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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특집/윤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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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000년대의 새로운 가족모델들
200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타난 가족의 이상과 현실
윤석진|드라마평론가
1. 허구의 산물로서 텔레비전 드라마
텔레비전 드라마는 현실이 아니라 허구의 산물이다. 하지만 텔레비전 드라마는 현실을 빼닮은 극적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의 현실 감각을 교란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상황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비교하면서 극중 인물과 함께 울고 웃는다. 이처럼 시청자들의 일상과 함께 호흡하는 텔레비전 드라마는 허구의 세계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에게는 실제 현실을 되돌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예술 양식이다. 사회학자들이 텔레비전을 사회화 도구로 생각하고, 특히 텔레비전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의 역할 모델을 연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허구의 세계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이 텔레비전 드라마의 극적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텔레비전 드라마는 그 어떤 예술 양식 못지않게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컨대, SBS 특별기획 드라마 <모래시계>를 통해 정치․경제적 ‘폭력’이 부각되고, MBC 미니시리즈 드라마 <애인>을 통해 ‘불륜’ 논쟁이 벌어졌던 경우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KBS 일일연속극 <노란 손수건>에서 제기된 ‘미혼모’와 ‘호주제’ 문제는 호주제 폐지 논쟁과 맞물려 시청자, 특히 주부 시청자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방송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모든 텔레비전 드라마가 실제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하드라마와 특별기획 드라마, 주말연속극과 일일연속극, 미니시리즈 드라마와 단막극 등과 같은 텔레비전 드라마의 양식(format)에 따라 텔레비전 드라마의 소재와 주제, 이야기 구성 방식 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정확한 구분은 아니지만 텔레비전 드라마 양식(format)과 소재의 관계를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대하드라마와 특별기획 드라마가 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주목받을 만한 굵직한 사건을 다루는 반면, 주말연속극과 일일연속극은 가족 중심의 일상적인 소재를 주로 다룬다. 그리고 미니시리즈는 일명 ‘트랜디 드라마’라는 별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춘남녀의 애정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MBC <베스트극장>과 KBS <드라마시티>와 같은 단막극은 실험적인 구성 방식으로 파격적인 소재를 다루는 경우가 많다.
텔레비전 드라마 양식에 따라 다루는 소재가 달라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모든 텔레비전 드라마의 밑그림에는 ‘가족’이 있다는 점이다. 그 어떤 양식이건 간에 가족 관계가 빠진 드라마를 찾기는 그리 쉽지 않다. 설령 가족 관계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드라마라 하더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가족을 ‘구성’하기 위한 설정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또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가족’을 다루는 방식은 동시대 사회 정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텔레비전 드라마는 허구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되짚어보는 거울로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가족’ 문제를 다룬 텔레비전 드라마는 동시대 가족 구성원의 갈등을 제시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함으로써 동시대 가족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텔레비전 드라마가 허구의 산물이며, 이에 따라 텔레비전 드라마에서의 갈등 해소는 어디까지나 극적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극적 현실이 실제 현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갈등이 해소되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결말을 보면서 그렇지 못한 실제 현실의 문제점을 봉합시키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지배 이데올로기를 관철시키는 수단에 불과할 뿐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도 텔레비전 드라마의 현실과 실제 현실의 이란성 쌍둥이 같은 관계 때문이다.
200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의 새로운 가족모델 문제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실제 현실은 분명 달라진 것 같은데 텔레비전 드라마의 현실은 여전히 20세기에 머물러 있거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새로운 가족모델을 제시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실제 현실과 닮아 있지 않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텔레비전 드라마’라는 예술 양식의 특징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실의 삶을 되돌아보는 허구의 산물이라는 일상’으로서의 텔레비전과 ‘본능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하지만 실제 현실에 발목이 잡혀 움직이지 못하는 예술’로서의 드라마가 충돌하면서 나타나는 특징이라는 것이다. 200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가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듯한 새로운 가족모델을 선보이면서 동시에 과거 회귀적인 양상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2. 200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의 현실과 이상
전통적인 가족모델과 새로운 가족모델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텔레비전 드라마의 ‘양식’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이 시차를 두지 않고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시청자들의 현실 감각에 또 다른 교란을 일으킨다. 상반되는 가치관에 따라 제시되는 서로 다른 가족모델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현실의 많은 부분이 변화한 것 같지만 실은 여전히 그대로이거나, 우리가 보고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극적 현실이 새로운 것 같지만 실은 옛날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1990년대 말 IMF 체제 이후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가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텔레비전 드라마는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실제 현실에서는 단란했던 가족이 해체되고 가정이 흔들리고 있는데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안락한 가족의 행복을 강조하는 내용이 강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육남매>, <옥이이모>처럼 IMF 현실을 반영한 드라마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명 ‘IMF’형 드라마라고 불렸던 텔레비전 드라마 역시 가족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행복하고 단란한 가족으로 재결합하며 끝남으로써 실제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지는 못했다. 반면에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반응 속에 방송되었던 일련의 드라마들은 가족 구성원 간의 갈등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내용을 주로 다룸으로써 실제 현실과 괴리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현실과 이상이 충돌하는 마당을 펼쳐 보이는 텔레비전 드라마는 현실에서 괴리된 시청자들의 욕망을 극적으로 충족시킴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봉합시키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현실을 반영한 듯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실제 현실에서 괴리된, 그럼으로써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 텔레비전 드라마들 가운데 최근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대표적인 작품에는 노희경 극본의 <꽃보다 아름다워>, 김수현 극본의 <부모님 전상서>, 문영남 극본의 <장밋빛 인생>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작품들에 나타난 가족 구성원의 갈등 양상과 그 극복 방안은 1990년대와 다른 2000년대 가족 관계의 미묘한 변화를 잘 보여준다.
2-1. 이상적인 대가족제도의 재현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 가족의 중심축에는 언제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순재’라는 배우가 시차를 두고 연기한 캐릭터인,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나 <목욕탕집 남자들>의 ‘할아버지’는 가부장제의 중심축에 위치하면서 가족을 다스리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대발이 어머니’(김혜자 분)나 ‘할머니’(여운계 분)는 남편에게 종속된 존재로 가부장제의 모순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상징적인 인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가부장제를 상징하는 강력한 ‘아버지’는 힘을 잃고 ‘어머니’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혼자서 억척스럽게 생선장수를 해가며 아이들을 키운 엄마 김영희(고두심 분)와 큰딸 가영(김혜수 분), 작은 딸 나영(김민선 분)을 전면에 내세웠던 MBC 주말연속극 <한강수타령>이 대표적인 경우다.
하지만 시청자들의 극적 환상을 충족시켜줘야 하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특성상 <한강수타령>과 같은 가족 구성은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고통스런 현실을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서나마 해결하고 싶었던 시청자들이 우리가 잃어버린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재현한 KBS 주말연속극 <부모님 전상서>에 몰입했기 때문이다. ‘대발이 아버지’와는 정반대로 한없이 자상하고 이상적인 아버지로 묘사된 ‘안 교감’(송재호 분)을 중심으로 구성된 <부모님 전상서>의 가족 관계는 현대인의 이기적인 모습을 반성하게 하면서 마치 어머니의 자궁처럼 평온한 가정을 재현해낸다. 물론 이들에게도 일상의 갈등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버지의 가르침과 가족의 지혜로 해결된다.
<부모님 전상서>는 대가족제도를 유지하면서도 과거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부부 관계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다. 재력가의 외동딸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가족의 큰며느리 역할을 군말 없이 받아들이는 큰아들 내외(장현성․송선미 분)나 초등학교 동기동창과 결혼한 둘째아들 내외(이동욱․이민영 분)는 말할 것도 없고, 안 교감과 아내 ‘옥화’(김해숙 분)의 관계에서 과거의 수직적인 부부 관계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위계질서가 무너진 것은 아니다. 상대방의 상처를 치유하고 잘못을 보듬어주는 과정에서 ‘어른’의 권위는 자연스럽게 살아나고, 이를 통해 애써 강조하지 않아도 가부장제의 긍정적인 힘이 자연스럽게 도드라진다. 이처럼 <부모님 전상서>는 이상적인 대가족 제도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수평적 부부 관계를 통해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현대인의 개인주의 성향을 반성하도록 함으로써 갈수록 각박해지는 현실에 대한 시청자들의 불안감을 해소시켜준 텔레비전 드라마라 할 수 있다.
<장밋빛 인생>은 수평적인 관계를 넘어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역전된 상황을 보여준다. 연하의 남편 ‘반성문’(손현주 분)과 연상의 아내 ‘맹순이’(최진실 분)의 관계는 아무리 연상연하 커플이라 해도 <천생연분>․<완전한 사랑>․<로망스> 등과 같이 기존의 연상연하 커플을 소재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존의 연상연하 커플 드라마들이 주로 여자보다 어린 남자가 주도권을 행사했던 것에 비해 <장밋빛 인생>은 아내 맹순이가 남편 반성문을 닦달하는 과정을 통해 주도권을 장악한 아내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한 것이다.
2-2. 부부 간의 애정을 중심으로 한 갈등 양상
200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불륜’은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이다. 시청률 전쟁의 최전선에서도 시청자들의 엄호가 끊이지 않는 KBS의 <부부 클리닉-사랑과 전쟁>의 주요 소재가 ‘불륜’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대가족 제도의 이상적인 모습을 재현한 <부모님 전상서>이나 죽음을 통해 부부와 가족의 사랑을 역설한 <장밋빛 인생>,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바람직한 가족의 모습을 제시한 <꽃보다 아름다워>에서도 ‘불륜’은 빠지지 않는 소재다.
이처럼 ‘출생의 비밀’을 다룬 텔레비전 드라마와 ‘불륜’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빠질 수 없는 소재이긴 하지만, 가족을 전면에 내세운 텔레비전 드라마에서조차 불륜이 빠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주로 자식 문제 때문에 부부 갈등이 벌어졌던 과거와 달리, 200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요 갈등은 부부 간의 애정 문제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모두 최근 텔레비전 드라마가 가족 관계보다 부부 관계 자체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꽃보다 아름다워>의 중심인물 ‘영자’(고두심 분)는 남편 ‘두칠’(주현 분)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자식들과 함께 고단한 삶을 꾸려가는 여성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꽃보다 아름다워>는 남편에게 버림 받은 여자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영자와 두칠의 관계는 이혼한 큰딸 ‘미옥’(배종옥 분)과 ‘영민’(박상면 분), 둘째딸 ‘미수’(한고은 분)와 ‘인철’(김명민 분), 막내아들 ‘재수’(김흥수 분)와 ‘지니’(추소영 분)의 관계를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미옥을 통해 제시되는 남편에게 강요받았던 이혼 문제, 미수를 통해 보이는 큰아들 ‘재식’을 죽인 원수에 대한 사랑, 그리고 막내아들을 통해 드러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은 자의 고통이 이들의 어머니인 ‘영자’를 꼭짓점으로 전개되는 과정은 <꽃보다 아름다워>가 영자와 두칠의 훼손된 부부 관계에서 시작한 이야기임을 상징한다. 다만,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이 영자의 삶 자체가 아니라 ‘어머니’ 영자의 삶을 나눠 갖고 있는 자식들을 통해 나뉘어져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꽃보다 아름다워>는 세월이 흘러도 결코 변하지 않는 가족의 의미를 훼손된 부부 관계에 초점을 맞춰 보여준 텔레비전 드라마라 할 수 있다.
한편, <부모님 전상서>의 전반부를 끌고 가는 인물은 안 교감의 큰딸 ‘안성실’(김희애 분)이다. 안성실은 어린 나이에 시집가서 행복하게 살다가 자폐아를 낳게 되고, 이를 못 견뎌하던 남편 ‘박창수’(허준호 분)가 가족을 소홀히 하면서 밖으로 돌다가 바람을 피우다 아내에게 걸리고, 이 때문에 이혼했다가 재결합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부모님 전상서>의 전반부 이야기는, 가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자에 대한 애정과 신뢰의 문제임을 시청자들에게 주지시킨다. 처자식을 버리고 잠시 한눈을 팔았던 남편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와 예전의 권위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자애로운 남편이 되고자 노력하는 과정은 주부 시청자들의 극적 환상을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했다.
남편의 외도에 너그러웠던 과거와 달리 <장밋빛 인생>의 맹순은 바람피울 재주도 능력도 없는 남편이라 믿었던 반성문을 이단옆차기로 날려버릴 정도로 기가 센 여성이다. 남편에게 매 맞는 아내가 이미 옛말이 되어버린 듯 심심찮게 아내에게 매 맞는 남편에 대한 기사가 신문지면을 장식하는 요즈음, 과거의 부부 관계를 역전시킨 것처럼 보이는 <장밋빛 인생>의 부부 관계는 최근의 변화된 현실을 반영한 결과이다. 이것은 남편의 죽음 앞에 속수무책이었던 아내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엄마의 바다>와 비교한다면 대단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텔레비전 드라마의 극적 현실은 실제 현실과 닮아 있으면서도 현실에서 한 발자국 빗겨서 있는 극적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현실이다. 암에 걸려 죽어가는 아내에게 헌신적인 남편이라는 <장밋빛 인생>의 극적 설정은, 맹순이와 자신을 동일시한 주부 시청자들의 환상의 산물일 뿐 실제 현실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2-3. 2000년대 남자들의 사랑과 전쟁
사회적 성공을 위해 사랑하는 여자와 자식을 버리는 남자의 야망은, <젊은이의 양지>나 <청춘의 덫>에서 알 수 있듯이, 199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요 소재였다. 200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 역시 이 같은 소재를 활용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사랑하는 여자와 자식을 버리게 되는 계기는 사뭇 다르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믿을 건 오직 자신의 재능밖에 없었던 1990년대의 남성과는 달리 2000년대 남성은, ‘사랑’ 때문에 처자식을 버리는 방식으로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자식들에게 외면 받는 아버지 두칠은 자신이 딴 살림을 차린 것이 잠자리에서든 어디서든 애교 필 줄 모르는 아내 영자 때문이라고 큰소리친다. 여기까지만 보면 옛날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많이 본 남편의 이미지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두칠이 딴 살림을 차린 것은 혼자서 호의호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두칠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살고 싶어 아내 영자에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영자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자 결국 딴 살림을 차릴 수밖에 없었던, ‘사랑에 약한’ 남자일 뿐이다. 중년 부부의 삶은 오로지 자식을 매개로 전개될 뿐이었던 과거에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인 인물 설정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자식들 앞에서는 부부 간의 애정 표현도 힘들었던 1990년대 이전의 가족 관계를 생각한다면 실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부모님 전상서>에서 박창수는 자폐아를 낳은 뒤 무서울 정도로 악착같아진 아내에게 진저리를 치면서 자신을 편하게 해주는 여자를 만난다. 박창수․안성실 부부의 갈등에 자폐아 아들은 점점 더 깊이 상처받고 그럴수록 아버지는 아들을 외면한다. 하지만 핏줄만큼 질긴 인연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온 남편 박창수는, 자상한 남편과 아버지 역할에 충실하면서 상처로 가득했던 부모 자식 관계를 치유하는 데 성공한다.
박창수가 가정의 평온함을 느끼지 못해 밖으로 뛰어나간 남편이라면, <장밋빛 인생>의 반성문은 “사랑 밖에 난 몰라”를 외치며 막무가내로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철없는 남편이다. 살림에 찌든 연상의 아내에게서 느낄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다른 여자에게서 보상 받고 싶었던 반성문은 사랑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희생할 수 있다며 자식까지도 포기한다. 여자 문제 때문에 어머니를 힘들게 했던 아버지의 피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처럼 아내를 괴롭히던 반성문은 아내가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처절한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했던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아내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순애보적인 사랑을 펼친다.
반성문만이 아니다. <장밋빛 인생>의 남성 캐릭터는 대부분 여성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상실한 인물로 묘사된다. 맹순이의 동생 ‘맹영이’(이태란 분)과 불륜 관계인 ‘이정도’(장동직 분)나 반성문의 동생 ‘반성해’(안선영 분)의 남편 ‘천원만’(권해효 분)은 모두 바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내’라는 이름표를 달고 남편에게 복종하던 여성 캐릭터였다. 하지만 <장밋빛 인생>의 남녀 관계는 이제 과거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성을 되찾고 냉정하게 불륜 관계를 정리하는 맹영이나, 아버지의 바람기에 질려 남편을 쥐락펴락하는 반성해에게서 더 이상 눈물로 한 세월 보낸 여성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것이 200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타난 부부 관계인 것이다.
최근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타난 2000년대 가족의 모습은 실제 현실과 닮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가족 제도의 위계질서에 근거한 수직적인 부부 관계가 수평적인 관계로 변화하면서 부부 관계에 집중하는 200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의 가족모델은 분명 남성성의 약화와 더불어 여성성이 강화된 2000년대 대한민국의 현실에 근거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결말만은 한결같이 가부장제에 근거한 ‘가족 이데올로기’로 귀결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어쩌면 200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타난 새로운 가족모델은 실제 현실이 아니라 더 이상 혈연 중심의 안락한 가족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해체되는 가족을 복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장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혈연’에서 벗어난 새로운 대안 가족의 가능성
부모 자식이 돈 때문에 서로를 죽이는 사건이 빈번한 2000년대 대한민국에서 가족 구성의 절대 조건으로 ‘혈연’을 꼽을 수 있을까? 굳이 이런 극단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1990년대 말 IMF 이후 가속화되기 시작한 대한민국의 가족 해체 현상은 2000년대에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웰빙’ 열풍과 생계형 ‘자살’이 공존하는 양극화 사회에서 화목하고 안락한 가족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만큼 실제 현실은 더욱 각박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혈연’은 더 이상 의미를 갖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젊은 시청자들은 ‘혈연’을 배제한 새로운 가족모델이 등장하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가부장제 하의 이상적인 가족을 등장시킨 텔레비전 드라마와 달리 젊은 시청자들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던 이경희 극본의 미니시리즈 <미안하다, 사랑한다>와 신정구 극본의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는, ‘혈연’에서 벗어난 대안 가족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텔레비전 드라마이다. 두 편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타난 가족 관계를 통해 가족 해체 현상이 가속화되는 현실과 맞물린 대안 가족의 가능성을 살펴봄으로써 2000년대 가족의 새로운 의미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태어나자마자 버림 받고 해외로 입양된 한 남자의 불행한 삶과 비극적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돈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에게 버림 받고, 그 여자를 지키려다 머리에 총을 맞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에 처한 남자 ‘차무혁’(소지섭 분)은 친어머니를 찾아 한국에 돌아온다. 가난해서 자기를 버린 줄 알았던 어머니 ‘오들희’(이혜영 분)가 너무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을 확인한 차무혁은 오들희가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들 ‘최윤’(정경호 분)의 모든 것을 빼앗는 방식으로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감행한다. 하지만 복수의 대상으로 삼았던 어머니의 아들 최윤이, 태어나자마자 죽은 줄 알고 있는 자식을 대신해서 입양한 아들임을 알게 된 차무혁은, 그토록 그리웠던 어머니를 불러보지도 못한 채 어머니의 상처를 보듬으며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 이처럼 수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방송되었던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혈연’의 부재를 대신하기 위해 ‘입양’이라는 대안을 모색한 텔레비전 드라마였다. 그리고 ‘혈연’ 이상의 가족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대안 가족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텔레비전 드라마로 자리매김하면서 ‘해외 입양’ 문제를 현실화시키는 저력을 발휘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가족 해체 현상보다는 ‘입양’에 무게 중심을 두었던 텔레비전 드라마가 <미안하다, 사랑한다>라면, <안녕, 프란체스카> 시즌 1은 2000년대 가족 해체 현상을 노골적으로 풍자한 시트콤이다. 시트콤(sit-com)은 시추에이션 코미디(situation comedy)를 줄여 부르는 용어로, 특정 상황에 처한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상황희극이다. <안녕, 프란체스카> 시즌 1은 2천 살인 왕고모 ‘소피아’(박슬기 분), 5백 살 동갑내기 친구 사이인 ‘프란체스카’(심혜진 분)와 ‘엘리자베스’(정려원 분), 2백 살 막내 ‘켠’(이켠 분)이라는 뱀파이어들이 프란체스카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된 인간 ‘이두일’(이두일 분)과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각자의 목적 달성을 위해 편의적으로 부부 행세를 하는 이두일과 프란체스카, ‘혈연’과 전혀 상관없이 두일과 프란체스카의 자식 노릇을 하는 소피아와 켠, 역시 ‘혈연’과 전혀 상관없이 프란체스카의 동생 역할을 하는 엘리자베스로 이루어진 가족의 일상은, 가족 해체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2000년대 대한민국의 가족이 처해 있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노름에 빠진 부인 프란체스카와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가장 이두일, 남성과 여성으로 양분되었던 성(性) 체계를 무너뜨리는 켠, 나이가 가장 많은 왕고모이지만 외모는 가장 어려 보이는 어린 소녀 소피아가 어른들을 농락하는 장면들은, 우리가 애써 상식이라 믿었던, 혹은 관습적으로 행동했던 모든 것들의 경계를 해체시키면서 전통적인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근대적 가족 제도를 노골적으로 풍자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떤 난관에 부딪혀도 결코 헤어지지 않는 가족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혈연보다 더 강한 대안 가족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렇게 <안녕, 프란체스카> 시즌 1은, 비판과 풍자의 시선으로 해체 위기에 놓인 2000년대 대한민국 가족의 실상을 고스란히 재현함으로써 기성세대에 반감을 품은 젊은 세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와 <안녕, 프란체스카>처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공감대가 형성된 몇 편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타난 대안 가족이 가족 해체 이후 2000년대 새로운 가족모델이 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텔레비전 드라마는 실제 현실을 반영한 듯하지만, 그 실상은 실제 현실과 정반대의 이데올로기를 내재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적응하기 힘들 정도로 급변하는 실제 현실에 대한 불안감을 과거 회귀적인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해소한다. 동시에 그다지 개선되지 않는, 그래서 별반 기대할 것 없는 현실에 대한 불만감을 현실 전복적인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충족시키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텔레비전 드라마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관철시키는 도구이면서 사회 변혁의 도구로서의 양가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몇 편의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새로운 가족모델의 출현을 단정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타난 가족모델은 199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찾을 수 없는 미세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다만 그 변화가 가능성을 넘어 대안 가족의 새로운 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는 좀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윤석진․
주간 ≪시사저널≫ 드라마 평론 집필
․저서 한국 대중서사, 그 끊임없는 유혹 등
․충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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