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1호 젊은시인 집중조명/손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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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별빛보호지구
오리나무쥐똥나무깨금나무산뽕나무
별들이 또록또록
산고동 우는 소리를 내며 흐른다
별이 지상에 내리는 걸 저어하지 않도록
일찌감치 저녁상을 물리고
잠자리에 드는 마을
어둠은 그 옛날 밭흙 냄새를 풍기며
눈꺼풀을 쓸어내려주던 할머니
손톱 끝의 까만 흙알갱이들을 닮았는데
이 별의 지표식물
미등록 천연기념물
고산족이 돼버린 어둠 속에 있으면
고른 숨소리 따라 스르르 눈이 감긴다
근육 속의 고단함을 축복할 줄 알아서
오리나무쥐똥나무깨금나무산뽕나무
계단식 논밭 땅을 갈며
하늘에 이르는 법을 익힌 사람들
동백꽃
동백꽃 멍울
까본 적이 있다
꽃소식 기다리다 지쳐 까본
멍울 속엔
흰빛이 겹겹
뭉쳐져 있었다
흰천에 살짝 떨어트린 붉은빛이
연하게 풀어져 있었다
이러다 어느 세월에 꽃을 다 물들일까,
선운사 동구 동백을 더듬다가
그 해 겨울
눈 위에 떨어진 동백을 보았다
멍울 속의 흰빛 모두 물들이고 나서
동백은 이제 온 천지의 눈을 물들일 기세였다
눈 덮인 온천지를 제 꽃잎으로 알고
이글거리는 꽃
겹겹 동백 멍울 속에 내가
들어있었다
챙
챙, 하면 떠오르는 빗소리
빗소리와 빗소리가
부딪치는 양철지붕 끝
처마에 챙을 단 집이 있었다
집안을 가리고 남은 여분이 살짝
밖으로 뻗어나와 만든 품,
하교길에 소낙비를 만나선
급한 마음에 우당탕탕 그 속을 비집고 든 적이 있는데
책가방 머리에 쓰고 뛰어든 그 속엔 마침
여고생이 된 옆집 누나가 새치름
비를 긋고 있었던가, 젖은 누나의
교복 위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김과
마악 잔털이 돋기 시작한 내 겨드랑에서 빠져나온 김이
우리들 허락도 없이 마구 휘감겨들던 챙
더운 살냄새와 살냄새가 뭉클뭉클 살을 비벼대던 챙
처마 끝을 따라 뭉긋이 흘러내려 깊어진 마음의 기울기
챙, 하면 아찔하게 후들거리던 빗줄기
은빛 스틱이 치던 양철북 소리
연못에만 오는 비
비가 오는군, 하고 하늘로 이마를 쳐드는데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는다
버드나무 발치 아래 연못엔 파문이 일고 있는데
파문이 물기슭까지 밀려와서
버드나무 발치를 흔들어보고 있는데
비가 오는군, 하고
옆 사람을 쳐다봐도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이렇게 하늘이 맑은데
그렇게 뚱한 표정이다
허나 화창한 하늘을 행해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마를 찡그릴 때
이마를 펴고 찡그리는 연못을 내려다볼 때
저 한 방울의 빗물처럼
나의 말도 너의 가슴
어느 한복판에 떨어지기라도 한 것인가
수면을 건드리고 톡! 튀어올랐다
가라앉기라도 한 것인가
그래 비가 오는군
물기슭까지 밀려온 파문에 밑동을 흔들린 듯
버드나무 잎이 한 장 떨어지는 것이다
앙큼한 꽃
이 골목에 부쩍
싸움이 는 건
평상이 사라지고 난 뒤부터다
평상 위에 지지배배 배를 깔고 누워
숙제를 하던 아이들과
부은 다리를 쉬어가곤 하던 보험 아줌마,
국수내기 민화투를 치던 할미들이 사라져버린 뒤부터다
평상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동백 화분이 꽃을 피웠다
평상 몰아내고 주차금지 앙큼한 꽃을 피웠다
구층암
처마 아래 기둥이 움푹 패었다
함박눈이 푹푹 내리던 날
그 속에서 새 소리가 들려왔다
겨우내 그 새 어디에서
새끼에게 줄 먹이를 구할까
또 누가 이 치운 날
새의 먹이가 되어
저 구멍 속으로 들어가 줄까
구층을 받치고 있는 건 나무 기둥,
그 중 몇 할은 새 소리, 입 쩍 벌린
새끼들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벌레 울음 소리
구멍 속에 구멍이 있다
안으로 패인 기둥이 지붕을 받쳐 들고 있다
안으로 조금씩 무너져 내리면서
무너지지 않고 있다
보수공사를 하고 싶어도
저 구멍을 버릴 수 없어 하지 못한다.
나무는 광기로 푸르다
나무 뿌리가 하수도
관을 뚫고 들어간다
드르르륵 드릴처럼
뚫고 들어간 뿌리가
오물들을 빨아들인다
부글부글 끓어대는 거품들,
뿌리에 태아가 걸리고
실종된 누군가의 팔 한짝이 걸리고
눈을 파 먹힌 고양이가
걸리기도 한다
나뭇잎의 푸르름은 고통의 빛깔
걸러내고 걸러내다 지쳐
으윽 윽 게워내는 초록
나무가 광기로 번뜩이는 걸
아무도 알지 못한다
聖젓갈
곰소는 소금입니다 젓갈맛의 유명세 뒤에 숨어서 은근히 젓갈을 익히는 소금맛입니다 옛날 선운사에 한 스님이 사셨는데, 이 스님이 의지할 데 없이 떠도는 火賊떼를 끌어모아 제염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화적떼였으니 얼마나 이글거렸겠습니까 어마 뜨거라 살이라도 데일까 모다들 멀리멀리 피해 다녔겠습니까 그런데 스님은 그 이글거리는 불을 끄지 않고 살려 더 부채질을 했습니다 타오르기로 했으면 제대로 타올라라 저 바다를 통째로 불살라 버려라 바닷물이 하얀 재가 되어 사라져버릴 때까지 다비식을 치루고 떠난 스님은 참 바다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어쩌면 스님도 화적떼의 불길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태워버리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하얀 사리알이 되어 살과 뼈가 통째 짓물러터지는 이 땅을 짭조름하게 버무려주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곰소에 한 번 가보셔요 화적떼 같은 열기를 품고 염전 옆에서 젓갈에 빼빌빼빌 밥이라도 한 번 비벼 드셔 보셔요 세상엔 참 이렇게 짜디짠 열반도 있구나 싶을 것입니다 골코롬한 젓갈맛이 성스럽게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손택수․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호랑이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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