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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특집/홍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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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39회 작성일 08-02-29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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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신자유주의와 문화


신자유주의와 출판

홍순철|북칼럼니스트


세계적인 석학이자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L. Friedman)은 비행기를 타고 인도를 여행한 후, 󰡔The World is flat(세계는 평평하다)󰡕이라는 아주 재미있는 제목의 책 한권을 선보였다. 콜럼버스가 이미 500여 년 전에 배를 타고 인도를 다녀온 후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했는데, 최첨단 하이퍼 테크놀로지 시대에 세계는 평평하다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하지만 분명하고도 확신에 찬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세계가 이제 평평해졌다는 그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물리적인 지구의 모습은 분명 둥글지는 몰라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평평해지고 있다. 그리고 세계를 평평하게 만들고 있는 최고의 동력(動力)은 신자유주의 물결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들의 주도하에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이미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키고 있고,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았다. 신자유주의 이론의 근간을 이루는 두 축은 시장경제와 자유무역이라고 할 수 있고, 그 흐름에 가속도를 붙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세계화(Globalism)의 흐름이다.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우리는 “시장 원리”라는 용어를 더욱 자주 듣게 되었고, 그 원리에 따라 재화와 용역 그리고 서비스가 아무런 제약 없이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시장 원리에 따라 자본과 노동이 더 좋은 조건을 찾아 자유롭게 이동하고 있고, 국가간 정보의 벽은 허물어지고 있으며, 그래서 이제 정말 세계는 평평해지고 있다. 󰡔세계는 평평하다󰡕의 저자 토머스 프리드먼은 인도의 실리콘밸리라고 불리는 방갈로르(Bangalore)에서 이러한 현실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었다. “골프장에서 그렇게 쉽고도 간단한 조언을 들은 건 처음이다. ‘그저 마이크로소프트나 IBM건물을 겨냥하면 됩니다.’ 내 파트너는 잔디밭 뒤로 멀리 떨어져 있는 근사하게 생긴 두 개의 빌딩을 가리켰다. 골드만삭스(Goldman Sachs)가 들어갈 빌딩은 아직 준공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 파트너는 골드만삭스가 들어가 있는 건물을 포함해 얘기해줬을 것이다. 휴렛팩커드와 텍사스 인스트루먼트가 입주해 있는 빌딩은 아홉 번째 홀과 열 번째 홀에 나란히 서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의 위치를 표시할 때 쓰는 마커는 복사기 제조회사인 엡손(Epson)제품이었다. 우리 팀의 캐디 한 명은 3M의 로고가 선명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 콜센터를 둘러보면 모든 컴퓨터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즈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컴퓨터 칩은 인텔(Intel) 제품이고 회사의 전화는 루슨트(Lucent)제품이다. 또 냉방 시스템은 캐리어(Carrier) 제품이고 생수는 코카콜라 제품이다.” 이곳이 과연 미국인지 인도의 한복판인지 헷갈릴 만하지 않은가?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유토피아는 바로 이런 모습이다.
신자유주의와 출판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해보자. 세계를 평평하게 만들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출판과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을까? 시장 원리, 자유 무역, 세계화는 출판 시장을 어떻게 변화시켜놓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현재 한국에서 팔리고 있는 아동 영어 그림책 한권을 골라 첫 장을 펼쳐서 그 책의 출신 성분을 살펴보면 짐작해낼 수 있다. “Copyrights by Chronicle Books, USA/Distributed by Raincoast Books in Canada/Manufactured in China. 이 책의 저작권은 미국 크로니컬 북스에 있고, 캐나다에 있는 레인코스트에서 유통을 담당하며, 책의 제작은 중국에서 만들어졌다.” 이 판권 표시 문안에 신자유주의가 담겨져 있다. 글을 쓴 저자와 그림을 그린 저자는 미국에 있는 크로니컬 북스에 판권 관리를 위임했고, 크로니컬 북스는 책을 만드는데 필요한 각종 제반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중국의 업체에 제작을 의뢰했고, 완성된 책들은 다시 태평양 바다를 캐나다 창고에 쌓여있으면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 출판 시장을 상대로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신자유주의가 구축해놓은 시스템을 통해 책을 구입하고 있고, 앞으로 신자유주의 시스템은 더욱 세밀한 부분까지 우리의 출판시장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출판 시장의 대형화, 자본화에 가속도를 붙여줄 것이며, 이러한 추세에 대한 정책적인 논의나 시장 참여자들의 합의가 없이 출판 시장을 완전히 시장 논리에만 맡겨놓을 경우에는 문화적 정체성을 지켜내야 하는 출판의 의미와 가치가 완전히 상실되어 버리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출판이 문화산업이라는 말 속에는 산업적인 가치와 문화적인 가치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산업적인 방식만으로 출판에 접근한다면 문화의 다양성은 사라지게 되어 있고, 그 빈자리에는 소위 돈이 되는 책들로만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앙드레 쉬프랭(Andre Shifflin)은 미국에서 가장 수준 높은 인문 예술 교양서적들을 출판했던 판테온 출판사(Pantheon Books)의 사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판테온 출판사는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어 교양인들의 필독서로 여겨졌던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를 미국에서 출간한 것을 비롯해, 좌파 역사학자 에릭 홉스본(Eric Hobsbawn) 그리고 미국 최고의 깨어있는 지성으로 여겨지는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등의 인물들을 발굴해내어 미국 독자들의 지성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판테온 출판사의 경영권이 대형 출판 미디어 그룹에 넘어가고, 새로 장악한 경영진이 수익성 위주의 책을 출간할 것을 요구하자 30년 동안 미국의 대표 인문 교양 출판사를 진두지휘했던 앙드레 쉬프랭은 그에 반기를 들고 사퇴해 버렸다. 그는『열정의 편집』이라는 책에서 신자유주의가 출판계에 몰고 온 파장과 악영향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지난 1999년 미국에서 상위 20개 출판사의 매출액 규모가 미국 전체 도서 시장의 93%를 차지했고, 상위 10개 출판사 점유율은 75%를 넘어섰다. 고급 인문 교양서를 만들어냈던 편집자들의 열정과 자부심은 사라지고 있고, 오직 출판 시장에는 숫자놀음과 수익성만이 팽배하게 자리 잡고 있다고 전한다. 복합 미디어 그룹은 출판의 다양성 확보를 이유로 색깔 있는 출판사를 식구로 맞아들이지만, 결국 일단 울타리 안에 들어오고 나면 다양성보다는 수익성에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도 전 세계 출판 시장에는 인수 합병과 관련된 무성한 소문들이 계속되고 있다. 독일 최대의 출판미디어 그룹 베텔스만(Bertelsm󰡕 ann)은 미국 최고의 출판 브랜드 랜덤하우스(Random House)를 인수한지 8년이 지난 지금 다시 랜덤하우스를 매각할 만한 대상을 물색하고 있다고 한다. 새 주인이 누가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전 세계 출판인들은 오랜 인수 합병의 세월을 걷고 있는 랜덤하우스의 현실을 보면서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실감하고 있다. 반면 프랑스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아셰트 리브르(Hachette Livre)는 지난 2월 미국 출판 시장에서 6%의 판매 점유율을 자랑하고 있는 타임워너계열 출판 그룹인 타임워너 북그룹(Time Warner Book Group)의 인수 합병을 공식 선언했다. 타임워너 그룹은 세계적으로 온라인 출판 시장의 붐이 일던 2000년대 초반 전자책 사업을 위해 아메리카 온라인(AOL)과 합병을 했다가, 전자책 시장이 시들어지면서 오히려 그것이 독이 되어 경영의 악화를 가져왔고, 그리고 결국 매각이라는 최악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랜덤하우스와 타임워너 모두 미국인들의 자존심과도 같은 출판사이지만, 신자유주의 시장 논리에 의해 인수 합병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이번에 타임워너를 인수하기로 발표한 아셰트 그룹은 앞으로 2~3개의 미국 출판사들을 추가로 인수해, 미국 출판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거대 출판 자본들은 지금도 먹잇감을 찾아 세계 시장을 기웃거리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출판시장에 가져올 파장이 더욱 두려운 이유는 책을 통해 전달된 이념과 가치의 중요성 때문이다. 2005년을 마감하며 독일 출판시장에 대한 주요 언론들의 총평은 “해리포터가 독일 출판시장을 먹여 살렸다.”였다. 2005년 독일의 베스트셀러에는 해리포터뿐만이 아니라 다빈치 코드를 비롯한 댄 브라운의 소설 3권, 그리고 파울로 코엘류의 소설들까지 외국 번역서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독일 주요 언론은 독일 출판 시장에서 최근 들어 급속하게 증가되는 영미 번역서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면서, “책을 통해 시작된 세계화는 다양한 제품과 서비스를 통해 독일인들의 사고와 가치를 서서히 바꾸어놓을 것이다.”는 보도를 했다. 실제로 스타벅스의 혁신 성공 사례를 다룬 책들이 번역되어 독일에 소개되면서 독일 전역에 스타벅스 매장이 증가되기 시작했고, 미국 출신의 육아 전문가의 책이 잘 팔리면, 그것을 읽은 부모들은 책에서 접한 미국 브랜드의 아동용 장난감이나 육아용품을 찾게 되어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에서 단기간 내에 브랜드 런칭에 성공한 브랜드를 살펴보면 거의 예외 없이 그 브랜드에 대한 책이 동시에 번역 출간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아직까지 전 세계의 독자들은 책을 통해 접하는 정보가 가장 믿을 만하며, 그 정보들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지금 신자유주의를 선도하고 있는 소위 강대국들은 출판과 연관 산업의 메커니즘과 시너지 효과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고 또한 그것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신자유주의가 누군가에게 혜택을 안겨다주고 있다면, 반드시 신자유주의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되는 누군가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상대적 강자들이 항상 혜택을 보아왔고 반대로 상대적 약자들이 피해를 받아왔다. 강자들은 신자유주의를 통해 더욱 강해지고 있으며, 약자들은 신자유주의로 인해 더욱 고통의 강도가 더해지고 있다. 대형화 자본화와 함께 밀려오는 신자유주의는 중간계층의 몰락을 가져오고 있다. 모든 경제 문제의 만능 해결책으로 평가받던 신자유주의는 지금 양극화라는 엄청난 문제에 봉착해 있다. 시장 경쟁 논리에서 뒤쳐진 상대적 약자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당신네들은 경쟁력이 없으니까, 당신들의 인생은 적자 인생이니까, 당신들은 낙오자니까 ……, 양극화 문제는 필연적으로 사회 분열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완성을 위해서 국가(정부)의 개입과 역할을 제한되어 있다. 최근 한미 FTA 개정 논의를 지켜보아도 정부가 얼마나 곤란한 딜레마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있다. 계속해서 쌀 개방을 미루고 우리 농민들을 보호하고자 한다면, 미국은 우리의 수출 주력 상품인 자동차와 반도체에 엄청난 관세를 매기거나 혹은 다른 방법으로 압력을 가해 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것을 시장 논리에 맡길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에 따른 부정적인 효과와 그림자에 대해서는 애써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출판 시장은 80:20의 법칙이 아니라, 95:5의 법칙이라는 표현이 적합하다고 할 정도로 극심한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연매출 300억을 넘는 출판사들이 등장한 지 불과 몇 년 전인 것 같은데, 올해 시작과 동시에 연매출 1,000억을 목표로 하는 출판사가 등장했고, 그 목표 달성을 위해 실제로 엄청난 자본과 인력을 쏟아 붓고 있다. 그리고 지금 추세대로라면 앞으로 1~2년 내에 2~3곳 정도의 연매출 1,000억대 출판사들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얼마 전 우리 출판계에서는 연매출 1,000억을 목표로 내세우고 막강한 자본의 힘으로 대형화를 추진하고 있는 출판사 대표와, 그것에 반대하는 모 출판사 대표가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논쟁과 관련해 출판계 내부와 언론계까지 가담해 누구의 주장이 옳으냐를 두고 볼썽사나운 또 다른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애초에 출판의 미래를 토론하는 자리의 주제부터가 과연 올바른 것이었느냐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출판의 미래를 위해 자본을 통한 대형화가 옳으냐, 아니면 기획력으로 승부하는 것이 옳으냐? 이러한 접근 방식은 이분법적인 사고의 한계가 드러나는 대목이며, 트렌드를 읽어내고 지적 담론을 형성하는 최일선에 있어야 하는 출판계 인사들의 토론 주제로는 너무 막힌 주제였다는 생각이다. 출판의 대형화와 기획력 중심. 이 문제는 무엇이 옳으냐를 두고 토론할 주제는 아니다. 출판 시장의 대형화 자본화 문제는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취사선택할 수 있거나 맘에 들지 않는다고 거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출판 시장의 대형화, 자본화는 신자유주의 물결을 타고 마치 거대한 해일처럼 몰려오고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직도 많은 출판인들이 출판 시장의 대형화 자본화 이야기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고, 그 변화를 거부하고 저항하고자 한다. 하지만 변화라고 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먼저 하지 않으면 누군가에 의해 당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더 이상 이미 방향을 잡고 흐르고 있는 어마어마한 물길을 돌이켜보자고 거부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합리적으로 수용하고 우리의 그릇에 잘 담으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이미 출판 시장의 대형화는 신자유주의 물결을 타고 이미 우리 출판 시장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 대교베텔스만의 전신인 베텔스만 코리아의 상륙, 랜덤하우스중앙의 탄생, 웅진, 민음사, 위즈덤하우스 등 대형 출판사들의 임프린트를 통한 사세 확장 등, 한국 출판계가 안이한 현실 인식으로 신자유주의 물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외국 자본은 너무도 편안하게 한국 출판 시장에 상륙해 시장을 뒤흔들어 놓았고, 이에 뒤질세라 토종 한국의 대형 출판사들이 몸집불리기를 통해 자존심 대결 한판을 하고 있는 것이 지금 한국 출판 시장의 모습이다. 한국 출판의 전통과 맥을 이어왔던 을유문화사, 창작과 비평사, 문학과 지성사, 문학동네 등과 같은 출판사들이 과거와 현재의 위치에 안주하며 신자유주의 물결에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동안 그들은 미래를 이끌어갈 수 있는 주도권을 빼앗겨 버렸다.
안타까운 점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신자유주의가 출판 시장 전반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가를 지켜보면서도, 그 점에 대해 수차례의 갑론을박만 있었을 뿐 적합한 대책이나 생존 전략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출판계 내부에는 이상한 정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대형 자본이 출현하고 이합집산의 물결이 거세지자, 사람들 사이의 정과 동료의식은 사라지고 누구는 어디서 얼마를 받는다더라 하는 식의 뒷소문과 부러움 섞인 시기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시장 논리에 따라 역량 있는 작가의 이동도, 능력 있는 편집자의 이동도, 심지어는 사재기와 같은 출판 유통에 있어서의 반칙 행위도 암묵적으로 정당화시켜 주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예전 같으면 손가락질 받을 행동도 시장 논리를 들먹이며 주장하면 받아들여지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신자유주의와 천민자본주의가 혼동되기 시작됐다. 시장에서는 공정한 룰과 원만한 합의가 사라졌고, 온통 돈으로만 숫자로만 모든 것을 재단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이론이 그토록 신봉하는 시장도 그것이 원만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몇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전제 조건들은 인간의 양심을 근거로 하고 있다. 시장 참여자들의 양심이 사라지면 그 시장은 시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일부 독점적 권력과 지위를 남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참여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만다. 우리 출판 시장에서도 바로 이러한 왜곡된 시장의 모습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일부 대형출판사들은 그들의 막대한 자본을 이용해 주요 타이틀 확보, 제작 스케줄 새치기, 마케팅 조작, 미디어 관리에 앞장서고 있다. 그리고 그 피해가 오히려 양심적인 시장 참여자들에게 전가되고 있다. 나름대로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출판에 뛰어들었던 건전한 양심을 지닌 참여자들이 이런 출판계의 현실에 혀를 내두르며 등을 돌려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출판은 사람들의 사고와 생각을 창조해내고 활자를 통해 전달하는 역할을 지닌 분야이다. 그런 의미에서 출판은 다른 산업과는 차별된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고, 치안이나 교육 분야처럼 일종의 공공재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그리고 세계화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지배하는 트렌드인 것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무작정 시장 논리에만 맡겨놓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최근 도서정가제와 관련된 논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미 시장이 자정기능을 잃었을 때는 제3자가 최소한의 개입을 통한 합의점을 도출해주는 것이 요구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진출입이 자유로운 출판 시장에서 시장을 감독하고 관리하는 제3자의 역할이 더욱 절실하다고 볼 수 있다. 출판이 공공재를 생산하는 산업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면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가장 커다란 문제인 양극화도 해결 방안도 찾아볼 수 있다. 다른 공공재와 마찬가지로 공공기관을 통해 공공재를 소비시키는 것이다. 출판계의 오랜 숙원 사업 중의 하나인 공공도서관 확충을 통해 수익성과 상관없는 책들이 일정 분량 소비되어질 수 있다면, 인문 교양서적을 출판하는 중소형 출판사들의 숨통을 트여주고 양극화 문제를 상당 부분 해소해 줄 수 있다. 보통 인문 분야 책의 경우 손익분기점이 2,000부 내외에서 형성된다고 한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공공도서관, 대학도서관 등 만여 곳에서 에서 1년에 평균 천만 원씩의 예산만 들여서 인문 교양서적을 구매해 도서관에 비치한다면, 약 5,000여 권의 인문 교양 책들이 수익성과 관계없이 출판될 수 있다. 하지만 전국의 많은 도서관들은 아직까지도 책은 출판사들로부터 기증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예산은 녹지사업과 전산시설 확충 등 외관꾸미기에만 신경 쓰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지원만을 바라보며 생떼를 쓰기에 앞서, 양극화를 비롯해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다양한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 출판계 스스로가 변화를 극복해낼 수 있는 내성을 길러내는 것이 필요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출판 시장의 모든 참여자들이 노력하여 출판 시장의 자정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출판계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도서 정가제 논란만 보더라도 대형 서점업계, 중소형 서점업계, 온라인 서점 업계 등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서로 양보할 줄 모르는 신경전이 수년째 방치되고 있다. 컨텐츠를 쥐고 있으면서 주도권을 행사해야 할 출판사들은 오히려 각 업계의 눈치만 살피며 단 몇 푼이라도 더 쥐어주는 유통업체를 서운하게 하지 않기 위해 그들의 비위를 맞춰주고 있다. 전국의 대형서점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이벤트 경품 행사에서 그 비용은 누가 지불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대형서점들은 경품 행사를 통해 독자들을 서점으로 유인해 판매량을 증대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경품 행사를 위한 비용 지불은 서점의 몫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경품 행사를 주최하는 곳은 서점이지만, 경품에 대한 비용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출판사들이 부담하고 있다. 경품 행사에 들어가는 비용을 지불하면 행사를 통해 책이 더 많은 매대에 진열될 수 있고 노출되기 때문이다. 울며 겨자 먹기 식이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름 없는 출판사의 책들은 출간과 동시에 한쪽 구석에서 긴 잠을 자고 만다. 뭐가 이렇게 페어(fair)하지 않느냐고 항변해봐야 공허한 메아리처럼 자신의 귓전에서만 울리고 만다.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그렇게라도 해야 살아남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업계간의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정작 소비자인 독자들은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는 출판 시장으로부터 아예 등을 돌리고 있다. 과연 누구를 위한 도서정가제이고 경품 행사인가? 공정한 룰(Rule)과 룰을 위한 합의가 실종된 시장의 궁극적인 피해자는 누가 될 것인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다.
신자유주의는 우리나라 출판 시장에 이미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고, 앞으로도 더욱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출판인들 스스로가 농담처럼 자주 내뱉는 ‘한국 출판계가 단군 이래 언제 최대의 불황이 아닌 적이 있냐?’라는 말 속에는 패배의식과 자포자기의 심정이 담겨져 있다. 우리 출판계는 먼저 이러한 패배의식과 자포자기의 심정을 버리고,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회복함과 동시에 새로운 의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출판은 더 이상 굴뚝산업도 아니며, 사양산업도 아니다. 출판은 세상을 디자인하는 아름다운 작업이며 창조적인 비즈니스이다. 신자유주의는 우리 출판계를 위기 가운데로 몰아넣고 있지만, 위기는 위험과 동시에 기회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한류 열풍을 타고 우리의 출판물이 세계 각국에 번역될 수 있었던 것도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선사한 기회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독자들 앞에서 정직해지자. 그리고 출판 시장에서도 정직한 룰이 통용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보자. 그것만이 우리의 출판이 세계라는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홍순철․
1972년생 ․번역가 겸 북칼럼니스트
․저작권 에이전트, 현 북코스모스 저작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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