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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김일영 작품론/이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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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430회 작성일 08-02-29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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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영 작품론|


여과된 비애

이명원|문학평론가



김일영의 시는 비애로 충만해 있지만, 그것이 감상적으로 휘발되지 않고 자아에 대한 응시라는 필터를 통해 성찰적으로 여과되고 있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시적 자아들은 대체로 완전히 젊지도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상태에서, 바닥의 절망으로부터 서서히 일어서기를 꿈꾸는 식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공간적으로 보면, 그 자아들은 ‘방’안에 갇힌 존재로 나타나지만, 그것이 세계에 대한 자아의 퇴행이나 고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귀’가 열려 있기 때문이다.

어둠이 하도 짙어
불을 켜야 잠들 수 있는 밤,
비가 온다.

칠판에 분필 뛰어가는 소리,

글씨들을 읽고 또 읽으면
어두운 벽 아래 쭈그리고 앉은 풀들의
소곤소곤 킥킥대는 소리까지 읽힌다.

여지없이 빗방울이 날아가고
내일은 풀들의 이미가
한결 자라 있을 것이다.
―「소리의 방」 전문

시적 화자는 ‘방’안에 갇혀 있지만, ‘귀’는 외부를 향해 열려 있다. 그 귀는 크고 민감한 것이어서, 사물을 식별하는 ‘눈’의 역할을 대신하기까지 한다. 아마도 그 비는 소낙비였다가, 가랑비로 오락가락하는 것이었나 보다. “칠판에 분필 뛰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그것은 소낙비다. 아마도 그 빗방울에 풀입들은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제 몸을 흔들었을 것이다. 그 흔들리는 풀의 모습을 상상하는 화자는 이를 “소곤소곤 킥킥대는 소리”라고 청각화한 심상으로 제시한다.
1행에서 “어둠이 하도 짙어” 하고 말하는 것을 보아, 화자의 내면은 무겁게 침잠해 있는 듯하다. “불을 켜야 잠들 수 있는 밤”이라는 진술은, 기실 그 어둠이 물리적 자연의 상태를 지시하는 동시에 하강하는 마음의 착잡함을 동시에 의미한다고 읽혀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귀를 열고 보니, 비 내린다. 불면의 밤에 비마저 내리니, 화자의 비애가 증폭되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지만, 흥미롭게도 화자의 마음은 이를 통해 오히려 정서적 반전상태로 나아간다. “칠판에 분필 뛰어가는 소리”로 그것을 느끼고 빗방울에 흔들리고 있는 풀들의 까딱거림을 “소곤소곤 킥킥대는 소리”로 읽어내는 감각이 이를 증거한다.
이때 어둔 방의 바깥에서 하강하고 있는 비는 화자에게 침전된 비애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는 명랑한 메신저다. 화자는 비가 전하는 전언이 무엇일까 고민에 빠진다. 자연의 일부인 비는 제 의지와 무관하게 그저 지상을 향해 내리고 있을 뿐인데, 그 빗방울에 어떤 전언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화자다. 그럴 때 외부로 열린 ‘귀’는 ‘눈’의 역할을 한다. “글씨들을 읽고 또 읽으면”이라는 표현은 “빗소리를 또 듣고 들으면”이라는 일상적 진술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빗소리를 반복해서 들으면서 오히려 강렬해지는 것은, 침전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화자의 무의식과 결합된 의지다.
화자는 이 불면의 밤이 괴롭기는 해도, 자기가 거쳐야 할 성숙에 대한 통행료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침전하는 마음의 정황을 더욱 깊은 수준에서 자극하는 저 빗방울조차, 아침이 오면 가볍게 날아오르고, 또 그 빗방울에 온몸이 젖어 흔들리던 풀들이 “한결 자라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데서 우리는 이를 유추할 수 있다. 요컨대 그것은 성숙에 대한 시인의 열망이 가탁된 것이다. 불면에 던져진 화자의 정황이야말로, 거꾸로 보면 성숙의 한 과정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방 안에 갇혀 잠들지 못하는 화자의 미래는 “내일의 풀”일 것이다.

숲에 바람이 분다.

새들의 발톱에 힘이 들어간다.
―「삶」 전문

간명한 시이지만, 위의 작품에도 김일영의 세계에 대한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아무런 정보도 제시하지 않고 시인은 “숲에 바람이 분다”고 말한다. 나무에 부는 것이 아니고, 숲에 부는 바람이라면 강풍일 것이다. 그 바람에 숲은 풀어헤친 머릿칼처럼 일렁거릴 것이다. 그런데 시인이 보는 것은 요동하는 숲이 아니고 ‘발톱’이다. 그것은 막 날개를 펼 준비를 하고 있는 새의 비상을 예비하고 있다. 김일영에게 한 편의 시는 동요하는 삶 속에서 비상을 꿈꾸는 새의 발톱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새가 날았다거나 바람이 강렬했다고 적지 않는다. 다만 바람이 불었고, 새가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만을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이는 시인이 사물과 인생을 깊은 수준에서 관조하고 또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의 여과장치를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것은 매우 소중한 시인의 에토스다. 가령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일컬어 ‘미래파’라거나 ‘바퀴벌레’의 생태로 규정하면서(물론, 메타포일 것이다!), 시인의 무한한 자기 표출 욕망을 긍정하는 일부 비평가들이 있다. 비평가 권혁웅을 포함하여, 가령 시인 강정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간명한 함정에 빠져 있다. 그들이 미래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학사적으로 보면 지극히 낡은 근대시의 히스테릭한 모험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만일 소통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랄까, 참여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굳이 문학장에 제출할 필요 없이 가령 일본의 시단처럼 ‘동호인’들의 결사체를 구성하면 될 것이다.
차라리 오늘의 문학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원점으로 회귀하여, 시와 시인 됨의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숙고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시의 ‘고현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왜 우리가 다른 일이 아닌 문학을 업으로 선택했고, 자본의 구조 속에서 되도 않는 시를 쓰기 시작했는지, 왜 그토록 우리들이 시인 됨의 고뇌에 빠질 수 없는가에 대해 원점에서, 고고학자처럼 사유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시가 말장난(fun)과 다르고, 세상에 가득한 ‘은어체계’와 다르다는 점에서, 또 문학의 출발점이 ‘감정교육’이고 ‘공감능력’의 활성에 있다는 점에서, 오늘의 시인들은 오히려 낡은 질문인 ‘시인정신’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시적 과장과 엄살, 감정의 과잉노출이 갖고 있는 감성의 유아적 노출증을 경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김일영의 여과된 비애는 소중한 것이다. 가령, 「오래된 오후의 아스팔트에서」라는 작품에서,

많은 이들이 예리한 말들을 맡겨두고 돌아오지 않던
젊지도 늙지도 못했던 계절

이라고 그가 말할 때, 우리는 이 여과된 비애가

나는 아직도 석양의 묘지들을 찾아 웃자란 풀숲으로 길을 만들고 싶어요

라는 희망으로 이어지는 그 ‘에움길’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콜타르 냄새가 코를 찔렀을 것이다. 욕정들로 들끌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아스팔트에서 속수무책으로 비 맞게 했을 것이다. 그런 자책이 스스로를 “더럽혀진 경전”으로, 그 천변만화하는 시간을 “더럽혀진 계절”로 느끼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희망은 또한 얼마나 힘이 센가.

잠꼬대처럼 꽃 한 송이 피어날까요

고럼! 하고 나는 말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시인도 할 말은 더 있을 것이다.

우리도 이 마당 벗어날 수 있을까
―「가지는 놓친 무게만큼 흔들리고」 부분

흠뻑 만져보지 못한 세월의 얼굴
―「십이월」 부분

답장할 수 없는 질문에/절반을 살았고/또 한해가 가고
―「두 장의 편지」 부분

내 고독은 지치고 늙었어도
―「봄비」 부분

소음과 땡볕이 바글거리는 마당을 견디며/살아 있다고 내뿜는 향기가 애리다
―「가지는 놓친 무게만큼 흔들리고」 부분

내가 돌아가 대답해야 할 편지
―「두 장의 편지」 부분

떨고 있던 가로등 아래서의 고백처럼 아직 사랑을 믿는다면/ 내 더럽혀진 계절에 당신의 부서진 홀씨들을 심겠어요
―「오래된 오후의 아스팔트에서」 부분

여러 시에 산재돼 있는 위의 발언들을 간명하게 논리적 맥락에 따라 서사화하면, 시적 자아는 흔들리며 비애와 절망을 관통했지만, 그 모든 낯익거나 낯선 상처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아스팔트를 뚫고 나오는 홀씨처럼, 그렇게 비애와 절망을 여과시켜 맑은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각도 크게 절망하지도 않고, 「여러  개의 방」에 등장하는 두 자아(소년과 사내)처럼 ‘벽’의 안과 밖에서 각자의 비애에 잠기지도 않으면서도, “홀씨”와 피어날 “꽃 한송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절망은 아마도 바닥을 치고 올라와 도리어 맑아진 비애에 속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센티멘말리즘과 무관하고, 표면적으로는 관조적인 듯하지만 마음의 율동은 지나치게 리드미컬했을 것이다. 이 절망과 비애를 희망의 낮은 수준에서 ‘여과’하면서도, 맑은 희망을 길어 올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김일영 시인의 성숙한 시적 에토스를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하며, 이러한 시적 미덕이야말로 그의 시를 신뢰하면서, 독자들 모두가 영적으로 고요해질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김일영의 시는 오래된 정신주의 시학의 계보에 속해 있으면서도, 삶의 구체적인 땀내가 배어있는 살아있는 서정을 보여준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오늘의 시적 현실은 이 오래된 시의 발생론적 근거-여과된 서정에 대하여 싸늘한 냉소와 입술 주변의 웃음을 아주 나른하게 흘리는 여과 안 된 ‘노출의 계절’인지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마음의 ‘노출증 환자’가 아니다. 좋은 시는 독기 많은 ‘항생제’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독기를 분출하는 듯 그 압력을 줄이고, 그 빈 곳에 따뜻한 입김과 서늘한 바람을 마찰시켜, 그야말로 풀들이 까딱까닥, 하듯 혹은 칠판 위를 명랑하게 달리는 ‘분필’ 군처럼, 그렇게 우리의 순탄치 않은 삶의 굴곡을 배로 기고 발로 뛰다가, 간혹 날개를 펴는 것이다.
김일영의 시는 ‘여과된 비애’의 성숙함을 보여준다. 이건 독자들에게 은근슬쩍 보여주는 힌트인데, 그 안에는 놀랍게도 ‘지뢰’가 있다. 새도 ‘발톱’이 있듯이. 아, 바람이 분다.


이명원․
199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 등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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