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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손택수 작품론/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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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작품론|
번져가는, 묻어나는
김남석|문학평론가
1.
손택수의 「별빛보호지구」는 참 아름다운 시이다.
오리나무쥐똥나무깨금나무산뽕나무
별들이 또록또록
산고동 우는 소리를 내며 흐른다
별이 지상에 내리는 걸 저어하지 않도록
일찌감치 저녁상을 물리고
어둠은 그 옛날 밭흙 냄새를 풍기며
눈꺼풀을 쓸어내려주던 할머니
손톱 끝의 까만 흙알갱이들을 닮았는데
이 별의 지표식물
미등록 천연기념물
고산족이 돼 버린 어둠 속에 있으면
고른 숨소리 따라 스르르 눈이 감긴다
근육 속의 고단함을 축복할 줄 알아서
오리나무쥐똥나무깨금나무산뽕나무
계단식 논밭 땅을 갈며
하늘에 이르는 법을 익힌 사람들
―「별빛보호지구」 전문
시인은 꽤 높은 산에 있는 것 같다. 아니면 대단히 조용한 산속에 있던가. 시인이 머무는 마을 주민들은 욕심이 없다. 별빛이 내리는 시간이 되면 조용히 집안의 불을 끄고 잠들기 때문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지상의 불을 밝혀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즐겁고 더 많이 세상을 즐기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별들에게, 이 지상의 밤을 만끽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이다.
사실, 이 마을은 전기도 빛도 놀이도 할일도 거의 없는 오지이거나, 몇 가구 살지 않는 외딴동네일 것이다. 그들은 저녁 일찍 잠자리에 들어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고단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어쨌든 시인의 눈에는, 이들이 잠자리에 드는 것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양보하기 위해서이다. 별들에게 지상의 뜨락을 거닐 기회를 주고, 별들을 구경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별들이 잘 보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지금은 이런 곳이 드물다. 그런 면에서 이 시의 배경은 과거일 것이다. 어쩌면 밭일에 시달리는 초로의 할머니가 손자의 어린 잠을 쓰다듬어 주던 유년 시절일 수도 있다. 할머니는 흙때 묻은 손으로 손자의 안쓰러운 잠을 청해준다. 손자 역시 손톱 끝이 새까만 할머니의 어루만짐을 기꺼이 기다리던 착한 소년이었을 것이다. 손이 무서워도 할머니이기 때문에 참을 수 있는, 그때 피어나던 냄새. 시인은 그 냄새가 코끝에 어리는 것을 느끼는 것일까.
예스럽고 다정한 기억 속에서 시는 아련한 정서를 쓰다듬고 있다가, 문득 ‘지표식물’이라는 이물감이 느껴지는 언어를 선택했다. 그러고 보니, ‘오리나무쥐똥나무깨금나무산뽕나무’의 나무 이름을 열거하여 산속임을 명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표식물은 이러한 나무들 가운데 하나일까.
지표식물의 사전적 의미는 땅의 부양도, 산성도, 건조도 등 환경 조건을 측정하는 식물을 가리킨다. 지시식물, 입지지표식물이라고도 한다. 가령 쇠뜨기가 자라는 곳은 토양이 산성이고 거미고사리가 생육하는 곳은 중성 혹은 알카리성에 가깝다. 그렇다면 시로 돌아가서, 시인이 말하는 지표식물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더구나 ‘이 별의 지표식물’이라고 했다.
만일 여기서 ‘이 별’이 지구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지표식물은 이 지구의 환경 조건을 측정할 수 있는 나무일 것이다. 물론 오리나무나 쥐똥나무, 혹은 개암나무도 될 수 있고, 시에 열거하지 않았던 나무가 될 수도 있다. 어쩌면 나무가 아닌, 보다 광범위한 생물이나 정서도 될 수 있다.
지금 시인이 머무는 곳에는 이 지구상에 꼭 있어야 하는데 없어진 것들이 너무 많다. 일단 어둠, 완전한 의미의 어둠은 이 지구상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휘황찬란한 도시의 불빛은 화려함이지만 동시에 외로움이기도 하다. 그 불빛만큼 고요한 어둠도 필요하다. 만일 완전한 어둠을 보호할 수 있다면 우리는 천연기념물로 제정해서라도 보호해야 한다.
이 시에서 말하는 별빛도 마찬가지이다. 별빛도 우리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이제 별을 보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그들이 북적이는 도시를 멀리 떠나야 한다. 우리는 편리함을 얻는 대신에, 항상 볼 수 있었던 별빛을 어머어마한 대가를 주고 찾아나서야 하는 세상에 살게 되었다.
어둠과 별빛도 중요하지만 더 소중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인정이다. 시인이 그려낸 마을에는 타인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있다. 고된 노동에 시달렸으면서도 고단한 손자의 잠을 어루만지는 귀한 손길이 있다. 이 마음씨는 꼭 찾아서 보호해야 하는 것들이다. 진정 천연기념물이 하나 있어야 한다면 이 마음씨일 것이다.
시인은 이 마음씨를 ‘하늘에 이르는 법’이라고 했다. 자연의 섭리를 헤아리고 마음의 이법을 따라 사는 삶, 이 삶의 터전에서만이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이 시가 가진 미덕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지금 우리 주변에 널리 퍼져 있는 시에 대한 생각과 관련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시가 어렵게 느껴지는 세상을 살고 있다.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하면 시는 복잡하고 풀기 어렵고 신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요즘 시들을 보면 그래서 무척 어렵다.
어쩌면 요즘 시들이 어려워지는 것은 세상이 복잡하고 삶이 복잡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이 복잡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틀리지 않은 지적이다. 문제는 쉬운 시를 통해 복잡한 세상과 삶과 정신 그리고 시를 치유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손택수의 이 시는 간명한 시인의 생각이 쉬운 형식과 전언을 통해 알맞게 표현된 경우이다. 한결 복잡해진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2.
손택수에게 시는 일종의 화선지 같은 것 일게다. 그렇게 생각하는 직접적인 근거는 「동백꽃」에서 찾을 수 있다.
동백꽃 멍울
까본 적이 있다
꽃소식 기다리다 지쳐 까본
멍울 속엔
흰빛이 겹겹
뭉쳐져 있었다
흰천에 살짝 떨어트린 붉은빛이
연하게 풀어져 있었다
이러다 어느 세월에 꽃을 다 물들일까,
선운사 동구 동백을 더듬다가
그 해 겨울
눈 위에 떨어진 동백을 보았다
멍울 속의 흰빛 모두 물들이고 나서
동백은 이제 온 천지의 눈을 물들일 기세였다
눈 덮인 온천지를 제 꽃잎으로 알고
이글거리는 꽃
겹겹 동백 멍울 속에 내가
들어있었다
―「동백꽃」 전문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나는 붉은(만개한) 동백 이외의 동백을 본 기억이 없다. 손택수의 시를 보면서, 동백이, 동백의 속살이 처음에는 하얗다가 차츰 연한 붉은 빛을 띠다가 결국에는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일 정도로 타오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 시간은 아마 계절의 윤환과 관련 있을 것이다. 겨울에서 봄으로 이전하는 그 느릿한 시간. 세상 모든 것이 멈춰 있다가 조금씩 제 빛깔을 찾아가는 기간과 대략 맞물려 있을 것이다.
이 시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하얗던 동백꽃이 붉어지는, 다른 말로 하면 붉은 빛깔이 하얀 동백 속살에 ‘번져가는’ 시간이다. 동백은 꽃이 되기 위해서 붉은 기운으로 자신을 물들이고, 번져나올 듯 묻어나올 듯 새빨간 동백꽃이 된다. 시인은 그 과정을 음미하면서 우주의 비밀과 오묘한 이치에 접근하는 것 같다.
선운사 동백이 흰빛 세상에 떨어져 이 세상을 물들일 기세로 타오르는 장면은 일종의 환상이지만, 그 환상은 글 쓰는 사람들이 꿈꾸는 세상의 아름다움이다. 제 것으로 남을 동화시키고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행위는 그것 자체로 미학이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의 예술 작품들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마음과 솜씨로 세상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그 무엇이다. 동백꽃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물들이고 세상을 물들이고 시로 태어나 읽는 이들의 마음을 물들이는 것처럼.
시인은 마지막 두 행에서 “겹겹 동백 멍울 속에 내가 들어있었다”고 했다. 오역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의 아름다움과 아름다움의 원리를 알아버린(어쩌면 어슴푸레한 직관일지라도) 시인의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번져가는, 그래서 이 세상 여기저기에 묻어날 것 같은 아름다움은 꼭 눈에 보이는 화려한 빛깔만은 아닐 것이다. 「챙」이라는 시는 그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음을 알려준다. 또 「챙」이라는 시는 그 아름다움을 만드는 힘이 의외로 단순한 것임을 알려주기도 한다.
챙, 하면 떠오르는 빗소리
빗소리와 빗소리가
부딪치며 양철지붕 끝
처마에 챙을 단 집이 있었다
집안을 가리고 남은 여분이 살짝
밖으로 뻗어나와 만든 품,
하교길에 소낙비를 만나선
급한 마음에 우당탕탕 그 속을 비집고 든 적이 있는데
―「챙」 부분
요듬 텔레비전 광고에도 비 오는 거리에서 당하는 난감함이 자주 등장한다. 우산 없이 간 학교에서 비를 맞으며 돌아와야 하는 난감함. 어린 날의 시인은 기다리지 않고 뛰어오는 편을 택한 것 같다. 그러다가 반갑고 고마운 ‘품’을 만난다. 남의 지붕 옆으로 살짝 나와 있는 처마의 챙.
시인은 급한 마음에 그 품으로 뛰어들고, 아주 작은 여분이지만 그 여분이 만드는 고마운 공간에 감사를 느꼈을 것이다. 인용한 시는 전반부로 그 자체로 하나의 느낌이고 깨달음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비 오는 날의 난감함과, 그 난감함으로부터 시인을 구해주었던 작은 배려에 대한 기록일 수 있다는 말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은 작은 것이다. 살짝 삐져나온 챙. 그 챙을 만들 수 있는 마음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었고, 그 아름다움에 시인은 적지 않은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마음과 마음의 번짐이다.
이 시의 후반부는 더 재미있다. 인용하지 않고 글로 설명하겠다. 챙 밑에는 먼저 뛰어들었을 누나가 있었다. 어릴 적에는 같이 뛰어놀았던 누나일 수도 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고는 왠지 거리감이 느껴지고, 가끔 만나면 마음이 들썩이는 누나일 수도 있다. 그 누나는 새초롬한 얼굴로, 비를 피하고 있었는데, 비를 맞아 섬연하게 드러난 몸매와 그 몸 위로 떠오르는 하얀 김이 묘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시인은 어색해졌을 것이고, 자신도 가쁜 숨을 고르며 역시 하얀 김을 피워 올렸을 것이다.
하얀 김들은 그들이 토해 내었을 숨과 함께 뒤섞이며 공중에서 묘한 얽힘을 보여준다. 시인은 더운 살 냄새도 번져왔다고 했다. 김, 숨, 향이 번져가면서 혼합되는 풍경은 상당히 에로틱한 정서를 자아내었을 것인데, 시인은 그 과정을 ‘마구 휘감겨들고’ 또 ‘비벼댄’다고 표현했다. 서로 번져가는 열기인 셈이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반부는 누군가의 배려로 만들어진 마음의 자리이고 후반부는 그 마음의 자리에서 무늬를 이루면서 엉켜 갔던 은밀한 기억들이다. 시인은 챙 밑의 공간을 ‘뭉긋이 흘러내려 깊어진 마음의 기울기’라고 표현했다. 두 사람은 짧은 시간, 좁은 공간에서도 나눌 것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은밀한 생각에 불과할지라도, 세상의 어느 곳은 그러한 느낌이 기울어지며 교류되는 공간인 셈이다.
손택수의 상상력은 물결치던 퍼져가는 파문의 모양을 닮았다. 그에게 아름다움은 동심원을 이루면서 여기저기로 밀려나고 전달되는 어떤 것이다. 그에게 은밀한 기억과 고마움은 서로 교류되는 것이고, 세상 구석구석으로 파고들어 뒤섞이는 것이다. 마치 연못에 떨어진 비가 물결을 만들고, 그 아름다운 무늬로 파장이 밀려가듯이 말이다.
「연못에만 오는 비」는 손택수의 시적 상상력을 풀어내듯 설명한 시이다.
저 한 방울의 빗물처럼
나의 말도 너의 가슴
어느 한복판에 떨어지기라도 한 것인가
수면을 건드리고 톡! 튀어올랐다
가라앉기라도 한 것인가
그래 비가 오는군
물기슭까지 밀려온 파문에 밑동을 흔들린 듯
버드나무 잎이 한 장 떨어지는 것이다
―「연못에만 오는 비」 부분
시의 후반부를 옮겨 왔다. 보다 다듬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손택수의 시적 목표와 취향이 두드러진 부분이 아닐까 해서 인용한다. 시의 전반부를 보면 연못에 이는 파문을 시인이 보고 옆 사람에게 말해주는 대목이 있다. 옆 사람은 하늘을 바라보고, 웬 뚱딴지같은 말을 하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시인은 물결을 보았고, 무언가가 연못에 파문을 일으킨 것을 알았다. 그것이 비가 왔느냐 오지 않았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만일 연못이 세상이라면 어떨까. 우리는 무언가가 파문을 일으키는 광경을 보게 된다. 그 광경을 목격한 이가 시인이라면 그 광경을 시로 옮길 수도 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이가 마음씨 좋은 이라면 챙을 더 넓게 지을 수도 있다. 별빛의 뜨락을 만들어주고 싶은 이라면 별빛이 세상에 일으키는 빛의 파문을 더 일찍 그리고 더 넉넉하게 만들어주고 싶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말과 표정과 행동과 아름다움은 세상에 무늬를 일군다. 그 무늬는 누군가의 내부로, 세상의 구석으로, 시의 심층 언어로, 아름다움의 자질로 바뀌어, 목격되고 기억되고 저장되고 때로는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되고 소중하게 간직될 것이다. 「연못에만 오는 비」는 누군가의 착각이지만, 그 착각은 아름다운 착각이고 세상을 이롭게 자신을 견실하게 만드는 착각이다. 이런 착각은 많이 있어도 괜찮을 듯하다.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시가 바로 이러한 착각이다. 문제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착각인가, 아니면 더욱 혼란하고 누추하게 만들 착각인가이다.
3.
「앙큼한 꽃」과 「구층탑」은 두 갈림길을 보여주는 시이다. 「앙큼한 꽃」만 인용해보자.
이 골목에 부쩍
싸움이 는 건
평상이 사라지고 난 뒤부터다
평상 위에 지지배배 배를 깔고 누워
숙제를 하던 아이들과
부은 다리를 쉬어가곤 하던 보험 아줌마,
국수내기 민화투를 치던 할미들이 사라져버린 뒤부터다
평상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동백 화분이 꽃을 비웠다
평상 몰아내고 주차금지 앙큼한 꽃을 피웠다
―「앙큼한 꽃」 전문
평상이 차지하던 공간에 누군가가 소유권을 명시하는 화분을 가져다 두었다.(이 화분이 동백이라는 점은 조금 아이러니하다.) 물론 평상은 사라졌을 것이다. 평상은 누군가의 개인 소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평상이 있었을 땅의 주인은 이제 그 땅을 남을 위해 쓰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주인을 나무랄 수 없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차를 사고 있고, 이제 차를 가진 사람이 안 가진 사람보다 많은 세상에서, 그 주인에게만 차를 사지 말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주인도 세상의 흐름에 맞추어 차를 샀고, 세상의 상식에 맞추어 평상을 거둬들이고 대신 주차 공간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 작은 선택이 마을의 작은 혼란을 가져온다. 애들은 쑥덕거리며 숙제할 공간을 잃었고, 지친 보험 아줌마들은 쉴 곳을 잃었다. 할머니들은 모여서 놓을 공간을 따로 찾아야 했다. 이제 그 자리는 아름다운 동백 화분이 당당하게 차지하게 되었다.
앞의 시 「동백꽃」을 상기해 보자. 물론 임의적인 비교이지만, 「동백꽃」의 동백은 봄이 오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식물’이었고, 세상의 아름다움이 번져가는 순간을 목격하는 미적 결정체였다. 하지만 이 동네의 동백은 사람들의 미움과 독선과 이기심을 증명하는 애물단지에 불과하다. 앞에서 말한 갈림길로 말하면 세상을 더욱 누추하고 비좁고 아름답지 못하게 만드는 착각이다. 이 동백은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불화를 번지게 하는 마음의 파문인 셈이다.
반면 「구층암」은 다르다. 이 시는 인용하지 않고 개요만 설명하겠다. 「구층암」은 처마 기둥 아래 새집을 보고 지은 시이다. 시인은 ‘처마 아래 기둥이 움푹 패었다’고 말했다. 제목을 염두에 두면, 절벽을 비유한 것 같기도 하지만, 일단 집의 기둥이 움푹 패었다고 이해하자. 파인 곳에는 새들과 그 새끼들이 살고 있다.
시인은 걱정을 한다. 이 엄동설한에 어떻게 새끼에게 먹일 먹이를 구할까라고. 연민의 정서가 가득하다. 또 시인은 아름다운 선택을 한다. 새들을 위해 기둥을 수리하지 않기로. 왜냐하면 나무 기둥이 패여 위험하기는 하지만, 새들도 당당한 입주자로서 살 권리가 있다고 용인했기 때문이다.
새들과 같이 살아본 사람은 새들과 같이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고 있다. 시끄럽고 지저분하고 집안에는 벌레들이 들끓는다. 시에서는 계절이 겨울이라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여름이 되면 냄새도 엄청나게 풍긴다. 기둥이 무너질 위험이 없다고 해도, 당장 없애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데 시인은 꾹 참는다. 아니 아름다운 인정과 은혜를 베풀고 있다.
시인은 아름다운 착각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시인은 새의 마음이 되어, 세상을 보고, 위험한 기둥이지만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평상을 없애는 마음과 새집을 위해 참는 마음, 두 마음은 기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 단지 한쪽은 누군가에게 번져갈 자신의 마음을 보지 못한 경우였고, 다른 한쪽은 나에게 들려오는(퍼져오는) 소리를 외면하지 않은 경우였다.
4.
늘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노력은 섬뜩한 마음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나무 뿌리가 하수도
관을 뚫고 들어간다
드르르르 드릴처럼
뚫고 들어간 뿌리가
오물들을 빨아들인다
부글부글 끓어대는 거품들.
뿌리에 태아가 걸리고
실종된 누군가의 팔 한짝이 걸리고
눈을 파 먹힌 고양이가
걸리기도 한다
나뭇잎의 푸르름은 고통의 빛깔
걸러내고 걸러내다 지쳐
으윽 윽 게워내는 초록
나무가 광기로 번뜩이는 걸
아무도 알지 못한다
―「나무는 광기로 푸르다」 전문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금방 알지만, 나무는 인내력이 무척 강하다. 나무는 세상의 많은 번잡한 것들의 스승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조용하고 웬만해서는 아픔이나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묵묵한 적요 속에서 항상 명상하며, 무언가 부족하고 무언가 잘못된 것들을 치유한다.
「나무는 광기로 푸르다」의 나무도 그러하다. 나무는 이 세상의 낮은 곳에 뿌리를 내려 그 안을 정화하려고 한다. 이 시의 중간 시행들은 다소 비현실적이다(거품, 태아, 팔 한짝, 고양이 등). 헐리우드 영화에서 보았음직한 광경이 다소 이물감을 준다는 뜻이다. 그러나 시인의 의도는 이 세상의 잘못된 착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비정상적인 질서, 헛된 탐욕, 이기심 등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복잡함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무는 세상을 치유하려고 한다. 묵묵히 버려진 것들을 거두고 자신의 몸으로 흡수하려 한다. 더러운 것을 자신의 내부로 번져오게 함으로써,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만 남아있게 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그러나 곧, 나무도 지치고 만다.
이 시가 충격적인 것은 ‘나무의 지침’을 초록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신록을 보면서 생의 환희를 느낀다. 아름다움의 원천이라고 믿고, 하늘의 이법을 담은 신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인은 그것은 나무들의 구역질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증오로, 무엇보다 악에 받친 광기로 읽어낸다. 이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다행인 것은 나무들의 광기가 초록빛으로 묻어나온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광기의 색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초록빛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곰소는 소금입니다 젓갈맛의 유명세 뒤에 숨어서 은근히 젓갈을 익히는 소금맛입니다 옛날 선운사에 한 스님이 사셨는데, 이 스님이 의지할 데 없이 떠도는 火賊떼를 끌어모아 제염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화적떼였으니 얼마나 이글거렸겠습니까 어마 뜨거라 살이라도 데일까 모다들 멀리멀리 피해 다녔겠습니까 그런데 스님은 그 이글거리는 불을 끄지 않고 살려 더 부채질을 했습니다 타오르기로 했으면 제대로 타올라라 저 바다를 통째로 불살라 버려라 바닷물이 하얀 재가 되어 사라져버릴 때까지 다비식을 치루고 떠난 스님은 참 바다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어쩌면 스님도 화적떼의 불길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태워버리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하얀 사리알이 되어 살과 뼈가 통째 짓물러터지는 이 땅을 짭조름하게 버무려주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곰소에 한 번 가보셔요 화적떼 같은 열기를 품고 염전 옆에서 젓갈에 빼빌빼빌 밥이라도 한 번 비벼 드셔 보셔요 세상엔 참 이렇게 짜디짠 열반도 있구나 싶을 것입니다 골코롬한 젓갈맛이 성스럽게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聖젓갈」
「나무는 광기로 푸르다」가 초록색에 관한 시였다면, 「聖젓갈」은 붉은 색에 관한 시이다. 「나무는 광기로 푸르다」가 초록이 가진 생명의 환희를 끔찍한 악몽으로 바꾸었다면, 「聖젓갈」은 공포의 화염을 인자한 희생으로 바꾸고 있다. 특히 이 시를 보면 젓갈의 붉은 색과, 화적(火賊)떼의 붉은 이미지와, 붉은 불꽃의 인자함과, 불꽃 속에서 산화하는 거룩함이 온통 뒤섞여 있다.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세상은 소금을 얻고, 젓갈을 얻고, 맛있는 밥을 얻고, 옛 이야기 속의 도적은 감화를 얻었다. 누군가의 희생은 세상을 짜게(이 시에서 짜다는 것은 이롭다는 뜻이다) 만드는 힘이었다.
다시 나무의 희생을 생각하자. 더 거슬러 올라가면 별빛의 산책을 위해 밤의 뜨락을 내준 마을 사람들을 생각하자. 비를 피할 수 있는 챙을 만든 사람과, 평상을 제공했던 사람과, 새와 새끼들의 안위를 돌보았던 사람을 생각하자. 그들은 서로에게 마음을 나누어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언어는 물결치는 마음의 무늬로 서로에게 전달되었다.
손택수의 시는 그 마음의 무늬를 찾아 옮겨오는 행위이다. 그의 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번져가는 마음의 문양을 어루만져, 시의 언어로 다시 묻어나게 하는 중계 행위이다. 그의 시가 아름답고 또 존중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시가 명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행가가 될 시도 있어야 하겠지만, 시의 깊이는 명상이 가능할 때 달성된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가 세상의 복잡함을 그대로 닮는 것보다는, 세상의 복잡함을 넘어서는 근원적인 힘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시의 언어가 차갑고 냉정해야 하지만, 그 안에 온기가 있어야 하고, 그 밑자리에 세상살이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같은 이유이다. 손택수의 시가, 차가운 언어가, 지나치게 득세한 세상에서 좋은 시의 무늬를 이루기를 바라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김남석․
1973년 서울 출생
․199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 비평의 교향악 등
․부경대 교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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