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1호 서평/오홍진
페이지 정보

본문
|서평|
이승하 시집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문학사상, 2005)
권혁웅 시집 마징가 계보학(창작과비평사, 2005)
김 근 시집 뱀소년의 외출(문학동네, 2005)
오래된 세계에서 꿈꾸는 시적 상상의 자리들
오홍진
1.
이승하 시집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문학사상, 2005)는 타자의 고통과 마주하는 시인의 형상을 보여준다. 고통은 타자의 고통이면서, 동시에 시인(주체)의 고통이다. 시인은 타자의 고통을 보고, 느낀다. “네 피고름 흘러내린 자리에서 꽃들 연이어 피어”(「아픔이 너를 꽃피웠다」)나는 것을 보는 주체는, 또한 “그 자리에서 네가 아픔 참고 있었기에 산것들 저렇듯 낱낱이/진저리치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을”(같은 시) 느끼는 주체는 시인이다. 타자가 고통으로써 피워내는 아름다움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이 있어 말(言語)로 표현된다. 시인이 “내 필생의 화두는 ‘고통의 뜻을 알자’는 것”으로 설정할 때, 시인은 타자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아토피성 피부염으로 고통당하는 아들의 아픔을 시화한 「아들은 가렵다」에 표현되는 것처럼, 시인은 타자의 고통을 봄으로써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낀다.’ 고통은 시인이 타자와 공명하는 창(窓)이며, 타자의 심연과 마주하는 시적 징후이다.
시인은 존재의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외부적 상황에 시선을 집중한다. 거기에는 돈이 없어 해체되는 가족이 있고, 힘이 없기에 희생을 강요당한 종군위안부와 이산가족들이 있다. 그들은 “아픔이 어린 나를 어른으로 만들었고/설움이 젊은 나를 늙은이 되게 했으나/나는 그날을 잊지 못해 악물고 살아왔고/억지로, 억지로 살아왔다”(「빼앗긴 시간」)고 이야기한다. “빼앗긴 시간”은 고스란히 그들이 감내하며 살아야 했던 고통의 시간일 터이다. 시인의 시선이 미치는 자리는 바로 이러한 타자들의 “빼앗긴 시간”과 맞닿아 있는바, 이번 시집을 관류하는 묵시록적인 시대인식은 타자들의 “빼앗긴 시간”이 결국은 ‘세상의 폭력’과 무관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하겠다.
인간의 마을에서 살고 싶었다
집도 없고 절도 없던 그대, 아내를 만나
벽체를 이루고 지붕이 되어
비바람을 막듯이 낙숫물을 받듯이
체온을 나누며
미움도 쌓으며
그렇게 한 번 살아보고 싶었겠지
사랑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돈인가 가족이 한 집에서 살 수 있게 하는
돈이 돈을 낳고 빚이 빚을 낳는다
대출금 납부 기한에 납부를 못하면?
카드 결제일에 결제를 못하면?
세금을 제때 내지 못하면?
연체가 누적되면? 점점 줄어드는 가계
날이면 날마다 조여드는 것들
-「너를 미치게 하는 것들․1」에서
“인간의 마을”을 지배하는 것이 돈이다. “체온을 나누며/미움을 쌓으며” 살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는데, “인간의 마을”에 사는 대부분의 인간들에게는 돈이 없다. 돈이 없는 데도 그들은 “인간의 마을”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너를 미치게” 하고,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린다. 미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고, 미치지 않으면 적응할 수 없는 세상이다. 「너를 미치게 하는 것들․2」라는 시를 참조한다면, 세상은 “정글”이고 그 정글을 지배하는 법칙은 “지느냐 이기느냐 그것뿐/죽느냐 죽이느냐 그것뿐”이다.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침묵의 거리」)는 시집의 제목은 “복음은 다시 들려오지 않는” 세상, “잠언과 묵시가 사라진 지구”(같은 시)의 상황을 대변한다. 인간의 세상은 “침묵의 거리”로 변하고, “침묵이 세상을 암흑에 휩싸이게 한다”. “미친 혼들이 떠”도는 세상에서 고통에 떨지 않는 시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고통은 타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의 문제로 전이되고, 나아가서 온 세상의 문제로 확장된다. 그렇다면 시인은 이러한 고통을 인간이라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운명으로 생각하는 것인가? 「구멍 속으로」라는 시를 보자.
길을 터라 구멍 막히면 죽는다
내 몸 비록 하나의 창(窓)일지라도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막장일지라도
구멍이 없으면 밥 먹을 수 없다
똥 절대로 눌 수 없다
내 어미 몸의 구멍을 열고 나왔다
목구멍으로 처음 울음 쏟아놓던 날
세계는 나의 기(氣)를 받아들였고
똥구멍으로 처음 똥을 눈 날
나는 세계를 느꼈으리 구멍을 통해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구멍 밖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텅 빈 구멍을 채우는 동안
나는 나를 잃어버리곤 했고
꽉 찬 구멍을 들여다보는 동안
나는 나를 되찾곤 했다
―「구멍 속으로」에서
시인은 구멍을 이야기하고 있다. 구멍은 틈이면서, 세상의 기원이다. “내 어미 몸의 구멍을 열고 나”온 것처럼, 구멍은 세상의 기원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또 이 세상으로 나오는 문이다. 묵시록적인 세상 너머에서 피어나는 ‘구멍’의 상상력은 실상 “저만큼 아름다운 풍경”(「세 번의 만남」)을 향한 시인의 시적 다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늙은 어머니(할머니)를 시화하는 시들(「어머니의 두통약 뇌신」,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 드리며」, 「외할머니의 마지막 굿판」, 「울 할매 생각」)이 이승하의 이번 시집에서 주목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물이 점점 줄어들어 메말라가는 세상”(「산불 진화에 나선 아버지」)에서, 늙은 어머니-할머니의 형상은 세상을 파괴하는 불(“저 깊은 골짜기가 지금은 온통 불/불의 밭이랑 불의 논배미입니다”)의 이미지와 맞서서 생명을 길러내는 양수의 이미지와 결부된다. 묵시록적인 세상은 어떻게 보면 생명으로서의 양수가 사라진 세상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구멍’의 상상력이 이러한 생명의 상상력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시인이 타자의 고통을 인간이 짊어져야 할 운명으로 고정하지 않고 있음을 암시한다. 시인은 불이 지배하는 세계에 양수가 흐를 수 있는 구멍을 내려 한다. 구멍이 막히면 생명은 살 수 없다. 암흑에 휩싸인 인간의 마을에 구멍을 내는 것, 그것이 고통의 흔적으로 여며진 이번 시집에서 이승하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시적 상상의 자리인 셈이다.
2.
권혁웅은 두 번째 시집 마징가 계보학(창비, 2005)에서 기억의 의미를 되짚어내고 있다. 시인에게 기억은 이미 지나간 시절을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장소에 저장된 ‘주름들’을 펼쳐내는 것이다. 다양한 삶으로 겹쳐진 기억의 주름들은 시인의 호출을 받고 다양한 맥락으로 다림질(의미화)된다. 그런데, 시인이 기억을 불러내는 방식은 1980년대의 대중문화라는 매개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선데이서울, 마징가Z, 미키마우스, 스파이더맨 등 대중문화의 다양한 기호들은 시인의 일상적 기억과 어울려 기억의 주름들을 형성한다. 따라서 마징가 계보학에는 두 개의 기억이 공존한다. 대중문화의 다양한 이미지들이 기억의 한 부분을 채운다면, 대중문화의 이미지와 맞물려 표현되는 서민들의 다양한 삶의 양상은 기억의 다른 부분을 채운다. 대중문화의 이미지는 80년대를 살아간 서민들의 삶과 이어지고, 서민들의 삶은 다시 대중문화의 다양한 기호들과 겹쳐진다.
표제작 「마징가 계보학」이라는 시를 보자. “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밤만 되면 갈지자로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라는 시의 첫 부분에서 알 수 있거니와, 이 시는 마징가라는 대중문화의 기호를 차용하여 현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마징가는 폭력의 기호일 뿐, 그것 자체가 시의 핵심은 아니다. 그래서 마징가 Z가 그레이트 마징가로 변주되면 “기운 센 천하장사”는 “오방떡을 만들어 파는 사내”에게 힘으로 밀려난다. 하지만 힘이 센 이 사내도 당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이 “그의 아내”였다. “그의 아내는 한밤에 나가서 오후에 돌아오더니 마침내 집을 나와 먼 산을 넘어 날아갔다”. “짱가”라는 이름으로 비유되는 아내의 형상은 힘(폭력)으로는 통제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대변한다. “사내에게 역마(驛馬)가 있었다면 여자에게는 도화(稻花)가 있었다”. 역마살-도화살로 표현되는 인간의 운명은 인간의 내부에 숨어 있는 ‘외부-바깥’이라 할 수 있다. 거부하고 싶어도 거부할 수 없는 것, 인정하고 살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여자는 날아서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아는 4대 명산은 낙산, 성북산, 개운산 그리고 미아리 고개, 그 너머가 외계였다. 수많은 버스가 UFO 군단처럼 고개를 넘어왔다가 고개를 넘어갔다 사내에게 역마(驛馬)가 있다면 여자에게는 도화(稻花)가 있었다 말 타고 찾아간 계곡, 복숭아꽃 시냇물에 떠내려오니…… 그들이 거기서 세월과 계란을 잊은 채…… 초록빛 자연과 푸른 하늘과…… 내내 행복하기를 바란다
“먼 산 너머”를 향한 갈망은 인간이라면 지니게 될 운명일 것이다. 그것이 역마살로 표현되든, 도화살로 표현되는 인간은 “초록빛 자연과 푸른 하늘”을 향한 꿈을 결코 접을 수 없다. 경계를 넘어 “외계”로 날아간 아내는 이런 점에서, 어떤 폭력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암시한다. 경계 안의 폭력은 경계 밖으로 탈출하는 존재를 통해 해소된다. 대중문화의 이미지와 기억 속의 현실을 교묘하게 겹쳐내는 방식은 「요괴인간」, 「투명인간․1, 2」, 「손」 등에서도 반복되는데, 이러한 점이 권혁웅의 이번 시집을 관류하는 대표적인 특징에 해당될 것이다.
권혁웅은 기억 속의 이미지를 비틀어 내보인다. 잔잔한 어투로 표현되는 대중문화의 이미지는 여러 인물들의 삶과 겹쳐지며 새롭게 해석되고, 그것은 곧바로 기억 속을 부유하는 다양한 ‘나’의 형상으로 확대된다. 「모순」에서 시인은 “내 속에 내가 너무 많다고 노래했던 시인과 촌장은 한 사람이다 나도 그랬다”라고 고백한다. 너무 많은 내 속의 나는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동네방네 내 이름을 부르며 귀가할 때마다 나는 출가한 붓다였고, 샴쌍둥이처럼 그녀의 몸에 세들어 살고 싶을 때마다 나는 늑대인간이었으며, 출근하기 싫어 장판에 들러붙을 때마다 나는 그레고르 잠자였다”. 대중문화라는 이미지의 세계를 경유하여 다양한 서민들의 삶을 엿본 시인이 도달한 장소는 이처럼 서민들의 삶만큼이나 다양하게 분열되는 ‘나’였던 셈이다.
작은 돌 하나로 잠든 그의 수심을 짐작해보려 한 적이 있다 그는 주름치마처럼 구겨졌으나 금세 제 표정을 다림질했다. 팔매질 한 번에 수십 번 나이테가 그려졌으니 그에게도 여러 세상이 지나갔던 거다
―「수면」 전문
시인에게 기억은 “여러 세상이 지나”간 주름들이다. 수많은 기억의 주름들을 다림질하는 주체가 금세 제 표정을 되찾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다림질된 표정 속에는 또한 다양한 주름들이 겹쳐져 있다. “작은 돌 하나”가 잔잔한 수면에 수십 개의 나이테를 그려내듯, 하나의 기억이 풀리면 그와 연관된 여러 가지 기억들이 연쇄적으로 풀려 나온다. ‘계보학’이라는 말은 이러한 기억들의 끊임없는 연쇄작용을 의미할 터이다. 슈퍼맨이 슈퍼마켓의 “대단한 사내”(「슈퍼맨」)를 불러내고, 우주소년 아톰이 “낙원이발소”의 “땅딸이 이발사 아저씨”(「아톰」)를 불러내는 것은 주름진 기억들이 한순간에 풀리면서 생겨난 기억의 환유적 작용 때문일 것이다. 권혁웅은 그 기억의 흔적 위에서 자신이 살아왔던 시대의 징후를 보고, 느낀다. 그가 거쳐 온 1980년대의 세상은, 그가 살아가고 있는 2000년대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지만, 동시에 2000년대의 세상 속에 1980년대의 세상은 여전히 주름진 채로 남아 있다. 시인의 다림질된 표정은 1980년대의 부재를 알려주는 기호가 아니다. 다림질된 표정의 이면에서 기억의 주름들은 펼쳐질 날을 기다린다. 마징가 계보학은 그 기억의 주름들이 2000년대의 세상으로 풀려나는 하나의 예증일 것이다.
3.
김근의 첫 시집 뱀소년의 외출(문학동네, 2005)은 신화적인 상상력으로 넘쳐난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한 상상력이 신화적 상상력의 기본적인 특성이라면, 김근의 시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로 이미지화함으로써 신화와 현실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아기들의 몸 없는 머리를 늙은 어미는 하나씩 뽑아”(「헤헤 헤헤헤헤」)드는 세계, “나는 내가 태어난 바다를 찾아서 왔는데 바다에 닿자마자 해는 내 살을 뜯어먹기 시작”(「오래된 자궁」)하는 세계가 김근이 시화하는 신화적 세계이다. 거기에는 오래된 우물이 있고, 그 “우물 속에는 자주 뱀 한 마리가 똬리 틀고 살았”(「우물」)다. <시인의 말>을 참조하면, 우물과 우물 속의 뱀 이야기는 시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실제의 현실이다. 그런데, 김근은 이러한 ‘현실’을 설화적인 현실로 부풀리기 시작한다. “어미는 미친 여자처럼 웃”고, 증조할아비와 증조할미는 죽지 않는다. “어떤 날은 우물에서 아기도 몇 마리 함께 건져졌는데 그 아기들의 몸에도 비늘이 묻어 있”다. 현실에 근거하되, 현실을 이탈하는 상황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수많은 현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보이는 세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는 이루어진다. 그래서 “나는 아주 조금씩 어미를 뜯어먹고 아주 조금씩 늙어”간다.
어미를 뜯어먹는 화자의 형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뱀소년의 외출」의 시적 화자는 “내 날카로운 독니로” “어미의 살점”을 “찢고 발긴”다. 어미의 살점을 찢고 발김으로써 화자가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시인은 “어미이기도 하고 어미가 아니기도 한/아들이기도 하고 아들이 아니기도 한/암소이기도 하고 수소가 아니기도 한”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뱀소년이 어미의 살점을 찢고 태어났을 때, 뱀소년과 어미의 관계는 모호한 관계가 되어 버린다.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어미와 자식의 관계가 뒤집혀 “어느 것이 허물 안의 기억인지/어느 것이 허물 바깥의 기억인지” 알 수 없는 상황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이 뱀소년에게는 경계가 지워지는 순간이다. 시인은 그 경계 위에서 위태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 금기를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신화의 내용은 위험한 것이다. 그들은 금기를 “어둠의 딱딱한 껍질”(「어두운, 술집들의 거리」) 속에 가두고, 금기의 해체는 신화라는 이야기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거리는 어디에든 있어 어둠은 모두 그런 거리를 하나씩 잉태하고 있거든 도시의 골목 한 귀퉁이를 지나다 미끈하고 딱딱한 어둠을 만나게 되면 네 온몸을 밀어넣어 봐 틀림없이 그 거리로 들어가게 될 거야 기꺼이 네 눈알을 빼낼 용기만 있다면 말이지
―「어두운, 술집들의 거리」에서
라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어둠을 벽으로 보지 않으려면 “기꺼이 네 눈알을 빼낼 용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어둠의 벽은 어둠을 어둠으로 보려는 사람에게는 벽으로 나타나지만 그 어둠의 이면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에게는 벽으로 인식될 수 없다. “미끈하고 딱딱한 어둠” 속으로 온몸을 밀어 넣을 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어둠 속의 세계가 현실로 드러난다. 그것은 현실이되 현실이 아니고, 현실이 아니되 현실이다. 경계의 자리에서 펼쳐지는 신화의 세계는 이처럼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세상과 기꺼이 만나려는 주체의 의지를 요구한다. 경계는 바깥이고, 바깥은 “전혀 다른 세계”(「바깥․1」)이다. “저 무거운 어둠의 조각들 때문에/시들지도 않은 꽃모가지들이/툭, 툭, 져 내리는 것”(「봄밤」)이라면, 신화적 상상의 세계, 다시 말해 어둠 저편(바깥)의 세상에서는 “몸에 꽃모가지들 돋아난다 돋아나 깔깔거린다”(「밤마다 축제」). 중요한 것은 신화의 내용이 아니라, 그 신화의 내용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화자(주체)의 태도이다. 세상 속의 ‘나’가 여러 시기의 ‘나’로 분열되듯(「그림자 밟기」) 세상 역시 여러 종류의 세상으로 끊임없이 분열한다. 그것이 김근이 지향하는 시의 세상이고, 신화적 상상의 세계이다.
그러나 돌의 피를 받아 마시는
언제나 푸른 이끼들뿐이다
그 단단한 피로 인해
그것들은 결국 돌빛으로 말라 죽는다 비로소
돌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사랑」 전문
김근의 시에서 죽음은 경계가 사라지는 지점이자, 신화와 현실의 경계가 사라지는 지점이다. 푸른 이끼가 말라죽음으로써 돌의 일부가 되고, 그로써 돌과 이끼의 경계는 사라진다. 이것을 돌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푸른 이끼의 운명이고, 돌의 운명이다. 그 운명이 둘을 하나로 만든다. 돌이되 돌만은 아닌 돌의 세계는 이렇게 완성된다. 「작은 방」이라는 시에서도 이러한 상황이 반복된다. 작은 방에 갇혀 “두 번 다시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던 그는 죽음(“그의 푹 꺼진 육체에서 썩은 내가 풍겨나왔다”)으로써 “나”와 하나가 된다. “그의 몸에서 빠져나온 구더기들이 스멀스멀 내 몸으로 건너”올 때 바깥을 거부했던 “작은 방은 금방 무너져내렸다”. 작은 방을 나온 그의 몸은 나의 몸을 통과함으로써 작은 방의 바깥으로 나오게 되는 셈이다.
「무서운 설경(雪景)」에서 시인은 이러한 상황을 “죽은 자들이 나를 통과해 간다 서서히/내 귀에선 어두운 꽃씨들이 발아하기 시작한다”라고 표현한다. 나는 산 자이면서 죽은 자이다. 죽은 자가 산 자를 통과해 삶으로 되돌아오듯, 산 자는 죽은 자의 몸을 빌려 죽음으로 다가간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해소되는 이 자리가 김근의 시가 도달한 시적 상상의 자리이다. 따라서 그가 부르는 노래는 “입을 다물 수 없는 노래”(「입을 다물 수 없는 노래」)가 될 수밖에 없다. 시집의 마지막 시 「입을 다물 수 없는 노래」에서 시인은 “마을의 청년들이 모두 숲 너머로 끌려간 뒤부터” 잊혀지기 시작한 노래를 상기한다. 그 노래는 아마도 공동체에서 금지한 노래일 것이다. 금지된 노래는 금지되었기 때문에 더욱 더 불려져야 한다. 그래야 금지된 것들이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고, 그래야 이 세상에 경계를 세운 것들이 사라질 수 있다. 김근은 이처럼 공동체가 금지한 세계(말들)를 끊임없이 이 세상으로 되불러낸다. “그것들은 이따금 깊이 박혀 있는 총알의 파편처럼 온몸을 욱신거리게” 하는 “질거나 된 말들”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내 입을 다물게 해 줄 이”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계속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라면, 그것만큼 행복한 삶도 없을 것이다.
오홍진․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평론 「죽음을 통해 죽음을 넘어 화해하는 길」 등
- 이전글21호 서평/임영봉 08.02.29
- 다음글21호 서평/강경희 08.02.2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