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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문화산책/함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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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721회 작성일 08-02-27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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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산․책


【연재】원작이 있는 영화 ⑦


도시 속 유목민-되기, 혹은 그 가능성

함종호|문학평론가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김중식의 시 「이탈한 자가 문득」 중에서



휴일은 불편하다. 익숙지 않은 집안일을 돌봐야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불안감,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 때문이다. 우리는 노동과 여가로 구조화된 삶을 살아간다. 이미 주어진 상황 속에서 미리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는 노동과 달리 여가는 자신 스스로가 의미 부여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 향유해야 한다는 점에서 좀더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와 시간이 주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삶의 대부분을 노동을 하며 지내는 우리는 노동에는 어느 정도 익숙하지만 주어진 여가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는 일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 여가가 주어진 휴일, 무의식적으로 TV를 보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할 때, 혹은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원인 모를 허무감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그것은 ‘존재론적 피로’에 사로잡힌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를 레비나스는 ‘내가 자기 존재를 떠맡고 있기가 어려워 생기는 피로, 권태, 무기력’ 등으로 설명한 바 있다. 사실 그가 말한 피로, 권태, 무기력은 지치고 가난한 영혼을 소유한 자들의 전유물이다. 노동과 여가(휴일)로 구조화되어 있는 삶의 모습이 그들의 경우에는 육체적 노동과 존재론적 피로가 휴일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삶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휴일은 육체적 노동과 존재론적 피로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인지도 모른다. 어떤 형태로든 세상의 온갖 것들은 노동과 존재론적 고뇌를 함축하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보라. 하물며 나뭇잎의 가냘픈 흔들림에서 저 머나먼 시베리아 들판을 질주해온 바람의 존재론적 피로를, 신호 대기 중인 자동차에서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자동차 엔진의 떨림과 같은 존재론적 피로를 우리는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존재론적 피로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을까? 존재론적 피로 속에서 우리는 보다 아름다운 곳을 동경하게 되고, 그곳을 향해 현존 자체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고 말한 사람도 역시 레비나스였다. 존재론적 피로로부터 비롯된 이러한 여행은 떠나기 위한 떠남이며, 정박하려 하지 않는 떠남이다. 그러므로 위의 물음은 존재론적 피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여행, 그 떠남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휴일 오전, 내가 집을 나서게 된 것은 우선 그 존재론적 피로 때문이었고, 다음으로는 간밤에 본 영화 <오발탄>(유현목 감독, 1961년) 때문이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하릴없이 누워 있는 내 얼굴을 비추기 시작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을 짓눌러 올 때, 간밤에 본 영화 속 인물 철호의 낡은 구두가 떠오른 것은 왜일까? 그는 그 낡은 구두를 신고 전후 서울의 거리를 걷고 또 걷고 있었다. 그의 낡은 구두가 정처 없는 떠남을 상징한다면, 신발을 갖고 싶어 하는 철호의 딸과 그녀에게 신발을 사주겠다고 약속하는 영호가 그토록 신발에 집착하는 것 또한 떠남에 대한 갈망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철호로 하여금 전후 서울의 거리를 걷게 만든 존재론적 피로는 무엇이었으며, 나로 하여금 그야말로 평안한 휴일 오전, 거리로 뛰쳐나가게 한 존재론적 피로는 무엇이었을까?
문밖을 나서려는 나에게 아내는 “어디 가요?”라고 묻는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특별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왜 집을 나서는지에 대해서 그녀를 납득시킬 만한 마땅한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득 영화 <오발탄>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무서운 굉음을 내며 날아가는 전투기 소리에 놀라 어머니는 “가자! 얘야! 어서들 짐을 싸고 맞으렴. 저 양떼를 따라 가야지. 모두들 모두들 푸른 곳으로 가는데. 얘야!”라고 외친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을 굳이 설명하자면, 한가로이 양떼들이 풀을 뜯고 노니는 푸른 초원 같은 곳은 아닐까? 날 억누르는 존재론적 피로로부터 벗어나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집을 나섰지만 골목길에 길게 늘어선 담장을 보면서 내 가슴은 이내 다시 답답해졌다.
혹 ‘땅 따먹기’ 놀이를 기억하는가? 납작한 돌을 손가락으로 튕겨 그 돌이 놓여진 자리마다 선을 그어 타인보다 자신의 영역을 더 많이 구획하여 차지하면 이기는 놀이 말이다. 이때 그어진 선은 텅 빈 공간을 영토화시켜 ‘홈 패인 공간’을 만든다. 골목길 여기 저기 높이, 그리고 길게 세워져 있는 담은 집과 집 사이를, 혹은 집과 길 사이를 나누고 구획한다. ‘땅 따먹기’ 놀이에서 그어진 선이 텅 빈 공간을 영토화시켜 ‘홈 패인 공간’을 만들 듯이, 집과 집 사이, 집과 길 사이에 세워진 담은 텅 빈 공간을 구획하고 영토화하여 집이라는 ‘홈 패인 공간’을 만든다. 담을 통해 영토화되고, 홈 파이게 된 집은 비로소 그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된다. 가족 구성원들 간의 일체감, 동일성 등의 형성이 그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가족 구성원들 상호간의 역할과 지위가 또한 결정된다. 철호의 존재론적 피로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즉 ‘홈 패인 공간’인 집 안에서 요구되는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과 지위가 자신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기제로 작용할 때 생겨난 존재론적 피로가 철호로 하여금 무작정 거리를 걷게 한 것이다. 영화 <오발탄>의 동명 원작소설(이범선 작, 1959년)에서는 철호를 억압하고 구속하는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들 구실. 남편 구실. 애비 구실. 형 구실. 오빠 구실. 또 계리사 사무실 서기 구실. 해야 할 구실이 너무 많구나. 너무 많구나. 그래 난 네 말대로 아마도 조물주의 오발탄인지도 모른다. 정말 갈 곳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건 가긴 가야 한다.

떠남이 어떤 출발점을 전제로 한다고 할 때, 나의 경우에 떠남은 집이라는 한계 공간으로부터의 떠남이었다. 철호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철호의 떠남은 가족 구성원들이 놓여 있는 상황, 즉 넋 나간 어머니가 주문을 외듯 “가자! 가자!”를 외치는 상황, 동생 영호가 은행 강도가 되어 경찰에 붙잡힌 상황, 아내가 아이를 출산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상황으로부터의 떠남이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는 집은 ‘홈 패인 공간’이며, 그렇기 때문에 집은 가족 구성원들에게 특정한 역할과 지위를 강요함으로써 억압하고 구속한다는 점을 살펴본 바 있다. 철호에게 주어진 ‘아들 구실, 남편 구실, 애비 구실, 형 구실, 오빠 구실, 계리사 사무실 서기 구실’ 등의 역할들은 그가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많다. 더욱이 이러한 역할을 그는 충실히 수행하고자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한계 상황(넋 나간 어머니, 은행 강도가 된 동생, 아이를 출산하다 죽은 아내)에 봉착해서는 정작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을 때, 이때 느껴지는 절망감과 허무감은 그로 하여금 존재론적 피로에 휩싸이게 하기에 충분하다.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무엇도 할 수 없거나, 혹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 철호가 바로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며,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오발탄’이라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 철호는 자신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집 안에서의 여러 역할을 수행하느라 늘 지쳐 있다. 사무실이나 집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과 치통 때문에 간간히 그가 짓곤 하는 찡그린 인상이 그의 피로를 짐작케 한다. 그가 계리사 사무실에서 받는 보수는 그의 가난을 떨쳐버리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계리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사무실과 집을 오가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주어진 삶의 전부인 양. 그는 ‘홈 패인 공간’ 안에서의 전형적인 삶을 살아온 것이다. 소설 속 철호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는 집 안에서 문득 “걸레 썩는 냄새”를 맡으며, ‘미라’와 ‘어머니’를 동일화시킨다. ‘걸레 썩는 냄새’를 맡고, ‘미라’와 ‘어머니’를 동일화시키는 그의 행위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역할을 강요함으로써 자신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집에 대해 그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그에게 있어서 ‘홈 패인 공간’으로서의 집은 그 어떠한 유기적 흐름도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썩고 있는 공간으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철호와 달리 영화 속 영호는 전후 서울 이곳저곳을 비교적 박력 있고 활달한 걸음으로 누비고 다닌다. 철호의 활동 범위는 집과 사무실로 극히 제한되어 있는 데에 반해, 영호의 활동 범위는 다방, 영화 촬영장, 술집, 설희의 집 등 철호에 비해 매우 광범위하다. 원작소설과 영화 <오발탄>이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에서는 영호가 매우 비중 있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다방, 영화 촬영장, 술집, 설희의 집 등지에서 영호가 만나는 사람들, 혹은 그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소설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철호가 ‘홈 패인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전형을 보여준다면, 영호의 삶의 모습은 그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셈인데, 영화에서는 바로 이러한 영호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골목을 빠져나와 나는 어느덧 큰 길 사거리에 이르렀다. 반듯하게 정돈된 길의 모습이나, 도로를 사이에 두고 네모난 건물들이 일렬로 길게 늘어져 있는 모습은 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는 전형적인 ‘홈 패인 공간’이다. ‘홈 패인 공간’은 ‘국가 장치’에 의해 강제적으로 구획되고, 통제된다. 여기서 ‘국가 장치’란 어떤 것이든 규칙적이고 동일한 것으로 통합하여 제도화시키고 동일성을 부여하는 힘을 말한다. 가령, 그것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보도블록의 모양과 색깔을 일치시키고, 도로를 일정하게 구획하고, 교통 신호 체계를 세운다. 그러므로 만약 ‘홈 패인 공간’으로부터의 이탈을 꿈꾸는 자가 있다면, 그는 ‘국가 장치’가 지닌 강력한 통제로부터의 이탈, 즉 ‘국가 장치’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
영화 <오발탄>에서 철호와 영호는 단 한번 대립한다. 이들의 대립은 표면적으로는 도덕과 윤리의 문제로 귀결된다. 다시 말해 도덕과 윤리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철호와 도덕과 윤리를 저버릴 용기를 갖는다면 더 윤택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영호의 대립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대립에 있어서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들이 살아가는 현실, 즉 ‘홈 패인 공간’에서 이미 정해진 삶의 양식으로 살아갈 것인가(철호), 아니면 정해진 삶의 양식을 강요하는 ‘홈 패인 공간’으로부터의 이탈을 모색할 것인가(영호)의 문제인 것이다. 영호가 ‘홈 패인 공간’으로부터의 이탈을 모색하는 인물인 이유는, 제도화한 법과 도덕의 힘으로 ‘홈 패인 공간’을 통제하는 ‘국가 장치’에 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라고 좀더 넓은 테두리, 법률선(法律線)까지 못 나가란 법이 어디 있어요. 아니 남들은 다 벗어던지구 법률선까지도 넘나들면서 사는데, 왜 우리만이 옹색한 양심의 울타리 안에서 숨이 막혀야 해요. 법률이란 뭐야요. 우리들이 피차에 약속한 선이 아니야요?

‘국가 장치’에 의해 규범화되고 제도화된 법질서 체제에 대해, 원작소설에서 영호는 위와 같이 의문을 품고 저항한다. 영호의 이러한 태도는 ‘국가 장치’를 ‘허수아비’로, ‘국가 장치’에 저항하고 그것으로부터 이탈하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을 ‘까마귀’로 상징화시킨 “까마귀는 허수아비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담론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소설과 영화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모습이기도 하다. 바로 이점 때문에 영호는 유목민의 모습을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의 개념을 빌린다면, 유목민은 다른 삶의 영토, 다른 삶의 가치, 다른 사유를 추구하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국가 장치가 구획하고, 획일화하고, 제도화한 기존의 가치와 규범을 전복시키는 전쟁을 수행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활동이나 사유를 행한다. 또한 그들은 기존의 신분적인 질서나 지배에 반하는 새로운 관계를 지향하고, 그들의 경제적 태도는 계산과 교환에 의해 구조화된 경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증여의 경제, 선물의 경제를 추구하며, 절약과 축적이 아닌 낭비의 체제를 따른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유목민의 이러한 특징적 모습을 영호에게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즉, 영호가 은행을 터는 행위는 기존의 가치와 규범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가장 강렬한 행위에 다름 아니다. 한편 소설에서는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지 않지만, 영화에서 영호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위에 놓여 있는 상이군인들과 주로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양공주로 나선 동생 명숙에게도 철호와는 달리 따뜻한 시선을 주고 있다. 이들은 흔히 주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가 추구하는 인간관계의 모습은 기존의 신분질서 내지는 인간관계와는 다른 양상을 띤다고 보이며 바로 이 점으로 말미암아 그는 유목민의 삶의 태도와 많이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호의 경제적 태도 또한 유목민의 그것과 닮아 있다. 영호의 경제적 태도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철호가 지닌 경제적 태도를 살펴보자. 그는 치과 진료를 받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하는 사환의 충고도 듣지 않고, 치통으로 고생하면서도 월급봉투를 고스란히 들고 들어와 아내에게 건네준다. 또한 그는 월급도 받았으니 함께 놀다 들어가자는 사무실 여사원의 유혹도 이미 뿌리친 상태이다. 이러한 장면들은 소설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들 장면을 통해 영화는 철호의 경제적 태도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대비되는 영호의 경제적 태도를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철호의 경제적 태도는 그의 직업(계리사 사무실 직원)이 상징하는 바처럼, 계산과 교환에 의해 구조화된 경제적 태도, 절약과 축적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경제적 태도를 보여준다. 즉, 철호는 정착민들이 지닌 경제적 태도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영호는 영화 서사가 전개되는 내내 친구들을 대접하고, 조카에게 신발을 선물하며, 신문 파는 막내 동생에게 돈을 건네주는 등 돈 씀씀이가 철호에 비해 매우 헤프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증여의 경제적 태도, 낭비의 경제적 태도를 취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영호는 유목민들이 지닌 경제적 태도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원작소설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영호를 강조함으로써 이 영화가 목적하고 있는바 또한 영호의 삶의 양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과연 창조적인 유목민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과 관련이 있다. 영화 <오발탄>의 이러한 방향성은 이 영화의 형식적 측면의 특징을 살펴보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이 영화는 형식적 측면의 힘을 빌어 창조적 유목민-되기의 가능성과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보기 전에 좀더 정착민과 유목민의 공간이 지닌 차이를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정착민의 공간은 ‘홈 패인 공간’으로 지칭되는 데에 비해, 유목민의 공간은 ‘매끄러운 공간’으로 지칭된다. ‘홈 패인 공간’과는 달리 ‘매끄러운 공간’은 구획 짓기에 필요한 절대적인 중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사방으로 동시에 넘쳐흐르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매끄러운 공간’은 다중성과 질적 변화를 내재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영화 <오발탄>의 형식적 특징을 이루는 시야심도 화면을 주의 깊게 보도록 하자. 이는 다방 장면, 집 안 장면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시야심도는 복수의 초점거리를 가지고 전경, 중경, 후경을 세밀히 포착함으로써 시각의 다중성을 확보한다. 더욱이 이것은 고정되어 있거나 이동하는 비교적 긴 쇼트인 시퀀스 쇼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가령, <오발탄>의 다방 장면을 보자. 중심인물은 전경이나 중경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후경에서는 나름대로의 행동선과 목적선을 지닌 인물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이들은 모두 시야 심도로 선명하게 포착된다. 다시 말해 시야 심도가 사용된 시퀀스 쇼트 내에서 전경과 후경 사이의 거리는 서로 교차하면서 질적 변화를 일으켜 화면 전체를 통일시킨다. 이처럼 시야심도 화면을 통해 다중성과 질적 변화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이 영화가 ‘매끄러운 공간’에 대한 형상화에 그 방향성을 둔 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나는 지금 버스 정류장 앞에 서 있다. 벌써 여러 대의 버스가 지나갔지만, 나는 그 어떤 버스도 타지 못했다. 무작정 집을 나와 여기까지 왔지만, 내가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 아직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사적으로 버스 정류장 주위를 둘러본다. 거의 매일 아침 이곳에서 버스를 타곤 했지만, 이렇게 여유를 두고 주위를 둘러보기는 처음인 것 같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곳 주변에 인터넷 PC방이 세 군데나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서 있는 쪽에 둘, 길 건너에 하나. 획일화되고, 규범화된 도시, 즉 ‘홈 패인 공간’ 안에 인터넷 PC방이 공존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도시가 정착민의 공간에 가까운 것이라면, 인터넷 매체는 ‘매끄러운 공간’이라 지칭되는 유목민의 공간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매끄러운 공간’은 ‘홈 패인 공간’을 구성하는 ‘국가 장치’와 같은 조직이 필요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 어떠한 구획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공간 전체를 점유할 수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인터넷을 관리하는 조직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인터넷을 통하면 동시에 공간 전체를 점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터넷 PC방이라는 존재를 통해 우리는 도시라는 ‘홈 패인 공간’의 극한에서 ‘매끄러운 공간’이 재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들 공간의 혼합, 이행 등의 양상을 보여준다고 볼 수도 있겠다.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이 혼합, 이행되고 있다면, 우리는 ‘홈 패인 공간’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잠시 미뤄놓도록 하자.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이 혼합, 이행되고 있다면, 이 중 어느 하나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떠남 그 자체가 유목민-되기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호도 나도 떠남을 행했지만, 철호가 유목민이 아니듯이 나도 유목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호는 유목민인 것인가? 그 또한 유목민의 삶의 태도와 많이 닮아 있긴 하지만 유목민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매끄러운 공간’이 ‘홈 패인 공간’이 되는 영토화와 ‘홈 패인 공간’이 ‘매끄러운 공간’이 되는 탈영토화의 과정만이 반복되듯이, 우리는 정착민과 유목민의 사이를 오가며 존재할 뿐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나는 이 떠남의 여정을 되돌리기로 했다. 앞으로도 나의 존재는 정착민과 유목민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을 것이다. 단지 유목이 일깨운 탈영토화의 욕망, 탈주의 욕망을 내 안에 깊이 품고서. 그러므로 영화 <오발탄>에서의 철호의 떠남도 앞으로 계속 진행될 것이다.



【연재】원작이 있는 영화 ⑦


도시 속 유목민-되기, 혹은 그 가능성
함종호|문학평론가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김중식의 시 「이탈한 자가 문득」 중에서



휴일은 불편하다. 익숙지 않은 집안일을 돌봐야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불안감,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 때문이다. 우리는 노동과 여가로 구조화된 삶을 살아간다. 이미 주어진 상황 속에서 미리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는 노동과 달리 여가는 자신 스스로가 의미 부여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 향유해야 한다는 점에서 좀더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와 시간이 주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삶의 대부분을 노동을 하며 지내는 우리는 노동에는 어느 정도 익숙하지만 주어진 여가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는 일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 여가가 주어진 휴일, 무의식적으로 TV를 보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할 때, 혹은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원인 모를 허무감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그것은 ‘존재론적 피로’에 사로잡힌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를 레비나스는 ‘내가 자기 존재를 떠맡고 있기가 어려워 생기는 피로, 권태, 무기력’ 등으로 설명한 바 있다. 사실 그가 말한 피로, 권태, 무기력은 지치고 가난한 영혼을 소유한 자들의 전유물이다. 노동과 여가(휴일)로 구조화되어 있는 삶의 모습이 그들의 경우에는 육체적 노동과 존재론적 피로가 휴일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삶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휴일은 육체적 노동과 존재론적 피로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인지도 모른다. 어떤 형태로든 세상의 온갖 것들은 노동과 존재론적 고뇌를 함축하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보라. 하물며 나뭇잎의 가냘픈 흔들림에서 저 머나먼 시베리아 들판을 질주해온 바람의 존재론적 피로를, 신호 대기 중인 자동차에서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자동차 엔진의 떨림과 같은 존재론적 피로를 우리는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존재론적 피로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을까? 존재론적 피로 속에서 우리는 보다 아름다운 곳을 동경하게 되고, 그곳을 향해 현존 자체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고 말한 사람도 역시 레비나스였다. 존재론적 피로로부터 비롯된 이러한 여행은 떠나기 위한 떠남이며, 정박하려 하지 않는 떠남이다. 그러므로 위의 물음은 존재론적 피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여행, 그 떠남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휴일 오전, 내가 집을 나서게 된 것은 우선 그 존재론적 피로 때문이었고, 다음으로는 간밤에 본 영화 <오발탄>(유현목 감독, 1961년) 때문이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하릴없이 누워 있는 내 얼굴을 비추기 시작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을 짓눌러 올 때, 간밤에 본 영화 속 인물 철호의 낡은 구두가 떠오른 것은 왜일까? 그는 그 낡은 구두를 신고 전후 서울의 거리를 걷고 또 걷고 있었다. 그의 낡은 구두가 정처 없는 떠남을 상징한다면, 신발을 갖고 싶어 하는 철호의 딸과 그녀에게 신발을 사주겠다고 약속하는 영호가 그토록 신발에 집착하는 것 또한 떠남에 대한 갈망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철호로 하여금 전후 서울의 거리를 걷게 만든 존재론적 피로는 무엇이었으며, 나로 하여금 그야말로 평안한 휴일 오전, 거리로 뛰쳐나가게 한 존재론적 피로는 무엇이었을까?
문밖을 나서려는 나에게 아내는 “어디 가요?”라고 묻는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특별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왜 집을 나서는지에 대해서 그녀를 납득시킬 만한 마땅한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득 영화 <오발탄>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무서운 굉음을 내며 날아가는 전투기 소리에 놀라 어머니는 “가자! 얘야! 어서들 짐을 싸고 맞으렴. 저 양떼를 따라 가야지. 모두들 모두들 푸른 곳으로 가는데. 얘야!”라고 외친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을 굳이 설명하자면, 한가로이 양떼들이 풀을 뜯고 노니는 푸른 초원 같은 곳은 아닐까? 날 억누르는 존재론적 피로로부터 벗어나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집을 나섰지만 골목길에 길게 늘어선 담장을 보면서 내 가슴은 이내 다시 답답해졌다.
혹 ‘땅 따먹기’ 놀이를 기억하는가? 납작한 돌을 손가락으로 튕겨 그 돌이 놓여진 자리마다 선을 그어 타인보다 자신의 영역을 더 많이 구획하여 차지하면 이기는 놀이 말이다. 이때 그어진 선은 텅 빈 공간을 영토화시켜 ‘홈 패인 공간’을 만든다. 골목길 여기 저기 높이, 그리고 길게 세워져 있는 담은 집과 집 사이를, 혹은 집과 길 사이를 나누고 구획한다. ‘땅 따먹기’ 놀이에서 그어진 선이 텅 빈 공간을 영토화시켜 ‘홈 패인 공간’을 만들 듯이, 집과 집 사이, 집과 길 사이에 세워진 담은 텅 빈 공간을 구획하고 영토화하여 집이라는 ‘홈 패인 공간’을 만든다. 담을 통해 영토화되고, 홈 파이게 된 집은 비로소 그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된다. 가족 구성원들 간의 일체감, 동일성 등의 형성이 그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가족 구성원들 상호간의 역할과 지위가 또한 결정된다. 철호의 존재론적 피로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즉 ‘홈 패인 공간’인 집 안에서 요구되는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과 지위가 자신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기제로 작용할 때 생겨난 존재론적 피로가 철호로 하여금 무작정 거리를 걷게 한 것이다. 영화 <오발탄>의 동명 원작소설(이범선 작, 1959년)에서는 철호를 억압하고 구속하는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들 구실. 남편 구실. 애비 구실. 형 구실. 오빠 구실. 또 계리사 사무실 서기 구실. 해야 할 구실이 너무 많구나. 너무 많구나. 그래 난 네 말대로 아마도 조물주의 오발탄인지도 모른다. 정말 갈 곳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건 가긴 가야 한다.

떠남이 어떤 출발점을 전제로 한다고 할 때, 나의 경우에 떠남은 집이라는 한계 공간으로부터의 떠남이었다. 철호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철호의 떠남은 가족 구성원들이 놓여 있는 상황, 즉 넋 나간 어머니가 주문을 외듯 “가자! 가자!”를 외치는 상황, 동생 영호가 은행 강도가 되어 경찰에 붙잡힌 상황, 아내가 아이를 출산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상황으로부터의 떠남이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는 집은 ‘홈 패인 공간’이며, 그렇기 때문에 집은 가족 구성원들에게 특정한 역할과 지위를 강요함으로써 억압하고 구속한다는 점을 살펴본 바 있다. 철호에게 주어진 ‘아들 구실, 남편 구실, 애비 구실, 형 구실, 오빠 구실, 계리사 사무실 서기 구실’ 등의 역할들은 그가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많다. 더욱이 이러한 역할을 그는 충실히 수행하고자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한계 상황(넋 나간 어머니, 은행 강도가 된 동생, 아이를 출산하다 죽은 아내)에 봉착해서는 정작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을 때, 이때 느껴지는 절망감과 허무감은 그로 하여금 존재론적 피로에 휩싸이게 하기에 충분하다.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무엇도 할 수 없거나, 혹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 철호가 바로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며,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오발탄’이라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 철호는 자신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집 안에서의 여러 역할을 수행하느라 늘 지쳐 있다. 사무실이나 집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과 치통 때문에 간간히 그가 짓곤 하는 찡그린 인상이 그의 피로를 짐작케 한다. 그가 계리사 사무실에서 받는 보수는 그의 가난을 떨쳐버리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계리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사무실과 집을 오가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주어진 삶의 전부인 양. 그는 ‘홈 패인 공간’ 안에서의 전형적인 삶을 살아온 것이다. 소설 속 철호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는 집 안에서 문득 “걸레 썩는 냄새”를 맡으며, ‘미라’와 ‘어머니’를 동일화시킨다. ‘걸레 썩는 냄새’를 맡고, ‘미라’와 ‘어머니’를 동일화시키는 그의 행위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역할을 강요함으로써 자신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집에 대해 그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그에게 있어서 ‘홈 패인 공간’으로서의 집은 그 어떠한 유기적 흐름도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썩고 있는 공간으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철호와 달리 영화 속 영호는 전후 서울 이곳저곳을 비교적 박력 있고 활달한 걸음으로 누비고 다닌다. 철호의 활동 범위는 집과 사무실로 극히 제한되어 있는 데에 반해, 영호의 활동 범위는 다방, 영화 촬영장, 술집, 설희의 집 등 철호에 비해 매우 광범위하다. 원작소설과 영화 <오발탄>이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에서는 영호가 매우 비중 있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다방, 영화 촬영장, 술집, 설희의 집 등지에서 영호가 만나는 사람들, 혹은 그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소설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철호가 ‘홈 패인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전형을 보여준다면, 영호의 삶의 모습은 그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셈인데, 영화에서는 바로 이러한 영호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골목을 빠져나와 나는 어느덧 큰 길 사거리에 이르렀다. 반듯하게 정돈된 길의 모습이나, 도로를 사이에 두고 네모난 건물들이 일렬로 길게 늘어져 있는 모습은 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는 전형적인 ‘홈 패인 공간’이다. ‘홈 패인 공간’은 ‘국가 장치’에 의해 강제적으로 구획되고, 통제된다. 여기서 ‘국가 장치’란 어떤 것이든 규칙적이고 동일한 것으로 통합하여 제도화시키고 동일성을 부여하는 힘을 말한다. 가령, 그것은 지금 내가 걷고 있는 보도블록의 모양과 색깔을 일치시키고, 도로를 일정하게 구획하고, 교통 신호 체계를 세운다. 그러므로 만약 ‘홈 패인 공간’으로부터의 이탈을 꿈꾸는 자가 있다면, 그는 ‘국가 장치’가 지닌 강력한 통제로부터의 이탈, 즉 ‘국가 장치’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
영화 <오발탄>에서 철호와 영호는 단 한번 대립한다. 이들의 대립은 표면적으로는 도덕과 윤리의 문제로 귀결된다. 다시 말해 도덕과 윤리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철호와 도덕과 윤리를 저버릴 용기를 갖는다면 더 윤택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영호의 대립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대립에 있어서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들이 살아가는 현실, 즉 ‘홈 패인 공간’에서 이미 정해진 삶의 양식으로 살아갈 것인가(철호), 아니면 정해진 삶의 양식을 강요하는 ‘홈 패인 공간’으로부터의 이탈을 모색할 것인가(영호)의 문제인 것이다. 영호가 ‘홈 패인 공간’으로부터의 이탈을 모색하는 인물인 이유는, 제도화한 법과 도덕의 힘으로 ‘홈 패인 공간’을 통제하는 ‘국가 장치’에 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라고 좀더 넓은 테두리, 법률선(法律線)까지 못 나가란 법이 어디 있어요. 아니 남들은 다 벗어던지구 법률선까지도 넘나들면서 사는데, 왜 우리만이 옹색한 양심의 울타리 안에서 숨이 막혀야 해요. 법률이란 뭐야요. 우리들이 피차에 약속한 선이 아니야요?

‘국가 장치’에 의해 규범화되고 제도화된 법질서 체제에 대해, 원작소설에서 영호는 위와 같이 의문을 품고 저항한다. 영호의 이러한 태도는 ‘국가 장치’를 ‘허수아비’로, ‘국가 장치’에 저항하고 그것으로부터 이탈하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을 ‘까마귀’로 상징화시킨 “까마귀는 허수아비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담론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소설과 영화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모습이기도 하다. 바로 이점 때문에 영호는 유목민의 모습을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의 개념을 빌린다면, 유목민은 다른 삶의 영토, 다른 삶의 가치, 다른 사유를 추구하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국가 장치가 구획하고, 획일화하고, 제도화한 기존의 가치와 규범을 전복시키는 전쟁을 수행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활동이나 사유를 행한다. 또한 그들은 기존의 신분적인 질서나 지배에 반하는 새로운 관계를 지향하고, 그들의 경제적 태도는 계산과 교환에 의해 구조화된 경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증여의 경제, 선물의 경제를 추구하며, 절약과 축적이 아닌 낭비의 체제를 따른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유목민의 이러한 특징적 모습을 영호에게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즉, 영호가 은행을 터는 행위는 기존의 가치와 규범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가장 강렬한 행위에 다름 아니다. 한편 소설에서는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지 않지만, 영화에서 영호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지위에 놓여 있는 상이군인들과 주로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양공주로 나선 동생 명숙에게도 철호와는 달리 따뜻한 시선을 주고 있다. 이들은 흔히 주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가 추구하는 인간관계의 모습은 기존의 신분질서 내지는 인간관계와는 다른 양상을 띤다고 보이며 바로 이 점으로 말미암아 그는 유목민의 삶의 태도와 많이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호의 경제적 태도 또한 유목민의 그것과 닮아 있다. 영호의 경제적 태도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철호가 지닌 경제적 태도를 살펴보자. 그는 치과 진료를 받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하는 사환의 충고도 듣지 않고, 치통으로 고생하면서도 월급봉투를 고스란히 들고 들어와 아내에게 건네준다. 또한 그는 월급도 받았으니 함께 놀다 들어가자는 사무실 여사원의 유혹도 이미 뿌리친 상태이다. 이러한 장면들은 소설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들 장면을 통해 영화는 철호의 경제적 태도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대비되는 영호의 경제적 태도를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철호의 경제적 태도는 그의 직업(계리사 사무실 직원)이 상징하는 바처럼, 계산과 교환에 의해 구조화된 경제적 태도, 절약과 축적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경제적 태도를 보여준다. 즉, 철호는 정착민들이 지닌 경제적 태도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영호는 영화 서사가 전개되는 내내 친구들을 대접하고, 조카에게 신발을 선물하며, 신문 파는 막내 동생에게 돈을 건네주는 등 돈 씀씀이가 철호에 비해 매우 헤프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증여의 경제적 태도, 낭비의 경제적 태도를 취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영호는 유목민들이 지닌 경제적 태도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원작소설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영호를 강조함으로써 이 영화가 목적하고 있는바 또한 영호의 삶의 양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과연 창조적인 유목민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과 관련이 있다. 영화 <오발탄>의 이러한 방향성은 이 영화의 형식적 측면의 특징을 살펴보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이 영화는 형식적 측면의 힘을 빌어 창조적 유목민-되기의 가능성과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보기 전에 좀더 정착민과 유목민의 공간이 지닌 차이를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정착민의 공간은 ‘홈 패인 공간’으로 지칭되는 데에 비해, 유목민의 공간은 ‘매끄러운 공간’으로 지칭된다. ‘홈 패인 공간’과는 달리 ‘매끄러운 공간’은 구획 짓기에 필요한 절대적인 중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사방으로 동시에 넘쳐흐르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매끄러운 공간’은 다중성과 질적 변화를 내재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영화 <오발탄>의 형식적 특징을 이루는 시야심도 화면을 주의 깊게 보도록 하자. 이는 다방 장면, 집 안 장면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시야심도는 복수의 초점거리를 가지고 전경, 중경, 후경을 세밀히 포착함으로써 시각의 다중성을 확보한다. 더욱이 이것은 고정되어 있거나 이동하는 비교적 긴 쇼트인 시퀀스 쇼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가령, <오발탄>의 다방 장면을 보자. 중심인물은 전경이나 중경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후경에서는 나름대로의 행동선과 목적선을 지닌 인물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이들은 모두 시야 심도로 선명하게 포착된다. 다시 말해 시야 심도가 사용된 시퀀스 쇼트 내에서 전경과 후경 사이의 거리는 서로 교차하면서 질적 변화를 일으켜 화면 전체를 통일시킨다. 이처럼 시야심도 화면을 통해 다중성과 질적 변화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이 영화가 ‘매끄러운 공간’에 대한 형상화에 그 방향성을 둔 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나는 지금 버스 정류장 앞에 서 있다. 벌써 여러 대의 버스가 지나갔지만, 나는 그 어떤 버스도 타지 못했다. 무작정 집을 나와 여기까지 왔지만, 내가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 아직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사적으로 버스 정류장 주위를 둘러본다. 거의 매일 아침 이곳에서 버스를 타곤 했지만, 이렇게 여유를 두고 주위를 둘러보기는 처음인 것 같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곳 주변에 인터넷 PC방이 세 군데나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서 있는 쪽에 둘, 길 건너에 하나. 획일화되고, 규범화된 도시, 즉 ‘홈 패인 공간’ 안에 인터넷 PC방이 공존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도시가 정착민의 공간에 가까운 것이라면, 인터넷 매체는 ‘매끄러운 공간’이라 지칭되는 유목민의 공간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매끄러운 공간’은 ‘홈 패인 공간’을 구성하는 ‘국가 장치’와 같은 조직이 필요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 어떠한 구획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공간 전체를 점유할 수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인터넷을 관리하는 조직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인터넷을 통하면 동시에 공간 전체를 점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터넷 PC방이라는 존재를 통해 우리는 도시라는 ‘홈 패인 공간’의 극한에서 ‘매끄러운 공간’이 재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들 공간의 혼합, 이행 등의 양상을 보여준다고 볼 수도 있겠다.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이 혼합, 이행되고 있다면, 우리는 ‘홈 패인 공간’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잠시 미뤄놓도록 하자.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이 혼합, 이행되고 있다면, 이 중 어느 하나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떠남 그 자체가 유목민-되기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호도 나도 떠남을 행했지만, 철호가 유목민이 아니듯이 나도 유목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호는 유목민인 것인가? 그 또한 유목민의 삶의 태도와 많이 닮아 있긴 하지만 유목민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매끄러운 공간’이 ‘홈 패인 공간’이 되는 영토화와 ‘홈 패인 공간’이 ‘매끄러운 공간’이 되는 탈영토화의 과정만이 반복되듯이, 우리는 정착민과 유목민의 사이를 오가며 존재할 뿐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나는 이 떠남의 여정을 되돌리기로 했다. 앞으로도 나의 존재는 정착민과 유목민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을 것이다. 단지 유목이 일깨운 탈영토화의 욕망, 탈주의 욕망을 내 안에 깊이 품고서. 그러므로 영화 <오발탄>에서의 철호의 떠남도 앞으로 계속 진행될 것이다.


함종호․
1970년 출생 ․서울시립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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