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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번역소설(모리 오가이)/김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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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092회 작성일 08-02-29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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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소설|


다카세부네
모리 오가이(森鴎外)∙번역:김영식|수필가
모리 오가이(森鴎外. Mori Ogai. 1862-1922)
․소설가, 희곡가, 번역가, 평론가
(나쓰메 소세키와 더불어 근대일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도쿄대 의학부 졸업 후, 육군 군의로 임관. 1884년부터 4년간 독일 유학 중에 서양의 문학, 철학, 미학에 접하였고, 귀국 후 최초의 근대적 문학작품이라 불리는 무희(舞姬)를 발표. 그 후 작가로서는 많은 현대소설과 역사소설, 수필 등을 발표하였고, 개인적으로는 군의총감까지 승진하였다. 일본에서는 현실 감각을 잃지 않은 지성인의 표상으로 존경받고 있다.)



다카세부네(高瀬舟)는 교토의 다카세천(高瀬川, 다케세가와)을 오르내리는 작은 배를 말한다. 도쿠가와(徳川) 막부 시대(1603-1867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무사정권 -역주)에 교토의 죄인이 섬으로의 추방(본문은 엔토(遠島)-역주)을 선고받으면, 가족을 감옥으로 호출하여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하는 것은 허용되었다. 그리고 죄인은 다카세부네에 실려 오사카로 호송되는 것이었다. 그 배를 호송하는 자는, 교토 마치부교(町奉行: 에도 막부의 관직명. 지역의 행정, 사법, 경찰 등 민정 전반을 관할. 요즘의 시장 정도-역주)에 속해 있는 포졸(원문은 도신(同心). 포리捕吏 밑의 하급관리. 편의상 포졸로 한다.-역주)인데, 그 포졸은 자신의 권한으로 죄인의 가족 한 사람이 오사카까지 동선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것은 위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소위 그 정도는 눈감아준다는 암묵의 허락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추방을 선고 받은 죄인은 물론 중죄를 범한 것으로 판단된 사람이기는 하였지만, 절도를 위해 사람을 죽이고 방화를 하는 짓을 저지르는 흉악한 인물이 다수였던 것은 아니었다. 다카세부네에 타는 죄인의 대부분은 소위 순간의 잘못으로 불의의 죄를 저지른 사람이었다. 흔한 예를 들어보자면, 당시 상대사(相對死)라고 불렀던 정사(情事)를 기도하여, 상대 여자는 죽게 하고 혼자 살아남은 남자와 같은 부류였다.
그런 죄인을 배에 싣고, 절의 저녁 종소리가 들릴 즈음에 출발한 다카세부네는, 강 양쪽의 어두워진 교토 시내의 집들을 바라보면서 동쪽으로 흘러 가모천(加茂川)을 가로질러 내려갔다. 이 배 안에서 죄인과 친족은 밤새도록 불행한 운명을 한탄하였다. 언제까지나 원망해도 되돌릴 수 없는 반복어인 것이었다. 호송의 책임을 진 포졸은 옆에서 그 말을 듣게 되므로 죄인을 낸 가문의 비참한 사연을 자세히 알 수가 있었다. 마치부교쇼(町奉行所)의 마당에서 표면상의 자백을 듣거나, 책상 위에서 자술서를 읽는 관리는 꿈에서도 들을 수가 없는 사연인 것이었다.
호송포졸로 근무하는 자에도 여러 성격의 사람이 있으므로, 그들의 사연 이야기를 그저 시끄럽다고 하여 들으려 하지 않는 냉담한 자가 있는가 하면, 절절하게 인간의 불행한 운명을 동정하여, 공무를 수행하는 입장이라 차마 그 속을 드러내지는 않고 무언중에 몰래 가슴 아파하는 포졸도 있었다. 경우에 따라, 아주 심약하고 눈물이 많은 포졸이 매우 비참한 운명에 빠진 죄인과 그 친족을 호송하여 가게 될 때에는, 그 포졸은 본의 아니게 눈물을 참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카세부네의 호송은 포졸들 사이에서는 불쾌한 직무라 하여 꺼려지는 일이었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아마 에도(江戶. 막부 시대의 수도. 지금의 도쿄-역주)에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 1759~1829에도 후기의 다이묘(大名). 1787 막부의 최고 관리(老中)가 되어 관정(寬政)의 개혁을 주도-역주)가 정무를 맡은 간세이(寬政.1789~1801.코가쿠천황(光格天皇) 때의 연호-역주) 때였을 것이다. 치온인(知恩院. 교토 소재. 정토종(淨土宗)의 총본산-역주)의 벚꽃이 저녁 종소리에 흩날리는 봄날의 저녁, 그때까지 전례가 없던 보기 드문 죄인다카세천(高瀬川)
교토시에 있는 운하. 1611년 화물 운송용으로 만들어졌다. 연장 9.7km. 다카세는 낮은 수심의 의미이고, 다카세부네는 낮은 수심용의 바닥이 평평한 배를 말한다. 다카세천 이름은 이 다카세부네를 이용하였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한다. 현재 운하 기능은 사용하고 있지 않다. 이 다카세부네에 태워졌다. 그자의 이름은 기스케(喜助)로, 사는 곳이 일정치 않는 30세 정도의 남자였다. 애초부터 감옥으로 면회 올 가족이나 친척도 없었기에 배에도 홀로 탔다.
호송 임무를 명받아 함께 배에 탄 포졸, 하네다 쇼베에(羽田庄兵衛)는 단지 기스케가 남동생을 죽인 죄인이라는 것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감옥에서 나루터까지 연행하여 오는 동안, 빼빼 마른 몸의 창백한 기스케의 모습을 살펴보니, 너무도 구분고분하고 얌전하게 자기를 관청의 관리로서 존경하는 태도로 매사 순순히 따라주었다. 게다가 그것은 죄인들에게서 종종 보이는, 온순함을 가장하여 권위에 아첨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쇼베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배에 탄 후로도 단순히 맡은 임무로써 죄인을 지켜볼 뿐 아니라, 계속 기스케의 거동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날은 저녁 무렵부터 바람이 잔잔해져, 하늘에 가득한 엷은 구름이 달의 윤곽을 스쳐 지나가고, 점차 가까워지는 여름의 온기가 아지랑이가 되어 강둑 위와 강바닥(河床)의 흙 위로 피어오르는 밤이었다. 시모쿄(下京)를 벗어나 가모천을 가로질러 간 때부터는 주위가 조용하여 단지 뱃머리에 갈라지는 강물 소리만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
밤배에서 자는 것은 죄인에게도 허용되었으나, 기스케는 잘 생각은 하지 않고, 구름의 농담(濃淡)에 따라 밝아지고 흐려지기를 거듭하는 달을 쳐다보며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의 이마는 밝게 빛나고, 눈은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쇼베에는 똑바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계속 기스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참으로 이상하다고 머릿속으로 거듭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기스케의 얼굴이 너무 즐거운 표정이라, 만약 옆에 있는 포졸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휘파람이나 콧노래라도 부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기 때문이었다.
쇼베에는 생각했다. 지금까지 다카세부네의 호송 임무를 맡은 적은 많았다. 그러나 태우고 가는 죄인은, 언제나 거의 모두가 차마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어찌된 사정인가. 유람선이라도 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죄는 남동생을 죽인 것이라고 하나, 설령 그 동생이 나쁜 놈이라 치고, 그 동생을 어떤 연유로 죽였건 간에, 인지상정을 생각하면 결코 좋은 기분은 아닐 터이다. 마른 몸의 창백한 이 남자가 인지상정을 완전히 잃은 정도로 세상에 보기 드문 악인이라는 말인가. 그렇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혹시 머리가 돌아버린 것은 아닐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앞뒤가 맞지 않은 말이나 행동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남자는 어찌된 것인가. 쇼베에는 기스케의 태도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쇼베에는 더는 참을 수 없는 심정으로 말을 걸었다.
“기스케. 자네 뭘 그리 생각하나?”
“예?”
주위를 둘러보는 기스케는 무언가 포졸에게 주의를 받은 게 아닐까 생각한 듯 자세를 바로 하고 쇼베에의 눈치를 살폈다. 쇼베에는 자기가 갑자기 질문한 동기를 밝혀, 공무를 벗어난 응대를 요구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였다.
“아니, 특별히 어떤 이유가 있어서 물은 것은 아니네. 실은, 나는 아까부터 자네가 섬으로 추방되는 마음이 어떤지 묻고 싶었네. 나는 지금까지 이 배로 많은 사람을 섬으로 보냈지. 여러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지만 다들 섬으로 가는 것을 한탄하며 함께 탄 가족과 밤새도록 우는 걸 나는 보았네. 그런데 자네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섬에 가는 것을 괴롭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네. 도대체 자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기스케는 빙긋 웃었다.
“친절하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렇군요. 섬에 간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슬픈 일이겠지요. 그 마음은 저도 충분히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이 세상에서 편안히 살았기 때문이겠지요. 교토는 살기 좋은 곳입니다만, 그 좋은 곳에서 지금까지 제가 겪은 고생은 어디에 가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자비로운 부교님(奉行-요즘의 市長격-역주)이 목숨을 살려주시고 섬으로 가게 해주셨습니다. 섬이 아무리 고생스러운 곳이라 할지라도 귀신이 사는 곳은 아니겠지요. 저는 지금까지 어디 한 곳 정착할 곳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부교님이 섬에 가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살라고 하신 곳에 정착할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게다가 저는 이렇게 허약한 몸이지만 아직 큰 병에 걸린 적이 없었기에, 섬에 가서도 어떤 고생스런 일을 하더라도 몸이 상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섬에 보내주시는 것도 모자라, 이백 냥의 엽전까지 받았습니다. 그 돈을 여기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기스케는 가슴에 손을 대었다. 추방을 명받는 자에게 엽전 이백 냥을 주는 것은 당시의 규정이었다.
기스케는 말을 이었다.
“부끄러운 말입니다만, 저는 오늘까지 이백 냥이라는 돈을 이렇게 가슴에 품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곳저곳 일거리를 찾으려고 돌아다니다, 일거리를 찾으면 뼈가 빠지게 일했습니다. 그리고 받은 돈은 매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야 했습니다. 그래도 현금으로 먹을거리를 사서 먹을 수 있을 때는 형편이 좋았던 때이고, 대개는 빌린 돈을 갚자마자 다시 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들어간 후로는 일을 하지 않아도 먹여주었습니다. 저는 그것만으로도 부교님에게 황송할 따름입니다. 더구나 감옥을 나올 때에는 이백 냥이나 주셨습니다. 이렇게 계속 부교님이 주시는 음식을 먹고 있다 보니, 이 이백 냥은 쓰지 않고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돈을 자기 것으로 하여 지닌다는 것은 제게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섬으로 가 봐야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있게 되겠지만, 저는 이 돈을 섬에서 할 일의 자본으로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기스케는 입을 다물었다. 쇼베에는 ‘흠. 그런가.’라고 말하였으나, 듣는 것마다 너무나 의외의 말이라, 쇼베에도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생각에 잠겨 입을 다물었다.
쇼베에는 어느덧 초로에 접어든 나이가 되어, 아내와 네 아이의 가족을 거느리고 있었다. 게다가 노모도 살아 있었기에 7인 살림이었다. 평소 남에게 구두쇠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여, 옷은 자기가 공무로 입는 것 외로, 잠옷 하나 정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내는 좋은 상인 집안의 여자였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이 받는 월급으로 살림을 하려는 선의는 있으나, 유복한 집에서 귀염을 받으며 자란 습관이 있어 남편이 만족할 정도로 근검절약하는 살림을 하지 못했다. 월말이 되면 자주 적자가 났다. 그러면 아내는 몰래 친정에서 돈을 가져와 적자를 메웠다. 그것은 남편이 돈을 빌리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런 일은 어차피 남편에게 알려지게 마련이었다. 쇼베에는 명절이라고 하여 친정에서 선물을 받고, 자식의 시치고산(七五三. 남자 아이 3세와 5세, 여자 아이 3세와 7세에 해당하는 해의 11월 15일에 행하는, 자식의 성장을 축하하는 행사. 새 옷을 입고 신사 등에 참배한다.-역주)을 축하한다고 친정에서 아이들 옷을 선물 받는 것도 싫어했으므로, 살림의 구멍을 메워주는 것을 알게 되면 웃는 얼굴을 할 수가 없었다. 그다지 집안의 평화를 깰만한 것이 없는 쇼베에의 집에 때때로 파란이 이는 것은 이것이 원인이 되었다.
쇼베에는 지금 기스케의 이야기를 듣고, 기스케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와 비교해 보았다. 기스케는 일을 하고 돈을 받아도, 돈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타인 손에 건네져 없어졌다고 하였다. 얼마나 안타깝고 불쌍한 처지인가. 그러나 반대로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면, 그와 나 사이에 과연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을까. 나도 받는 월급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타인 손에 넘겨주며 살아가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와 나의 다른 점은, 소위 주판의 자리 수가 다르겠지만, 기스케가 고마워하는 이백 냥에 상당하는 저축조차 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금액의 자리 수를 달리 생각해 보면, 엽전 이백 냥이라도 기스케가 그것을 저축이라고 보고 기뻐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 마음은 나도 충분히 헤아릴 수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의 단위를 달리 생각해 보아도, 이상한 것은 기스케가 욕심이 없는 점, 충족함을 알고 있는 점이다.
기스케는 이 세상에서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고생을 하였다. 일거리를 찾기만 하면 뼈가 빠지게 일해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것에 만족하였다. 게다가 감옥에 들어간 후로는, 지금까지 얻기 힘들었던 먹을거리가 마치 하늘에서 하사받은 것처럼 일하지 않고도 얻어진다는 사실에 놀라 난생처음 만족을 느낀 것이다.
쇼베에는 아무리 돈의 단위를 달리 생각해 보아도, 여기에 그와 나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는 것을 알았다. 자기의 월급으로 꾸려가는 살림은, 때로 부족한 적이 있을지라도 대개 출납이 맞았다. 빡빡한 살림이었다. 그런데 그것에 만족을 느낀 적은 거의 없다. 평소에는 행복한지 불행한지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고 살고 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이렇게 살고 있다가 갑자기 목이 잘리면 어떻게 하나, 큰 병이라도 걸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잠재하고 있어, 종종 아내가 친정에서 돈을 가져와 적자를 메우는 것을 알게 되면, 이 걱정이 의식의 표면으로 머리를 내미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 간격은 어째서 생기는 것일까. 단순히 그것은 기스케에게는 처자식이 없고 자기에게는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그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다. 설령 자기가 혼자 몸이라고 해도, 아무래도 기스케와 같은 마음은 되지 않을 듯하였다. 아무래도 그 이유는 더 깊은 곳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고 쇼베에는 생각했다.
쇼베에는 그저 막연하게 사람의 일생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사람은 몸에 병이 있으면 그 병이 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날의 먹을 것이 없으면 먹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만일 마련한 재산이 없으면 조금이라도 재산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재산이 있어도, 또 그 재산이 좀 더 많았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이처럼 계속 생각해 보면, 사람은 어디까지 가도 멈추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지금 눈앞에서 멈춰 보여주고 있는 자가 바로 기스케라고 쇼베에는 생각하였다. 쇼베에는 새삼스럽게 경이의 눈을 크게 뜨고 기스케를 바라보았다. 이때 쇼베에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기스케의 머리에서 휘광이 비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쇼베에는 기스케의 얼굴을 지켜보면서, 다시 “기스케 씨.” 하고 불렀다. 이번에는 ‘…… 씨’라고 했는데, 그것은 충분한 의식 하에서 호칭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그 소리가 자신의 입에서 나와 자신의 귀에 들어간 순간, 쇼베에는 이 호칭이 부적당하다고 느꼈으나, 어차피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예.”라고 대답한 기스케도, ‘……씨’라고 불린 것을 이상하게 느꼈는지 긴장을 하며 쇼베에의 눈치를 살폈다. 쇼베에는 잠시 어색해진 느낌을 억누르고 말했다.
“많은 걸 묻는 것 같은데, 자네가 지금 섬에 보내지는 것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왕 말이 나왔으니 내게 그 사연을 말해 주겠나?”
기스케는 매우 황송하다는 모습으로 나직한 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참으로 엉뚱하게도 순간의 잘못으로 무서운 짓을 저질러 뭐라 드릴 말이 없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나 자신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모두가 꿈속에서 저지른 일 같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양친이 전염병으로 돌아가셔서 남동생과 둘이 남았습니다. 처음에는 마치 처마 밑에서 낳은 강아지처럼 동네 사람들이 불쌍하게 생각해 보살펴주셨기에, 이웃집의 심부름 같은 것을 하며 간신히 굶주림을 면하며 컸습니다. 커서 일거리를 찾을 때에도 가능하면 둘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며 서로 도우며 일했습니다. 작년 가을의 일입니다. 저는 동생과 같이 니시진(西陣)의 직물 공장에 들어가 직물을 짜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동생이 병에 걸려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희는 기타야마(北山)의 움막 같은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미야천(紙屋川)의 다리를 건너 공장에 다니고 있었습니다만, 제가 저녁에 먹을거리를 사가지고 돌아오면 동생은 기다리고 있다가 나 혼자서 일하게 해서 너무 미안하다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집에 돌아와 보니, 동생은 이불 위에 팍 엎드려 있었고 주위는 피투성이였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는 도시락 보따리를 팽개치고 다가가 ‘왜 그래, 무슨 일이야?’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동생은, 양쪽 볼과 턱에 피가 묻은 창백한 얼굴을 들고 저를 쳐다보았습니다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숨을 쉴 때마다 상처 구멍에서 휴휴 하는 소리가 날 뿐이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어떻게 된 사정인지 알 수가 없어 ‘왜 그래? 피를 토했냐?’라고 말하고, 옆으로 다가가려고 하자, 동생은 오른손을 바닥에 짚고 몸을 약간 일으켰습니다. 왼손은 턱밑을 꼭 누르고 있었으나, 그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핏덩어리가 삐져나오고 있었습니다. 동생은 내가 옆으로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습니다. 간신히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미안해. 용서해 줘. 어차피 낫지 못하는 병이니, 빨리 죽어 조금이라도 형을 편히 해주려고 생각했어. 울대를  찌르면 금방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숨이 새기만 하고 죽지 않아. 더 깊이 찌르면 될 거라 생각해서 힘껏 찔러 넣다가 옆으로 미끄러져 버렸어. 칼은 부러지지 않은 것 같아. 이걸 잘 빼주면 나는 죽을 수 있을 거야. 말하는 게  괴로워. 제발 좀 빼줘.’라고 말하였습니다. 동생이 왼손을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하면 그곳에서 숨이 새어나왔습니다. 나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말이 나오지 않아 잠자코 동생 목의 상처를 들여다보니, 아마 오른손에 면도칼을 잡고 옆으로 울대를 그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숨이 끊어지지 않아 그대로 면도칼을 쑤시듯이 깊게 찔러 넣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손잡이가 두 치 정도 나와 있었습니다. 나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동생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동생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마침내 ‘기다려. 의사를 불러올 테니.’라고 말했습니다. 동생은 원망스러운 듯한 눈을 하였으나 다시 왼손으로 목을 꼭 누르고, ‘의사가 무슨 소용이야. 아아 괴로워. 빨리 빼줘, 부탁이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동생의 얼굴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는 묘하게도 눈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동생의 눈은 ‘빨리 해, 빨리.’라고 하며 자못 원망스러운 듯이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제 머릿속에서는 수레바퀴 같은 것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듯하였으나, 동생 눈은 무서운 재촉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원망스러운 눈이 점점 더 험악해져서 이윽고 원수의 얼굴이라도 노려보는 듯한 증오의 눈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자 나는 결국 동생이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알았다.  빼주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기쁘다는 듯 동생 눈빛이 환하게 싹 바뀌었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단번에 해치워야겠다고 생각하며 무릎걸음으로 동생에게 다가갔습니다. 동생은 바닥을 짚었던 오른손을 떼고 그때까지 목을 누르고 있던 손의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누웠습니다. 나는 면도칼 손잡이를 꽉 잡고 쑥 빼냈습니다. 바로 그때 대문이 열리며 옆집 할멈이 들어왔습니다. 내가 없는 동안 동생에게 약을 먹이거나 돌봐주도록 부탁한 할멈이었습니다. 꽤 방안이 어두워졌기에 할멈이 모든 걸 다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앗 비명을 지르고 열린 문을 그대로 둔 채 뛰쳐나갔습니다. 제가 면도칼을 뺄 때, 재빨리 똑바로 빼려고 주의를 기울이긴 하였으나 아무래도 뺄 때 느껴진 손의 반응은 그때까지 끊어지지 않은 부분이 끊어져버린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칼날이 바깥쪽을 향하고 있었으니 바깥쪽이 끊어진 것이겠지요. 나는 면도칼을 손에 든 채, 할멈이 들어왔다 다시 뛰쳐나가는 장면을 멍하니 보고 있었습니다. 할멈이 가버리고 나서 정신이 들어 동생을 내려보니, 동생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습니다. 상처에서는 엄청나게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잠시 후 관리가 나타나셔서 야쿠바(役場: 지방 공무원이 사무를 보는 곳-역주)로 끌려갈 때까지 저는 면도칼을 옆에 놓고, 눈을 반 정도 뜬 상태로 죽은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고 쇼베에의 얼굴을 밑에서 올려다보며 이야기를 하던 기스케는 이렇게 말하고 시선을 무릎 위로 떨어뜨렸다.
기스케의 말은 조리가 정연했다. 너무 조리가 정연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것은 반년 정도의 기간에 당시의 사건을 몇 번이나 생각해 보았던 것과, 야쿠바에서 심문을 당하고 다시 마치부교쇼(町奉行所)에서 조사를 받을 때마다 주의를 거듭하여 면밀히 설명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쇼베에는 그 장면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는 생각을 하며 듣고 있었으나 이야기를 반쯤 듣게 된 때, 과연 이것을 친족 살인이라고 해야 할 것인지, 그를 살인자라고 간주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고, 다 듣고 나서도 그 의문은 풀리지가 않았다. 동생은 면도칼을 빼주면 죽게 될 터이므로 빼달라고 말했다. 그것을 빼주어 죽게 한 것이며, 살인을 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대로 놔두어도 어차피 죽을 동생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빨리 죽고 싶다고 한 것은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기스케는 그 고통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고통에서 구해주려고 생각하여 목숨을 끊었다.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인가. 죽인 것은 죄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고통에서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생겨난 의문은 도대체 풀리지가 않았다.
쇼베에는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 결과, 자기보다 윗사람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 권위(원문은 autorite 仏-역주)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쇼베에는 부교님의 판단을 그대로 자신의 판단으로 하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도 쇼베에는 아직 어딘가 납득이 가지 않은 것이 남아, 뭐가 뭔지 부교님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어졌다.
점차 깊어가는 으스름달밤, 침묵의 두 사람을 태운 다카세부테는 검은 수면을 미끄러져 갔다.

*이 이야기는 오키나구사(翁草. 에도시대의 수필집)에 나온 것을 작자가 소설로 쓴 것이다.



김영식
․1962년 부산 출생
․2002년 ≪리토피아≫ 수필 등단
․‘일본문화연구’ 사이트 운영자(http://hobbian.ne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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