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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외국문화순례/고영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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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문학순례|
내 영혼을 적신 ‘피의 기록’
―반레 장편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
고영직|문학평론가
그것은 한바탕 스콜(squall)과도 같았다. 처음에는 두터운 겨울외투를 적셨지만, 한번 엄습하기 시작한 베트남발(發) 스콜은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모른 채 차츰 속옷을 적시더니, 마침내는 나의 영혼까지 흠뻑 적시고 말았다. 반레의 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과의 만남은 무슨 책을 보아도 ‘감동’을 접하기 힘든 시절에, 묵연(黙然)한 스콜처럼 나의 영혼에 엄습했던 강렬한 독서 체험이었다.
나는 반레의 소설을 접하면서 2년 전쯤 방한했던 「전쟁의 슬픔」의 작가 바오닌(B'ao Ninh)이 했던 말이 비로소 구체적인 실감으로 육박하는 것을 느꼈다. 바오닌은 신촌의 <섬>이라는 카페에서 술잔을 기울이면서 우수가 깃든 눈빛으로 읊조리듯 말했다. “만약 당신이 단 하루만이라도 이 전쟁에 참전했더라면, 그 ‘슬픈 경험’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랬다. 반레의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은 전쟁의 슬픔 그 자체를 증언하는 상흔(傷痕) 문학의 실체였다. 그러나 반레의 소설은 베트남전의 슬픔을 슬픔 자체로 그리지 않고, 그 슬픔의 비애를 넘어서는 도저한 ‘평화의 사유’를 속말에 가까운 간절한 언어로써 그려내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반레의 소설을 통해 ‘빠른 총알’에 맞서는 ‘느린 문학’의 진정한 힘이 ‘기억’의 위력이라는 점을 새삼스럽게 인식하게 된다.
반레의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은 일종의 진혼굿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작품이다. 전쟁통에 미군에 의해 숨진 21살의 PK1 정찰중대 소속 응웬꾸앙빈 상사가 저승 노잣돈이 없어 삼도천을 건너지 못한 채, 이승과 저승을 무시로 오가며 잔혹한 전쟁 체험을 진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반레의 소설은 국내 작가 김성동의 미완의 장편 「풍적(風笛)」(1984)의 내러티브 구조와 매우 흡사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6.25 발발과 함께 처형당했던 「풍적」의 화자인 ‘수인번호 526’과,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의 ‘응웬꾸앙빈 상사’는 비록 나라와 언어는 사뭇 다를지라도 비정하기 짝이 없는 전쟁이 할퀴고 간 두 나라의 비극적 망령들이라는 닮은꼴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과 베트남 문단을 대표하는 두 작가가 일종의 ‘망령 문학’의 전범을 산출했다는 점에서도 두 나라의 작가들은 이미 상상력의 연대를 이루고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결코 견강부회적 해석은 아닐 것이리라.
모두 15장으로 구성된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을 지배하는 주선율은 비애의 정서이다. 비애의 정서는 이 책의 행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전쟁은 자애가 없지. 전쟁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괴물과 같은 것이니까. 그것은 세상, 인류 전부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지…….”(29쪽)라든가, “사람이라면 신뢰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지. 신뢰를 저버리는 사람은 사람이라고 불러줄 가치도 없어.”(73쪽)라는 진술은 단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전자의 진술은 1966년 고교 졸업과 동시에 17세의 나이로 자원입대를 결심한 응웬꾸앙빈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해주는 말인데, 최수운의 “호생불살생(好生不殺生)”을 구절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진술은 베트남 민족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근원(根源)이 무엇인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이 소설에 넘쳐나는 비애의 정조는 이른바 <플래툰>류의 할리우드 영화처럼 값싼 감상의 차원으로 덧칠된 허무주의와는 분명 거리가 멀다. 비애의 정서가 허무주의의 수렁에 경사되지 않았던 결정적 이유는 반레라는 작가 특유의 균형 감각이 넘치는 시적 사유의 힘 때문은 아니었을까.
작가는 무엇보다 선과 악이라는 악무한의 이분법에 빠지기 쉬운 전쟁소설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균형 감각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미국과의 전쟁 자체를 왜곡하지도 과장하지도 않은 채, 담담한 서술과 시적 비유 그리고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소설의 골격을 통해 전쟁을 기억함으로써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에도 선과 악에 속하는 인물 유형이 엄연히 존재한다. 중대 정치국원․부이반꼼 상․후인반바오 등이 관료주의적 속성을 내면화한 부정적 인물 유형이라면, 민 아저씨․판웃 준위․부이쑤언팝 부분대장․꾸에지․따꾸앙론 소대장 등은 자기 희생과 책임감을 기꺼이 감수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반레는 설령 자신의 출세를 위해 임신한 애인 꾸에지를 독살하는 의사 후인반바오와 같은 인물들을 묘사할 때에도 설령 급박한 전투 와중일지라도 그 상황에 맞는 적절한 행동의 제시를 통해 그 인물의 개성적 캐릭터를 창조하는 노련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가령 미군 B-52 전투기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매몰된 동료를 구하기 위해 헌신적인 태도를 취하는 판웃 준위의 태도라든가, 관료주의에 대한 도저한 비판의식으로 “당 바깥의 공산주의자”(177쪽)를 자처한 따꾸앙론 소대장의 묘사는 매력적인 인물 창조의 전형적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은 모두 반레라는 작가의 분신과 같은 존재들로서 읽혀진다.
특히 따꾸앙론과 같은 인물이 취한 태도는 반레의 소설이 체험문학의 한계를 넘어 이른바 ‘객관적 주관’의 서술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작가적 모랄 감각으로 확장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반레의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은 문학에 엄습한 정치라는 악귀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지 못했던 1980년대 한국 민중문학에도 소중한 힌트가 되었을 법하다. 만약 1980년대 우리 문학계에 「사이공의 흰옷」과 더불어 반레의 소설이 함께 소개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우리는 반레의 소설을 통해 비로소 한국인의 피가 스며 있는 베트남전 참전이 왜 ‘야만적 행위’였던가를 아프게 깨닫는다. 특히 전쟁 와중에 응웬꾸앙빈이 사랑했던 여인들(응웬티마오, 낌깐)을 잃고 영혼의 고통을 겪는 장면은 차마 정시(正視)하기 힘든 전흔(戰痕)의 절정을 이룬다.
그런 탓일까. 반레라는 작가에 반한 나머지 수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존재의 형식」이란 중편까지 썼던 소설가 방현석의 전언에 의하면, 반레의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이 이른바 ‘참전 용사’들의 영혼을 울리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방현석의 전언에 의하면 베트남 참전군인 단체의 어느 간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반레의 소설을 읽을 때처럼 많이 울기는 처음이었다.”며, 여전히 고엽제(Slow Bullet) 후유증 등을 앓고 있는 반레를 위해 “치료비라도 보탤 방법이 없느냐?”고 고백했다고 한다. 또, 참전 문인’이었던 김태수 시인은 “반레의 소설을 일곱 차례 읽었다.”면서, “그 전쟁의 한 장면장면까지 거의 ‘기억’을 할 정도였다.”고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홈페이지(www.forvietnam.or.kr)에 참회한 바 있으니, 반레의 소설이 빚어낸 기억의 위력을 능히 측량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반레라는 작가에 반한 방현석의 감동적인 발문도 이 소설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어떠한 무기도 인간을 능가할 수 없으며, 어떠한 이념도 인간에 우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반레의 소설은 슬프고도 장엄하게 보여준다.”(300쪽) 무엇보다 시인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전장에서 죽어간 친구 ‘반레’의 이름으로 계속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반레(본명 레지투이)라는 필명에 얽힌 사연도 과연 묵연한 감동으로 와 닿는다. 반레는 1966년 17세의 나이에 자원 입대해 10년 동안 전장터를 누볐다. 1975년 미국과의 전쟁이 끝났을 때 함께 입대했던 부대원 3백 명 중 살아남은 5명에 속하는 반레의 고난에 찬 이력은 반레문학의 주제가 왜 ‘전쟁’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논거하는 기억이 된다.
물론 번역에 대한 아쉬움도 없지 않다. 베트남어 특유의 6성의 운율에 시적 운치와 사유를 담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이 소설의 정수가 번역 과정에서 휘발될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과 관련해 역자와 출판사측의 좀더 섬세한 보완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평화와 독립을 원하는 베트남 청년이 질풍노도의 전쟁 참화에도 굴하지 않고, 나와 가족 그리고 민족과 국가라는 ‘공동체’를 위해 목숨으로써 혁명과 전쟁에 헌신했던 피의 기록은 그 자체로서 베트남전의 진실을 가장 잘 드러냈다고 말할 수 있다. 응웬꾸앙빈과 낌칸의 아름다운 사랑은 베트남전의 진실을 가장 응축적으로 드러냈던 것은 아니었을까. 베트남전 당시 군인들의 항전 구호였다는 말을 반레 시인이 받아야 마땅한 헌사(獻辭)가 아닐까 싶다.
“그대 계속해서 가라. 그러면 어디에 도달하더라도 도달한다!”
고영직․
1968년 전북 군산 출생
․1992년 ≪한길문학≫에 평론 발표
․주요 평론 「‘자발적 가난’의 한 경로」 「추락하는 권위, 춤추는 문학상」 등
․현재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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