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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젊은시인 집중조명/김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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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22회 작성일 08-02-29 01:50

본문

김일영






숲에 바람이 분다.

새들의 발톱에 힘이 들어간다.



가지는 놓친 무게만큼 흔들리고


시멘트 뚫는 포크레인 드릴소리
오래된 대들보를 흔들고
*老安堂 마당에 눈물처럼 떨어진 복숭아들,
가지는 놓친 무게만큼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문간방 마루에 앉아
김밥 한 줄을 나눠 먹는다
옆얼굴을 침식한 슬픔과 피로,
그녀가 한결 늙어 보인다

연한 바람에도 소스라치게 흔들리며
땡볕을 쓸어내는 그늘 아래서
우리는 복숭아를 줍는다
소음과 땡볕이 바글거리는 마당을 견디며
살아 있다고 내뿜는 향기가 애리다

카메라 든 사람들 두리번거리며
마당 가로질러 사라지듯
우리도 이 마당을 벗어날 수 있을까
손바닥에서 뒤척이는 복숭아들
나무 그늘에 묻으며


우리는 어디쯤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일까
가난한 그녀의 손을 꽉 쥐어 고이는 땀에
헤머드릴이 열을 식히고, 녹슬어가고,
전생의 어느 여름처럼 무기력한
운현궁을 빠져나가며


        *老安堂:운현궁의 사랑채



십이월


숟가락 하나까지 다 드러낸 까치집
새끼까치가
산동네 집들을
둥지 틈으로 바라다보고 있는데
걸음이 피식 꺼질 것 같은 노인이
달력 두루마리 양쪽에 끈을 묶어
괴나리봇짐처럼 짊어지고 언덕길을 오른다
지독하게 느린 걸음까지
노인이 다녀오는 시절
큰아들묘지참배, 마을공동제사, 상봉신청기간
흠뻑 만져보지 못한 세월의 얼굴,
그리운 얼굴 같은 동그라미들
멀리까지 굴러가도록
건망증 같은 걸음이
교체될 시절을
마지막 짐처럼 짊어진 노인을 태우고
산동네 계단을 간신히 오르고 있다
새끼까치가 물끄러미 지켜보고



두 장의 편지


편지를 받았다
추위와 비바람을 건너오느라
구겨지고 흙이 묻은
두 장의 편지
오래된 사투리로
잘 살고 있냐고
답장할 수 없는 질문에
절반을 살았고
또 한해가 가고
잘 살고 있냐는
화단에 지금 도착한
두 장의 새순
내가 돌아가
대답해야 할 편지



오래된 오후의 아스팔트에서


당신을 콜타르냄새 식욕을 몰아내던 무더운 거리에서 만난 건
많은 이들이 예리한 말들을 맡겨두고 돌아오지 않던
젊지도 늙지도 못했던 계절이었지
욕정들이 이글거리던 도로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한참을 걸었지요
질문들을 대일밴드처럼 붙여주며 당신은 무슨 표정을 지었던가요
서로를 기억의 응접실로 초대해 주지 않던 날들은
허기와 함께 밀물이 되어 오가고
빌딩들의 평행선에 단면을 잘리며 죽어가던 무수한 석양들이여
나는 아직도 석양의 묘지들을 찾아 웃자란 풀숲으로 길을 만들고 싶어요
당신을 비 오는 아스팔트 웅덩이에 남겨두고 돌아오던 그날 밤처럼
창밖의 어둠을 부서뜨리며 비가 오는데
부서진 틈으로 봄의 가로수들 한숨을 심는데
나의 도로 위에는 더렵혀진 경전이 뒹굴고 있어요
떨고 있던 가로등 아래서의 고백처럼 아직 사랑을 믿는다면
내 더럽혀진 계절에 당신의 부서진 홀씨들을 심겠어요
언젠가 홀씨가 앉은 오래된 오후의 아스팔트에서
잠꼬대처럼 꽃 한 송이 피어날까요



봄비


내 고독은 지치고 늙었어도
습기 타고 전송되는
발기한 새순 신음소릴 듣는다
너의 투명한 줄기를 잡고 올라보리라
침침한 방안에서도
벽지의 꽃송이는 수액을 흡입한다
십자가들 단풍 든 빌딩 창가에서도
전철 안에 선인장으로 꽂힌 퇴근길에도
내 몸을 세우던 빗소리
더 굵은 줄을 내려라
내 느린 몸짓으로
떨어지는 너를 안고 올라보리라
순백의 모나리자여  
시멘트 마당에서 살아있는 것을 꺼내다오

비워낸 陰囊 안에 처음 태어난 햇빛이 들이친다
맑은 소리로 죽은 빗소리가 멀어진다
이제 다시 새로 심은 고독을 잉태할 때
낡은 종잇장의 얼굴 뒤에 숨은
그늘을 펴 읽다보면 나는
들에 솟는 싹
그 중 한 포기



깃털이 죽지 않고


깃털이 간절히 손을 내밀지만
저 주검을 끌어당겨 줄 바람은
오지 않는다.

바퀴는 거듭 새의 흔적을 짓밟고 가지만
솜털 하나에까지 기억된 바람이
바람을 붙잡는다.

아스팔트를 뽑아 일으키며 날아갈
바람의 씨앗,
깃털이 죽지 않고 손을 든다.



여러 개의 방


낯선 방에 소년이
그림자를 가슴에 품고 주먹처럼 웅크리고 있다
오후 햇빛을 가득 채운 유리창이 부풀고
창밖을 지나가던 아이가
무릎이 깨졌는지 빈 냄비처럼 운다
낯선 공기가 소년을 훑어본다

빈 교실에 주소 없는 편지처럼 담긴 소년은
운동장에 아이들이 흘리고 간 땀방울이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소리를 센다
그 소리마저 창고처럼 우는 뻐꾹새가 삼켜버린다
지나가던 아이가 유리창에 얼굴을 붙였다 사라진다
칠판에 덜 지워진 글씨가 소년에게 말을 건다

엄마는 배고픈 해가 간신히 져도 오지 않는다
무릎이 가슴 깊이 박힐 때까지
못에 걸린 어깨 없는 옷이 내려다본다
등 뒤 벽지에 크레파스로 그려진 남자의 얼굴이 창백하다

여러 개의 방이 갇힌 방안의 남자는
생각을 눕힐 방을 찾지 못했다
사내는 아직 방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소리의 방․5


지난밤에는
이부자리가 다 젖도록 비가 내렸다
담 너머 옆집 개가
팔려간 어미를
젖은 자리에 두고 깨어났는지
일찍부터 낑낑거린다
아침이 슬금슬금 지나가고
건물 틈, 접은 손수건만한 하늘에
구름이 지나갈 뿐인데
왜일까―
어린 개는 잠시 울음을 그친다
자전하던 지구도 잠시 주춤한다



소리의 방․6


어둠이 하도 짙어
불을 켜야 잠들 수 있는 밤,
비가 온다.

칠판에 분필 뛰어가는 소리,

글씨들을 읽고 또 읽으면
어두운 벽 아래 쭈그리고 앉은 풀들의
소곤소곤 킥킥대는 소리까지 읽힌다.

여지없이 빗방울이 날아가고  
내일은 풀들의 이마가
한결 자라 있을 것이다.



김일영․
1970년 전남 완도 출생
․200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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