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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신작시/희음/배낭이 된 남자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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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64회 작성일 20-01-08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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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신작시/희음/배낭이 된 남자 외 1편


희음


배낭이 된 남자



 남자는 늘 배낭을 메고 다녔다 남자 키의 반쯤은 돼 보이는 큼직한 배낭이었다 배낭 안은 책으로 빽빽했고 그 무게를 이기느라 남자의 상체는 앞으로 조금 쏠려 있었다 배낭을 멘 채로 남자는 거리의 불 켜진 카페들을 전전했다 이따금 카페에서 약속이 잡혔고 어쩌다 실수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다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책들을 줄였고 배낭은 무척 헐거워졌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것이 단지 이례적인 외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남자의 배낭은 다시금 남자의 비스듬한 등뒤에 묵직하게 매달렸다 시간이 갈수록 남자의 등은 점점 더 기울어갔고 배낭은 남자의 등에 얹혀 있다시피 하게 되었다 남자는 조금씩 더 왜소해졌다 등에 얹힌 배낭은 마치 남자를 부리는 또 한 남자처럼 보였다 그 남자는 카페 안 넉넉한 소파 위에다 잠시 자신의 몸을 기댔다가도 이내 남자를 재촉하여 카페를 뜨곤 했다 쪼그라든 등뼈 위에 남자를 얹고 남자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 들어찼을 남자 속의 페이지를 끝도 없이 넘기며 아직 불 꺼지지 않은 다음의 카페를 향해 걸었다 남자와 남자는 나뉘지 않는 하나의 그림자로 행간 같은 밤의 골목을 느릿느릿 더듬어 나아갔다





루지



통영의 루지에는 초급 코스와 중급 코스가 있습니다.
단 한 차례의 초급 체험을 거치고 나면 중급 코스로 갑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합니다.
 
자발적으로 미끄러진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떠밀리는 거다 우리는 더 멀리까지


잠깐 눈을 감아 봐도 좋지만 아주 잠깐만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책임도 없습니다.


코스와 코스의 모든 경사 위에서
어쩌면 몸이 떠오르는 기분을 느낄지도 몰라
세계의 모든 구멍들을 오므리듯
오줌을 참고
어둠을 참고
죽음을 참고


손잡이를 놓치고 펄럭거리며 당신이 어딘가로 떠나가도
우리는 모릅니다.


흐르는 손으로
빙빙 헬멧을 쓰다듬는 동안
울렁임은 느릿느릿 우리를 감싸고
코스를 따라 다음 코스로

둥글고 검은 리듬이 완성되어가겠지
우리는 끝내 그 끝을 보지는 못하겠지만
그러면 어때, 떠오르면 그만
기분이 기분을 따르면 그만


코스와 코스
멈추지 말자
숨 쉴 수 있는 모든 구멍을
참아왔던 슬픔의 힘으로 오므리고
다음은 모르고
어제도 모르고
틀어버리는 것
놓아버리는 것

모르는 거기까지 날아가 버리는 것


통영의 루지의 코스와 코스
얼음 바닥보다 차가운
세계와 내일의 다정한 매뉴얼
처음인 얼굴로 우리는 그저 따라서 말하기
우리는 모릅니다 책임지지 않습니다





*희음 2016년 《시와반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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