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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서평/임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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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철 평론집, 칼날 위에 서다(실천문학사, 2005)
하상일 평론집, 전망과 성찰(작가마을, 2005)
열정과 균형감각, 두 개의 비평적 개성에 대하여
임영봉
l. 무당의 언어와 그 뜨거움의 세계
비평의 언어가 이렇게 뜨거워도 되는 것일까. 젊은 비평가 고명철의 세 번째 문학평론집 칼날 위에 서다를 읽어나가는 동안 나는 자주 그런 물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비평적 글쓰기 일반의 성격을 거론할 때 우리는 먼저 ‘냉정함’을 염두에 두게 된다. 비평가의 비평행위란 그 태도와 어법에 있어 생리적으로 뜨겁기보다는 차갑다. 좋은 비평을 두고 흔히 ‘예리하다’거나 ‘날카롭다’고 할 때도 그것은 뜨겁기보다는 차갑기 그지없는 성질의 어떤 국면을 환기시킨다. 비평 일반의 운명이 그러하다고 생각할 때 그의 비평이 ‘뜨겁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뿐만 아니라 이 뜨거움을 비평가 자신이 자기 비평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
「비평, 칼날 위에서 추는 한바탕 신명난 춤」이라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고명철은 자신의 비평을 굿판에서 춤을 추는 무녀의 춤사위에 비유하고 있다. 그는 “냉철한 이성적 사유로 조직된 언어의 향연이 아니라, 온몸의 신경을 팽팽히 곧추세운 채 마치 신들린 것처럼 한바탕 신명나게 춤을 추는 그러한 비평을 욕망한다.”(8쪽)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비평을 ‘행위예술’로 구분하고, 비평행위란 ‘자유분방한 전위적 퍼포먼스’임을 선언하고 있는데, 그런 주장은 가히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나에게는 그 머리말이 다른 어떤 글보다도 흥미롭고 인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 글은 비평사를 통틀어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전대미문의 비평관의 표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고명철이 고안해낸 이 비유는 아마도 많은 비평가들이 자신의 비평적 개성을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낸 여러 가지 표현 중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례 중의 하나로 남을 것이다.(내가 그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라면, 그의 비유는 무엇보다 형식상으로 ‘재미’있고 내용상으로 ‘적확’하다.) 그렇다면 그의 비평적 수사가 떠올리게 만드는 ‘뜨거움’의 구체적 의미는 과연 어떠한 성질의 것인가. 칼날 위에 서다에서 이 뜨거움이 그의 비평언어와 어떤 식으로 만나고 있으며 또 어떻게 그 자신의 비평가적 개성의 형성에 이바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고명철 평론집 칼날 위에 서다는 분량이 오백여 쪽에 이르고 있는데 그의 두 번째 평론집 비평의 잉걸불(2002)을 염두에 둘 때 이 책의 두께는 그의 비평적 글쓰기가 매우 지속적이면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의 비평이 ‘뜨겁다’는 것은 이 책의 전반적 내용-쟁점 중심의 논쟁과 민족문학론, 작가/작품론의 범주로 묶여있는 대부분의 글에서 느낄 수 있다. 대체로 이 책에 묶여있는 글들은 그 성격의 다름에 상관없이 모두 오늘의 우리 ‘문학판’을 배경으로 한 ‘현장의식’을 담고 있는데, 특히 오늘의 한국문학 평단에 대한 그 자신의 문제의식을 표명하고 있는 <1부>의 글들은 이와 같은 특징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그가 가진 문제의식의 핵심은 90년대 이후 새로운 문학적 국면에 에워싸인 오늘의 비평이 타락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데에 놓여 있다. 그는 오늘의 한국문학 평단이 새로운 종류의 새것 콤플렉스와 과도한 비평적 욕망, 이론 중심의 강단비평, 출판상업주의와 연결된 주례사 비평 등에 휘둘리고 있음을 직시하고 이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타락한 비평의 형태에 대하여 그는 ‘살아 숨쉬는 비평’을 제안하고 있는데 그것은 “현실의 구체적 맥락 속에서 작품의 비의성을 해독해내고 그것의 가치를 평가해내는” 비평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논쟁적 성격의 글들이 보여주는 ‘현장적’ 의식, ‘직설적’ 논리, ‘육성’에 가까운 어법 등의 요소는 고명철 비평이 가진 ‘뜨거움’의 원천을 이루고 있다.
<2부>의 민족문학론에 관련된 글들 역시 그 열기는 매우 뜨겁다. 이 민족문학론 관련 글들은 <1부>에서 이론보다 ‘현실’을, 개체적 욕망보다 ‘집단’의 진실을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던 그의 사고가 하나의 이념에 근거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그는 민족문학이라는 진보적 문학이념의 옹호자이면서 계승자이다. 백낙청과 염무웅이라는 두 명의 비평가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함께 그는 현단계 민족문학(운동)의 향방과 관련하여 강도 높은 주문을 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진보적 문학의 갱신은 ‘선언’의 차원에서 어떤 원칙을 반복적으로 제시할 게 아니라 과거의 진보적 문학이 거둔 성과를 창조적으로 전유함은 물론, 발전적으로 해체함으로써 갱신에 값하는 실질적 내용물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진보적 문학이 갈 길은 더디고 힘들다. 하지만 ‘우공이산’의 진리를 믿는 한 이 길은 아름다운 길이다.”(187쪽) 지난 시대의 민족문학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해나가는 문제는 그 중요성 때문에 작가/작품에 대한 논의과정에서도 자주 반복되고 있다. 비평가 고명철의 이념적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민족문학론은 그에게 있어 주요한 비평적 화두이며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 논의는 앞으로 더욱 깊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3부>와 <4부>의 작가/작품론의 성격을 띤 글들은 성실한 텍스트 분석과 함께 그가 견지하고 있는 문학 이념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 책 전체를 두고 말한다면, 나의 관심을 가장 크게 끌었던 경우는 <2부>의 ‘4.3문학’과 ‘베트남전쟁소설’을 다루고 있는 두 개의 글, 「화마의 섬에서 평화의 섬으로 가는 길」과 「베트남전쟁소설, 기억과 망각의 변증법」이었다. 고명철의 칼날 위에 서다는 생생한 현장감각과 풍부한 문제의식으로 충만해 있는데 앞서 말한바, 뜨거움을 담고 있는 육성의 언어가 그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이 생생한 육성의 언어는 덜 육화된 관념을 낳기도 한다. 이번에 그의 글을 천천히 읽어나가면서 나는 그가 가진 비평적 개성의 한 부분이 그가 구사하는 입말투의 활달한 문체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그가 가끔씩 ‘빙의’나 ‘활착’과 같은, 우리가 평소에 거의 사용하지 않는 낯선 한자어들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가 그런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어휘들을 중첩해서 쓸 때 그의 글쓰기는 갑자기 무거운 분위기의 번역체로 바뀌고 만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신속․생생함을 표현하는 구체어(현실)와, 그에 대하여 한 박자 느린 호흡을 요구하는 추상어(관념/이론)의 세계가 갈등 국면을 빚어내는 순간이 아닐까.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둘 때 4.3문학과 베트남전쟁소설을 다루고 있는 두 개의 글은 ‘생생한 현장감각’과 ‘논리적 관념(화)’의 가장 행복한 균형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경우로 여겨진다.
그의 비평행위에 내재되어 있는 개인과 사회에 대한 가치의식 또한 음미될 필요가 있다. 전후의 한국 현대사 가운데서 개인과 사회는 늘 충돌해 왔다. 개인의 자유와 집단으로서의 사회적 평등은 여전히 양립 불가능한 가치인가. 이와 같은 물음을 떠올릴 때 개인과 사회의 요구를 통합하는 새로운 문학적 이념형을 민족문학 혹은 민중문학의 전통 속에서 이끌어내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돋보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는 자기 세대에 부여된 소임 중 하나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70년대에 나서 9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세대이다. 나는 그들이 개인과 사회에 대한 가장 건전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세대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앞 세대들의 공통 경험인 억압적 기억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런 점에서 개인과 사회의 가치에 대한 객관적 체험 세대이다. 이런 문화적 배경과 관련하여 그가 수행하는 비평행위의 성격은 한편으로 <비평과 전망>이라는 자기 세대 비평그룹의 정체성으로부터 설명될 수 있을 터이다. 앞 세대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합리적 가치의식의 내면화에 근거하고 있는 그들 세대의 비평적 글쓰기는 비평사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고명철 비평에 대한 전망은 자기세대의 비평적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비평과 전망>의 미래와 무관할 수 없다. 그렇다면 <비평과 전망>이라는 새로운 비평-기계의 육체 속에서 그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을까. 이 대목에서 나는 한 그루의 튼실한 나무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타는 혀의 이명원이 대지의 근원을 향해 뻗어나가는 뿌리라면, 칼날 위에 서다의 고명철은 태양을 향해 나아가는 향일성의 가지와 무성한 잎사귀들을 펄럭이고 있으며, 페르세우스의 방패의 홍기돈은 그 두 세계가 섞이면서 연결되는 지점의 줄기를 이루고 있다. 나는 그 나무가 자기 내부의 활발한 분자 운동에 의해 뿌리줄기라는 형태의 리좀적 수목유형으로 서서히 커나가는 모습을 떠올렸다.
돌이켜보면 그의 두 번째 평론집이 ‘잉걸불’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은 예사롭지 않다. 왜냐하면 칼날 위에 서다에 이르러 고명철의 비평언어는 한껏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혹시 그는 신들린 무당이 되어 춤을 추면서 스스로 불꽃이 되기를 욕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가 자신의 내부에 품고 있는 이 뜨거움은 그 자신의 비평적 글쓰기를 어떤 운명 속으로 인도해 나갈 것인가. 그 대답이 미정형인 것은 ‘불’의 운명이 여러 갈래이기 때문이다.
2. 주변인의 균형감각
전망과 성찰은 하상일의 두 번째 문학평론집이다. 이 평론집은 고명철의 칼날 위에 서다와 여러 모로 비교될 수 있다. 일단 그가 고명철과 동년배(1970년 출생)이자 현재 그들 세대 비평가들의 교두보인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다. 이런 점들을 떠올릴 때 하상일과 고명철은 서로에 대하여 친근한 동료이자 동지라는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임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이 두 명의 젊은 비평가들이 보여주는 ‘세계관’과 ‘문제의식’의 공유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물론 여기에도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고, 나의 관심사 또한 바로 그러한 측면에 놓여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차이의 존재는 비평이라는 글쓰기 형식의 고유한 성격이 무엇인가에 대한 새삼스런 질문 또한 떠올리게 만든다. 비평적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인식적 기능에 충실하지만(이때 비평은 학술논문과 같은 ‘과학’에 접근한다), 동시에 그것은 시나 소설과 같은 창작의 차원-‘표현’이기를 욕망한다. 그렇다면 이 표현적 측면은 한 비평가의 고유한 세계, ‘개성’의 확보 과정에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 그런 물음들 속에서 나는 하상일의 두 번째 평론집을 읽어나갔다.
하상일의 평론집 전망과 성찰은 전체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책의 <1부>를 이루고 있는 ‘권력․제도․비평’은 그가 서 있는 자리를 분명히 보여준다. <문학과지성> 에콜의 문학사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전후비평의 타자화와 폐쇄적 권력지향성」, <조선일보>와 동인문학상 운영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는 「문언유착과 문학권력의 제도화」,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에 대한 제언에 해당하는 「문화정책의 변화와 실천의 객관성」 등의 글에서 그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현행 ‘문학제도’와 ‘문학권력’에 대한 비판,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문학적 패러다임’을 건설해나가는 일이다. 이 글들은 그가 <비평과 전망>의 일원으로서 한국문학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문제의식을 자기세대 비평가들과 공유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그가 가진 비평가로서의 정체성은 고명철의 경우와 동일하게 자기세대가 담지하고 있는 합리적 의식과 계몽적 의지에 뿌리를 둔 것으로 이를 구현하고자 하는 비평적 실천에 충실하다.
물론 이와 같은 측면과 더불어 하상일은 자신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갖추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비평가로서 자신의 독자성을 구축해나가고 있다. 예컨대 그가 “참여정부의 문화정책이 ‘분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어 왔지만, 중앙/지역의 이분법적 구도는 여전히 깨뜨려지지 않고 있다.”(65쪽)고 주장할 때 문화적 권력의 ‘분점’과 문화생산-향유의 기회 ‘균등’을 요구하는 그의 목소리는 상투적인 차원을 넘어 나름의 절실함을 띠게 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지방대학 출신일 뿐만 아니라 중앙문단의 공식화된 등단코스를 거치지 않고 비평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수립해나간 드문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상일이 가진 이러한 희귀성은 <비평과 전망> 동인들, 더 나아가자면 자기세대 비평가 집단 전체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는 특별한 위상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을 염두에 둘 때 그가 가진 비평가로서의 ‘자의식’이 그 누구보다 내밀하고 다중적인 성격의 것임을 눈치 챌 수 있다. 비평가로서 하상일의 출발점이 ‘타락한 중심을 향한 반역’의 선언에서 시작되었고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그 자신의 목소리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 또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하상일의 이번 평론집은 비평가로서 그 자신의 정체성과 그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에 대한 확인일 뿐만 아니라 하상일 비평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그 가능성들은 하상일의 비평가적 ‘개성’에 해당하는 것이니만치 그를 이해하는 데 있어 나름의 의미를 띠고 있는 것으로 2․3․4부를 구성하고 있는 실제 비평의 사례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번 평론집에서 <2․3․4부>를 구성하고 글들은 내용상 ‘현대시의 원리론’, ‘시인론과 시 작품론’, ‘시집 서평’에 해당하는 경우로 각각 구별될 수 있지만 그 모두가 공통적으로 ‘시’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첫 번째 평론집 타락한 중심을 향한 반역과 비교할 때 전망과 성찰의 미덕은 그가 보여주는 미시적 시각에 놓여있다. 비평가의 미시적 시각이 이념이나 원리의 탐구에 치중하는 거시적(!) 글쓰기가 놓치기 쉬운 측면이라면, 시를 대상으로 삼고 있는 비평행위 속에서 그의 글쓰기는 마침내 자신의 모든 촉수를 통해 온전한 감각을 발휘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텍스트 자체에 대한 섬세한 독법을 요구하는 그의 시 읽기와 해석이 견고한 토대 위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는 이 책의 머리말 첫 문장에서 “최근 우리 시의 변화를 살펴보면 도대체 시 혹은 시적인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고민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 물음은 “더 이상 시는 대중과의 소통을 고민하지 않으며 자족적인 세계에 갇혀 있을 뿐이다.”는 비판적 문제의식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평론집 전망과 성찰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하상일의 시 비평은, ‘시 혹은 시적인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물음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기에 논의 수준 또한 견고함을 보여준다. 비평가 하상일의 판단에 의하면 우리 시대의 문학적 ‘혼란과 혼동’은 문학의 ‘본질 혹은 근원’에 대한 재인식을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으며, 이 문제를 그는 ‘우리 시에 대한 전망과 성찰’을 통해 수행해 나간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수행하는 전망과 성찰이 전통적인 ‘서정시’를 자신의 거울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에 근거하는 서정시의 원리와 정신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최근의 부정적인 시 경향, 특히 키취적 감수성과 현란한 기법을 자랑하는 시들의 허위성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정지원의 시집에 대한 글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87년 6월 항쟁을 기폭제로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하고 이에 맞선 정권의 무분별한 탄압이 극에 달했던 90년대 초반, 수많은 청년들이 연쇄적으로 넋이 되어 우리 곁을 떠나야만 했던 그 시절, 김남주와 김지하의 시를 읽고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를 가방에 넣어 다니던 그때의 풍경들은 이번 시집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지난 90년대의 시간들이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형상화되어 있는 정지원의 시를 읽으면서 동년배인 필자는 사뭇 가슴 뭉클한 감회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이러한 감정의 과잉은 그의 시를 이해하고 분석하는데 상당한 걸림돌이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대를 함께 했던 필자에게 있어서 적당한 거리조정이란 처음부터 수용하기 어려운 이론적 객관성에 불과하다. 다만 그의 시에서 역사의 현장을 발견하는 데만 매몰되지 않고 문학의 본질을 담은 예술적 성취를 가늠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비교적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할 따름이다.”(243쪽)라고. 이 대목에서 하상일은 비평가로서의 자기 판단을 위협하는 ‘감정의 과잉’을 우려하고 있지만, 그 자신이 겸손하게 말하고 있는 ‘비교적 객관적인 자세’에서 결코 벗어나는 법이 없다. 그의 사고와 언어가 보여주는 이와 같은 ‘균형감각’은 때때로 ‘일탈’을 감행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겸손하고 침착한 성격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가 가진 균형감각의 궁극적 원천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을 나는 그가 서 있는 자리, 중심의 공허함을 비출 수 있는 ‘주변인’으로서의 위치에서 찾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수긍할 때 젊은 비평가 하상일의 성숙과정이 제기하는 의미는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다. 비평가로서 하상일의 성공은 한국문단, 더 나아가자면 한국사회 전반의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기:두 권의 평론집을 다룬 이 글은 하나의 제목을 달고 있지만 필자의 사정 때문에 각각 다른 시간적 편차 속에서 독립된 형식으로 씌어진 것임을 밝혀둔다.
임영봉․
경남 김해 출생
․1997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저서 늪에 빠진 언어의 표정 한국 현대문학 비평사론 등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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