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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서평/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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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37회 작성일 08-02-29 02:21

본문

|서평|


  장석주 시집 󰡔붉디붉은 호랑이󰡕(애지, 2005)
  장종권 시집 󰡔꽃이 그냥 꽃이 날에󰡕(리토피아, 2005)
  변종태 시집 󰡔안티를 위하여󰡕(작가마을, 2005)




붉고, 강렬하고, 차가운 시선

강경희



1. 상처의 자리와 꽃의 자리
장석주의 󰡔붉디 붉은 호랑이󰡕는 온통 자연의 심상들로 가득하다. 시집의 차례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자연과의 교감에 몰두했는지 알 수 있다. 「단감」, 「태양초」, 「앵두」, 「무당벌레」, 「모란꽃과 수련」, 「박새 둥지」, 「오동나무」, 「파밭」, 「소금강」, 「11월의 나무들」 「봄비야 봄비야」, 「청산이 젖다」, 「쑥」, 「돌과 박새」, 「벚꽃 폭설」 등 시집 어디를 펼쳐 보아도 온통 자연이다.
장석주에게 자연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에게 자연은 시인 자신의 존재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구체적 사물로 투영된다. 이는 자연을 풍경 자체로써 발견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 시인 자신의 실존적 형상을 드러내려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영원한 고향인 자연과의 합일을 지향한다. 그러나 자연과의 완전한 합일은 관념적 세계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때문에 자연과 인간 사이에는 ‘거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거리는 세속과 영원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며, 실제와 관념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거리’에 고뇌하는 존재의 고독한 형상이 위치한다는 점이다. 장석주가 그려놓은 자연은 그에게 고향이며 어머니이며 눈물이며 상처이며 또한 한없이 붉디붉은 유혹의 시선이다.

오동나무 속의 어머니가 나와
사금(砂金) 한 움큼을 건네주며
얘야, 소금 좀 다오, 소금 좀 다오, 했다.
벼랑을 품고 사는 나날,
앵두가 잘 익었어요, 라고 말하는 찰라
전나무에 얹혀 있던 작년의 눈이
잔모래처럼 날아와 이마를 때렸다.

얘야, 앵도가 잘 익었으며 뭘 하니?
내겐 받을 손이 없구나.

두견새는 울지 말았어야 했다.
구름의 자양분을 먹고 자라는
누이들은 아직 피가 견고하지 않으니
어머니는 밤새껏 피울음 울다가 돌아갔다.

이튿날 앵두나무 가지를 보니
어린 누이들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다.
―「앵두」 전문

병든 존재, 기구한 운명, 가난과 치욕, 고통과 상처의 흔적들로 가득한 시절의 이야기를 듣는 듯 이 시는 우리의 아픈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화자의 상처의 뿌리는 피로 맺어진 가족의 관계에서 탄생한다. “사금砂金 한 움큼을 건네주며/얘야, 소금 좀 다오, 소금 좀 다오,”라고 말하는 어머니는 비정상적인 가족 관계를 보여준다. 화자의 현실은 “벼랑을 품고 사는 나날”이자, “잔모래처럼 날아와 이마를 때”리는 고통의 연속인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불행했던 가족사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설명하지 않는다. 즉 이야기는 생략되고 이야기를 거느리는 이미지들이 선명하게 부각될 뿐이다. 장석주는 시각, 촉각, 청각의 감각적 이미지들을 엮어냄으로써 슬프고 서럽고 불안하고 그러나 아름다웠던 지난날들의 영상을 담아낸다. 특히 이 시는 서로 대비되는 두 이미지간의 결합을 통해 가족의 시련을 고스란히 껴안아야 했던 화자의 고통스런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사금과 소금, 앵두와 흰눈, 구름과 누이들의 피, 두견새의 울음과 어머니의 피울음은 결국 “앵두나무 가지”에 매달린 “어린 누이들”로 응집된다. 화자에게 앵두는 자연의 열매가 아닌 생의 고뇌를 상징하는 피의 유산인 것이다.
이처럼 장석주에게 자연은 존재의 상처를 인식하게 만드는 매개가 된다. 그에게 있어 ‘상처’는 생의 빛이자 그림자이다. “상처가 본디 꽃이 진/자리인 것을,”(「단감」)이라는 말처럼 상처는 꽃이자 어둠인 것이다. 그는 풍성하고 화려한 자연을 보여주기보다는 마르고, 으스러지고, 수그러들고, 성글고, 밀려가는 것들을 통해 가장 빛나는 생의 일면을 보여준다. “붉고 메마른 것”(「태양초」), “웅덩이들 물이 마르고” “그림자 바스러질 때”(「무당벌레」), “성근 가지”(「박새 둥지」), “마른 풀에 서리 앉은 아침”(「오동나무」), “산능선 겹겹 파도 가없이/밀려가는”(「11월의 나무들」) 자연 속에서 그는 “살아있는 동안만/죽음을 살아낼 수 있는 것임을,”(「검은 삼나무 장벽․2」)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람 섞여 진눈깨비 치는 저녁,
흘러나온 불빛이
코뚜레 뚫은 송아지처럼 길게 길게 운다.

길 나서지 못한 사람 살고 있다고,
가는 저녁 다시 못 온다고,
다정한 몸속으로
울음이 뭉툭하게 밀려든다.

저녁마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것들 속에서
무릎 아래 그림자 키우는
누군가의 재개봉영화 같은 생이 밀려간다.

누군가 어둠 쪽으로 몸 돌려
꽃피는 머리를 수그린다.
―「수그리다」 전문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자연처럼 인간의 삶도 그저 흘러가는 것이다. “가는 저녁 다시 못 온다고,”라는 말처럼 생의 한 순간순간 밀려온 것들은 다시 지나가고 또 다시 다른 삶이 밀려온다. “저녁마다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것들 속에서” 자연도 인간도 조금씩 소멸을 향해 나가는 것이다. 이처럼 덧없는 삶에 대해 시인은 “누군가의 재개봉영화 같은 생이 밀려간다”고 말한다. ‘재개봉영화’와 같이 더 이상 신선하지도 중요하지도 주목을 끌지도 못하는 ‘생’은 슬프다. 그러나 장석주는 이 ‘그림자’ 같은 생의 어둠 속에서 머리를 수그리는 ‘꽃’을 발견한다. 이것은 인생의 깊이를 터득한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경지이다.
󰡔붉기 붉은 호랑이󰡕는 장석주의 수졸재에서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고스란히 떠올리게 한다. 자연에 동화된 삶 속에서 그는 “세상이 나를 까맣게 잊어” 버릴지라도 “마침내 고요의 달인(達人)으로 등극”(「은자전(隱者傳)․4」)하려는 침묵의 시간을 살고자 했다. 그 침묵의 시간을 통해 길어 올려진 붉디붉은 호랑이의 포효를 듣는 일이 이 시집을 읽는 즐거움이다.

2. 생의 의지로 피어난 꽃
장종권의 시는 강렬하다. 그는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은유의 형식보다는 직설법의 형식을 더 많이 구사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당당하고 힘차게 느껴진다. 이러한 그의 문체적 특질은 그만의 고유한 인간적 기질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장종권에게 생을 밀고 나가는 힘의 원천은 ‘의지(意志)’라 할 수 있다. 시인은 고달프고 가파른 생일지라도 이 험난한 생을 중단 없이 전진하려하려는 남성성의 의지를 강인하게 드러낸다. 우리 시사에 있어 남성적 감수성을 보여주는 시편은 많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비극적 근현대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화된 목소리, 상실과 그리움, 슬픔과 회환, 도피와 연민은 우리 시사의 대표적 얼굴이었다. 이러한 특성은 한편으로는 남성성에 대한 강렬한 기대와 요구를 불러일으킨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장종권의 시는 상실된 아니무스의 심리와 감성을 대변하기도 한다.

꽃은 사람을 위하여 피지 않는다
다만 벌․나비를 위하여 아름답게 핀다
벌․나비는 본능적으로 꽃의 의미를 알지만
사람은 죽어서도 꽃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꽃은 사람에게 꽃으로 있지 않는다
꽃은 벌․나비를 만나야 비로소 꽃이 된다
벌․나비는 무시로 꽃의 나라에 침입하지만
꽃을 의미 없이 강간하지 않는다
벌․나비는 예외 없이 아름다운 초대장을 받아들고
꽃과의 저항 없는 사랑을 나눈다
그것은 꽃의 의지이다
―「아산호는 꽃의 의지이다」 전문

“꽃은 사람을 위하여 피지 않는다”라는 말이 선언하고 있는 의미는 꽃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에 의해 해석된 ‘꽃’이 아니라 자연으로서의 ‘꽃’이 지니 고 있는 본질적 역할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그에게 “꽃은 벌․나비를 만나야 비로소 꽃이 ”되는 것이다. ‘꽃’과 ‘벌’과 ‘나비’는 서로에 의해서, 서로를 위해서 존재할 때 마침내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꽃’과 ‘사람’은 서로 적대적 관계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죽어서도 꽃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에 꽃은 사람에게 자신을 허용하지 않는다. 꽃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기에 인간은  꽃(자연)에 대해 한없이 잔인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꽃의 세계를 파괴(강간)하는 행위로 암시된다. 장종권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이처럼 적대적인 관계로 설정하는 것은 결국 자연과 궁극적으로 일치될 수 없는 인간의 파괴적 욕망에 대해 문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그의 시는 철저히 생태주의를 지향한다. 특히 그는 자연의 입장에서 인간을 해석함으로써 자연주의적 시각을 견고하게 관철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칠 줄 모르고 아산호를 찾는다
아산호는 언제나 그 자리에 서있지만
누구도 아산호에 다가서지는 못한다

야바위꾼은 결코 돈을 잃지 않는다

아산호의 손놀림은 신기하기 그지없어서
그들은 끝내 아산호의 옷고름을 풀지 못하고
아산호의 치마 끝 어디쯤에서 피곤한 몸을 눕힌다
―「아산호는 야바위꾼이다」 전문

야바위꾼으로 비유된 아산호는 인간과의 노름에서 언제나 승리를 한다. 아산호가 인간을 이기는 방법은 결코 자신의 몸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지칠 줄 모르고 아산호를 찾는다”. 자연의 유혹에 현혹되지만 끝내 자연의 일부가 될 수 없는 인간은 헛된 욕망의 노예처럼 자연에게 끊임없이 패배한다. 아니 그렇게 패배하여야 된다고 시인은 믿고 싶은 것이다. 이처럼 시인이 온건하게 자연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실은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한 강한 부정 어법이라 할 수 있다. 대상을 파괴함으로써 대상을 소유한다고 믿는 인간의 잔인한 이기심을 시인은 폭로한다.
장종권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조화’와 ‘평등’의 관계임을 역설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거룩한 나의 몸이 아니다/우리가 원하는 것은 누군가의 달뜨는 몸이다/몸과 몸이 어울려야 비로소 거대한 세상이 된다/몸과 몸이 어울려야 비로소 세상은 깊어”(「아산호는 출렁이는 몸이다」)지는 것이라는 말은 서로의 몸이 되어줄 수 있는 조화로운 수평적 세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그의 확고한 생의 철학은 우직하리만큼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그의 순수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각설하고
촌놈이 사라진 시대에 촌놈으로 남는 일은
참으로 딱하다

―「딱한 자화상」 부분

오염된 자연은 인간의 타락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이다. 그는 좀처럼 병든 자연을 노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에게 침범당하거나, 정복되지 않는 자연 속에서만 우리의 삶도 지속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스스로 촌놈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시인, 촌놈이 사라진 시대에 끝까지 촌놈으로 남으려 하는 순수한 의지야말로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장종권 시인의 삶의 철학이다. 그는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는 길이 욕망과 타협하지 않는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길이 “절망과 공포와 수치와 모욕적인 사랑”을 감내해야 하는 길이라는 사실 또한 그는 잘 알고 있다. 그의 시의 남성적 어법은 이러한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려는 의지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간혹 그의 시는 이러한 강렬한 의지로 인해 숨 가쁘기도 하다. 가끔은 이 숨 가쁜 의지의 질주로부터 한가로이 쉬어 가는 그의 여유를 보고 싶기도 하다.

3. 폭력적 일상에 대한 안티
일상이란 익숙한 것이며, 단순하고, 사소하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사건과 상황이다. 일상은 익숙하기에 편안하지만 또한 위험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일상이야말로 우리 스스로를 매몰시킬 수 있는 함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에 자신을 함몰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먼저 자신의 일상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탐구하려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최근 발표되는 일상 시편들은 이처럼 타성에 젖어 있는 생각과 법칙들에 균열을 냄으로써 일상의 이면에 놓인 위악적 세계의 일면을 드러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변종태의 󰡔안티를 위하여󰡕는 일상에 대한 성찰로 가득하다. ‘TV 보기’, ‘밀려드는 카드 청구서’, ‘오늘의 운세’, ‘담배’, ‘일기’, ‘면도’, ‘깡통’, ‘포장마차’등의 말에서 환기되듯이 그는 친숙한 우리의 일상을 소재화한다. 이러한 일상적 소재들을 통해 그는 일상이야말로 현대인을 억압하는 근원적 구조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TV는 끝났다.
리모컨을 들고 간단히 붉은 버튼 하나로
닫아버릴 수 있는 이 세상,
누군가 등 뒤에서
나를 향해 리모컨을 겨누고 있다.
잠들지 않는 저 손,
똑딱거리는 탁상시계의 둔탁한 발음에 따라
흔들리는 저 손,
비가 탁음(濁音)으로 슬레이트 지붕을 때리는 오늘 밤
문득 빗소리에 섞여 리모컨 버튼을 누르는 소리 들린다.
어디선가 한 세상이 꺼지고 있다.
―「TV 리모컨을 노래함」 전문

TV가 끝나는 순간을 화자는 세상이 닫히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리모컨을 들고 간단히 붉은 버튼 하나로” 이 세상을 닫아버릴 수 있다고 말한다. 버튼 하나로 열리고 버튼 하나에 닫히는 세상은 간편하고 편리한 세상이다. 그런데 이 간편함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열리고 다시 사라지는 세계는 조작된 세계이다. 이 조작된 세계에 대해 화자는 근원적 공포를 갖는다. “누군가 등 뒤에서/나를 향해 리모컨을 겨누고 있다.”라는 말은 언젠가 자신 또한 누군가에 의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다.
여기서 ‘TV’와 ‘리모컨’은 소모와 폐기가 일상이 되어버린 세상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오늘날 인간은 자신의 존재성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이유와 가치를 생산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때 ‘나’의 존재성은 ‘타자’에게 인정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존재가 도구인 세계는 불온하다. 불온한 세계 속에서 인간은 고통에 신음하는 대상이 되고 만다. “똑딱거리는 탁상시계의 둔탁한 발음”은 언제 꺼질지 모르는 실존적 공포를 극대화한다. “잠들지 않는 저 손,” “흔들리는 저 손”은 자신을 숨 막히게 만드는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의 위력을 상징한다. 이처럼 변종태는 일상을 통해 도구화된 오늘의 시대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씩 하는 개그 프로그램
에서는 똑같은 인물들이 반복적
으로 변주해서 뱉는 대사
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심각해진다. 심각해진다
는 것이 웃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
하지는 않는다. 박장대소하다가 집사람의 옆구릴 걷어차
기도 하니까 웃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다. 웃는다
고 심각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정말
로 심각하게 웃긴다. 9시 뉴스를 보거나 그보다 한 시간 빠른 뉴스
를 보거나 정말로 웃긴다. 사람들은 그 힘으로 살아간다. 웃다가 허리
가, 부러지게 웃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심각한 표정
으로 TV 전원을 끈다.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다시 웃는다. 그 힘으로 일주일
을 견딘다.
―「나는 일주일에 한번씩만 심각해진다」 전문

개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화자는 “심각해진다”고 말한다. 그것은 ‘웃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보면서 웃고 있는 자신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웃는 것은 이 세상이 즐거워서가 아니라 잔인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심리를 대변한다. 고통이 가중될 때 인간은 고통을 망각하려 한다. 이때 TV는 망각의 도구가 된다. 그러나 “TV의 전원이” 꺼지면 다시금 세계는 심각해 질 수밖에 없는 무거운 일상으로 환원된다. 변종태가 보여주는 일상은 이처럼 인간의 사소한 행위마저 통제하는 규범화되고 질서화된 세계에 대한 불안의식이다. 「나는 일주일에 한번씩만 심각해진다」라는 제목은 이처럼 길들여지고 훼손된 현대인의 감성을 반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타전(打電)」은 전쟁마저도 사소한 볼거리로 인식하는 자아의 무관심한 행동을 냉소적으로 제시하면서 거대한 세계의 진리로부터 소외된 비인간화된 현실의 문제를 지적한다. 「깡통 속의 여자」는 사랑마저도 상품화하는 화자의 비정상적인 심리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안티를 위하여」, 「장송곡」, 「오래된 안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고찰」, 「부재하는 오늘의 운세」, 「가을, 그녀를 기다리며」 등과 같은 작품은 일상성이란 문제를 통해 인간의 욕망, 위선, 무관심, 냉소와 같은 이 시대의 문제를 탐색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변종태의 󰡔안티를 위하여󰡕는 오늘날의 각박한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나와 타자가  소통하지 못하는 고립과 단절의 삶의 형식이야말로 그는 가장 경계 해야 될 이 시대의 문제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그의 시는 형태주의적 실험, 고향과 가족서사, 역사와 현실의 문제, 자연과 사랑 등과 같은 주제를 다룬 시편들이 있다. 다양한 소재의 발굴과 그에 대한 관심은 앞으로 그의 시의 행보가 어떻게 될지 기대하게 한다.




강경희․
200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숭실대, 산업대 강사․본지 편집위원

추천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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