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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책·크리틱/김익균/왜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니─어떤 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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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책·크리틱/김익균/왜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니─어떤 안부
김익균
왜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니
─어떤 안부
1.
리토피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정규 시인이 시집 『내 고향 남해』를 상자하였다. 이번 시집을 일독하는 첫 느낌은 마치 튼튼한 건축물로 들어선 듯한 아늑함이었다. 우선 ‘내 고향 남해’는 시집 제목이자 1부 제목이기도 한데 1부에 모인 시들은 ‘거리의 서정적 결핍lyric lack of distance’이라는 서정시의 본질에 천착하고 있다. 2부는 남해의 세목들을 장소와 사연들로 직조해나가는 「남해12경」 연작시이고 3부에서 고향과 자신의 관계를 어머니와 나의 관계로 성찰하는 「우리집 닭은 어머니다」가 이어진다. 여기에 덧붙여 4부 「지천명과 이순 사이」는 노년을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실존적 성찰로 풍요롭다.
2.
고향이란 현재의 장소가 아니라 언젠가는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의 소실점이다. 근대인에게 고향의 이미지는 지방(고향)에서 도시로 나와 뜻을 이루고 다시금 고향으로 귀향한다는 전형적인 내러티브 구조와 뗄래야 뗄 수 없을 것이다. 1부에 실린 「귀촌」은 고단한 도시 생활 중에 고향을 돌아보는 모던 클래식의 힘을 증언한다.
지구도 사람들이 워낙에 헝클어서 그런지
아파트 바람도 태풍처럼 매서울 때가 있다
베란다에 입주한 알루미늄 건조대를
죽을힘을 다해 누르고 있는 돌거북 부부
땀 냄새 품은 셔츠, 악취 묻은 바지, 쾌쾌한 양말
굴뚝의 매연처럼 바람에 춤을 춘다
돌거북 등짝이 젖은 빨래처럼 흥건하다
어느 비 내리는 날.
베란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왕관을 쓰고
아득하게 정든 고향바다로 금의환향 휴가를 갔다
조개 멍게 해삼 미역 파래 고향친구들을 만나
빌딩 숲에서 아파트 숲으로 항상 숲에서만 산다고
인터넷에 밴드, 카톡에 SNS 정보바다에서만 산다고
부부는 도시를 화려하게 풀어놓으며 안부를 물었다
자연도 사람들이 워낙에 구박해서 그런지
돌풍 부는 날 건조대가 휘청거리며
젖은 이불이라도 걸어두는 날은 환장한다.
그런 날은 밤이 되면 팔 다리 허리 만신이 쑤신다.
세상살이 어찌 돈만 먹겠느냐고, 이제 자연과 손잡고
흐르는 물길처럼 살자며 질그릇 같은 시골로
향하는 물줄기가 날마다 불어난단다.
─ 「귀촌」 전문
위의 시 1연은 아파트 베란다의 건조대를 전경화하고 있다. 아파트 바람이 태풍처럼 불어오는데 죽을 힘을 다해 건조대를 지키고 있는 “돌거북 부부”는 영락없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여기에 고단한 삶의 세목들로 “땀 냄새 품은 셔츠, 악취 묻은 바지, 쾌쾌한 양말”이 보태진다. 어느 비오는 날 만화 같은 상상력이 우리를 고향으로 돌려세우면 우리는 베란다의 고인 빗물방울 왕관을 쓰고 마술처럼 고향 바닷가에 도착해 있다. 금의환향이라는 말은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는 말이던가. 시인 부부는 고향 사람들에게 도시의 화려한 삶을 너스레 섞어서 이야기하고는 고향 사람들의 안부를 듣는다.
1연 첫 행의 “지구도 사람들이 워낙에 헝클어서 그런지”가 3연 첫 행에서 “자연도 사람들이 워낙에 구박해서 그런지”로 변주되는 순간 고향의 안부가 도시의 삶과 그닥 다르지 않음을 암시하는 대목에서는 장인적인 솜씨가 엿보인다. 힘들기로 하면야 도시나 고향이나 뭐가 다르겠냐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귀향의 “물줄기가 날마다 불어난단다.”는 결구의 여운이 애틋하다.
1부의 짙은 고향의 서정성은 남해의 아름다운 장소 12곳을 한땀 한땀 그려나가고 있는 2부의 연작시 「남해 12경」의 진득한 작업에서 새로운 진경으로 펼쳐진다. 2부에 실린 시의 제목들을 개괄해 보는 것만으로도 남해의 전모가 그린 듯 선연하다. 해안을 따라 곡예 운전을 하는 ‘보광운수 최기사’( 「제1경 금산과 보리암-보광운수 최기사」)로부터 시작해서 노량포구 영아 씨(「제2경 남해대교와 충렬사-노량포구 영아 씨」), ‘죽방림의 후예들’(「제4경 창선교와 원시어업 죽방렴-죽방림의 후예」) 등 남해에서 살아내는 인간 군상과 함께 우리가 갖게 되는 남해의 심상지리는 종요롭다.
남해 12경을 알뜰하게 살핀 뒤 ‘파구멘’이라는 부제가 이색적인 「에필로그」를 보자. 파구멘은 13번째 달을 뜻하는 에티오피아 말이라고 한다.
요 몇 달 동안 남해12경을 두루 살펴보고 오늘은 노도 갯바위에 앉아 낚싯대를 들이고 유언 같은 내 짧은 생의 여분을 낚시질한다. 비록 정사에 누명을 쓰고 노모와 이별하여 천리 먼 남해바다 고도에 유배 오는 길은 무거운 마음을 달랠 길 없었으나, 천지신명도 깊은 뜻이 있었는지 황홀한 비경과 질그릇처럼 살아가는 토민들의 후덕한 인심이 골마다 넘치는 이곳, 남해에 와 깨달으니, 지금도 당쟁과 재물로 나라 파는 한양의 양반네들이 얼마나 우둔하고 미천한지를 생각하매, 하루라도 붓을 뗄 수가 없어 구운몽, 사씨남정기, 서포만필, 서포집, 고시전 다 묶어 바라노니, 세상사 욕망은 다 한낱 꿈이러니 하고, 높다고 하는 양반네들은 지금부터라도 부디 민초들을 하늘로 받들고 치국하기를 명하노니, 자암 김구, 촌은 유희경, 약천 남구만 선생들의 이곳 심경도 헤아리고 다독여 예를 다하였으니, 비록 이제 내 육신은 어머니 품으로 가겠지만 내 넋은 길이길이 보물섬에 남아 후대들의 올곧은 가르침에 소진하겠노라.
─「에필로그-파구멘」 전문
위 시는 전통시학의 표현과 세계상이 재현되고 있다. 연작시 중에서 전통적인 어조를 살리거나 전통 시대의 선비를 시적 화자로 전경화하는 경우가 몇몇 보이는데 12경 연작을 마치는 소회로 쓰여진 「에필로그-파구멘」에서 이 점은 특히 인상적이다. 시적 화자는 “정사에 누명을 쓰고 노모와 이별하여 천리 먼 남해바다 고도에 유배 오는” 선비로 표상된다. 남해의 12경을 두루 둘러본 소회를 전통시대 선비에 기대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유불선 삼교회통의 태도로 “황홀한 비경”에 홀리고仙敎, “세상사 욕망”을 경계하고佛敎, “민초들을 하늘로 받들고 치국하기를 명”儒敎한다. 이는 고향을 노래하는 시인이 서정성의 원형적 시간을 꿈꾸는 데서 기인한다. 시인의 고향 남해의 세목은 현대에 바쳐지지만 그 이면에서 움트는 것은 ‘13번째 달’이 암시하듯이 분별지를 넘어서는 상상계 그 자체이다. 이 세계를 루카치는 이렇게 서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3.
할머니 얼굴 주름살 골을 타고 달려온 버스가
마중 나온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싸-한 바다냄새 비늘처럼 일어나 차창을 두드린다
산허리까지 올라선 다랑이들 가슴에
노니는 물안개가 도솔천 대문을 지키고 있다
파릇파릇 마늘 농심 꿈으로 키우는 동면 잊은 다랑이들
대장군 여장군 우뚝 서있는 남해대교 두 팔 뻗어 반기고
방파제 깨우는 파도 거품 위를 비상하는 갈매기들
통통 고깃배 넘나드는 해전포구 노량바다 거북선 지킴이
세속에 발 담지않은 처녀 허벅살처럼
뽀송뽀송 싱싱한 횟집 아줌니
꼴뚜기 병어회에 묻어나는 인심
망운산 골짝 깬 청옥 같은 물줄기
뿌리 이어 내려오는 맑디맑은 내 고향
할아버지께서
토담 치고 옹기 모아 둥지 튼 보금자리
할머니 쌈지 속에 콧물 묻은 지폐처럼
밟아버린 세월 저편 아련한 추억들
삶의 주머니에 꼬깃꼬깃 숨었다가
겁 없는 망아지처럼 버스 안으로 뛰어든다
버스는 꼬불꼬불 시간 속을 달리건만
차창 밖 어린 세월은 새치만큼씩 마음 안을 키운다
아, 언제나 안기고픈 비릿한 흙냄새 마늘향기
토끼반도 남쪽 바다 한려공원 중심에서
청정해역 출렁이는 내 고향 남해
표제작 「내고향 남해」의 첫 구에서 명징하게 제시되듯이 고향 남해의 땅이며 길이며는 “할머니 얼굴 주름살 골”처럼 나를 낳아준 원천인 아버지를 낳은 어머니 즉 할머니의 몸이나 다름없다. 2행의 싯구 “마중 나온 산모퉁이” 역시 고향의 산모퉁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정겨운 가족과 동일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에게 고향이란 “뿌리 이어 내려오는 맑디맑은” 곳임을 알 수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 가족과 친지들의 몸이고 살인 고향 남해의 길 위를 달려가다 보면 “세월 저편 아련한 추억들”이 시인의 품으로 안겨든다. 그러고 보면 고향 남해의 길은 펼쳐진 시간 그 자체인 듯하다. 내 고향 남해의 “버스는 꼬불꼬불 시간 속을 달”린다.
고향은 지난 세월의 시간성 위에 존재하는 심상공간이며, 떠나온 고장을 그립게 아쉬워하는 기억의 표상이다. 고향이라는 장소 그 자체는 과거의 경험과 사건의 현재적 표현이며, 미래에 대한 희망의 현재적 표현이다. 시간은 이렇게 우리의 장소 경험의 일부이다. 시인은 과거 기억 속 고향의 풍경을 그리워하고 고향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거듭 노래한다. “대장군 여장군 우뚝 서있는 남해대교”, “방파제 깨우는 파도 거품 위를 비상하는 갈매기들”, “통통 고깃배 넘나드는 해전포구 노량바다 거북선 지킴이”, “뽀송뽀송 싱싱한 횟집 아줌니”, “망운산 골짝 깬 청옥 같은 물줄기” 등등 끝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사람들은 고향을 기억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이다. 고향의 아름다움의 나열은 객관적 사실 그 자체라기보다는 시적 화자가 그 경관 안의 일부였다는 기억의 재생으로서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어릴 적 겨울은 길고 아팠다. 올망졸망 하반신이 부챗살로
뻗은 아랫목은 배가 불렀지만, 아랫목은 아랫목이 아니었다.
밤이면, 봉창 문풍지 마대자루가 둥둥 북을 쳤다. 아버지는
헛간에서 떨었고, 어머니는 정지에서 시렸다. 낮이면, 철없
던 나는 스케이트 놀이로, 논두렁 쥐불놀이로 하루해를 서산
에게 주고 거북등짝 같이 언 손과 바꿔 왔다. 아버지 몰래
뒤란에서 따슨 물로 만져주던 어머니 손이 더 파랬다. 동동
구리무 발라 호호 불러주던 손 아프지 않았다. 손금처럼 지
워지지 않는 아련한 그 결. 가슴 속 등신불 같은 흑백사진
한 장, 파마머리 동동구리무 바른 봉선화 닮은 젊은 적 고운
어머니, 언제나 웃고 계신다.
─「동동구리무」 전문
3부 「우리 집 닭은 어머니다」는 고향과 나를 결속시키는 가족의 삶을 부감俯瞰하는 바 특히 “어릴 적 겨울은 길고 아팠다.”고 시작하는 「동동구리무」는 유년의 가장 소중한 순간이 어머니와 고향과 결속되어 아프게 현상한다.
마지막으로 4부에 실린 ‘지천명과 이순 사이’의 순정 서정시들을 읽어보면 결국 이 시집 전체가 “그리움의 시”로 채워져 있으며 시인에게 시란 “긴긴 안부”(「은행잎」)를 묻는 일임을 알겠다. 시인은 우리에게 “아프다고 왜 말하지 않았니”라고 여지껏 결곡하게 묻고 있었던 것이다. 이쯤에서 잠시라도 눈을 깜박이며 ‘아프다, 아프다’고 유년의 저 너머로 안부를 전해 보아도 좋겠다.
둑방길에서 서럽도록 피어나던 때
여린 첫사랑 안고 아무도 없이
또 얼마나 울었니.
어둠 속 하현달이 이슬편지를 쓰고
사위가 적막인 사랑이 물결치며 떠날 때
아프다고 왜 말하지 않았니.
─「아프다고 왜 말하지 않았니」 부분
*김익균 2010년 《시작》 평론 「그 참 견고한 외계-황인숙론」으로 등단. 저서: 『서정주의 신라정신 또는 릴케 현상』(소명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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