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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신작시/이소희/난간 없는 다리를 건너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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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신작시/이소희/난간 없는 다리를 건너다 외 1편
이소희
난간 없는 다리를 건너다
왜 그렇게 못 살아?
장맛비에 잠긴 징검다리 벗은 발로 성큼성큼 건너가
높은 다리 걸터앉아 팔랑팔랑 다리 놀려 봐
낮은 다리라면 배 깔고 엎드려 물살 헤적여야지
덤프트럭 오가는 대교 아래 짐을 부리고
시리다 싶을 만치 발을 담가둬
비도, 천둥도 가다가 멈출 테니
왜 그렇게 안 살아? 원하는데
건너기 전에 한 번, 다리 가운데서 한 번, 건너고 나서 한 번,
세 번의 키스를
버드나무 둥치에 오래도록 몸 기대고
납작한 돌을 골라 가장 멀리까지 물수제비를 보내
지나치는 빠른 걸음들 하나도 보지 못하고
한껏 목을 젖혀 정지비행 하는 매를 고요히 바라보지
자운영 군락에 앉은 그 사람을 어지럽다 하고
난간 같은 건 아주 생각지도 말고
돌아서기 전 마지막 키스를
멀리 잦아드는 당나귀 울음처럼
해는 이미 스러지고 있어
왜 그러고 살아? 내가 원치 않는데
오존주의보
오래된 도시가 분명하다 큰길가로 화려한 상점 즐비하지만 한 블록만 들어가도 연립주택 단독주택 사이로 골목이 걸어간다 좁은 빈터마다 옛날식 화단이 엎드리고 분꽃 호박덩굴 사이로 휙, 빠르게 지나가는 흰 고양이, 철조망 올린 담장 지나 공원으로 통할 법한 길을 따라가면 어김없이 막다른 골목이 돌아 나온다 시청 건물이 빤히 보이는데도 담이 솟아오른다 배배 꼬인 계단은 끝내 공중화장실로 들어가고, 녹슨 대문 위 가늘게 눈뜬 하얀 고양이, 아주 길을 잃고 싶어 좁은 골목을 골라 걸어도 기어이 광장에 닿고야 말던 그 옛날의 도시는 지하에 묻혔다 식민지의 테라스마다 새로 빨아 내걸던 기억을 지우느라 끈질기게 공사 중이다 투덜거리며 걸어가던 K들 싱크홀에 빠진다, 길은 텅 빈 호주머니, 뼈가 으스러진 새빨간 새, 아니 고양이, 오후 세 시의 뙤약볕이 정수리에 꽂힐 때 분명 나를 에워싸는 또 다른 무엇이, 있다. 드라이아이스보다 빠르게 사라져,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던 것이,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자동차 연거푸 세 대 지나가고 나는 구역질을 시작한다 나를 마주보며 잎이 말라가는 비비추도 보랏빛 토악질을 한다
*이소희 201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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