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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신작시/여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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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15회 작성일 08-02-29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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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천


局外者․2


종탑에서 빛이 흘러넘치는 때면
나는 이런 말을 곧잘 노트에 쓰곤 했었다
부끄러워하라
부끄러워하라
너무 하얘진 얼굴과
여지없이 들이닥치는 방문과 위로마저

종탑은 낡았고 빛은 희미했다
사람들은 가벼운 신발을 신고 이곳을 떠났다

달콤한 사과처럼 익어가는 시간은
그대에게로 가는 엽서에도 있어서,
나는 또 이런 말을 기어코 찾아 지우기도 했는데
수상한 말들의 씨
들키기라도 할까봐 내내 불안했다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마음의 역병과 저 펄럭거리는
희고 누런 빨래들이
넘치는 하수구와 집집마다 솟은 굴뚝이

그리고 내다버린 저 검은 비닐봉지들
수백 년 동안 이곳의 아이들이 그렇게 사라졌고
앞으로 부끄럼 없이 걸어갈 것이다



복면의 계절


이웃집 사내가 잎을 땄다
동네에서 마지막 남은 잎이었다
그러자 나무들이 하나둘씩 밀려오더니
골목을 만들었다
나무들이 한 줄로 서서 가등행렬을 하는 것 같았다
나무들은 말이 없었으나
긴 가지로 서로를 위협했다

이맘때면 사람들은
남쪽 멀리 있는 친척들에게
초록잎을 부쳐달라고 편지를 했지만
소식은 없었다

사람들은 복면을 한 채
플라스틱 잎을 나무에 매달았고
저녁이 되면 동네를 걸어 다녔다
누구누구 집에 떨어지지 않은 열매가 있나
감시하기 위해서라고
땅속에 머리를 처박은 잎들이 수군거렸다

멀리 혹은 가까이 있는 나무들이
마을의 것이 아님을 알았으나
바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나무와 우리가 같은 색의 옷을 입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태천․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론집 󰡔김수영의 시와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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