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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신작시/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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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
너에게 보내는 편지
베티, 사진 속 자유로운 미소를 짓는 내 모습에 많이 놀랐겠지 좀처럼 네 옆에서도 웃지 않던 내가 어떻게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느냐고 어떻게 그렇게 밝을 수 있느냐고 너는 묻겠지 그저 웃으며 여기는 인도잖아라고 대답한다면 너는 이해할 수 있을까 인도에 온 지 며칠 동안 나는 불면증에 시달렸지 그토록 그리워했던 인도인데 나의 몸은 이미 인도에 왔는데 내 마음은 인도에 있지 못했어 인도라는 것이 도무지 느껴지지 않았지 내가 꿈꿔왔던 인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내가 잘못 집은 것은 아닐까 머릿속에서만 존재했던 인도가 실존할 것이라 착각했던 것은 아닐까 무작정 다울라타바드로 향했어 이슬람의 어느 폭군이 수도를 옮기기 위해 수많은 민중을 강제 이동시키고 요새를 만들었던 곳 지금은 그저 관광객의 발길만이 닿는 곳 아무 생각 없이 요새에 올랐지 힘들면 쉬고 쉰 후엔 다시 걸어 올랐지 넓은 평지 위에 우뚝 솟은 요새 한 시간여 만에 정상에 다다랐지 그곳에는 나보다 먼저 자리 잡은 일행이 있었지 소풍 나온 중학생 녀석들 40여 명과 담임선생님 한 분이 계셨지 자기네들 무리를 비집고 외국인 한 명이 들어왔으니 그 녀석들도 놀라움 반 호기심 반으로 나에게 다가왔지 어느새 그 녀석들은 나를 둘러싼 채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어 나는 바위에 앉아 그네들의 귀여운 질문에 대답해주었지 같이 사진도 찍고 노래도 부르고 그러다 문득 어떤 녀석이 한국 노래 하나를 불러 달라는 거야 나는 망설였지 어떤 노래가 좋을까 그러다가 아직 정하지도 않았는데 내 입에서는 노래가 흐르기 시작했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한국에서는 한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노래였지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이들의 모든 눈망울이 나의 입과 눈과 노래에 집중되고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노래는 나른한 오후의 공중으로 퍼졌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세상 모든 침묵이 그곳에 존재했지 어디선가 불어오던 싱그러운 바람 그 바람이 막 노래를 끝낸 내 볼을 스치는 순간 깨달았지 아 이 바람이 인도구나 이 하늘이 인도구나 이 침묵이 이 태양이 인도구나 이 80개의 검은 눈이 인도구나 내 입에서 흐르던 노래가 인도구나 내 목에서의 울림이 인도구나 내 볼을 타고 흐르던 상쾌한 공기가 바로 인도구나 몇 초간 눈을 감았지 눈을 열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았어 아이들의 손뼉 소리는 아득해져만 가고
그렇게
그렇게 인도는 나를 찾아왔어
언젠가의 너처럼
베티, 그런데 넌 어디에 있니
내 죽음에 대해 들려줄까 베티,
그 시절 나는 쓸모없는시 한 편만큼 그래 그만큼으로도 존재하지 못했어 태양이 진 하늘은 여전히 핏빛이었고 베티, 바깥에서는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지 그 소리 그 소리를 못 참겠는 거야 머리를 쪼아대는 베티, 땅속 깊이 박히고 싶었어 나는 후훗, 유리창을 열고 뛰어내렸지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고 베티, 하늘은 여전히 핏빛이었어 나는 죽었을 테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나를 소재로 시를 쓰기 시작했지 베티, 아아 사람들은 모래가 된 나를 서걱서걱 씹어대며 핏빛 하늘 아래 목이 메어 버렸고 드디어 베티, 나는 존재하게 된 거야 베티,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던 내 시들과 함께 나는 비로소 존재하게 된 거야 웃기지 않니 베티, 그런데 베티,
넌, 넌 어디에 있니, 넌 도대체 어디에
어디에 있는 거니,
하늘은 여전히 핏빛인데 네 모습이 보이지 않아 죽질 못하겠어
이 성(본명 김성식)․
부산 출생
․2001 ≪생각과느낌≫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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