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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소시집/김동호/사람과 짐승과 달빛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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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소시집/김동호/사람과 짐승과 달빛 외 4편
김동호
사람과 짐승과 달빛
짐승들은 달빛을 보면 차갑게
헤어져 각자의 자리로 가는데
왜 사람들은 달빛에서 더 진하게
붙어 헤어지지 못 하는 것일까
열 달 후에 나올 달덩이
햇덩이가 그 해답을 주리라
●시작메모
짐승과 사람의 다른 점 많지만 달빛 맞는 모습이 가장 다를 것 같다. 인간은 심층적으로 정서적 동물이다. 깊은 정서에서 풀라토닉 러브도 나오고 종교적 상상력도 솟아 오른다. 짐승은 아무리 새끼가 예쁘고 훌륭해도 ‘달덩이’ ‘햇덩이’ 그런 은유로 감싸지는 못 할 것이다.
소옹笑翁
바람을 봐도 웃고
구름을 봐도 웃고
아버지를 닮은 아들을 보면 하-
어머니를 닮은 딸을 보면 호-
아기를 닮은 강아지를 보면
배꼽이 빠지도록 하하호호 웃는다
●시작메모
바람에서 하늘의 입김을 생각하고 구름에서 하늘을 유랑하는 물의 천변만화를 생각해본다. 존재의 근원에서 웃음의 근원을 본다. 아비를 닮은 아들을 보면 웃음이 난다. 엄마를 닮은 딸을 보면 또 웃음이 솟는다. 강아지와 아가가 하는 짓이 너무나 닮은 것을 보면 웃음이 폭발하지 않을 수 없다.
蓮花院
한 송이 꽃이
만 송이 꽃이네
만 송이 꽃이
한 송이 꽃이네
오늘은 햇님이 부처님인 듯
온 뜰 안이 온기로 가득하네
●시작메모
연꽃엔 두 가지 이미지가 있다. 더러운 썩은 연못에서 맑고 고운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며 부처님을 그려보는 이미지와 무한히 넓은 연꽃 밭에서 온화한 햇빛이 널리 퍼져가는 것을 보며 부처님의 무량 자비를 그려보는 이미지. 蓮花院에는 이 두 이미지가 함께 있다
겨울 햇살
겨울햇살 신통神通하다
冬장군의 칼도 뚫지 못 하는
숙녀의 두터운 털옷을
힘 하나 드리지 않고 뚫고 들어가
地熱과 지하수의 영접을 받으며
속살을 촉촉이 녹여놓는다
●시작메모
겨울 여인, 두터운 털옷만으로 추위를 물리칠 순 없다. 비타민D가 들어있는 햇빛, 깊은 수면을 예비해주는 멜라토닌이 들어있는 햇볕도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남성을 상징하는 아폴로의 빛살, ‘겨울 햇살’ 있어야 한다
잔디 소리
이 세상에
죽음은 없습니다
불에 탄
잎들이 있을 뿐입니다
뿌리에 젖을 먹이고 있는
재가 있을 뿐입니다
■시작 노트
잔디를 무덤에 심는 풍습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늦가을 초겨울 밭둑의 마른 잔디를 태우며 봄에 더욱 무성하게 솟아오를 것을 믿는 농심들이 인간생명도 잔디처럼 힘차게 되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것은 아닐까
*김동호 197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수리산 연작』, 『단 맛 뜸들이는 찬바람』 외. 성균문학상,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수상.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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