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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문화산책/반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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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15회 작성일 08-02-27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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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산․책


페니스 공포증과 ‘한국적’ 집단 몰취향

반이정|미술평론가dogstylist.com



지난 7월말 촉발되어 8월초까지 미디어의 사회, 문화면을 들었다 놨던 두 개의 사건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사람의 기억이란 이렇듯 간사하다. 이후 언론들도 더 이상 이들에 관한 추가 보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우리의 요란했던 열광과 집요한 기억 또한 두 사건을 이미 맥없이 놓아주고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당시 한건은 원심 파기 및 5백만 원 벌금형으로, 다른 한건은 구속수감으로, 그 화려한 데뷔전을 마치고 단조롭고 허망한 결말을 맞았다. 언론은 선정성이 떨어진 두 사안들을 더 이상 붙잡을 이유를 찾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뭔가 서운한 감이 남는다. 적어도 내 생각은 제3자(대법원과 검찰)에 의한 단조로운 상황 종료에 우리가 답답함을 느껴야 정상이라는 것이다. 여론의 집중조명과 사회적 비중으로 볼 때 단연 생방송 지상파에서 ‘방송사상 초유’라는 수식어가 붙은 쇼를 벌인 쪽이, 자신의 홈피에 ‘교육자적 자질이 의심되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쇼를 벌인 쪽보다 압도적인 국민적 관심 대상이 되었지만, 그들이 마주한 허망하고 씁쓸한 결말은 동일한 중량을 갖는다. 그리고 유사한 두 사건이 한국사회에서 지칭하는 내용적 가치 역시 실은 대동소이 해 보인다. 좀 단순하게 요약하면 이들은 승낙 없이 자신들의 ‘자지’를 공개했기 때문에 공공의 적으로 간주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다름 아닌 ‘애들 앞’에서. 물론 그에 대한 처벌은 ‘어른의 몫’이다. 본 사람은 애들인데 판단은 어른이 내리는 구조. 이처럼 실재적 수용과 수용 여부에 대한 판단과 사안에 따른 제재와 처벌이 엄격히 분화된 구조는 비단 유교독재국가인 대한민국에서만 유일무이하게 관찰되는 건 아닐 터이니, 좀 보편적인 시각에서 볼 필요도 있겠다.
우선 나는 이들 사건과 관련하여 반론을 주도하는 진영이 내세운 캐치프레이즈가 ‘표현의 자유’와 ‘인디 정신’으로 모아진 것에 동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별로 승산 없는 카드라는 생각이다. 또 예술이므로 무엇이든 표현해도 무방하다는 입장을 피력할 마음 또한 솔직히 들지 않는다는 점을 밝힌다. 그보다는 대한민국 평균인의 심미안 역시 사법당국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방향으로 진행 중인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표하려는 것이 글을 쓰는 목적이다.

요컨대 특권계급의 지배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은 모두 다른 계급에게는 도덕률로 강요되었다. 계급차별에 방해가 되는 것은 모두 부도덕한 것이나 허용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행동이 지배계급의 권력을 위협할 경우에는 그것은 왕왕 도덕에 대한 범죄라고 호된 비판을 받았다. ……(중략)…… 특정계급의 특수한 도덕률은 계급연대나 계급차별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는 계급지배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며 따라서 그것은 대대로 내려오는 보도(寶刀)로서 항상 휘둘러지는 수단이다. 각 시대의 지배계급은 여타의 계급을 향해서 자신들의 특수한 지배이익을 대표하는 이데올로기의 일부를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라고 강제했다. 지배계급은 다른 계급들을 육체적으로, 다시 말하면 사회적 정치적으로 지배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정신적으로도 지배한다는 것, 따라서 지배계급은 모든 정신분야에서도 다른 계급들에게 자신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의견을 강요한다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발터 벤야민이 진지한 연구 대상으로 삼았던 문명사가(文明史家), 에두아르트 푹스가 내린 위와 같은 결론은 글이 발표된 지 근 100년이 지나 한국에서 발생한 두 사건에도 큰 모순 없이 적용되는 걸 보면 꽤 공시성 있는 이론인 듯하다. 김인규 사건이 처음 터졌던 2001년과 대법원에서 원심 파기 결정을 내린 올 7월, 사법당국에 분개하는 측의 비판 논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난무하는 이보다 강도 센 음란물과 비교해 봐라!”, “판결문에 적시된 ‘성기만 크게 부풀린’ 작품이 동서고금 미술사의 걸작 중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르네상스시대 다비드 상이나, 조선시대 춘화도 같은 이치로 외설이냐!”는 따위의 주장이 그것이다. 큰 오점을 찾을 수 없는 상식적 반박의 한 형태이긴 하나, 어쩌면 이처럼 ‘누구나 다 아는’ 반증 사례의 나열은 이 사건의 핵심도, 사법당국에 저항하는 정면 돌파의 해법도 아닐지 모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법당국의 어른들은 저항군이 쏟아내는 ‘예측 가능한’ 정합적 반론을 익히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정합적 반론들이 자신들이 탄탄하게 구축해놓은 비정합적 국민 정서에 의해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할 것이고, 따라서 쉽게 잊혀지리라는 사실을 귀납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빼어난 용모와 관능적 몸매를 구비한 수만의 ‘딴사람’ 생식기 이미지만을 전문적으로 매매하는 업자들보다, 오히려 매매를 목적으로 제작하지 않은, 하나도 봐줄 게 없는 ‘자신의’ 생식기 노출 사건에 사법당국이 준엄한 어조로 분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포르노업자들이나 이미 ‘공인된’ 서양미술가들이 내놓은 걸작 누드는 사법당국의 처지에서는 선도해야 할 ‘애들’의 수준을 넘어서 있다. 아니 그들의 머리 위에 올라앉은 고수들이다. 사회적 지위에서 ‘어른’을 자처하는 사법부가, ‘아이’로 간주하는 범주는 계급윤리를 합법적으로 강요할 수 있는 불특정 다수의 ‘사회적 평균인’이다. 해서 그들에게 성윤리는 계급윤리의 변형된 이름일 것이다.
한 조직의 정수리에서 일국의 법을 집행하는 그들의 두뇌 속에는 자신의 ‘아이’ 취급받는 다수의 범인(凡人)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윤리의 설계도, 혹은 교육 지침이 엄격하게 그려져 있다. 그것은 에두아르트 푹스의 지적처럼 계급간의 위계와 차별을 합리화하는 여론몰이를 통해 거듭 재생산된다. 그런 이치에 따라 쇼를 하는 무대에는 무대 윤리가, 계몽을 지휘하는 일선 교사에게는 교사 윤리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신앙처럼 믿는다. 여하한 일탈행동도 지배계급의 이익에 반하는 조짐으로 간주되는 판국에 대한민국에서 호래자식들의 물증으로 간주되는 성기 노출을 일선 교사가 자행했으니 대다수의 사회적 평균인에 비해, 극소수의 대법관들이 훨씬 분개하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논리였다.

사법당국의 성감대는 민감하다.
이 철없는 어른들의 분노가 완만한 어조로 수록된 판결문은 따라서 일종의 특정 계급의 위기감의 완화된 불평에 다름없다. 사법당국 관계자들이 그들의 위기감과 분노를 ‘사회적 평균인’의 성적 수치심으로 자진 전용시킨 내적 이유도 이 때문이다. 최고위급 지위가 확보된, 남부러울 게 없는 대법관 중, 자신의 미적 안목을 고작 사회적 평균인의 미감과 동일시하려는 경우가 과연 있을까? 과도하게 민감한 그들의 성감대와 그에 따른 호들갑스러운 오르가즘과 비교할 때, 날로 고급 쾌감을 가려 즐기려는 자신의 자식들, 즉 실질적인 ‘사회적 평균인’의 일진보한 성감대의 성장 속도를 늦추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다. 이는 자녀들의 자위행위와 성적 자각을 경계하고 차단할 목적으로 잠자는 아이들의 손과 발을 묶은 빅토리아시대의 귀족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사고방식이다.
지방 소재의 무명 중학 교사 부부의 무감동한 누드에 자극도 받지 않는 사회적 평균인의 ‘성적 둔감’을 어른 된 사람으로서 허용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사소한 자극에 동하지 못한 불특정 다수의 성적 욕구불만이 일시에 폭발해서 자신들의 법복(法服)을 벗겨 초라한 생식기를 내려보며 비웃을까봐 그것이 걱정스러운 것이다. 참 별 걱정을 다해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른들의 특징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들은 몰라요.”라고 말한다. 한편 이번 사건의 또 다른 핵심은 사실 객체로서의 음란한 살덩어리인 누드가 아니라, 주체로서의 교사의 자진 탈의(脫衣)에 있다. 김인규 교사를 변호하는 측에서 성기가 크게 부각된 미술사의 걸작을 무죄의 증거로 제시하는 것이 전환점이 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법관은 사실 성기 노출보다는 ‘교사의’ 성기 노출에 따른 자신들의 계급적 위기감을 경계한 것이다. 사법부의 견지에서 비교적 ‘큰 아이’로서 어린 아이들을 훈육해야 할 교사의 ‘배신’이야말로 대법원 원심파기의 본질이다. 도덕 교육을 통한 계급차별의 선봉에 서야 할 일선 교육현장에서 벌어진 일탈이라는 상징적 저항성 때문에 대법원은 원심파기라는 상징적 대응을 한 것이다.
비슷한 사례들은 외신을 통해 흔히 접할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안에 예수를 포함한 12사도를 젊고 관능적인 여자 모델로 대체, 재구성한 광고가 올 초 등장했다. 광고의 제목은 ‘여성에게 바쳐짐’이었다. 그러자 교황청과 가까운 밀라노에서 이것의 게재를 전면 금지시켰다. 비록 여기선 성기를 드러내진 않았지만 남성 지도체제의 상징적 아이콘인 <최후의 만찬>의 통치자와 내각을 여성으로 대거 교체한 이 이미지는 계급 이익에 반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이번 대법원의 원심 파기 환송은 사법부의 전근대적인 성감대가 사회 일반에서 공식적으로 통용될 수 없게 되는 상황-이미 비공식적으로는 통용 불가능하지만-을 수용하지 못하겠다는 엄포였다.
이 처럼 전 국민을 상대로 자행되는 전근대적 성교육은 불행히도 효과를 보고 있는 중이다. 오랫동안 공들인 대국민 훈화교육의 가시화된 성과 중 근자의 예가, 김인규 교사의 대법원 판결 3일 후 발생한 MBC 생방송 ‘하반신’ 노출 사고와 그에 대응하는 전 국민적 분개 시나리오다. 대다수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물론이고 사건의 지원지인 ‘홍대클럽 현지 분위기’ 조차 사고를 친 동료들에게 우호적이지 못했다. 심지어 그들을 테러리스트라 몰아세운 한 인디밴드 맏형의 인터뷰는 그들을 완벽하게 고립시켰다. 결국 당사자의 공식 사죄가 있었고 이후 신속한 구속수감 절차가 뒤따랐다. 그리고 세상을 뒤집어놓을 것 같았던 이 사건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덜 떨어진 어느 미치광이의 노출 자작극으로 사태는 봉합되었다. 한민족 고유의 대동단결 몰매 속에, 아이들이 주 시청 대상인 생방송에서 체모가 덥수룩하게 자란 고추를 단 4초 동안 달랑거린 2인조 어릿광대는 그 어떤 각도에서건 옹호하기 쉽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더러 “물론 그들은 용서받지 못할 과실을 범했다.”로 시작하는 변호의 글조차, 대부분은 “그렇다고 인디문화 전체를 매도하지는 말자.”라는 쪽으로 중지를 모으고 있었다.
이번 성기 노출이 수십 년 전부터 해외의 진보적(?) 록밴드의 행사에서 어렵지 않게 목격되는 이벤트의 한 변종이라는 기사 역시, 이들에 대한 분노를 완화시키는 효과보다는 “서양에도 동일하게 미친놈들이 있더라!”라는 분개의 시너지 효과만 가져왔을 뿐이다. MBC 방송 사고를 보도하는 태도는 페니스 (노출) 공포증에 과도하게 유포된 한국사회를 가리키고 있다. 이 사건은 ‘성기 노출 사고’와 ‘하반신 노출 사고’로 회자되고 보도되었다. 성기보다 신체를 구획하는 상위개념인 하반신을 미디어에서 선호한 이유는 단 4초간만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성폭력”의 충격을 완화시킬 목적으로 최소한 특정부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용어를 자체 검열한 결과였을 것이다. 물론 바지를 무릎 아래까지 내렸으니 하반신이 맞긴 하나 결국 그들이 정녕 두려워했던 것은 무릎이나 허벅지, 장딴지가 아니라 바로 몇 센티도 안 되는 볼품없는 자지였다. 실제로 당시 TV를 지켜본 시청자 중에는 화면이 너무 빨리 지나간 통에 “내가 본 ‘그게’ 정말 ‘그건’ 줄은 나중에 보도를 통해 알았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대한민국 전체는 단 4초간 보이는 둥 마는 둥한, 그 자지 노출 사건에 심히 분노했다.
김인규 씨와 카우치, 두 피고인 유죄판결은 사법당국의 손을 빌어 내려진 것이지만, 사실상 대한민국 평균인의 현재적 미적취향이 내린 것이다. 이 같은 다수 평균인의 정서가 반영된 판결을 배후 조종한 최종 설계자는 사법부다. 그렇다면 사법부의 정서를 배후 조종한 세력이나 이데올로기는 존재할까? 이런 현상을 사법부의 과도하게 민감한 성감대와 그로 인해 조성된 대국민적 페니스 공포증이라 규정하고 싶다. 김인규 사건이나 생방송 성기 노출 사건에서 관찰되듯 사생활과 현실 공간에서는 이미 충분히 음란해진 대한민국이 이상하게도 공적영역에서 또는 가상공간에서 자행되는 성기 노출에서만큼은 신경질적이고 또한 완고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성기의 노출을 심히 두려워한다. 이름하여 페니스 공포증! 유독 남한 사법부의 성감대만이 예민하게 진화해 온 탓이다. 사건과 분쟁의 최종착지인 사법당국의 요인들의 민감한 성감대는 성모마리아보다 더 순결한 판례들을 잉태했고, 그 결과 국민정서 전체는 성(聖)미학의 처녀성(virginity of divine aesthetics)의 신봉자가 되어, 지금 이 모양이 되었다.
그렇다면 대체 대한민국 사법부의 성감대만 유독 예민해진 이유와 그들 국민이 성미학의 신봉자가 된 원인은 무엇일까? 여러 이유 중 가장 핵심은 권력의 유지를 위해 극우적인 윤리의식(실은 지지하는 구성원 스스로도 이행하지 못하는)이라는 추상성의 재생산을 통해, 물과 기름처럼 분화된 계급 이익을 엄호하는 데에 있고,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 그것이 여전히 먹혀들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전근대적 정치역사에서 정치적 위기상황을 돌파하고, 사태를 반전하는 가장 무난하고 용이한 방법론은 여전히 좌익 논쟁과 외설 논쟁이다. 그리고 우리 국민은 아직도 한 시골교사의 성기를 보고도 실제로 자지러지게 경악하는 도덕적 수준에 머물러 있고, 이것은 대단히 우려할 상황이다.
김인규 사건, 생방송 성기 노출 사건, 심지어 수년 전 최경태 사건에 이르기까지, 사법부의 성감대가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경우마다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이들 사건 모두 사회의 기반이 되는 불특정 다수에게 ‘상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리에 있거나 그런 요소를 자극했다는 점이고, 그 방법으로 옷을 벗었다는 점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거대한 페니스 공포증에 지속적으로 사로잡혀 있다. 나는 정직하게 말해서 김인규의 ‘문제의’ 작품이나 인디밴드 카우치의 ‘외설’ 퍼포먼스를 심정적으로 변호 혹은 지지할 생각이지만, 그것이 항간에서 얘기되듯 “그것은 예술 표현의 자유일 뿐”이라거나, “인디정신의 폭발”이어서는 아니다. 이는 비가시적 지배계급이 유포한 거대한 페니스 공포증과, 거기서 파생된 거역할 수 없는 성윤리의 갑갑함이 나와 내 공동체의 목을 조여 오는 것이 두려워서이다. 나의 우려와는 정반대로 작품에서 성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서 외설이라는 대법원의 판결문을 보면 그들이 사로잡힌 페니스 공포증의 무게감은 짐작 이상인 듯하다. 글쎄, 지난 역사를 거론할 때 ‘만약에’라는 가정법은 있을 수 없다지만 만일 김인규 교사의 생식기가 1센티만 짧았어도, 대법원의 판결은 달라졌을까?

예술성 여부는 쟁점이 아니다.
김인규 교사의 작업은 예술적인가?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예술성 유무가 죄의 유무로 연결되는 판결의 전례에 따라 우리가, 김인규의 문제작으로 예술품이라고, 논거로 변호하는 것이 마땅한 해법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를 지지할 여지와 논거가 남을까? 나는 남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이해시키는 일은 정교한 작업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그의 2001년 누드와 2005년 누드는 존재론적으로는 동일한 이미지이지만, 의미론적으로 이제 완전히 다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2001년도의 사소한 사건은 지난 4년을 거치면서 역설적이게도 위풍당당한 현상을 만들었다. 사법당국이 총감독을 맡은 이 대국민 사기극은, 저열한 미적 취향이 만들 수 있는 가장 ‘흉물스러운 풍경’을 보여준 것이다.
예술을 정의하는 건 현재로선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예술적 가치’를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장치 또한 미술사와 미학사가 고안된 이후로도 버젓하게 제시된 바는 없다. 그럼에도 ‘예술적’ 이라는 수식어는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함의한다고들 한다. “어떤 특수한 사건을 통해 보편적인 문제의식을 환기시키는 위력이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저 순수한 부부 알몸 사진에서 출발한 이 길고 지루한 소란은, 개별적으로는 ‘별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반적 견지에서는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를 ‘우연히도’(작가는 의도하지 않았다) 들추어내어, 공동체에게 고민을 독촉했다는 점에서 김인규 교사와 그의 누드와 이 사건은 ‘예술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지난 9월 15일자 한 외신에 따르면, 조각가 마크 퀸(Marc Quinn)이 제작한 한 장애인 여성의 임신 누드상(Alison Lapper pregnant)이 영국 트라팔가 광장의 4번째 대좌 위에 제막되었다고 한다. 1841년 트라팔가 광장에 조성된 총 4개의 대좌 중 4번째 대좌만 빈 채로 남아 있었는데(예산상의 문제로), 나머지 3개의 대좌에 올려진 고전적인 조각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비어 있는 4번째 대좌에 번갈아 현대 작품들을 올리는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있는데, 일명 네 번째 대좌 프로젝트(The Fourth Plinth Project)이다. 고전 조상들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볼품없이 짧은 다리와 잘려나간 양팔의 임신한 여성상의 조성 계획은 처음에 적지 않은 저항에 부딪친 모양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행에 옮겨졌고, 예술이 완성된 것이다. 아주 특별한 인생을 산 어느 보통 여성의 조각상은, 완고한 폼을 잡고 있는 나머지 고전 조각들과 강한 대비를 이루며 보행자들에게 어떤 생각을 일깨워줬을까? 단 한번도 예술의 대상으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질 못한 소수자(장애인, 임신한 여성)에 대한 예술적 접근과 실행이라는 점에서, 그 어떤 소수자 인권운동보다 값지고, 그 어떤 고가의 예술품보다 빛난다. 이 경우 우리는 런던 시민의 둔감한 성감대를 부러워해야 하는 걸까? 그건 참 한탄스러운 일이다. 대한민국 평균인의 미학적 취향에 입각하면 이 사지가 비정상인, 게다가 임신으로 배불뚝이가 된 어느 평범한 여성의 조각상은, 여론 사냥에 밀려 조형물의 반열에조차 올라가지 못하고 입안 단계에서 좌절을 맛볼 것이다. 순진한 생각에서 말하자면, 언제나 다수로부터 비롯되는 윤리적 저항으로부터 소수의 건전한 실험정신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것이 국가가 하는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공권력의 존립 이유이고, 또한 그로 인해 문화와 정신은 제도적으로 앞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트라팔가 광장에 ‘한시적으로’ 올려진 이 장애임신여성 조각상은 바로 그들이 진보했다는 사실의 한시적 증거이며,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 대한민국은 그와 정반대의 길을 간다. 국가가 윤리적 저항을 앞장서서 성급히 조성하고, 그것을 구성원의 윤리와 미적 취향에 깊이 내면화시켰다. 하지만 ‘에펠탑’이 가져온 문화적 충돌이 그러하듯, 다수의 안정적인 생각에 크게 저촉되는 소수의 문제의식에게 ‘시간적 기회’가 주어졌을 때 진짜 예술, 진짜 정치, 진짜 문화가 탄생해왔다는 전례가 있다. 일단 불온한 그들에게 ‘기회를 단 한번만’ 줘보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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