났을 때만 얻을 수 있는 유쾌함 그 자체였다. 또한 만화의 수많은 나레이션을 표현하기 위해 배우들이 활용하는 대사법이나 만화식의 클로즈업이 불가능한 연극이 도용할 수 있는 팔로우 스폿(follow spotlight, 롱핀)의 다층적 활용은 무대 언어에 대한 고민을 반증해 준다. 또한 의식적으로 과장된 표정 연기와 단순화한 신체 활용은 이 연극이 가진 만화적 색감을 최대한 살려내려는 노력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문제는 이 모든 장점이 ‘순정’과 만날 때부터 시작된다. 연극 초반부의 재기발랄함은 만화적 상상력을 무대화하면서 확보되었지만, 원작이 가진 순정의 서정성은 배우의 감정을 집약해내야 하는 극의 후반부에서조차 원활하게 생산되지 못한다. 만화가 인물들의 표정을 중심으로 충분한 여백과 담백한 화체(畵體)를 담보하며 각 캐릭터들의 진솔하고 순수한 내면을 표현할 수 있었던 데 비해, 연극은 후반부의 템포가 늦춰져가면서 구멍을 만들었고 그 구멍은 극적 균열과 진부함의 과잉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원작에 충실하고자’ 했다는 순진한 의도가 전환된 매체 안에서 완성도 있게 마무리되지 못한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연극은 만화의 어법을 극적으로 ‘차용’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 만화가 결국 전하고자 했던 ‘순정의 감동’은 놓쳐버렸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원작인 아버지가 물려주고자 했던 최고의 유산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아들이 아버지의 재주만을 닮고 그가 가진 진정성의 깊이를 획득하지 못한다면, 그 아버지와 아들은 외형만 유사한 서로의 ‘타인’이 될 뿐이다. 결국 이 작품이 만들어져야 했던 ‘왜(Why)’는 길을 잃었다. 작품 전환의 ‘왜’가 상업성의 확보에서만 그 답을 찾게 되지 않으려면, 새롭게 생산되는 작품은 원작을 넘어서는 자신의 ‘무엇(What)’ 혹은 ‘어떻게(How)’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버지보다 나은 아들들이 많은 세상이라면 조금은 더 살맛나지 않겠는가.
4-2. 아버지와 다른 아들, 연극 <이(爾)>와 영화 <왕의 남자>
<살인의 추억>, <웰컴 투 동막골>, <박수칠 때 떠나라> 등 이제는 새롭지도 않은 유행인 ‘연극과 영화의 조우’의 현장에 연극 <이(爾)>(김태웅 작․연출, 극장 용, 2005.12.06~21)와 영화 <왕의 남자>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더 이상 빛나는 진단이 아닐 정도의 시대적 흐름이 되어버린 이 현상은, 그러나 연극 <이(爾)>를 ‘왜’ 다시 조망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줄 수 있는 유익한 단서라고 할 수 있다.
재밌는 것은 위에서 언급된 영화 모두가 연극의 제목을 그대로 차용했으나, 최근 개봉한 <왕의 남자>만큼은 연극 <이(爾)>의 제목을 버리고 남성인 ‘왕’의 여자가 아닌 ‘남자’를 자신의 이름으로 선택한 점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답해버리자면, 조선조 때 왕이 신하를 높여 부르는 호칭인 ‘이(爾)’라는 용어 자체가 대중적으로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극의 제목인 ‘이(爾)’가 표지하는 것은 연산(이남희 분)의 남색(동성애) 파트너 ‘공길’(박정환 분)이고, 여기서 유추할 수 있듯 이 연극은 공길에 초점을 맞추고 그를 부르는 상대 주체인 연산 정도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 진행된다. 연극은 대명사 ‘이(爾)’를 호명하는 주체와 대상, 즉 연산과 공길의 이야기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두 인물 사이의 묘한 애정과 갈등, 권력, 증오가 이 연극을 원천적으로 숨쉬게 한다. 극의 호흡은 ‘이(爾)’, 즉 공길이라는 인물의 감정 변화에 얼마만큼 동의할 수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고, 이때의 그의 감정을 움직이게 하는 두 축인 ‘관계’와 ‘권력’에 대한 관심이 이 연극을 지탱하는 뼈대가 된다.
반면, 영화 <왕의 남자>의 제목은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장생(감우성 분)은 자신의 목이 잘려나갈지도 모르는 마지막 줄타기 묘기를 하며 “내가 이 궁궐의 왕이다.”라고 외친다. 그것은 굴곡된 내면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실제 왕인 연산(정진영 분)에 비해 눈을 잃고도 외줄 위에서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우인(優人)인 자신이 이 세상의 진정한 왕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로서 <왕의 남자>는 왕인 연산과 남자인 공길(이준기 분)의 이야기이며, 껍데기 왕인 연산과 진정한 왕인 장생, 존재 그 자체가 자유를 위한 광대 장생과 그와 닮은 자유를 꿈꾸는 공길 그리고 남자를 움직이는 남자 공길과 남자를 넘어서고 싶은 여자 녹수의 서사로 재탄생한다. 다시 말해 영화의 제목은 구조상 두 개의 개체를 연결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이 영화의 모든 인물 관계를 표상하는 상징이 될 수 있는 중층의 것이다.
바로 이곳에 연극 <이(爾)>의 독보성과 영화 <왕의 남자>의 변이성이 존재한다. 연극이 가진 실험성과 과감성은 내성적이고 소심했던 공길이 동성애를 이용하여 권력을 획득하고 결국에는 권력 위에서 그것을 조종하고 싶어 하는 인물로 변화해 가는 것을 그린다. 이것은 인간 내면의 변화이며 권력의 지형도에 편입된 인간의 운명을 은유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SM적 성행위에 신음하는 그의 모습을 ‘동생에 대한 안쓰러움’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영화의 공길과는 달리 연극의 그는 그 누구에게도 ‘동생’일 수 없다. 반대로 영화는 애써 공길과 연산의 동성애적 코드를 흐릿하게 처리한다. 날카로운 채찍소리와 남성의 건조한 반라(半裸)는 대중영화에게 불편한 소재일 뿐이다. 놀이판의 왕으로서, 신명의 열망을 가진 장생에게 서사의 방점이 이동함은 영화 매체가 지향하는 대중성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각 매체는 자신만의 방식을 고안함으로서 스스로를 수용자들의 인식선 상의 안전지대로 도입시킨다. 그것은 아버지와 다른 세계를 사는 성공하는 아들의 철저한 생존 방식이다.
차별화된 어법과 방점의 이동으로 연극과 영화 사이의 주제적․형식적 거리는 멀어졌지만, 이들 작품을 형상화하는 태도에는 주목되는 공통점이 있다. 연극 <이(爾)>는 연산군일기 60권 22장의 짧은 문장-배우 ‘공길’이 논어를 외워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니 비록 곡식이 있은들 먹을 수가 있으랴.”-에서 시작되었다. 공길과 장생이 즐겨하던 놀이일 뿐만 아니라 그들 관계의 운명을 은유하는 장님놀이 장면의 일부는 다른 희곡 작가의 작품-윤영선의 -을 오마쥬하는 것에서 발원하였다. 죽은 역사를 살려내는 문학적 상상력과 동시대 다른 작품에 대해 헛된 부채의식을 갖지 않은 채 실시되는 탁월한 자가 도입은 연극<이(爾)>를 만들어냈고, 그것을 자기가 딛고 서있는 매체의 방식으로 굴절시켜 영화화하려는 의지는 또 다른 이름의 <왕의 남자>를 탄생시켰다. ‘전환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다양한 자기 변이로 서로 다르게 그러나 모두 아름답게 살아남으려는 자각이다. 아버지는 좀더 아버지답고, 아들은 좀더 아들다워도 좋다.
5. 빈 칸의 공허, 발견 없음의 외로움-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주목하는 전시극(展示劇) 계열이나, ‘무엇을’ 다룰 것인가를 근성 있게 고집하는 주제극(主題劇) 계열, ‘왜’ 이 연극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무대 위에서 주장하는 전환극(轉換劇) 계열 연극들의 흔적을 되짚어볼 때,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공허함이다. 그나마 존재하는 흔적들조차 분명한 자신의 위치를 아우성쳐 알리지 못한다는 점도 공허하지만, 아예 비워져 있는 남은 칸들의 아연함과 맞닥뜨릴 때는 사뭇 외롭고 괴롭다.
원로작가라고 할 수 있는 이강백의 <맨드라미 꽃>이나 오태석의 <용호상박>이 2005년 하반기 연극계를 장식하긴 했지만 그들이 지금의 ‘누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작가의 탄생도 그 기다림의 간절함에 비하자면 끝없이 묘연하다. ‘현재’의 이야기라면 치열한 현재의 모습답게, ‘과거’의 이야기라면 현재와 미래 모두에도 호소력 있게 만드는 연극적 시선인 ‘언제’의 칸도 비어 있는 듯하다.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의 전용극장 ‘극장 오아시스’가 새로 지어지고, 위엄과 기품을 지닌 ‘극장 용’이 들어섰지만, 아직도 소규모 극단이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는 편안한 중극장 인프라는 부족하기만 하다. 이러한 빈 칸들의 공허는 발견 없음의 외로움 위에 지어졌다. 이 공허가 빨리 허물어질 때, 연극계가 그 어떤 타장르의 현장과 비견해도 뒤지지 않을 튼튼한 육하원칙의 장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발견 없음’이 곧 ‘희망 없음’과 직결된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발견 없음’이 끊임없이 ‘발각’됨으로써, 우리는 ‘희망 있음’의 시대에 한 발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절반의 발견들이 모두 연극적 완성도 안에서 성장하여 육하원칙의 칸들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날을 기대한다. 그래도 ‘발견 없음’이 ‘관심 없음’보다는 좀 덜한 새드 엔딩(sad ending)이 아닌가.
이경숙․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2004년 LG아트센터 ‘오늘의 젊은 연극 시리즈’ 연극비평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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