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75호/특집/인천과 근대문학 100년/이경재/한국근대문학 100년과 인천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부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49회 작성일 20-01-10 15:40

본문

75호/특집/인천과 근대문학 100년/이경재/한국근대문학 100년과 인천


이경재


한국근대문학 100년과 인천



1. 들어가며


1917년은 한국 최초의 근대장편소설로 불리는 이광수의 『무정』이 발표된 시기이다. 『무정』으로 인해, 그 이전 『혈의 누』(1906)로 대표되는 신소설이나 1910년대 단편소설들을 빼놓더라도 한국근대문학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쌓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천으로 초점을 집중해 보아도, 1920년을 전후한 시기는 인천근대문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 문예부’가 탄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글은 지난 100년 동안 한국현대문학에서 인천이 어떻게 표상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인천을 하나의 통일된 인상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천은 개항, 식민지, 분단, 전쟁, 산업화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엄청난 속도의 변화를 겪었으며, 이로 인해 메트로폴리스가 갖게 마련인 복잡성과 더불어 혼종성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여 우리 문학에서도 인천의 얼굴은 실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지역이 문학에 등장할 경우 그것은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하나의 장식적 기능에 그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색인으로서의 공간은 지역의 구체적 삶과 생활양식이라는 맥락에 연결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본고에서는 인천이 색인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제외하고, 인천이 구체적인 삶의 공간으로 등장하는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집필의도를 달성하기 위하여, 2015년에 인천광역시에서 발행한 『한국문학이 그려낸 인천』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책은 100여년의 한국근대문학사에서 인천을 형상화 한 수많은 작품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작품들을 간추렸을 뿐만 아니라, 발간 시기가 최근이라 그 선정 작품들의 시의성도 매우 적절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최찬식의 『해안』, 현덕의 『남생이』, 이상의 『지주회시』, 함세덕의 『해연』, 이태준의 『밤길』, 한남철의 『강 건너 저쪽에서』,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 이원규의 『포구의 황혼』이 수록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창작 연대순으로 작품의 특징과 거기에 나타난 인천 표상의 의미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2. 개항장으로서의 인천


조선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은 이후 본격적으로 근대 세계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 바로 개항이라 할 수 있으며, 인천은 부산과 원산에 이어 1883년 정식으로 개항을 하게 된다. 비록 개항의 시기는 늦었지만, 서울의 인후咽喉라는 그 지리적 특징으로 인하여 그 영향력의 강도는 매우 컸다. 인천은 그야말로 가장 근대화되고 서구화 된 도시라는 위상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개화기 인천이 차지한 문명화 된 도시로서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최찬식의 『해안』(1914)이다. 우연적인 구성이 난무하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근대소설로서는 부족한 점이 많은 작품이지만 인천이 당대 조선 사회에서 어떻게 표상되고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을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적인 공간의 의미가 사회적 관계성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고려할 때, 『해안』에서 인천의 의미는 서울과의 대비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작품에서는 경자瓊子의 뛰어남을 설명하면서 “서울 같이 번화하고 안목 높은 천지에서도 그러한 아이가 있으면 사람마다 놀랄 만한 일이어든, 인천 같이 무무(貿貿. 교양이 없어 말과 행동이 서투르고 무식함)한 곳에서 그런 신재로 보고 어찌 하품 아니할 자 있으리요.”(17)라고 말하다. 위의 문장 속에서는 ‘서울:번화하고 안목 높은 천지=인천:교양 없고 언행이 서투르고 무식한 곳’이라는 이분법이 성립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작품 속에서 이러한 이분법으로 오히려 전도된다. 대성과 그의 가족이 생활하는 서울은 오히려 전근대적이며 무지몽매한 곳으로, 경자와 경자 모가 생활하는 인천은 근대적이며 개화된 공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해안』은 간단히 말해 인천에 살던 신여성 경자의 수난기라고 할 수 있다. 인천에서 승승장구하던 경자는 서울 계동 황참서의 아들 대성과 결혼을 하게 되고, 시아버지의 어리석음과 탐욕으로 그 결혼생활은 위기에 봉착한다. 시아버지는 경자를 범하려 하고, 이러한 행동은 경자를 자살로까지 내몬다. 바다에 빠진 경자는 시집에서 하인으로 일하던 경천에게 극적으로 구조 받아 살아나고, 마지막에는 심한 병증으로 인하여 인천병원에 입원한다.     

작품은 경자가 시집에서 쫓겨나 인천에 돌아왔다가 자살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장면에서 인천은 일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모던한 도시이다. 공원의 이름은 ‘일본공원’이고, 그 공원에 있는 주인공 경자는 “구름 같은 히사시가미에 사쿠라색 리본을 새뜻하게 꽂고”(11) 있다. 경자는 공원을 나서 화개동 고개를 넘어서서 시키시마 아래끝 해안에서 몸을 던진다. 이 때의 모습은 “월미도 등대의 불빛은 경경 시끼시마 일산루의 사미센 소리는 쟁쟁, 동천에 돋는 달은 교교한 광휘를 일본공원 팔판루 앞에 날리더라.”(14)라고 아름답게 묘사되는데, 이러한 아름다움은 경자가 처한 비극적 상황을 더욱 부각시킨다. 경자의 어머니가 경자를 찾아 나선 길, 즉 일본공원을 거쳐 용동통 큰길로 해서 축현정거장(동인천역의 일제강점기 명칭)을 향하는 길에서도 나름 개화한 인천의 모습이 드러난다.  
『해안』에서는 인천항 근처가 다른 곳보다는 삶의 발전 가능성이 큰 공간으로 그려진다. 경자의 어머니는 본래 한미한 농민 정씨의 아내로서, 남편과 부평 오류동서 농업을 하며 빈궁하게 살다가 경자 다섯 살 되던 때에 남편을 잃었다. 이후 “인천항구가 살기 좋다는 말을 듣고”(15) 경자를 데리고 인천항에 가서 남의 집 곁방을 얻어들고 바느질품을 팔거나 해관에 나가 헤어진 곡식을 주워서 간신히 생계를 이어왔다. 경자의 어머니는 열심히 생활한 결과 남의 집 곁방을 하직하고 만석동 산 밑에 조그마한 초가집을 사서 살림을 차린다. 그렇게 편안한 삶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인천항구가 살기 좋다’는 소문처럼 가세가 오히려 “그 남편 살아 있을 때보다 백배나 나”(16)아진 것이다. 경자네 가족은 농사를 짓던 부평을 떠나 인천항으로 온 결과, 남편이 없음에도 ‘백배나 나은’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인천에 사는 경자 모는 “경자는 아무쪼록 공부를 시켜 조선 여자계에 모범이 되게 하리라.”(16)는 마음으로 공부를 시킨다. 경자는 이러한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여 “시험마다 우등이요, 학기마다 진급을 하여 경인간에 여학생계에 성예가 자자”(17)하다. 『해안』에서 당대 여성에 대한 작가의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다. 대성의 어머니나 유모 같은 구세대 여성은 “어리석은 품은 한량이 없는 것이라.”(34)고 이야기되고, 신여성들도 “하나도 문명한 지경의 실지를 밟는 자가 없고, 다만 히사시가미에 보석핀이나 꽂고, 손가락에 금반지나 두서넛 끼고, 화려한 의복에 반짝반짝하는 금시곗줄이나 늘여 남자의 눈동자를 형황하게 하는 것으로 성사를 삼을 뿐이라.”(38)거나 “자긍하는 마음이 하늘을 뚫을 듯 하고, 날마다 생각하는 바는 연극장 구경이나 다닐 생각, 밀매음이나 할 생각, 툭하면 이혼이나 할 생각, 이것이 소위 조선의 신부인이라 하는 인물이라.”(38)고 부정적으로 이야기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자는 독보적으로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 신여성이며, 이러한 여성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 인천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인천과 달리 서울에서는 구시대적 관념과 인습이 판을 친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무지몽매한 과거를 상징하는 인물은 대성의 아버지 황참서이다. 그는 결국 정신병에 이른 타락과 무지함으로 며느리를 탐내다가 며느리를 자살로까지 내몬다. 황참서는 “완고 인물일 뿐 아니오, 투미하기가 짝이 없는”(18) 인물로서, 욕심과 어리석음이 정신병의 수준에 이른 것이다. 그는 아들의 결혼도 양반을 따지고 재산을 따지고 얌전함을 따지는 구시대적 방식을 고수하고자 한다. 황참서는 “그 신부의 학문 여하는 묻지 않고 지체나 자기와 같고 형세는 과히 빈한치 아니하여, 신부가 시집올 때에 혼수나 굉장히 하여가지고 올 만한 곳”(18)을 원하는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와 달리 대성은 서울 계동 사는 황참서의 아들로서 법률전문학교에 입학한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다. 대성은 “문벌이나 신분은 헤아릴 것 없고 다만 신부의 학문이 섬족하고 지식이 충분하여 가히 조선 여자계에 모범되고 스승이 될 만한 신부”(19)를 원한다. 황대성은 이러한 상대를 모두 거부하다가 신문에 난 “인천 여자고등학교 사년급 정경자”(27)에 대한 기사를 본다. 그 기사는 “그 여학생의 이력과 숙덕과 과공이 우월함을 지극히 찬양”(27)하는 내용이다. 황대성은 그 기사를 보며 “조선에도 이러한 여학생이 있으니 일반 여자계에 대하여 가히 축하할 바는 장래에 좋은 희망이 있겠도다.”(27)라며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
그러나 문제는 황대성이 자기가 마음에 둔 정경자와 결혼을 하는 과정이 “부모의 명령적 결혼을 타파하고 장차 부부될 신랑신부의 공화적 결혼을 창도하는 자의 효시가 되”(20)고자 하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지극히 구시대적이라는 것이다. 황대성은 자신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유모와 무당의 미신적 권위 등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이처럼 최찬식의 『해안』은 서울과의 대비를 통하여 개화된 공간으로서의 인천을 드러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3. 식민지 시기 인천


1) 자본의 공간
이상의 「지주회시」(1936)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착취와 피착취의 문제를 여러 가지 알레고리와 비유를 통하여 드러낸 문제작이다. 이 작품에는 동물 비유가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모든 인물들은 그에 걸맞는 동물 비유를 하나씩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바로 거미이다. 「지주회시」에서는 그, 아내, 친구 吳, 마유미, 돈 등이 모두 거미로 비유된다. 이처럼 여러 차원에 놓여 있는 인물과 대상을 거미라는 동일한 동물로 나타낼 수 있는 근거는, 비유되는 대상들이 ‘무언가를 빨아들인다는 것’에 있다. ‘빨아들인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a). 눈물이 새금새금 맺혀 들어왔다. 거미-분명히 그 자신이 거미였다. 물부리처럼 야위어 들어가는 아내를 빨아먹는 거미가 너 자신인 것을 깨달아라. 내가 거미다. 비린내 나는 입이다. 아니 아내는 그럼 그에게서 아무것도 안 빨아먹느냐. 보렴-이 파랗게 질린 수염 자국-퀭한 눈-늘씬하게 만연되나마나하는 형용 없는 영양을-보아라. 아내가 거미다. 거미 아닐 수 있으랴. 거미와 거미 거미와 거미냐. 서로 빨아먹느냐. 어디로 가나. 마주 야위는 까닭은무엇인가. (161-162)

b). “이게 마유미야 이 뚱뚱보가-하릴없이 양돼진데 좋아 좋단 말이야-금金알 낳는 게사니 이야기 알지(알지) 즉 화수분이야-하룻저녁에 3원 4원 5원-잡힐 물건이 없는데 돈 주는 전당국이야(정말?)아-나의 사랑하는 마유미거든” (169)

a)에서 주인공이 자신과 자신의 아내를 거미로 단정 짓는 이유는 상대방이 야윌 정도로 서로가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빨아먹는 데에 있다. b)에서도 그의 친구 吳는 자신의 물욕을 채우기 위해 여급 마유미를 등쳐 먹으면서, 자신을 거미라고 규정짓는다. 이 때 거미는 죄인을 눈멀게 하는 악마로서 가난한 자의 피를 짜내는 수전노라는 기독교적 의미를 획득한다.
서로가 서로를 빨아먹는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탄생한 거미의 이미지는 더욱 확대되어 당시 사회를 밑바탕에서 움직여나가던 핵심적인 힘인, 즉 돈을 의미하기까지 한다. 즉 ‘돈도 거미’(173)인 것이다. 나중에 주인공은 돈을 거미에 빗대어서, “요 새금한 내음새-요것 때문에 세상은 가만있지 못하고 생사람을 더러 잡는다-더러가 뭐냐. 얼마나 많이 축을 내나.”(181)라고 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지주회시」에는 그야말로 일제 치하에서 자본을 중심에 놓고 움직이던 사회의 모습이 곳곳에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도 백원을 석달만에 오백원으로 만들어 주겠다며 그의 돈을 가로채기도 하는 친구 吳야말로 자본의 속성에 가장 깊이 침윤된 인물이다. 
흥미로운 것은 자본의 논리를 대표하는 吳가 인천의 미두 취인소에 근무한다는 점이다. 그는 吳가 거주하는 인천에 와서 ‘해안통사무실’, ‘바’, 그리고 ‘월미도’ 등을 방문하며, 인천에서 한 달 정도 머물기도 한다. 자본의 논리에 철저한 인물을 인천에 있는 미두 취인소에 근무하게 한 것은, 창작 당시 인천 미두 취인소가 가진 의미를 생각할 때 상당히 의미 있는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吳가 본래는 화가를 꿈꾸는 예술가 지망생이었다는 점이다. 부친이 가산을 탕진하였기 때문에, 吳는 예술가의 꿈을 접고 돈을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예술과 자본이라는 근대의 대표적인 갈등이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것인데, 이 때 결국 이기는 것은 자본이고 그 자본의 본거지가 인천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의 꿈을 추구하다가 실패하고, 대신 자본을 구한다는 설정은 「지주회시」보다 10여년 전에 쓰여진 이광수의 「재생」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재생」(1924-1925)에서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가 감옥살이까지 한 신봉구는 연인이었던 김순영에게 심각한 배신을 당한다. 순영은 장안의 부자인 백윤희에게 갔을 뿐만 아니라 신봉구를 농락했던 것이다. 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봉구가 돈으로 순영에게 복수하겠다고 찾아간 곳이 또한 인천의 미두 취인소이다. 그 곳에서 많은 돈을 벌어 돈에 넘어간 순영에게 돈의 힘으로 복수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봉구는 “김영진金英鎭이라는 가명으로 인천 마루김金미두米豆 취인중매점에 사환 겸 점원 겸”(74회)으로 취직한다. 미두란 “한 놈이 잘 되려면 아흔 놈이 망해야 되는 법”(77회)에 바탕한 것으로서 비대칭적인 교환논리가 극단에 달한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시기 인천은 미두라는 매개를 통해 자본의 논리가 가장 철저하게 관철되던 조선의 대표적인 공간으로 표상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노동의 공간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식민지 시기 인천은 미두로 대표되는 자본의 논리가 작동하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형상화된다. 동시에 인천은 농촌에서 몰려온 이주민들이 살기 위해 자신의 삶 전부를 바치며 몸부림치는 노동의 공간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현덕의 「남생이」와 이태준의 「밤길」이 노동의 공간인 인천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현덕의 「남생이」(1938)는 인천 해안의 빈민촌을 무대로 하고 있으며, 안회남은 일찍이 “朴泰遠氏는 京城市內의 淸溪川 川邊風景을 맛고 「남생이」 作者 玄德氏는 仁川 海岸의 貧民 生活을 차지해도 괜찮을 것”(「현문단의 최고수준」, <조선일보>, 1938.2.6.)이라고 고평한 바 있다.  
「남생이」에서 노마네 가족은 농촌에서 소작을 다 떼이고 도시로 나왔으나 아버지는 병이 들어 죽고,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려 나간다. 노마는 가정과 학교 모두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남생이」에서 노마의 아버지는 중병이 들어 가장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 가장의 몫은 고스란히 어머니가 짊어지고 있는데, 그녀는 항구의 들병이가 되어 이미 도덕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 노마가 경험하는 인천은 이미 정감어린 세계와는 거리가 먼 어머니, 털보, 바가지의 온갖 비루한 욕망과 애욕이 들끓는 타락한 세상이다. 「남생이」에서 노마의 시각은 현실의 암울함과 세상의 부도덕함을 바라보는 중요한 통로가 되고 있다. 식민지 시기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 변두리로 이주했다가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태준의 「밤길」(1940)은 월미도 공사장을 배경으로 하여 일제 말기 도시 빈민의 처절한 삶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황 서방은 서울에서 살다가 월미도 용궁각의 공사 현장에 돈을 벌기 위해 온다. 권 서방은 집도 권속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홀아비이고, 황 서방은 서울서 내려왔다. 황 서방은 수표다리 근처에서 남의 집 행랑살이를 하다가, 돈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에 “주인나리한테 사정사정해서 처자식만 맡겨 놓고 인천으로 내려온 것”(246)이다. 처음 보름 동안은 돈을 벌었지만, 장마가 시작되는 바람에 벌어놓은 돈은 다 까먹고 간신히 연명만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다 서울에서 집주인이 황서방의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황서방을 찾아온다. 집주인은 황 서방을 보자 마자 따귀를 연달아 때린다. 황 서방의 아내가 두 딸과 백일 겨우 지난 아들까지 내버려두고 은수저 네 벌과 풀 먹이라고 내어준 빨래 한 보퉁이까지 가지고 나가선 아무 소식이 없었던 것이다. 겨우 백일이 지난 아이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매우 아파서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인다. 겨우 네 번째 찾아간 병원에서 진찰을 받지만 의사로부터 “오늘 밤 못 넹규.”(253)라는 말을 들을 뿐이다. 결국 아이가 죽기만 기다리다가, 황서방과 권서방은 집주인이 자기 집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싫어할 거라며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결국 황서방과 권서방은 “가다가 죽건 묻세그려.”(256)라며, 주안朱安 쪽을 향해 무작정 걷다가 끝내 죽은 아이를 묻고 돌아온다. 
그러고 보면 첫 번째 문장 “월미도月尾島 끝에 물에다 지어 놓은, 용궁각인가 수궁각인가는 오늘도 운무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245)는 이들의 소외된 처지를 적절하게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월미도는 식민지 시기 조선의 관광명소 중에서 4위에 기록될 만큼 빼어난 풍광과 위락시설을 자랑하던 곳이다. 그러나 그 빼어난 풍광과 위락시설을 만들어낸 노동자들은 정작 그러한 행복과는 무관한 생존의 막장에 처해 있었음을 이태준의 「밤길」은 가슴 시리게 보여준다.   


3) 낭만의 공간
함세덕의「해연」(1940)은 식민지 시기 작품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바다의 도시이기도 한 인천의 아름다움과 낭만을 한껏 뽐낸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섬, 등대, 방산이(豐漁期), 바다제비(海燕), 덴마(傳馬船), 모두리(鮫), 펄, 가무락섬, 조기사리, 후리그물, 야깡집(魚物競賣場), 조개껍질처럼 바다색이 물씬 풍기는 단어가 풍성하게 존재한다. 
이 작품의 주요한 무대는 유명한 등대가 있는 팔미도이다. 이 곳에는 등대지기와 등대지기의 딸인 진숙이 산다. 진숙은 “거친 바다에서 자라나 도회에 가 공부를 했으므로 근대적 세련과 분방한 야성이 화합된 19세의 명랑하고도 침울한 처녀”(186)이다. 인천고등여학교 다니다 홀아버지를 돌보겠다며 학교를 그만두고 팔미도에 들어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팔미도를 중심으로 한 바다에서 진숙은 세진과 티 없는 사랑을 나눈다. 세진은 인천 해안정(인천 중구 해안동)의 유명한 의사인 안진건의 아들로서 몸이 약해 학교를 쉬고 요양을 다니다 진숙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둘의 사랑은 푸른 바다처럼 맑고 깨끗한 생명의 순수함 그 자체이다. 세진의 아버지와 진숙의 아버지는 둘의 사랑을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사실 진숙의 아버지는 공금 횡령으로 감옥에 갔고, 그 사이에 안의사가 진숙의 어머니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바로 세진이었던 것이다.  
바다에서 멀어질수록 세상은 혼탁하고 더럽다. 진숙의 아버지는 서울의 사립보통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학교를 새로 짓기 위해 받은 기부금을 가지고 인천에 가서 미두에 손을 댔다가 돈을 모두 날려먹고 공금횡령죄로 2년 동안 징역살이를 한다. 그리고 감옥에 가 있는 동안 진숙의 어머니는 진숙을 버리고 안의사에게 시집을 가서 세진을 낳았던 것이다. 안의사에게는 딸이 있었지만, 그 딸은 아버지가 원치 않는 결혼을 강요하자 작약도 검정바위에 올라 생을 마감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밤과 바다를 사랑했고, 해양문학을 사랑했고, 늘 촛불 켜고 방안에 혼자 있길 좋아”(218)한 것으로 이야기된다. 이처럼 「해연」은 바다와 육지라는 이분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자에 아름다운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면 후자에는 비루한 현실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4. 분단의 상처가 생생한 공간


해방 이후 인천은 놀라운 속도로 양적·질적 팽창을 거듭해 왔다. 오늘날 인천은 수도 서울 다음 자리에 놓이는 한국의 대표적 도시이다. 이토록 거대한 도시의 모습은 실로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중에서도 분단과 전쟁, 그에 따른 실향민들의 도시라는 특징을 갖는 인천의 모습을 면밀하게 드러낸 작품들이다.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1979)만큼 전후의 인천 거리와 풍물을 상세하게 반영한 소설도 찾아보기 힘들다. 제분 공장, 공원, 장군의 동상, 중국인 상점, 화차, 저탄장, 항만 등이 눈에 잡히듯 생생하다. 어린 소녀의 눈을 통해 포착된 인천은 같은 모양의 목조 이층집들이 늘어선 초라하고 지저분한 곳이다. 역의 저탄장에서 날아오는 석탄가루 때문에 빨래도 말릴 수 없고 이상한 냄새가 대기에 가득하다.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에서 소녀의 가족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해안촌으로도 불리는 중국인 거리로 이사를 오게 된다. 「중국인 거리」에서 전쟁은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주인공이 이곳까지 흘러온 이유부터가 한국전쟁 때문이고, 중국인 거리에 빈민촌이 형성된 것도 전쟁 때문이다. 중국인 거리를 차지하는 외국인은 중국인과 미군들인데, 미군들은 모두 전쟁 때문에 이곳에 머물게 된 것이다. 특히 집세가 싸고 지저분한 중국인 거리는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양공주와 난민들이 뒤섞여 사는 빈민촌이다. 거리에는 전쟁의 흔적으로 드문드문 포격에 무너진 건물의 형해가 널려 있고, 시의 동쪽 공설운동장에서는 공산국가를 규탄하는 궐기대회가 열린다. 미군 병사는 부대 안의 테니스 코트에서 칼 던지기를 하다가 갑자기 고양이에게 칼을 던져 죽인다. 그리고는 “킬킬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나중에 양공주 매기언니를 살해한 미군도 “낄낄대며” 미군 지프차에 실려 간다.
전쟁의 상흔傷痕은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매춘을 통해 가장 가슴 아프게 드러난다. 소녀의 집만 제외하고는 적산 가옥 모두가 양갈보에게 세를 주었을 정도로 미군 상대의 매춘은 널리 퍼져 있다. 양갈보를 대표하는 형상은 치옥이네 위층에 사는 매기언니이다. 다섯 살짜리 백인 혼혈의 딸 제니를 가진 매기 언니는 흑인 병사와 동거하며 미국에 갈 것을 꿈꾼다. 그러나 매기는 자신을 미국에 데려다 줄 거라고 믿었던 바로 그 흑인에게 잔인하게 살해되고, 딸 제니는 고아원에 맡겨진다. 이 끔찍한 사건이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단문으로 전달되는데, 그러한 건조함은 사건의 비극성을 더욱 고조시킨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인 거리」의 아이들도 세상의 추악함에 그대로 노출된다.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나’의 친구인 치옥이다. 의붓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치옥은 처음에 미용사를 꿈꾸지만 나중에는 매기 언니와 같은 양갈보가 되기를 꿈꾼다. ‘치옥’이라는 이름은 사실 ‘치욕’의 오기인지도 모른다. 
이원규의 「포구의 황혼」(1987)은 문학의 보편적인 주제 중의 하나인 부자父子간의 갈등과 화해를 다루고 있다. 중요한 점은 그 갈등과 화해의 이면에 남북 간의 분단과 전쟁의 상처가 절절한 통증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도 바다에 접한 인천의 향토색이 진하게 풍겨 나온다. 특히 소래포구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용규와 용규의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만큼 인천 앞바다의 어장에 대한 묘사가 매우 구체적이다.


소래 포구의 어선들이 고기의 회유에 따라 연평도 근해 어장, 선미도 북서쪽 어장, 목덕도 남방 어장, 풍도와 육도 주변 어장, 팔미도와 선재도 주변 어장으로 해역을 바꾸어 출어하는데 비해서 아버지는 언제나 연평도 주변 어장에만 고집스럽게 매달렸다. (356)
 
용규는 지금 평생 불화한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바다로 나가려 한다. 15년 전에 북에 넘어갔다가 온 일로 인해 아버지는 “용공 요시찰 인물”(346)로 주목받고 있다. 아버지는 간경변증이 심해서 이삼 년을 넘기지 못할 처지이다.
아버지는 황해도에서 내려온 월남민으로서, 두고 온 고향에 대한 애도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우울증에 빠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소래 포구의 어부들 절반 이상이 실향민이었지만 아버지만큼 고향에 집념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357)고 이야기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상당 부분은 아버지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전달하는데 할애되어 있다. 아버지는 남한에서 얻은 아내에게도 “임자는 나 겉은 시러배 사공 놈헌테 미련을 갖지 말라, 이거야. 나는 휴전선이 뚫리면 곧장 고향으로 달려갈 거니까.”(349)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소래 포구에 자리를 잡은 것도 “여기 배들이 휴전선 근처 어장으로 고기잡이하러 나간다는 것 때문”(349)이다.
아버지는 늘 가족들에게 무뚝뚝했고, 자신을 남한에 주저앉게 만든 첫 번째 자식인 용규에게는 특히 쌀쌀맞게 대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용규는 아버지가 소중하게 여기는 북쪽의 가족사진을 찢은 적이 있고, 아버지로부터 뺨까지 얻어맞은 후에 가출하였다. 용규는 “남북통일이 되면 우리 가족은 버림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반항하는 아이”(356)로 자란 것이다.      
특히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사건은 용규에게 아버지에 대한 원한의 감정까지 갖게 한다. 용규는 해군사관학교나 해양대학을 나와 큰 기선의 선장이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연평도 근처까지 올라갔다가 북쪽 경비정에 납치되어 끌려가는 바람에 그 꿈은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이 일로 가장이 된 용규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새우잡이를 하는 낭장망 어선을 탔던 것이다. 그 와중에 엄지 손가락까지 잃어버린다. 이 일을 겪으며 용규는 “처음으로 6.25라든지 휴전선이라든지 나와는 관계가 없는 것들이 내 일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는 것”(363)을 깨닫는다.
아버지는 일년 반 만에 선원들과 배를 이끌고 귀환한다. 이 일로 실어증에 걸리고 납북당했던 전력까지 있는 아버지는 생활 무능력자가 되고, 용규는 청춘을 다 바쳐 가장 역할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 일로 용규는 아버지와 더욱 사이가 안 좋아졌고,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마저도 들어줄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무리해서 배를 타려는 이유는 병에 편지를 담아서 북쪽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기 위해서이다. 용규는 평소 아버지에 대한 감정도 있고, 그 병이 군인들 손에 들어가면 허가를 취소당하고 감옥에 갈지도 모른다며 격렬하게 반항한다. 그러나 15년만에 아버지는 ‘마지막 소원’이라는 간절한 말을 하고, 끝내 용규는 아버지의 청을 들어준다. 그리고 아버지가 보내는 병 중의 하나가 북쪽 형들 손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뜨거운 피”(372)가 몸 속에 흐르는 것을 느낀다.

한남철의 「강 건너 저쪽에서」(1991)는 자전적인 글로서 “유언”이라는 주위의 증언이 있을 정도로, 작가가 유년 시절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차분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 작품은 단편이지만 일제 말기부터 산업화가 본격화된 시기까지의 비교적 긴 시간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서 이 작품은 인천을 중심으로 한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잔잔하지만 아름답게 보여준다. 자전적인 성격이 강하며, 할머니와 같은 자신의 피붙이를 중심에 두고 서술된 만큼 낭만적인 요소가 다분히 존재한다. 주인공의 고향과 유년을 채우는 여러 사람들이야말로 이 소설의 핵심적인 기호들이다. 그 구체적인 예들은 다음과 같다.


조실부모하고 동생들을 돌보다 성기능이 온전치 않은 남자에게 시집 와 히스테리를 부리는 큰어머니, 집 나간 며느리 때문에 고생하는 꼬부랑 할머니, 큰어머니가 죽자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된 사돈들, 큰아버지가 두 번째 장가를 간 주변머리 없는 여인 등등.


그 중에서도 핵심은 어린 시절 ‘나’를 업어 키웠으며 팔십팔 세로 돌아가신 할머니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내’가 유년 시절 할머니와 함께 굴비를 말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것으로 끝난다. “희망과 절망이 무엇인지, 그런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남에게 해를 끼친 일도 없이 그저 열심히 살다가 할머니는 이 세상을 떠났다.”(298)고 요약되는 할머니의 삶이야말로 이 땅에 살다 간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대변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것이다.
「강 건너 저쪽에서」는 강화에서 인천을 거쳐 서울로 이어지는 주인공 가족의 동선이 작품의 기본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주인공은 유년 시절을 인천에서 보냈는데, 이 시기의 인천은 매우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차원에서 묘사되어 있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굴비를 말리던 일, 할머니의 비녀를 이빨로 찌그려놓은 일, 할머니와 큰어머니가 싸우던 기억, 강화와 인천을 오가던 배 갑성환, 장유유서의 풍습이 뿌리 깊던 생활정서, 만국공원, 홍여문과 그 주변의 장사꾼들, 인천 앞바다 등의 이야기가 그 구체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어떠한 삶도 역사나 사회로부터 무관할 수 없듯이, 아무리 자신의 사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더라도 거기에는 자연스럽게 역사와 사회가 스며들 수밖에 없다. ‘나’의 집안은 본래 강화에 살았는데, 할아버지가 중선을 부린다고 조기떼를 쫓아다니다 배를 가라앉히고 망하는 통에 도망치듯 인천으로 옮겨왔다. 이차대전 말기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만 강화로 다시 소개疏開한다. 해방과 더불어 집안의 형편이 점점 좋아졌지만, 6.25 전쟁 중에 큰어머니가 병사하고 작은삼촌이 전사하면서 다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결국 그 가난을 쫓기 위해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머리를 맞대고 중선을 부리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빚까지 내서 배를 띄우지만 크게 실패하고, 결국 빚쟁이들을 피해 서울로 떠나버린다. 처음에 서울에 와서는 정릉에서 거의 토막土幕 생활을 하며, 간신히 돈암정 시장에서 생선장사 등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나 이 집안의 삶도 점차 조금씩 개선된다. 교육 받은 월급쟁이가 생겨나고, 마침내는 수유리에 조그만 집을 장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선은 “우리 집 식구들의 나이를, 그 긴 세월을 모두 바쳐 결국 우리는 집과 바꾼 셈이었다.”(285)는 말처럼, 간난신고 끝에 얻은 조그마한 안정이라고 할 수 있다. 
2차 대전으로 도시를 떠나 촌으로 향하고, 해방 이후 작은 희망의 빛을 보다가 곧이어 발발한 전쟁으로 인해 다시 어둠 속에 내동댕이쳐지고, 이후 대도시로 가서 삶의 작은 기반을 마련하는 이들 가족의 행로는 크게 보아 한국인들 대부분이 지난 세월 거쳐 온 삶의 큰 궤적과 일치한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때로는 보다 직접적으로 분단과 전쟁의 끔찍한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전쟁 중에 “이따금씩 대로를 차단하고 불시에 들이닥친 군용트럭이 길에 갇힌 남자를 무작정 싣고 가 노무자로 충원하는 살벌한 풍경이 일쑤 벌어지던 시절이다.”(275)와 같은 문장이나, 6.25 때 부역한 강씨가 잡혀가면서 “할머니, 난 이제 아주 가요.”(284)라는 말을 남기고 결국에는 맞아 죽었다는 소문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한 난리통에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동네 사람들이 어떤 여잘 지붕 꼭대기에 올려놓구 불을 질렀다”(285)는 얘기는 분단의 비극이 가져온 섬짓한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인 거리」, 「포구의 황혼」, 「강 건너 저쪽」에서는 해방 이후 인천이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분단과 전쟁의 상처가 심한 곳이었음을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는 작품들이다.    


5. 결론


『한국문학이 그려낸 인천』에 수록된 여덟 작품을 통하여 지난 100여년 동안 인천이 한국문학에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살펴보았다. 인천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형상화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가장 먼저 근대문학에 등장한 인천의 모습은 개항장으로서 선진화 된 지역이 었다. 다음으로 식민지 시기 인천은 자본주의적 질서가 그 어느 곳보다 깊숙이 파고든 곳으로 형상화되었다. 그것은 자본이나 노동의 양 측면에서 모두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해방 이후 인천은 그 지리적 인접성으로 인하여 분단과 전쟁의 상처가 깊이 각인된 공간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세 가지 모습은 모두 당대의 시대적 상황과 긴밀하게 연결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삶과 세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거점으로서의 인천이라는 이 소중한 자산은 앞으로의 새로운 문학 100년을 창조해나가는 커다란 힘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1) “인천에 있어서의 문화운동사의 제1페이지는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에서 발단했다. 한용단의 어머니격인 친목회는 인천의 문학청년을 아들로 탄생했으니 운동 경기를 외피外皮로 한 그 핵심은 민족해방정신을 내포內包한 문학운동으로 전개했었다. 정노풍鄭蘆風, 고유섭高裕燮, 이상태李相泰, 진종혁秦宗爀, 임영균林榮均, 조진만趙鎭滿, 필자 외 문학동호인文學同好人은 습작習作이나마 등사판간행물謄寫版刊行物을 발행했었고” (고일, 『인천석금』, 경기문화사, 1955, 53면) 

2) 본문 인용은 『한국문학이 그려낸 인천』(선집편집위원회 편, 인천광역시, 2015)에서 인용하였다. 인용시 본문 중에 페이지수만 기록하기로 한다.

3) 최찬식과 달리 이해조가 바라본 이 무렵의 인천은 이상적인 곳과는 거리가 멀다. 「빈상설」(1908)에서는 인천이 국적불명의 도시라는 작가의 부정적 인식을 은연중에 드러냈으며, 「모란병」(1911)에서는 인천을 타락한 도시로 설정하였다. (이희환, 『문학으로 인천을 읽다』, 작가들, 2010, 47-49면) 

4) 현재의 인천시 중구 신흥동. 

5) 敷島, 인천시 중구 신흥동에 있던 유곽의 이름. 

6)일본신사 경내에 1889년 창업한 요정을 겸한 여관. 

7) 마지막에 대성이 일본에서 공부를 하다가 워싱턴에 가는 것은 당시 신소설의 기본적인 공간 인식과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성은 화성돈대학교 의과에 입학하여 “편작이나 화타가 되어 고국을 돌아가서 병든 동포를 건지고 고명한 의술을 후생에게 전하리라!”(104)는 다짐을 하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 

8) J.C.Cooper, 이윤기 옮김, 『세계 문화 상징 사전』, 까치, 1994, 372면. 

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미두는 현물 없이 약속으로만 미곡을 거래하는 투기행위를 말한다. 장래의 일정한 날짜에 현물을 주고받는 기일을 정하고, 그 기간 안에 전매하거나 되사는 방법으로 매매거래를 상계할 수 있는 정기거래를 장기청산거래라고 하는데, 본래 미곡거래에서 장기청산거래의 목적물로 된 쌀을 정기미(준말로 期米) 또는 ‘미두’라고 불렀다. 미두에 종사하는 사람을 ‘미두장이’·‘미두꾼’이라고 부르고, 미두꾼이 모여서 미두거래를 하는 장소를 ‘미두장’이라고 불렀다. 1899년 3월 일본인이 주식회사 인천미두거래소를 설립하였는데, 1910년 우리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일반 거래소의 설립은 일체 금지되었지만, 인천미두거래소는 예외적으로 그것의 존속이 용인되었다.

10) 아버지가 이토록 고향에 집착하는 것은 고향에서의 삶이 다른 월남민들보다 화려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아버지는 황해도 연백군 해룡면의 한 포구에서 선주로 이름을 날렸고, 그렇기에 아버지의 옛날을 아는 실향민들은 지금도 아버지에게 경어를 쓸 정도이다. 

11)물론 함세덕의 「해연」처럼 바다의 멋과 낭만을 감각케 하는 작품도 존재한다. 





*이경재 200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비평집 『단독성의 박물관』, 『끝에서 바라본 문학의 미래』. 연구서 『한설야와 이데올로기의 서사학』, 『한국 현대소설의 환상과 욕망』. 숭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