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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미니서사/박금산/사슴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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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미니서사/박금산/사슴 장례식
박금산
사슴 장례식
추모팻말에는 ‘로렌을 기억하며’라는 큰 글씨 아래에 ‘안전하게 운전하기!’라는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흰 바탕에 검은 무늬였다. 사망 사고를 알리는 그 지역의 표지판이었다. 그것을 몰랐기에 그는 숲으로 들어가는 길을 안내하는 팻말인 줄 알고 접근했다가 로렌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었음을 알게 되었다. 인터넷으로 로렌의 교통사고를 검색했다. 사고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장례식이 교회에서 진행된다는 안내가 나와 있었다. 신문 기사에 의하면 로렌은 열여덟 살이었고 고등학생이었다. 그 지역에서는 열여섯 살부터 운전면허를 딸 수 있었다.
그는 팻말 앞을 지나칠 때마다 사고 경위를 상상했다. 사고가 일어날 수 없는 안전한 도로였다. 갓길과 인도 사이에 10미터가 넘는 공터가 있었으며 도로는 직선이었다. 가족이 팻말에 ‘안전하게 운전하기’라고 적어놓은 것에 따른다면 로렌은 누군가로부터 해코지를 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안전을 지키지 못해서 저세상으로 간 것이었다. ‘안전하지 않게 운전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떤 운전이 ‘안전하지 않게 운전하기’인 것일까. 과속밖에는 답이 없었다. 가족은 팻말에 아무런 원망도 담지 않았다.
그는 ‘안전하게 운전하기’를 떠올렸고 자기가 평소에 안전을 조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되뇌었다. 때는 일월이었고 그는 일월에 징크스를 가지고 있었다. 크고 작은 사고가 모두 일월에 벌어졌다. 새로 이사를 한 마을에서 보내는 일월은 로렌의 팻말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는 집에서는 칼을 쓰는 일을 조심했고 바깥에서는 차를 모는 일을 조심했으며 직장에서는 타인들에게 너그럽게 대하면서 일월이 무사히 지나가길 기원했다.
그는 팻말 앞에서 멈추었다. 누군가 팻말의 기둥을 빙 둘러 소라 껍데기를 쌓아두었다. 로렌은 바닷가에서 소라 껍데기를 줍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았다. 소라 껍데기에 귀를 대고 파도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했을 것이다. 정적을 좋아하는 성격이었을 텐데 어쩌다 과속을 하게 되었을까. 과속 자체가 사고는 아니었을 것이고, 과속을 하다가 무언가를 만나서 충돌했을 것이다. 과속은 정지해야 할 순간 정지하지 못했을 때 문제가 된다. 무엇을 만났을까. 혹시 차가 망가진 것일까? 귀신을 만난 것일까?
출근길과 퇴근길에 그는 로렌의 팻말 앞에서 속도를 높였다. 무의식중에 차의 엔진을 시험하기 위해서 속도를 높였고 브레이크 성능을 점검하기 위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밤에 아내와 함께 쇼핑몰로 나갈 일이 있었다. 평소처럼 운전을 하는데 아내가 소리를 질렀다.
“크리스, 당신 미쳤어? 왜 그래?”
그가 말했다.
“왜?”
아내가 말했다.
“왜 안 하던 짓을 해? 그렇게 죽을 듯이 운전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그는 아내의 말을 듣고 나서야 계기판의 숫자를 보면서 속도를 늦췄다. 아내의 얼굴을 보자 기분이 머쓱했다. 평상시처럼 운전을 했을 뿐이었다. ‘이곳은 차에 이상이 느껴지면 언제든 차를 세울 수 있는 안전한 도로이고, 안전을 시험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야, 왜 여기에서까지 조심해야 하지?’라고 말하려는 순간 아내가 말했다.
“사슴이라도 치면 어쩌려고!”
“사슴?”
“그래, 사슴.”
“우리 마을에 사슴이 있어?”
“집 마당에까지 내려오기도 해.”
“나는 못 봤는데.”
“주민들한테서 들었는데, 휴일이나 주말에는 집에 사람이 많으니까 안 온대. 평일 낮에 가끔 보여.”
“알았어. 조심할게.”
그는 아내에게 대답한 후 조용히 로렌의 사고를 상상했다. 그곳은 마을 이름이 사슴이 사는 숲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옆 마을은 차례로 속삭이는 소나무(Whispering pine tree), 돌다리(Stone bridge), 은 시내(Silver Creek)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아내의 말을 듣고 그는 깨달았다. ‘아! 그랬겠다. 로렌은 사슴을 피하다가 사고를 낸 것이었을 수 있겠네.’ 그는 로렌의 팻말에 얽힌 사연을 아내에게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지금까지 참아왔듯이 들썩거리는 마음을 잠재우며 속으로만 생각했다. 아내는 로렌의 팻말을 알지 못했다. 그가 로렌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사를 온 것이 불길해질까봐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말했다.
“일월이라 뒤숭숭해. 내가 손가락을 베서 응급실에 갔던 일, 머리에 돌을 맞고 응급실에 갔던 일, 아킬레스건이 터져서 수술을 받았던 일, 기억하지?”
“당연히 기억하지.”
“그게 모두 일월이야. 스케줄 표 점검하다 보니까 그렇더라.”
“그래? 운이 나쁘게 다친 건 기억하는데 그게 모두 일월에 있었다는 것은 몰랐어.”
“일월이 잘 지나갔으면 좋겠어.”
“그래.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데 여보!”
“응?”
“조심은 일월에만 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야. 일월을 겁낼 게 아니라 일월에 조심하면 되고, 이월이 되고 삼월이 되어도 일월에 했던 것처럼 조심하면 돼. 일 년 삼백육십오 일 늘 조심했으면 좋겠어. 조심을 나누어서 할 게 아니라 조심하는 총량을 늘려야 해. 당신한테는 두 아들이 있어. 그 애들을 위해 조심해.”
“알았어.”
그는 아내와 대화를 나눈 뒷날부터 로렌의 팻말 앞에서 과속하는 버릇을 끊었다. 의식적으로 서행하면서 일월을 겁낼 게 아니라 일월에 특히 조심하고 나머지 달에도 일월에 조심했던 것처럼 안전을 챙기기로 했다.
일월이 무사히 지나갔다. 그는 무사한 나날에 감사하며 이월에도 일월을 조심했던 습관을 유지하기로 했다. 이월 또한 무사히 지나갔다. 그는 매사에 조심하는 것을 버릇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삼월 어느 월요일이었다. 해가 길어져서 출근길이 어둡지 않고 환했다. 그는 새로운 주를 시작하면서 의식적으로 운전을 천천히 했다. 오가는 차가 없었으나 그는 속도를 높이지 않았다.
그는 길가에서 사슴이 자는 것을 발견했다. 사슴은 그가 차로 지나친 뒤에도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사슴은 풀숲에 몸을 감추고 자야 할 것 같은데 그 사슴은 차도 갓길에 네 발 중 한 발을 걸치고 아무렇게나 드러누워서 자고 있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속도를 줄여서 차를 세웠다. 그의 차가 선 곳은 로렌의 팻말 앞이었다. 그는 팻말을 바라본 후 ‘여기에서 차가 멈추다니, 우연치고는 인연 깊은 우연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는 차에서 내렸다. 잠자는 사슴을 확인하기 위해 지나쳐온 길을 걸어갔다. 도로 가에는 푸른 잔디 사이로 올라온 봄꽃이 자잘하게 피어 있었다. 그는 전화기를 꺼내어 응급센터에 연락할 준비를 하면서 사슴을 향해 걸어갔다. 곧 사슴이 나타났다.
사슴은 그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듣고도 깨어나지 않았다. 사슴은 굉장히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사슴을 잠들게 만든 운전자는 사슴을 도로 가로 밀어낸 후 유유히 길을 간 것 같았다. 그는 사슴을 피하기 위해 핸들을 급하게 꺾은 뒤 반사적으로 급브레이크를 밟는 로렌을 상상했다. 로렌의 차는 뒤집혀서 내동댕이쳐졌다. 한적한 밤이었을 것이다. 로렌은 소라 껍데기 속에서 그것을 귀에 대는 사람의 귓속으로 옮겨 다니는 파도소리처럼 아련한 꼬리를 남기며 숨이 멎었을 것 같았다. 열여덟 살의 인생이 그렇게 끝난 것이었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어 사슴의 눈 주위에 묻은 피를 닦았다.
*박금산 소설가. 여수 출생. 《문예중앙》으로 등단. 서울과기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소설집 『생일선물』, 『바디페인팅』, 『그녀는 나의 발가락을 보았을까』. 장편소설 『아일랜드 식탁』, 『존재인 척 아닌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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