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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신작시/신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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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
흘러 다니는 그림자들
사람은 없고 사람 그림자만 돌아다닌다
그림자들이 검은 자루처럼 밑으로 쳐진다 혹은
고무줄처럼 자유자재로 늘어나기도 하고 형체를
바꾸기도 한다 벽이나 문지방에 붙어있기도 한다
가만히 보라
이슥한 저녁, 주체할 수 없어 쓰러지는
벽들을 떠받치는 것들은 모두 그림자들뿐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자신의 주인들 몰래
서로 몸이 바뀌기도 한다 그러나 주인은 모른다
혹은 주인이 잠자리 들 때 몰래 탈출하기도 한다
그림자가 출몰하는 곳에선
늘상 그림자들끼리 주인을 팔아치우기 위해서
암거래가 이루어진다 그림자들도 같은 부류끼리
끼리끼리 뭉쳐 다닌다 보았는가 거리를 떠도는
그림자들은 동작이 민첩하다
그림자들은 모의하여, 자신의 주인을 멀리
추방시키기도 한다 한때의 권력이 되었던 주인은
위기의 벼랑 앞에서 최후의 목격자인 자기 그림자 앞에
두 무릎을 꿇을 때 있다
지금 네 옆을 돌아 보라 그림자들이 침묵으로 네게 반란한다
시체농장
테네시 주,
시체농장이 있다. 타일러 오브라이언 교수가 설립한
생물인류학과 시체농장엔 임자 없는 시체들
지금 신선한 발효를 꿈꾸고 있다.
어떤 죽음이 더 잘 썩는지
어떻게 살다 죽은 목숨이 더 오래 남아 향기로운지 실험을
위한 연구소가 있다.
뼈와 살 뭉크러져 퇴비를 꿈꾸는 시체,
바오밥나무 고픈 배 먹여주는 시체,
채마밭 푸성귀로 푸른 척추 꼿꼿이 펴고 싶은 시체,
붉은 수수밭 노을이 되고 싶은 시체,
치솟는 욕구 놓아버리고 되도록 평평해지고픈 시체,
잘 익은 한줌 고요가 되고픈 시체,
타일러 오브라이언 교수는
인간의 창조적 부활에 대해 연구한다.
죽음의 늪에서
얼마나 생명을 풍성하게 재배해야 할지 고찰한다.
우리는 더욱 더 잘 썩는 연습 위해
날마다 신성한 식탁 앞에서 세끼 죽음을 뜯어먹고
세포가 쑥쑥 터져오른다 되도록 잘 숙성된
타자의 죽음을 먹고
싱싱하고 탐스러운 꽃과 열매를 폭죽처럼 터트린다.
신지혜․
서울 출생
․2000년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 2002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현재 미국 뉴저지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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