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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서평/복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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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675회 작성일 08-02-29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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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김종성 소설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
  편혜영 소설집, 󰡔아오이가든󰡕(문학과지성사, 2005)







삶과 자연, 그토록 ‘친숙하고도 섬뜩한(Un)canny’

복도훈


‘자연은 존재하는가?’
김종성의 소설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은 위기에 처한 생태적 현실에 대한 사실적인 재현, 폭로와 고발을 일차적인 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르포문학에 가깝다. 󰡔연리지가 있는 풍경󰡕은 문학적 재현의 형식이나 미학의 층위보다는 고발과 폭로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적 층위를 고려한다는 점에서 생태주의 담론의 문학적 재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작가 김종성은 소설집의 저자 서문에서 자신의 생태주의적 입장이 아르네 네스(Arne Naess)와 같은 심층 생태론자보다는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을 위시한 사회 생태론자들의 입장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자연은 만물의 상호조응이라는 조화로운 리듬과 질서를 따르고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므로 자연의 이치에 순응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입장은 심층 생태론의 것이다. 이에 비해 사회 생태론은 환경의 위기를 자연에 대한 인간의 기술적 지배의 결과임을 통찰하는 동시에, 이러한 기술주의에 대한 대안은 기술(자본)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기술(자본)의 근저에 깔려있는 인간의 지배욕망에 대한 근본적 반성과 생태환경의 위기를 불러오는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둔다. 따라서 사회 생태론은 인간과 기술의 친환경적 조화와 인간중심주의의 극복의 이념과 인간이 살고 있는 ‘지금-여기’의 환경적 개선이라는 운동적 차원이 긴밀히 결합되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연리지가 있는 풍경󰡕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후자의 생태주의의 입장에 대한 작가나 서술자의 ‘언표의 층위’와 실제 문학적 기술(記述)이 갖는 ‘언표행위의 층위’와의 일치점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언표와 언표행위가 불일치하는 문턱, 즉 생태주의담론과 그것에 대한 문학적 재현의 미묘한 어긋남과 틈새의 떨림을 포착하는 것이 훨씬 흥미롭다. 비평이 개입할 수 있는 지점은 오직 여기, 작가가 말한 것과 작가를 통해 실제로 말해진 것, 의도된 것과 의도를 벗어난 것, 언표와 언표행위의 틈새일 것이다.
언표의 측면에서 볼 때 󰡔연리지가 있는 풍경󰡕에 실린 여섯 편의 단편은 대개가 무분별한 발전과 개발, 자본의 이익 추구라는 목표와 자본가 계급의 교묘한 수단에 의해 불구가 되어버린 환경과 그로부터 삶의 터전을 축출당한 사람들의 애환과 투쟁의 현장에 관한 사실적이고도 충실한 보고서 모음집이다. 이 단편들에서 기업과 자본가계급의 위선적인 모습은 철저히 해부되며, 공동으로 지켜왔던 삶의 터전을 자본가의 꾐에 넘어가 팔아버리고 삶의 뿌리를 지키고자 하는 다른 사람들마저 급기야 억압하고 마는 인간의 추악한 속성 또한 가감 없이 폭로된다. 그 중 자본가계급과 기업의 위선적 측면은 이 소설집에서 도드라지게 부각되며, 자본가계급과 기업 그리고 그에 공모하는 자들의 표면과 심층을 부조(浮彫)하는 솜씨는 김종성의 생태소설이 가진 장점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일요일을 지킵니다」에서 ‘광신은 주일을 지킵니다’라는 기독교적 광고 문구를 제작해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예우의 이미지나 기독교인들 소비자들에 대한 호의를 표방하려는 ‘광신그룹’은 비밀리에 용정골 골프장 건설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며, 그에 대항하는 마을사람들을 이간질하는 동시에 무자비하게 탄압한다. 한편, 「열목어」에서 환경친화적인 ‘숲의 집’을 운영하고 환경생태총서를 간행하는 문화재단을 가진 풍산광업소는 실제로는 용소 골짜기에 20년 동안 아연버력을 몰래 방출시키고 광업노동조합을 해체시킨 악덕 재벌기업으로 드러난다. 환경친화적으로 알려진 ‘숲의 집’ 또한 말썽 많은 광미 처리장을 흙으로 덮고 그 위에 세운, 나무 한 그루 제대로 자라지 않는 황량한 숲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진다. 현실에 대한 사실주의적 양각(陽刻), 즉 폭로의 기예가 작가 김종성의 문학적 성과의 대부분이라는 인상을 다소 줬다면, ‘숲의 집’ 주변의 골짜기에 대한 음각(陰刻)의 묘사는 김종성 르포문학의 ‘문학’적 측면을 감싸는 또 다른 성취로 주목할 만하다. “안개가 나뭇가지에 닿자”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는 곳인 용소 골짜기를 택시로 빠져나오면서 주인공 권 실장은 열목어 떼의 환각을 본다.

안개가 스멀스멀 내려와 차창에 다닥다닥 붙었다. 차창의 유리가 뿌연 안개로 휩싸였다. 눈앞이 침침해졌다. 안개를 힘겹게 헤치며 열목어 떼가 다가왔다. 열목어 떼들은 한결같이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권 실장은 열목어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윙 하는 소리가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그때 풍산문화센터 앞에 피켓을 들고 쭈그리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느릿느릿 다가왔다. 이윽고 그들은 안개의 숲 속으로 물러섰다. 열목어 떼가 사라졌다.(「열목어」)

‘눈이 충혈’된 열목어 떼의 이미지, 그리고 주인공이 ‘열목어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은 용소 골짜기나 󰡔연리지가 있는 풍경󰡕에 실린 여타 소설들에 투영된 자연이 갖는 위상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단초로 볼 수 있다. 인용문에서 눈이 충혈된 열목어 떼는 절개되고 조각난 자연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황폐와 오염 이전의 조화로운 자연을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이미지이다. 앞의 것이 현실적=상징적 자연이라면, 뒤의 것은 본래적=상상적 자연이라고 부를 수 있다. 상징적, 상상적 자연은 그에 대한 훼손의 이미저리까지 포함하여 기본적으로 ‘친숙한(canny)’ 자연을 상정한다. 이에 비해 무자비한 환경훼손과 그에 따른 생태계들의 교란으로 나타난, 소설의 한 구절을 빌리면 “황금 나비들이 사라지자” 나타난 “모기하고 검은 나방들”은 자연의 억압된 이면, 실재의 자연, ‘섬뜩한(uncanny)’ 자연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눈이 충혈’된/파괴 이전에 용소 골에 살던 열목어 떼, 즉 상징적/상상적 자연이 소설집에서 작가가 의도하고 언표한 자연의 형상이라면, ‘모기와 검은 나방들’은 작가와 서술자의 의도에서 볼 때 자연의 타자로 배제된 생태계의 과잉(excess), 교란된 생태계의 형상이다. 동시에 이 자연은 작가의 언표로부터 배제되면서 포함된 언표행위의 얼룩(spot)이기도 하다. 󰡔연리지가 있는 풍경󰡕에는 이처럼 세 가지 차원의 자연이 존재하며, 그것은 보로매우스 매듭처럼 세 고리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조화로운 균형과 일정한 리듬을 갖고 순환하는 자연의 이미지, 상상적 자연의 형상에 대한 복원을 위기에 처한 생태적 현실에 대한 최종적인 치유책으로 보고 있다. 󰡔연리지가 있는 풍경󰡕에서 복원되어야 할 자연은 앞서 인용한 대목의 열목어 떼, 성산산성의 가야고분에서 출토된 연리지 조각품(「연리지가 있는 풍경」), 땀 흘리는 미륵불(「일요일을 지킵니다」), “모성적인 힘”이 숨어있으며 청계산 기슭에 있다고 하는 전설의 도원(「버력산」), 용소의 용왕님과 용 울음소리(「용 울음소리」), “황금나비”(「나비를 찾아서」) 등등 조화로우며 파괴 이전의 온전한 자연의 형상을 뒷받침하는 은유와 상징의 연쇄를 통해 매번 강조되고 있다. 또한 작가가 비판하고자 하는 현실의 추악한 모습은 자연의 이미저리에 대한 훼손과 복원의 은유를 통해 사실적/비유적으로 재현된다. 그것의 최종적인 문학 생태론적 언표이자 가정은 ‘자연은 존재한다.’이다.
‘자연은 존재한다.’는 이 가정법적 언표는, 그러나 균형과 리듬을 가진 자연의 이미지를 현재, 즉 자연에 대한 파괴와 생태계의 교란이 일어나는 지금의 시점에서 작가가 소급적으로 투사해서 재구축한 것이다. 그것은 소설집 전반에서 자연의 이미저리가 무분별한 개발과 파괴 이전의 용소처럼 순수한 고향의 영상, 더 나아가 연리지 조각품처럼 단절 없는 연속성을 지닌 고대 유물에 유독 자주 비유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작품의 문학적 성취도의 여부를 굳이 제쳐두고서라도 자연에 대한 작가의 회고적 태도를 과연 생태적 위기에 대한 근본 처방으로 볼 수 있을지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여전히 작가 또는 서술자가 포함시키면서 배제했던 생태계적 카오스의 증상이자 얼룩, ‘모기와 검은 나방들’의 발생과 그 원인에 대해 탐구하는 작업이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 󰡔연리지가 있는 풍경󰡕과 그를 둘러싼 생태주의에 대한 비평적 물음이 있다면 그 질문의 형식은 이럴 것이다. ‘자연은 존재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탐구가 생태현실의 위기에 대한 코스모스적인 생태계/상상적인 자연을 여러 방식으로 전제하고 상징화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지만, 또한 더 가치 있는 일은 아닐까.

‘당신은 살아있나요?’
과천에 사는 소시민이자, 대학 강사 출신의 살인마 한창림을 혹 기억하시는지. 싱싱한 어린애들을 납치해 스너프필름을 찍은 다음 목화밭의 거름으로 주는 엽기적 행각으로 한국문단과 독자들에게 매혹과 혐오를 동시에 안겨줬던 그, 백민석 소설 󰡔목화밭 엽기전󰡕(2000)의 남자주인공. 생살여탈권을 쥔 팻숍 삼촌의 명령을 받아 지하실에서 살인기구를 꺼내드는 살인마, 그는 과천동물원의 만드릴 육식원숭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수컷’이자 ‘인간-동물’이다. 그러나 그는 살인과 폭력을 저지를 때를 제외하곤 뷰티플 피플에 진열된 ‘인형’처럼 조용하고 냉담하기만 하다. 장난으로 혀로 핥거나 했다가는 살을 천천히 문드러지게 만들 수도 있는 ‘유사-인간’ 말이다. 잔인함과 냉담함을 겸비한 동물이자 자동인형, 한창림이라는 이 캐릭터는 최근 젊은 작가들의 엽기적 상상력의 시발점(始發點)에서 다시 부활하고 있다. 󰡔귀뚜라미가 온다󰡕(백가흠, 문학동네, 2005)의 주인공들은 사도-마조히즘적 사랑의 복음을 전파하는 충동적인 야수-동물들이며, 󰡔악어떼가 나왔다󰡕(안보윤, 문학동네, 2005)의 주인공들은 뭉툭한 발목만 없다면 완벽한 모델이 될 수 있으리라 꿈꾸다 도리어 자신의 발목을 잘라버린 채 파멸하고 마는 속빈 자동인형들이다. 이들에게는 보통의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질 법한 최소한의 이성적 사유나 도덕적 책임마저 없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분명 실존, 아니 ‘생존한다.’ 동물이자 인형인 그들은, 그렇다면 살아있는가, 죽어있는가. 왕복 운동하는 이 존재․신학적 물음을, 이제 편혜영의 소설집 󰡔아오이가든󰡕에서 도심을 배회하는 시체들이 던지고 있다. ‘당신은 살아있나요?’ 동물, 인형, 그리고 시체들. 한국문학의 젊은 상상력은 비로소 무신론적 성삼위일체캐릭터를 완벽히 겸비하게 되었다.
󰡔아오이가든󰡕은 범박하게 말한다면, 예를 들어, ‘만국박람회’라는 문명의 알레고리적 극장을 무대로 삼고 있다. “사고의 영역에서 알레고리는 사물의 영역에서 폐허에 상응한다.” 󰡔독일애도극의 기원󰡕의 저자의 말은 󰡔아오이가든󰡕에서도 적실한 표현을 부여받고 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30년 전쟁으로 인구의 2/3가 죽고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된 시대의 예술작품인 바로크 애도극(trauerspiel)과 뒤러(Albrecht Dürer)의 그림에 묘사된 바 있는, 아름다운 귀부인을 끌어안고 있는 해골들, 훤히 드러나 보이는 뱃속에 벌레와 오물들이 가득 찬 젊은 여인의 모습을 통해 삶과 죽음이 어떤 극단의 문턱에서 일치하는 황폐한 풍경을 우울하게 바라본 바 있다. 󰡔아오이가든󰡕도 그와 유사하다. 이 소설집에서 도시문명의 삶은 자연의 폐허로, 인간은 시체와 동물로, 건강은 질병으로, 생명은 무기물로, 음식과 수면은 약물 복용과 불면으로 대체되며, 아니 도리어 폐허, 동물과 시체, 질병, 무기물이 문명, 인간, 건강, 생명보다 앞서 존재하고 그것들을 (재)정의한다. 말하자면 ‘아오이가든’이든, ‘서쪽 숲’, ‘맨홀’, ‘만국박람회장’이든, 문명의 세목이 전시된 극장과 배우들의 연기는, 벤야민의 표현을 한 번 더 빌리면, 예외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정상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항구적 비상사태에 대한 은유이자 환유가 된다. 전염병에 걸린 동물들과 개와 고양이들은 도심을 배회하다 붙잡혀 실험대상이 되거나 유기되며 또한 야생화된다. 마찬가지로 지하맨홀로 추방된 아이들은 위생관리청, 아동보호소에 붙잡혀 가 폐기처분되거나 실험관리 대상이 언제 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산다. 이처럼 외부 없이 닫혀버린 도심 속의 ‘삶’은 만인이 만인에 대해 늑대가 되어버리는 홉스적 자연상태의 동물적 ‘생존’으로 뒤바뀌며, 생명은 생정치적(biopolitical) 실험대상이라는 점에서 시체와 다를 바 없는 것이 된다.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에 따르면, 홉스적 자연상태는 종종 오해되듯 도시공동체 성립 이전의 야만적 혼돈이 아니라 누군가가 추방당한 존재일 때, 만인이 그/녀에 대해 늑대나 그/녀의 생살여탈권을 쥐는 주권자(sovereign)로 뒤바뀌는 도심 속의 예외상태(state of exception)이다. 이제 그들은 이성적 로고스(logos)를 버리고 야생적 울부짖음(phone)으로 도심 속을 굶주리며 배회한다. 오로지 처절한 생존 그 자체를 위해.
그럼 이쯤에서 이 작가의 하드고어적 상상력이 재현되는 한 방식을 재구성해보면 어떨까. 알레고리적 충동이 강한 문명비판의 우화보다는 일상적 현실을 낯설게 만드는 ‘섬뜩한’ 재현에 보다 가까운 작품으로. 󰡔아오이가든󰡕의 질적 성취는, 편차가 그리 심하지는 않지만, 알레고리적 의도를 표방하는 우화들(「저수지」, 「아오이가든」, 「만국박람회」, 「마술피리」)보다는 현실과 일상을 작품 내부에서 전복하는 효과를 유도하는 소설들(「문득」, 「시체들」, 「서쪽 숲」) 쪽에 더 많이 있다.  

다리는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시퍼렇고 까맣게 썩어 있었다. 대퇴골이 다 드러난 살 끝이 풀어진 실밥처럼 너덜거렸다. 너덜거리는 살과 달리 뼈는 조형물처럼 단단해 보였다. 까맣게 썩어 있는 살 사이에서 대퇴골이 형광등처럼 빛났다. 무릎 관절을 보호해주는 슬개골도 여전히 단단해 보였으며, 대퇴골과 이어지는 정강이뼈도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살과 피부는 분명 부패한 시체의 것이었지만 뼈는 산 사람의 것 같았다. 발가락은 짓이겨지고 뭉개져 형상을 알아볼 수 없었다. 원래 발가락이 없었던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편혜영, 「시체들」)

실종된 아내의 사체를 찾으러가는 남자 주인공의 음울한 상념과 관찰이 집요할 정도로 그로테스크하게 묘사된 「시체들」에서, 인용문과 같은 주인공의 상념과 관찰은 아내라고 추정되는 여자의 훼손되고 조각난 부패된 신체들에 대한 해부학적인 묘사로 인해 환상적 효과마저 띤다. 서술자의 시선은 의사의 냉정한 임상적 시선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지만, 그것이 재현한 바는 섬뜩하기만 하다. 주인공과 함께 생선 백반집을 운영하던 아내가 실종되었으리라고 추정된 낚시터가 사람이 자주 익사하기 때문에 고기 맛이 더 좋다는 낚시꾼들의 진술과 겹쳐지면서 소설은 묘한 긴장감을 획득한다. 내장이 썩어 들어가고 독한 비린내가 나는 것으로 묘사된 죽은 생선들은, 그것을 교묘하게 팔아 그들 부부의 “유일한 생명체”와도 같은 백반집을 마련하는 기틀이 되었던 것이며, 그리하여 삶의 터전을 어렵사리 마련한 그들 부부에게는 딱히 단죄하기에 뭣한 욕망이 있다. 작품 전반에서 단편적으로 묘사된 이들 부부의 삶은 오히려 가여운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작품의 서술과 묘사는 그러한 연민마저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독하고 비정하다.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 아내와 유사한 여자들의 절단되고 부패된 시체들은 아내와 주인공이 매만지던 생선의 사체들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쥘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말마따나 시체는 최고의 폐기(abjection)의 대상이며, 삶과 욕망을 죽음으로 전염시킨다. 인간과 동물은 등가교환이 될 수 없는 존재이지만, 부패와 훼손으로 사물(事物, 死物)이 될 때 등가가 된다. 결국 환상적인 결말에서 남편도 또한 아내가 익사했을 법한 낚시터에 빠져죽는 것으로 처리된다. 시체를 먹고사는 물고기-생선 백반집을 운영하는 부부-파산 이후 낚시터에서 각각 죽는 부부-부부의 시체를 먹고사는 물고기로 욕망의 생태계는 악순환한다. 이제 인간은 먹이사슬의 드높은 권좌에 더 이상 위치하지 않는다. 󰡔아오이가든󰡕은 이처럼 “인간의 몸이란 부패하기 쉬운 단백질 덩어리”라는 충격적인 전언을 던진다. 인간=시체, 삶=죽음, 문명=폐허라는 편혜영 식의 전언은 더 이상 현실 너머에 대한 환상적 탐구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이러한 전언은 미학적으로도 뒷받침되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시체가 자체의 외관만으로 가장 탁월하게 재현되는 사물이라는 점이다. 시체의 존재로 인해 이제 현실은 그 자체로 가장 적합한 미학적 재현이자 이미지로 승화된다.
문득, 그런 의문이 던져질 법도 하다. 작가는 왜 이리도 극단적인 상상력과 음울한 알레고리로 문명적 현실을 전면 폐허로 되돌려놓고 마는 걸까. 하드고어 영화의 괴물 캐릭터인 프레디나 제이슨처럼 공동체의 희생양도 더 이상 아닌 이들, 도심에서 추방되었지만 여전히 도심 안에서 살아가다 그저 버려지는 이 유령적 존재들의 사회적 기원은 무엇일까. 󰡔아오이가든󰡕에서 이따금씩 출몰하는 ‘가난’이라는 단어는 그 문명=폐허의 등식을 설명하기에는 다소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집의 엽기적 상상력을 그저 하위문화(허구)를 통해 허구로 재생산된 복제물로 보는 혐의도 성급하기만 하다. 다만 󰡔아오이가든󰡕을 여전히 해독되어야 할 우리시대의 사회적 삶의 증상이자 알레고리로 보는 것만큼은 분명,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전혀 상반되고 심지어 관련조차 없어 보이지만, 󰡔연리지가 있는 풍경󰡕과 󰡔아오이가든󰡕을 나란히 두고 독해할 수 있는 방법은 혹 없을까. 극단적인 것들의 일치라는 무한판단의 형식을 적용해 본다면, 이 두 소설집은 우리시대의 문학적 풍경과 그로부터 재현되는 삶의 증상의 양극단을 구성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어떻게? 우선 󰡔연리지가 있는 풍경󰡕의 생태주의가 가정하는 자연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친숙하다.’ 그 자연은 친숙한 고향 한 가운데에 거주하며, 회복되어야 할 본원적 삶의 형식에 대한 탐구와 맞물려 있다. 이에 비해 󰡔아오이가든󰡕의 자연은 ‘섬뜩하다.’ 그 자연은 낯선 도시 한 가운데에 속해 있으며, 헐벗은 인간과 동물들이 야생상태로 배회하는 생존의 형식과 맞물려 있다. 󰡔아오이가든󰡕의 편에서 볼 때, 󰡔연리지가 있는 풍경󰡕의 생태주의가 가정하는 삶과 자연, 또는 생명은 더 이상 자명하고도 친숙한 존재론적 개념이 아니다. 이미 󰡔아오이가든󰡕에서 보았듯이 삶, 생명, 자연은 우리시대의 웰빙(well-being)이나 수많은 생태주의가 그것들을 전유한 만큼이나 추방, 굶주림, 헐벗음과 같은 음산한 의미망을 함축하면서 훨씬 정치적으로 다가온다. 이제 삶과 생명은 생정치의 산물이며, 자연은 만인이 만인에 대해 늑대인 예외상태가 되었다. 이처럼 󰡔연리지가 있는 풍경󰡕과 󰡔아오이가든󰡕은 그토록 친숙하면서도 섬뜩한 우리시대 삶(과 자연)의 형식에 대한 비평적 물음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극히, 증상적(symptomatic)이다.




복도훈
2005년 ≪문학동네≫로 등단
․공역서 슬라보예 지젝 외, 󰡔성관계는 없다: 성적 차이에 관한 라캉주의적 탐구󰡕

추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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