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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장편연재⑥/김현숙/흐린 강 저편 제6회/눈물의 웨딩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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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장편연재⑥/김현숙/흐린 강 저편 제6회/눈물의 웨딩 마치
김현숙
흐린 강 저편
제6회/눈물의 웨딩 마치
실종되었던 훈이가 구사일생 집으로 돌아온 후 스스로의 다짐대로 매주 일요일 시모는 손주들과 함께 교회엘 나갔다. 교리며 찬송가며 아무런 내용도 몰랐으나 예배 시간에 그저 감사 가득한 마음으로 망연히 자리에 앉았다 돌아오곤 하는 게 주일의 임무였다. 절박한 순간 눈물로 맹세한 약속은 꼭 지켜야만 한다는 게 시모의 생각이었고 무엇보다 이젠 훈이를 잠시도 혼자 두어선 안된다는 강박증 같은 게 생긴 때문이기도 했다.
훈이를 납치한 범인은 애초 일정 액수의 돈이 목적이었을 뿐 추호도 아이를 해칠 생각은 없는 인간이었음이 천만다행이었다. 급전이 필요한 시점, 우연히 시장통을 지나다 할머니의 뒤를 졸졸 따르는 훈이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아이의 목에 걸린 반짝이는 순금 목걸이에 눈이 닿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아이에게 다가가 슬며시 손목을 잡아끌곤 급히 시장통을 빠져나온 것이었다. 아가, 너 아이스크림 좋아하냐. 더운디 어디 가서 삼촌이랑 시원한 얼음과자나 하나 먹을까이. 순진무구한 훈이는 얼음과자란 말에 앞 뒤 가릴 것도 없이 단지 인상 좋고 유순해뵈는 마치 삼촌 같은 젊은이를 따라 쪼르르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갔다. 무더운 여름 얼얼히 혀에 감겨오는 달콤하고 시원한 얼음과자는 어린 훈의 혼을 앗아갔고 그후 모든 것은 그저 삼촌의 뜻에 따랐을 뿐이었다. 그만큼 인심 좋고 서민적인 동네에서 방목하듯 키운 마냥 무방비 상태의 양육이 가져 온 결과였다. 농촌에서 태어나 자랄 때부터, 그리고 J시로 이사온 후에도 이웃의 그 누구로부터도 그저 귀염만 받았을 뿐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곤 전혀 모르고 살아 온 훈이였기에 어쩜 그러한 행동은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느 한 구석 미운 데라고 없는 아이가 일말의 의심도 없이 자신을 믿고 따르는 모습에 젊은이는 가슴 한 켠이 저릿해옴을 막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전화선을 통해 들려오는 훈이 할머니의 떨리는 음성, 울부짖음이, 일찍 조실부모한 불우한 어린 시절 자신을 키워 준 할머니 음성이랑 너무도 흡사하여 그는 도저히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다만 이제 내일이면 부산으로 내려가 원양어선을 타고 멀리 떠나려는 자신의 노잣돈을 위해 아이를 납치하긴 했으나 애초 아이를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도시의 구석구석을 떠돌며 장사, 날품팔이, 노가다 일 등 안 해본 일이 없었으나,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라곤 없었고 끝내는 고향 친구의 권유로 둘이 함께 원양어선을 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간의 밀린 방세 및 주변의 빚을 갚고 나니 당장 부산까지 내려 갈 차비며 당장 구비해야 할 비품조차 구매할 여력이 없었다. 난감한 마음에 가까운 시장통을 찾아 어슬렁거렸고 바로 그때 훈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훈아, 너 할매 보고잡냐. 네에. 날이 어두워지면 울할매 온동네 다니며 날 찾거든요. 울할매 진짜 무서요. 동네에서 호랑이 할매라 부르니께요. 삼촌, 나 인자는 울집에 가야 헐 거 같어요. 해맑은 아이의 눈망울에 물기가 어리더니 똑, 하곤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더 이상은 아이를 붙잡아 둘 수 없음을 깨달은 순간 그는 훈이에게 자신의 심경을 솔직히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실은 훈아, 삼촌이 낼 바다에 가서 배를 타야만 허는디, 차비가 한 푼도 없어라. 훈이가 날 쪼깐 도와주면 안되겄냐. 나중에 삼촌 돈 많이 벌어오믄 갚을텐께 우선 이 목걸이 좀 빌릴 수 있겄냐. 아까 전화론 느거 할매 헌티 당장 돈 갖고 나오라 혔다만…… 가만 생각해봉께 노인 양반헌티 못헐 짓하믄 뭐시 좋겄냐 싶어 내 맴을 바꿔 먹었단께. 그의 말에 훈이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했다.
삼촌 돈 안 갚아도 돼요. 이 목걸이 그냥 줄텐께 언릉 배 타고 가서 돈이나 많이 벌어 와여. 아녀, 삼촌 돈 많이 벌어 오면 꼭 너를 찾아볼것인께. 꼬옥 지둘러라잉. 이 목걸이에 새겨진 주소가 느그 집 주소 맞쟈…….
그는 몇 번이고 목걸이에 새겨진 아파트의 동 호수를 확인한 후 훈이를 처음 만난 시장통 입구까지 데려다 주곤 순식간에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귀한 손자를 위해 노모가 쌈짓돈을 털어 돌 선물로 마련해 준 미아 방지용 3돈짜리 순금 목걸이. 결국은 그것이 훈이를 되찾게 해 준 셈이었다. 하긴 애초 그것이 아니었담 훈이의 납치 자체가 이뤄지질 않았겠으나 어쨌든 모든 일은 무사히 잘 풀렸고 그로인해 노모는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그 일은 신앙 생활로 그토록 대립하던 계순과의 갈등 완화를 위해서도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혜옥의 서울 생활도 어언 3년에 접어들 즈음, 들판의 처녀, 한 마리 야생마와도 같던 그녀의 기질 또한 점차 순응, 체념에 가까운 정제의 단계에 이르고 있음을 희연은 감지했다. 더욱 차분하고 깊어진, 그러나 스치듯 전해오는 한 가닥 근원모를 애상의 그늘이 뭔가 더욱 성숙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모습이었다. 그 가을 총기 소지 사건 후 경훈은 더 이상 혜옥을 찾지 않았다. 빈번히 오가던 편지도 점차 뜸해졌고 혜옥의 주변은 뭔가 호젓함이 감도는 분위기로 변해갔다. 어쩐 일로 찬욱 또한 대입시 준비로인해 예전처럼 희연의 집을 자주 드나들지 않음이 더욱 그런 느낌을 안겨주었다. 어쩜 찬욱 부친의 회갑연으로 그의 집을 다녀온 이후 혜옥은 뭔가 더욱 빠르게 자신의 주변을 정리해온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혜옥의 살뜰한 보살핌으로 유리는 천성적 허약함을 극복하며 나날이 눈에 띄게 잘 자라났다. 혜옥은 옷이며 머리 단장이며 유리를 마치 인형처럼 예쁘게 꾸며 데리고 다녔고 간식 등 먹을 것도 최상의 것으로 해 먹여 주위에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상심과 좌절 속에서도 어린 생명, 그 혈육에 대한 정성만은 더없이 지극하여 동네에서도 조카 바보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거기에 평소 혜옥의 반듯하고 야무진 성품을 눈여겨 본 동네 어르신들이 다투어 중매를 하겠노라 나선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방년 꽃다운 열아홉 살에 상경, 조카를 키우느라 어언 22세가 된 손끝 맵고 똑똑하고 참한 처녀. 혜옥에겐 어느새 그런 꼬리표가 붙어 여기저기서 선을 보자는 청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정작 혜옥 자신은 언감생심 아직은 전혀 시집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혜옥이 23세가 되던 해 봄, 아파트 옆 동의 한 노인이 희연을 통해 집요하게 맞선을 주선해 와 도리없이 서로 얼굴만 한 번 보는 것으로, 혜옥은 마침내 끌려가듯 희연의 손에 이끌려 찻집으로 선을 보러 나갔다. 신랑감은 노인과 함께 사는 며느리의 남동생으로 공고 졸업 후 전문대를 나와 포항제철에 근무하는 견실한 직장인이었다. 단지 5남매의 장남에 나이가 7살이나 차이 나는 노총각이란 점이 좀 맘에 걸렸으나 결정은 일단 두 사람이 선을 보고난 후의 일이라며 희연은 크게 개의칠 않았다.
맞선을 보는 날, 곱게 단장한 혜옥을 데리고 희연은 약속 장소를 향해 출발했다. 마침 봄방학이라 학교 근무가 없는 날로 약속이 잡힌 게 다행이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의 아담한 찻집을 들어서니 서른 살 정도의 제 나이 꽉 차 보이는 점잖은 모습의 총각이 꾸벅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윤섭. 키도 몸피도 인물도 그저 그렇게 적당한, 그리 튀지 않고 훈훈해 보이는 선량한 인상의, 그러나 몹시도 수줍은 미소와 찻잔을 잡은 손끝의 떨림에 커피가 찰랑, 넘치는 양이 왠지 포근한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남자였다. 신랑 측은 중매를 넣은 누나와 매형이 함께 나와 찬찬한 눈길로 혜옥을 지켜보며 몇 마디 이야기를 건네었고, 희연은 시종 눈을 내리깔은 채 조신히 앉아만 있는 혜옥을 대신해 신랑을 향해 몇 가지 의례적인 질문을 던졌다. 직장 일은 힘들지 않은지, 고향인 J시를 떠나 타향인 포항에서 혼자 생활하는데 애로 사항은 없는지 등을 물었을 것이다. 아, 네에. 타지에 혼자 나와 있으니 때로 외롭긴 합니다. 솔직한 속내를 토로하며 슬몃 흘리는 웃음이 완전 무공해의 미소란 생각에 희연은 내심 적이 놀라움을 느꼈다. 적어도 권모술수하지 않고 세상의 때가 덜 묻은 유순한 성품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신붓감인 혜옥의 판단은 어떠할지…….
맞선 당사자들인 두 사람만을 남겨두고 가족들은 모두 자리를 피해 찻집을 나왔다. 홀로 남겨진 혜옥의 낯빛을 보니 약간의 홍조를 띤 표정이 꽤 밝아보여 희연은 안도했다. 시누이와 올케의 관계지만 근 4년의 세월을 함께 살아와 이제 작은 표정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이가 된 것이다. 찻집엔 마침 혜옥이 좋아하는 팝송이 흐르고 있었다. 원래는 희연이 좋아하여 사놓은 음반인데 함께 듣다 보니 어느새 혜옥까지 덩달아 즐겨 듣게 된 곡. The Drifters. 미국 5인조 흑인 남성 그룹의 정감어린 음색이 가슴을 적셔오는,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Save the last dance for me)’. 과연 그는 혜옥과 마지막 춤을 출 상대가 될 수 있을까. 마지막 춤이 끝난 후 혜옥의 손을 잡고 집으로 데려갈, 그렇게 너그럽고 자신감 넘치는 마초적 기질의 멋진 남자일까. 희연은 괜스레 자신의 가슴 한 켠에 까닭모를 설렘 같은 것이 여울져 옴을 느꼈다. 간만에 느껴보는 신선한 감정이었다.
더없이 순정하고 풋풋한 고향 친구, 경훈과의 첫사랑, 그리고 희연의 제자, 찬욱을 향한 애잔한 핑크 빛 연모.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오늘 만난 그 남자의 손을 잡고 그와 함께 해로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지. 뭔지 모를 직감으로 희연은 자신의 맘이 적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희연의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남자를 만나고 돌아 온 혜옥의 얼굴엔 알 수 없는 생기가 감돌며 전에 없는 광채가 아른대는 모습이었다, 어땠어요, 아가씨. 그 남자 맘에 들었나요. 희연이 넌지시 물었다. 뭣보다 우선 참 착헌 것 같혀요. 직장도 안전한 디고 집안도 좋고…나이가 쪼깐 많지만 내 승질머리가 원캉 싸나워갖꼰 그 뜻 다 받고 살라믄 나이 차 나는 게 월등 나을 거 같기도 혀요. 나이 어리다는 거 빼고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는 나헌티는 쬐깐 과분한 상대 같기도 허네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혜옥의 기분은 적잖이 고양된 느낌임이 전해왔다. 한 집에서 오래 살아 온 탓에 그 정도는 서로 충분히 감지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혼사는 믿을 수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연분은 과연 따로 있고, 혼사란 낙수받이의 물이 다 차기 전에 치뤄야 한다는 옛말이 실감나듯 혼사를 둘러 싼 모든 것이 순탄히 풀려갔다. 그런 연유엔 신랑이 서른을 넘기기 전 서둘러 장가를 보내야만 한다는 신랑 측의 간곡한 바람이 있었고, 무엇보다 타지에서 연애도 한번 못해 본 신랑감이 맞선 후 오직 혜옥만을 자신의 신붓감으로 점 찍어 도무지 요지부동의 고집을 부린 때문이었다. 윤섭은 거의 매주 주말이면 포항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 누나 집에 머물며 혜옥에게 데이트를 청해 왔다. 매우 끈기 있고 진국스러운 성격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이윽고 남자의 부모까지 상경, 혜옥에게 따스한 관심과 호의를 보이며 은연 중 그들의 며느릿감으로 점 찍고 있음을 전해왔다. 신랑감의 아버지는 지방 사립 고등학교의 교장이었고 어머니는 전업 주부로 그 지방 유지의 고명딸로 평생을 호강하며 살아 온 고운 티가 온몸에서 풍겨나는 귀부인 타입이었다. 그들은 먼저 자신의 아들과 혜옥과의 궁합을 본 후 매우 흡족해 했고 그로인해 알게 된 혜옥의 생일엔 신촌 이대 앞 양장점으로 며느릿감을 불러 옷과 구두를 맞춰 주며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그날 옷을 맞춘 다음 예비 시부모로부터 신촌의 고급 음식점에서 저넉까지 대접 받고 윤섭과 데이트를 즐긴 후 집으로 돌아 온 혜옥은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희연을 향해 말했다. 태어나 그렇게 화목한 가정은 첨 봤다고, 자기 주변에 그토록 점잖고 품위 있고 교양을 갖춘 어른들을 대면한 건 처음이라 너무도 얼떨떨하고 당혹스럽고 두렵기조차 하다고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다. 신랑감 또한 더없이 진중하고 선량하고 반듯하여 도저히 그의 청혼을 내칠 수가 없노라 고백했다.
더구나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과 여건에 불만이 쌓여 되도록이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 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기에, 아무래도 그 남자와의 혼인을 마다할 이유란 아무것도 없는 듯 하다고 되뇌였다. 경상도 속담에 ‘신부는 빤스만 입고 시집간다’ 란 말이 있다고 허대요. 그란께 신랑측에선 혼수품일랑 암 것도 해올 것이 읎다고 허네요. 포항 신랑 자취집에 엔간한 살림살이는 다 있은께 걍 몸만 오면 쓰겄다고 허는디……. 희연의 의견을 물으며 혜옥은 진심어린 얼굴로 덧붙였다. 이참에 신랑 부모님 만나며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단께요. 울 언닌 서울서 곱게 자라고 많이 배운 사람인디 워쩌서 울집 같은 그런 깡촌으로 시집을 와 고생을 해쌌는가, 참말로 시집을 잘못왔단께, 요즘 새칠로 그런 생각을 다 한단께요. 혜옥의 고백을 들으며 희연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제 혜옥의 혼인은 오직 진행의 절차만이 남아있음을 희연은 직감했다. 마침 그간 혜옥을 위해 은행에 적립한 3년 기한의 적금 만기일이 다가와 희연은 혜옥의 결혼 비용이며 모든 가전제품 및 살림살이 일체를 장만해주기로 맘 먹었다.
그렇게 혜옥은 5월의 신부가 되어 고향인 J시에서 성대히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앞두고 자신의 성격대로 이불빨래며 가구며 온 집안을 깔끔히 청소하던 혜옥이 어느날 냉장고 안을 정리하던 중 갑자기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울었다. 그간 오라버니네 살림을 도맡아 하며 손끝마다 와닿던 서러운 정, 뼈아픈 회한이 그예 폭발하고 만 것일까. 그녀의 흐느낌은 점점 더 격렬해만 지더니 급기야는 통곡으로 변해갔다. 언니헌티 그간 못헐 짓 징허니 많이 혔네요. 미안혀요, 언니이. 먼 데로 시집 가 울 유리도 자주 못 보고 모든 게 꺽정스러 어찐대여. 꼭 팔려가는 신부 맹키로 맘이 그러네여. 혜옥은 냉장고 곳곳을 정갈히 닦아내며 소리 내어 울었다. 울음 중간중간 토로하는 혼잣말이 하도 애절하여 듣고 있는 희연 또한 눈시울이 시큰해왔다. 미운 정 고운 정. 돌이켜보면 피차 적잖이 힘들고 고된 세월이기도 했으나 어느새 서로 정이 들어 헤어짐의 정한이 예사롭질 않은 것이다. 꼬모, 어디 가는 거야. 가지 마아. 가면 안돼. 곁에 있던 유리 또한 덩달아 울먹이며 혜옥의 품을 파고 들어 더욱 눈물을 자아냈다.
혜옥의 결혼식 날은 더없이 맑고 화창했다. 그러나 하얀 드레스를 입고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는 혜옥은 계속 눈물 바람을 멈추지 못했다. 아가씨, 이런 좋은 날 울면 안돼요. 이젠 그만 울어요. 희연은 곁에서 아무도 눈치 못채게 손수건을 꺼내 들고 혜옥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바빴으나 소용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축하드립니다. 장발의 멋진 사진사가 묵직한 촬영 장비를 들고 신부 대기실로 들어섰다. 어디선가 눈에 익은 모습……언니, 내 동창, 경훈이 야아 알겄지요. 혜옥이 급히 눈가를 닦아내며 희연에게 설명했다. 아, 오경훈. 혜옥의 첫사랑, 그가 결국 집안의 가업인 사진관을 물려 받은 것인가. 희연도 반가움에 활짝 웃으며 그를 맞았다. 오랜만이네요. 우리 아가씨 옛친구가 촬영하니 정말 특별한 작품이 되겠네요. 잘 부탁해요. 네에. 감사합니다. 모델이 원캉 좋아서요……. 유연한 동작으로 캠코더를 돌리며 경훈이 응답했다. 가슴 뭉클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결혼 준비를 위해 미리 고향으로 내려 간 혜옥이 자신의 웨딩 촬영을 경훈에게 맡기고 또한 그걸 기꺼이 수락하여 촬영에 임하는 경훈의 흔연한 태도라니!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깊은 우정과 배려에 희연은 그저 감동할 따름이었다. 야아, 신부가 울면 사진 완전 망쳐븐께 제발 그만 혀라잉. 흐르는 혜옥의 눈물을 포근히 감싸주는 경훈의 모습이 훈훈하여 희연은 가슴이 뻐근해 왔다. 결혼을 기해 몸은 비록 먼 곳으로 떠나가나 다만 옛친구에게 눈물어린 자신의 마음 한 자락만은 선물인양 고스란히 남겨주고 싶었던 것일까. 스튜디오란 이름으로 읍내 새로 생긴 최신식 사진관 다 놔두곤 굳이 경훈의 사진관을 선택했음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신부 입장. 힘차게 웨딩마치가 울리며 장남인 경석이 혜옥의 손을 잡고 식장으로 들어섰다. 긴 레드카펫을 밟으며 천천히 입장하는 경석과 혜옥의 모습을 보는 순간 희연은 전혀 뜻밖에도 와락 눈물이 솟구치는 자신을 발견하곤 당황했다. 돌아가신 부친을 대신하여 여동생의 손을 잡고 예식장을 들어서는 경석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슬픔에 희연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후끈 뜨거워짐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신혼에 느닷없이 상경한 여동생 혜옥으로인해 그간 누구보다 마음 고생 자심했을 오라비의 마음이 새삼 가슴을 저며온 까닭이었다. 전형적 도시형의 성정을 지닌 희연과 거침없는 야생마의 기질인 혜옥 사이에서 두 개체간 화합과 조화를 위해 알게 모르게 애써 온 그의 심고는 과연 어떠했을까. 그러한 사실을 한참이나 어린 시누이, 그녀를 떠나보내는 순간에야 깨닫는 여자. 희연은 그런 여자였다.
예식의 매 순간순간을 카메라에 담기에 여념없던 경훈이 정작 피로연장에선 전혀 눈에 띄질 않았다. 잔칫집에 왔음 어떤 몫을 맡았건 적어도 국수라도 먹고 가야 하련만! 조금 전 희연의 손에 매달려 식장 안으로 들어서는 유리를 보자, 경훈은 열심히 카메라 돌리던 손길을 멈추곤 반색 하며 유리에게로 다가와 아이의 손을 잡았다. 오매, 니가 유리 맞냐. 겁나게 커브렀네. 덕수궁에서 첨 봤을 땐 고렇큼 울어쌌드만…… 나 알아 보겄냐. 인증샷 하나 남겨야 쓰겄다. 회한에 찬 눈빛으로 경훈은 유리의 모습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으며 말했다.
유리를 데리고 희연이 잠시 피로연장을 빠져 나와 패백실로 향할 때였다. 예식장 로비 한켠, 폐백실로 이어지는 좁다란 통로 유리창 밖으로 얼핏 경훈의 모습이 비쳤다. 텅빈 듯 공허한 시선으로 끊임없이 담배 연기를 허공으로 뿜어올리며 한쪽 다리론 퍽 퍽, 온 힘을 다해 아름드리 나무의 밑둥을 걷어차는 기이한 모습! 몇 번이나 반복하여 애꿎은 나무를 향해 발길질을 해대는 모습이 실로 예사롭질 않아 희연은 순간 섬뜩한 충격을 느꼈다. 한때 너무도 좋아했던 여친을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는 참담함의 표출일까. 아님 그녀의 결혼 사진을, 그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카메라에 담아 각인해야만 하는 고통 때문일까. 행여 그와 시선이라도 마주칠까 희연은 황황히 몸을 돌려 통로를 급히 빠져나왔다.
혜옥의 신혼 살림은 당연히 신랑의 직장이 있는 포항에서 시작되었다. 그녀가 입버릇처럼 말해 온, 징허니 징글징글한 고향으로부터 아주 아주 먼 곳이었다. 산 설고 물 선, 아는 이 하나 없는 황량한 항구 도시. 그곳은 혜옥에게 신혼의 달콤함 보단 훨씬 더 큰 외로움과 쓸쓸함을 안겨주었다. 한옥 한 켠에 부엌을 내달아 전세용으로 급조된 듯한 작은 사랑채. 그곳이 그녀의 신혼 아지트였다. 정방형의 좁은 마당 가운데엔 시멘트로 만든 수도 시설이 있어 웬만한 물일은 거기서 다 해결이 되는 아기자기하면서도 탁 트인 전형적 한옥 구조가 혜옥은 맘에 들었다. 서울 오빠네 아파트의 숨 막히는 폐쇄된 공간과는 달리 비록 타향이나마 마당만 나오면 얼굴 마주치기 십상인 주인집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남편은 포항 시청에 근무하고 나이가 50대 중반인 주인 아주머니는 동네의 지형 지물과 재래 시장, 대형 마트, 버스 노선 등을 상세히 알려주었고 때론 혜옥을 직접 데리고 다니며 안내도 해주어 여간 도움이 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마당을 함께 쓰는 한옥 구조라 해도 밤이면 불이 환한 대청 유리문 저 안채는 완전 별세계였다. 가족이 함께 TV 보고 담소하며 자잘한 웃음소리 새어나오는 지극히 평범한 한 가족의 일상.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 그저 가족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는 게 고통의 탈피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여겼던 철없었던 자신을 돌아보며 혜옥은 어두운 마당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야근이 잦은 남편을 기다리는 시간이 그녀에겐 가장 힘들고 외로운 시간이었다. 과묵하나 속이 깊은 큰오빠, 다소 깔깔한 성품의 올케 언니조차 너무도 그리웠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보고픈 존재는 핏덩어리때부터 받아 안아 키운 어린 유리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유리의 모습이 눈에 선해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 날이 허다했다.
집 앞 대로변의 공중 전화 박스를 찾아 서울 큰오빠집에 전화를 했다. 언니, 저여요……. 올케, 희연의 음성을 들으니 혜옥은 울컥 복받치는 설움에 목이 잠겼다. 어머, 아가씨, 잘 지내죠? 신혼 생활은 어때요. 오빠랑 한번 가봤어야 하는데…방학 때나 한번 내려가려고요. 전화선을 통해 들려오는 희연의 음성은 여전했다. 늘 단정하고 예절 바른 깎듯한 어조. 그러나 먼 타향에서 들으니 함께 살던 예전관 달리 뭔가 좀 정감이 묻어나는 듯한 포근한 느낌임이 이상했다. 유리가 고모만 찾고 도우미 이모를 안 따라 걱정이에요. 우려 가득한 희연의 젖은 음성이 혜옥의 가슴을 휘저어왔다. 가뜩이나 눈에 삼삼하여 당장이라도 달려가 담싹 보듬어 안아야만 맘이 놓일 듯한 유리의 근황이 그리 좋질 않다니. 매일 아침 울며, 출근 준비에 바쁜 희연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는, 그러다 급기야 어제 아침엔 희연을 쫒다 아파트 계단에서 굴러 이마에 상처가 생기고 말았다는 얘기엔 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오매, 꽃 같은 얼굴에 상처가 뭔 짝이다요. 워디 크게 안 다친게 천행이네여.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서울로 달려가고플 만큼 그곳의 모든 것이 걱정되고 그리워 눈물을 줄줄 흘리며 혜옥은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길을 따라 마냥 걸어갔다.
나가 미친 여자여. 완전 미쳤나벼. 시상에 어린 거 가찹게 있는 디로 시집을 갔어야 뭔 일 있음 당장에 담박질 쳐 가고, 암때나 찾아가 아이를 돌보기도 혔을텐디, 폭폭혀서 이 일을 대저 어찐대여. 혜옥은 가슴을 치며 먼 곳으로 시집 온 자신의 결혼을 후회했으나 소용 없었다. 계속 걷다 보니 혜옥은 자신이 바다 내음 물씬 풍겨나는 부둣가에 다다라 있음을 깨달았다. 포항으로 내려온 지 이제 겨우 두 달째. 그간 한번도 와 보지 못한 곳이었다. 항구 도시라 어딘가에 바다가 있으리란 건 알고 있었으나 스스로 이렇게 오게 되리라곤 전혀 예측 못한 일이었다.
해풍이 불어오는 초여름 저녁. 홀로 낯선 부두를 거닐고 있다니! 혜옥은 갑자기 주변의 그 모든 것이 도무지 비현실적인 가상의 시공으로만 다가와 전율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과연 행복한가. 한 남자. 그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람 하나만을 믿고 먼 타향에 덜컥 내려오기로 한 자신의 무모함이라니!
윤섭은 워낙 심성 유하고 선한 사람이라 남편감으로 딱히 흠을 잡긴 어려운 경우였으나 일면 너무도 과묵하고 진지하여 재미가 없는 남자였다. 더구나 함께 한 시간이 별로 없어 공유할 그 무엇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때론 둘 사이를 너무도 낯설고 건조하게 만들었다. 고향 서해 심포의 흐리고 완만한 물살과는 달리 동해 끄트머리 항구, 그곳의 바다는 사나웠다. 시퍼렇게 날을 세우며 달려오고 달려가는 조류의 세찬 흐름에 혜옥은 오싹 몸을 떨었다. 거칠고 투박한 언행, 도무지 알아 듣기 힘든 억센 방언 만큼이나 근원 모를 두려움을 안겨주는 바다였다.
불현 듯 고향 친구 경훈이 떠올랐다. 결혼식 날 모든 쵤영을 마치고 돌아가며 그가 한 말이 내내 가슴을 맴돌았다. 읍내 오가다 너그 집 가는 심포행 버스만 봐도 가슴이 덜컹 한단께. 그럴 적마다 휘파람으로 ‘그집 앞’을 부르며 널 생각헌다. 부디 옛친구 생각도 쪼깐은 허고 잘 먹고 잘 살어라잉. 널 완전 잊을 때까정 네 사진을 우리 사진관 간판 스타로 올려놓을텐께. 언젠가 그 사진 떼브리는 날이 내가 영영 널 잊는 날일랑가. 더없이 쓸쓸한 미소로 그렇게 말하며 떠나간 경훈. 그의 힘없는 뒷모습을 영영 잊을 수가 없었다.
또한 희연의 제자 찬욱의 모습도 떠올랐다. 설명할 수 없는 남성적 아우라와 야성미가 느껴지던 문청 기질의 강한 듯 섬약한 남자. 그리고 목장을 경영하던, 고인 봇물처럼 눈가에 물기 찰랑이던 그의 형, 찬희. 그저 모두가 그리울 뿐이었다. 단지 허심히 그리울 뿐인 대상들. 그래도 그들이 존재하기에 이 낯선 항구 도시의 외로운 나날을 견뎌낼 수 있으리. 부두의 저녁 바람에 아련한 추억을 날려보내며 혜옥은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낼 당장 서울로 올라 가 유리를 데려와야 겠다는 생각에 맘이 적이 급해졌던 것이다.
결국 혜옥은 떠난 지 근 두 달만에 유리를 키우며 살던 서울 큰 오빠의 집으로 돌아왔다. 아파트 진입로 작은 슈퍼에서 유리가 좋아하던 과자와 초콜릿을 사는데 가슴이 몹시 뛰었다. 현관문을 노크하니 누구셔요, 하고 묻는 느릿한 말투의 젊은 처자 음성이 들려왔다. 유리 고모에요. 유리야, 고모다아. 순간 약간은 당황한 모습의 처녀가 뜨악한 얼굴로 문을 열어주었다. 긴 생머리의 여위고 파리한 낯빛을 한 그녀의 손에는 볼펜이 들려있었고 유리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실례 좀 허께요. 근디 유리는 워딨다요. 자나요? 마루로 올라서며 혜옥이 물었다.
꼬모오, 꼬모오, 으앙~~!! 놀랍게도 철제 샷시로 보호망이 쳐진 5층 창가, 그 좁은 창턱에 서서 하염없이 창밖만 내다보고 있던 유리가 혜옥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오매, 아가, 이게 뭔 일이다냐. 위험 천만인디 왜 여그 서있냐잉. 담싹 유리를 안아 내리며 혜옥이 물었다. 엄마랑 꼬모 기다리는 거야. 왜 이제 왔어. 유리가 혜옥의 목을 끌어 안고 울었다. 혜옥도 오열했다. 오매, 울 애기, 이게 시방 뭔 짝이다냐. 힐난하듯 쳐녀를 바라보며 혜옥이 반문했다. 유리가 창가만 좋아해서요. 늘 거기 세워달라고 졸라요. 밥도 잘 안먹고 엄마랑 고모만 찾네요. 작은 상을 펴놓곤 편지지에 깨알 같은 글씨를 빼곡이 메워놓은 처녀가 서둘러 그걸 치우며 해명했다. 둘의 우는 모습에 적이 놀란 표정이었다. 방바닥에 놓인 쟁반 위엔 유리를 먹이다 만 듯한 작은 밥그릇이 보였다. 그릇 가장자리에 바싹 눌러 붙은 적갈색의 밥알들. 아마도 간장과 깨소금, 그리고 참기름에 비벼 준 것임이 분명했다. 그걸 바라보는 혜옥의 눈가가 다시 붉어졌다. 최소한 생선 구이나 계란 말이라도 곁들여 줘야지, 아이의 밥상이 너무도 초라함에 혜옥은 가슴이 미어졌다.
저녁에 퇴근한 희연은 반색을 하며 혜옥의 상경을 반겼다. 그새 몰라보게 배가 불러 와 이젠 누가 봐도 임산부의 태를 감출 수 없는 모습이었다. 마악 혜옥의 혼삿날이 잡힐 즈음 둘째를 갖게 된 희연은 몹시도 여위고 고단한 기색이라 혜옥은 다시금 자책감에 휩싸였다. 하필이면 오빠네가 가장 힘든 때 훌쩍 시집을 가버려 여러 사람 고생시킨다는 자각에 맘이 무거웠다. 일박이일 휴가를 얻어 온 혜옥은 서울에서의 단 하룻밤이 너무도 아쉽기만 했다. 오라버니 경석은 마침 출장 중이라 혜옥은 희연, 유리와 함께 나란히 잠자리에 누워 쌓인 회포를 풀었다. 희연은 한숨을 쉬며 유리를 돌봐주는 처녀의 사연을 들려주었다. 미쓰 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친구의 오빠인 한 육사생을 짝사랑하여 그를 향한 적극적 구애를 위해 무작정 지방에서 상경한 간호사 출신의 아가씨였다. 그녀와 먼 인척간이라는 희연의 동료 교사 소개로 유리를 돌봐주게 되었는데, 육아와 가사보담은 매일 육사생에게 연애 편지를 쓰는 일이 하루 일과의 거의 전부였다. 또한 주말이면 어김없이 태능의 육군사관학교를 찾아가 남자를 면회하는 게 서울에 온 유일한 목적인 듯 해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 날 혜옥은 조카 유리와 함께 포항으로 출발했다. 희연의 승낙 하에 당분간 유리를 자신의 신혼집으로 데려가 보살피겠노라 단호히 결심한 때문이었다. 돌보미, 오 양에게 맡기기엔 유리가 너무 안됐고, 또한 임신 중인 희연 또한 육아를 떠나 얼마간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리란 생각에서였다. 고마운 시누이가 아닐 수 없었다. 희연은 시집 식구들의 그러한 속깊은 정, 훈훈한 인간미엔 번번히 감동치 않을 수 없었다. 자신에겐 결코 없는, 자신은 절대 닮을 수 없는 그들의 그러한 일면. 그녀도 자신이 어떤 여자인지는 스스로 알고 있었고 끝내 그들처럼 될 수는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아침마다 울며 매달리던 유리가 없는 퇴근길 걸음이 더없이 가벼워 희연은 절로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더구나 오늘은 금요일. 경석은 야외 필드로 출장 중이고 주말까지 무려 사흘의 연휴가 주어진 것이다. 살다가 잠깐 이런 인터미션도 있다니! 생각할수록 시누이 혜옥이 고맙고 살갑게만 느껴졌다. 함께 살 땐 더러 격렬히 부딪치며 갈등과 고뇌 속에 힘겨워하기도 했으나 막상 헤어지고 나니 혜옥의 많은 것이 생각나 아쉽고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늘 보채던 유리의 존재를 잠시 잊을 수 있음도 덤처럼 주어진 선물이라 여기며 희연은 모처럼 상가와 서점엘 들러 맘에 드는 임부복 한 벌과 한아름의 책을 사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 양은 유리가 없어 다소 자신의 역할이 줄어든 때문인지 전에 없이 반찬이며 빨래며 집안 청소를 말끔히 해놓곤 희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만든 반찬은 맛깔스런 데라곤 전혀 없어 먹기가 괴로웠다. 나물 한 가지를 무쳐도 더없이 감칠 맛 나게 하던 혜옥의 손맛이 생각나 임신 중인 그녀 또한 당장이라도 포항으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대신 향긋한 잉크 냄새 밴 신간 서적을 뒤적이며 그리운 입맛을 다스릴 밖엔 없었다.
다음 날 아침 희연은 매우 느긋한 기분으로 아침도 거른 채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자리에 누워 있었다. 간만에 독서삼매에 빠져 늦잠을 잤고 옆구릴 파고 들며 함께 놀자고 보채는 유리도 없는 아침이 달콤한 충일감을 안겨주어 오래도록 그 시간을 만끽하고 싶었던 것일까. 순간, 엄마아 엄마아……, 꿈처럼 환상처럼 어디선가 가녀린 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해 희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방 문을 열면 바로 현관이 바라보였다. 오매오매 유리 너 벌써 온겨. 예상외의 출현에 깜짝 오 양의 음성이 들려왔다. 와락, 안방 문을 열니 말총 머리에 병아리처럼 노란 원피스를 입은 유리가 혜옥의 손을 잡곤 짜박짜박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상황 종료. 그로써 평온한 모든 것은 끝이 났음을 희연은 직감했다. 방으로 들어서던 혜옥이 눈이 퉁퉁 부은 얼굴로 단 하루만의 상경 연유를 털어놓았다. 야아 땜시 폭폭혀서 죽는 줄 알았단께요. 참말로 뛰다 죽을 일여요. 혜옥은 다시 또 눈물을 내비치며 유리로인해 밤새 생고생 한 내막을 털어놓았다.
포항 혜옥의 집에 도착한 유리는 낯선 환경에 다소 경직된 모습이긴 했으나 워낙 따르는 고모 곁이라 별다른 특이점을 보이진 않았으나 점차 해가 저물며 어스름 저녁이 되자, 그때부터 간간이 울먹이며 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희연이 학교에서 퇴근할 무렵이라 엄마 생각이 났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유리의 식성을 잘 아는 혜옥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며 달래자 겨우 나아졌는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워매, 유리 왔냐아. 퇴근하고 돌아 온 윤섭이 대환영의 뜻으로 유리를 번쩍 들어 올려 반기는 순간, 유리는 낯선 남자의 모습에 놀라 그만 아앙,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후에도 유리의 울음은 밤을 새우며 이어져 좁은 신혼 단칸방에서 윤섭과 눈만 마주쳐도 계속 울어대는 통에 혜옥은 아이를 업고 달래며 거의 꼬박 밤을 새웠다. 아침에 되어 윤섭이 출근하자 유리는 겨우 울음을 그쳤으나 뭔가 공포에 질려, ‘꼬모, 집에 가자, 엄마한테 가자.’ 하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혜옥은 그런 유리의 모습이 서러워 한바탕 통곡을 했고 그리곤 둘이 부등켜 안고 또 한참을 울었다.
아이를 서울로 데려다 주는 것 외엔 달리 방도가 없다는 판단에 혜옥은 도리없이 그날로 유리와 함께 다시 상경하게 된 것이 그간의 사연이었다. 혜옥은 그 하룻밤의 과정을 얘기하면서도 줄곧 울음을 감추지 못했다. 정든 조카를 보살피려던 마음이 무산되어 못내 속상하고 아쉬워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해 겨울 초입, 희연은 둘째 아이를 낳았다. 아들이었다. 시모에게 미리 귀띔한 말이 결코 헛되지 않게 되어 희연은 우선 그 점에 크게 안도했다. 시모는 하늘과 조상이 내린 큰 선물이라며 뛸 듯이 기뻐했다. 가뜩이나 시모로부터 귀한 맏며느리라며 까닭없이 굄을 받아오던 터에 첫 딸에 이어 둘째로 아들까지 낳자, 희연에 대한 시모의 편애는 더욱 심해져 때론 적이 부담이 될 정도였다. 그즈음 포항의 새댁 혜옥도 마침 태기가 있어 입덧으로 고생이 막심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느날 희연에게 전화를 건 혜옥의 음성은 분노와 혼란으로 매우 격앙되어 있었다. 언니, 여그 사람들은 워쩌서 그런대여. 언니도 경상도 출신이지만 그런 편견 당췌 못 느꼈는디, 여그 포항은 참말로 무섭단께요. 혜옥이 전해오는 그곳, 포항의 분위기는 희연이 듣기에도 자못 심각한 수준임이 분명했다.
5년마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대통령 선거. 그 대선을 앞둔 즈음이면 매양 묘한 정치적 기류로 으레 민심의 이반, 지역적 대립 양상이 최악의 상황으로 몰리곤 하는 게 상례이긴 했으나 항구 도시 포항의 그해 대선 기류는 실로 예사롭질 않았다. 특정 정치인들이 자신의 당선과 유익을 위해 리모콘처럼 민심을 조종하는 탓이었다. 완전 타향이라 할 낯선 곳에서 처음으로 대선을 치르는 혜옥은 마치 맨몸으로 치열한 격전의 현장에 서 있듯 더없이 두렵고 살벌한 느낌이었다. 새댁 고향이 어디라캤제. K시라꼬. 그라믄 마 무조건 기호 2번 찍겄네. 그토록이나 살갑게 도와주던 주인집 아주머니조차 점차 뜨악한 낯빛이 되어 뭔가 혜옥을 경계하는 눈치였고, 시장에 가서 장을 볼 때도 상인들은 고향 말씨를 그대로 쓰는 혜옥을 결코 고운 눈으로 보질 않았다. 야채값이 허벌나게 올라브렀네잉. 무심코 던지는 혜옥의 말에, 한겨울에 야채값 오르는 기 당연한 거 아입니껴. 됐심더, 마. 안살라카믄 치아뿌소. 평소 낯이 익은 상인들이건만 그렇듯 야멸찬 응답으로 감정 섞인 대응을 보이기 일쑤임이 기이하기만 했다. 어쩌다 타는 택시의 기사들 또한 한 술 더 뜨기 십상이었다. 아지매 고향이 어딥니껴. K시라꼬예. 아구마, 거어 사람들 저거들끼리 똘똘 뭉쳐갖곤 마 억수로 무섭대예. 한 마디로캐서 마 디이 독하다 아입니껴. 그렇듯 어처구니 없는 반응을 보이기 십상이었다.
그런 어이없는 일을 당할 때마다 혜옥은 예리한 단도에 가슴을 찔린 듯 심장에서 피가 팍,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낯선 도시, 낯선 길, 낯선 사람들. 어느날 장을 봐 집에 오다 말고 혜옥은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길가에 망연히 서있었다. 우리 사회 큰 병폐의 하나인 지역 감정. 그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전화선을 통해 혜옥은 당장이라도 그곳을 떠나 다시 정든 고향으로 가고 싶다며 울먹였다.
아가씨, 그사람들 그냥 무시해버리세요. 그건 마치 허깨비 같은 거예요. 다만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필요와 이익을 위해 민중을 조정하고 선동하는 것일 뿐. 그러다 선거 끝나고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곧 일상인으로 돌아가기 마련이에요. 희연은 겨우 그렇게 말해 줄 수밖에 없음이 안타까웠다.
우선 경석과 희연, 그들 부부조차 대선이 가까워 올수록 분위기가 점차 묘하고 무거워질 것임이 뻔한 때문이었다. 결혼하던 그 해 대선 때도 경석은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아 희연은 실로 맘고생이 자심했었다. 영남 출신 여자와 호남 출신 남자의 결합. 누가 뭐라해도 소위 순도 높은 가연이련만 유독 선거 때만 되면 알게 모르게 대선 후보자를 둘러싸고 서로 신경전을 펼치며 투명한 내심을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무언의 괴리감 같은 것.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특정 지역을 폄훼하고 소외시켜 그에 따른 반사적 이익을 얻으려는 집단은 과연 누구일까. 사회과학적 분석, 정확한 통계에 의한 수치가 아니라, 소위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부와 권세를 지속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것을 적극 표방하여 우매한 민중을 선동하고 고정관념화 시킨 일종의 사회적 통념. 지역 감정의 실체란 바로 그런 것임이 분명했다. 가뜩이나 남과 북이 갈라진 좁아터진 땅덩이에 더욱 깊고 넓게 골이 패여가는 지역차별의 망국적 기류라니. 어쩜 그건 리히터 규모 7.0 이상의 대지진과도 같은 민심의 엄청난 파괴력을 몰아 올지도 모를 일. 희연은 다가올 대선전을 떠올리며 무언가 으스스한 기운에 몸을 떨었다.
혜옥은 그해 겨울 아들을 출산했다. 순산이었다. 대선을 전후한 그 모든 혼란과 갈등의 회오리 속에서도 그녀는 의연히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켰다. 그녀는 아들의 이름을 ‘영일’이라 지었다. 영일만의 항구 도시인 포항의 아이. 자신의 아들이 태어난 땅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희망, 또한 큰 소망이 묻어나는 이름이었다.
*김현숙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단편: 골고다의 길). 1989년 《현대문학》 신인상 추천완료(단편: 어둠, 그 통로). 작품 「출모」, 「삼베 팬티」, 「어두워지지 않는 밤」, 「가지 않은 길」 ,「꽃비 내리다」, 「홋카이도 3월의 눈」, 「와디」, 「히스의 언덕」등 다수. 2002년 소설집 『하얀시계』 출간 (휴먼 앤 북스), 2010년 소설집 『노을 진 카페에는 그가 산다』 출간 (도서 출판, 개미), 2013년 장편 『먼 산이 운다』출간 (문학나무). 2010년 제 14회 이화문학상 수상, 2012년 제 1회 아시아황금사자 문학상 (우수상) 수상, 2013년 제 10회 한국문협 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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