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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기획/감성의 건넌방/오석만/시간냉장고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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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기획/감성의 건넌방/오석만/시간냉장고 외 4편
오석만
시간냉장고
요 놈이 살아 있을까
엊그제 넣어 두었던 몇 마리
시간들이 궁금하여
살짝 냉장고 문을 열어 본다
꽁꽁 얼어 버린 추억
기억하고 싶은 얼굴
고이 간직하고픈 시간
그리고
멍하니 바라보았던 하늘
그냥 흘러 보냈던 강물
이런 것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보며
꽁꽁 얼어 있구나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흐물흐물
녹아가는 기억들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시간을 해동하며
냉장고 문을 열어 본다
초승달
새가 오르며
꼬옥 찍다가
잡힐 듯 말 듯
떨어뜨린 별 하나
날개 세우고
한참 찾다가
보일 듯 말 듯
피어난 꽃 한 송이
미소 지으며
손짓 하다가
웃는 듯 우는 듯
새가 그린 눈썹 하나
손톱깎기
아내는 손톱깍기를 좋아한다
깨끗해진 손톱을 보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나도 좋아 한다
손을 맡기고 있으면
어릴 적으로 돌아간다
손톱사이에 낀 검정 때
꺼칠거리는 손
짝짝 갈라져 조금씩 묻어나는 피
따끔거리는 아픔
손때와 아픔이
다시 살아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만경벌
김제땅 논두렁사이로
하얀 눈이 무던히도 쏟아져
천지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이고
강아지가 꼬리치며 눈 속에서 뛰어놀던
김제평야 넓은 들판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손톱깍기는
어린 시절 고향의 품으로
오늘을
일으켜 준다
고추잠자리
눈이 부시다
빨간 고추사이로 가을이 내려온다
작은 몸뚱이 가벼워져
하늘 속으로 사라진다
바다에서 돌아온 연어처럼
이제 가야한다
수많은 시간들이 쏟아지는 폭포를
뛰어 올라 가야한다
날자
뛰어 오르자
텅빈 가슴 하늘로 가득차 오를 때까지
파란 하늘이 보인다
올라온 만큼 작아지는 세상
바람에 몸을 맡기고
비상하며 세월을 배운다
바람 속으로
하늘 속으로
날아가는 시간 속으로
가을이 저물어간다
지브롤터 갈매기
날아오르고 싶다
카사블랑카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은
밤새도록 유로버스 트렁크에 짐짝처럼 숨어들어
갈매기로 날아오르려 한다
지브롤터 해협만 건너면 꿈은 이루어지리라
검은 구름 속에서 피어나는 햇살처럼
찬란히 바다를 물들게 할 수 있으리라
달리는 차에 매달리며 얼마나 단련을 했던가
쾌속정에 탈 수만 있다면
갈매기처럼 높이 날 수 있으리라
날아오르자
가벼운 바람이 되어 날아오르자
바다를 가르며 사라지는 파도 위로
높이 날자꾸나
지브롤터 갈매기는
카사블랑카 골목 모퉁이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다
*오석만 시인은 1955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하여 익산 남성고와 성균관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1976년 대학 1학년 때 성대문학상을 수상했고, 국민은행 근무 중인 1995년 첫 시집 『인형의 도시』를 발간했고, 2000년 《세기문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은퇴 후 부부가 국내는 물론 세계 곳곳을 함께 여행하며, 시마음을 느끼면 사진 찍고 길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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