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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서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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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
김서령의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리토피아 2005년 가을)
착한 통속, 무감한 신파
문학평론가|서영인
1.
엄마는 내가 미처 크기 전에 집을 나갔고 아버지는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다. 하나뿐인 언니는 그 사이에 고등학교를 미처 졸업하지도 않고 먼 도시로 일자리를 얻어 떠났다. 아버지가 죽고 독서실로 짐을 옮겼고 고등학교 입시에 떨어지자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머리를 번갈아 다른 색으로 물들이며 피자집이나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 돈으로 여행을 가고 클럽을 가고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며 그렇게 살았다. 언니가 살고 있는 도시로 옮겨와 고등학교를 다니기로 한 것은 언니의 간절한 애원을 뿌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니가 일하는 잡화도매상은 그 시장에서 가장 큰 집이었고 언니는 의과대학 인턴인 그 집 둘째아들과 4년째 연인 사이다. 나도 물론 남자친구가 생겼다. 그의 아버지는 사고로 3살짜리 정신연령으로 살고 그의 어머니는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다가, 간혹 대문간에 기대어 꺽꺽 운다. 언니의 배가 불러왔지만 집에다 둘 사이를 말할 수 없었던 언니의 애인은 서투르게 언니의 소파수술을 하다가 언니의 자궁을 찢어 죽였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이다.
2.
결손 가정에 방황하는 청소년들, 어울리지 않는 연애와 허용되지 않은 임신, 가엾은 죽음까지. 세상의 온갖 불행한 일들이 모여 소설이 되었다. 이것을 통속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주말 드라마에서, 혹은 여성지 연재소설에서 언젠가 어디선가 한번은 본 듯한 이야기들. 그러나 통속적인 이야깃거리를 모아 놓았다고 다 통속이 되는 것은 아니다. 김서령의 소설은 지극히 통속적인 이 이야기들을 다른 어조로, 전혀 통속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다시 풀어낸다. ‘나’는 성인이 되기 전에 파탄된 가정을 경험했지만 그것을 핑계로 철없는 반항의 눈길을 치뜨지 않는다. 수시로 색깔이 바뀌는 머리칼은 그냥 시간을 견디기 위해 나를 소비하는 일 중 하나였을 따름이다. 언니가 사는 도시에서 새로 만난 남자친구 태원과의 섹스 역시 그렇다. 그것은 오래 견뎌왔던 시간들의 연장에 다름 아닌 “지극히 사사로운 시간”이었을 뿐이다. 엄마는 유달리 바람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른 욕망에 달떴던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미용실 사장은 될 수 없는, ‘야매’로만 살 수밖에 없는 삶이 견디기 힘들었을 뿐이다. 그러니 내가 엄마를 원망하거나 남아 있는 힘없는 아버지를 상대로 날카로운 감수성을 청춘의 무기처럼 휘두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가 있다면 너무 일찍부터 평범한 삶을 육박하는 불길한 소리들을 들어왔다는 것이다. 삶이 무력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불길한 소리들은 언제나 미리 들려온다. 그곳에서 집나간 어머니나 무력한 아버지의 삶, 혹은 수련의 애인의 손에 자궁이 찢겨 죽은 언니, 또는 뇌기능이 멈춘 남편과 살아야 하는 태원 엄마의 삶은 지독한 불운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담담하기 짝이 없다.
이 통속이 한없이 착하기만 한 것은, 그리고 극단적 시련과 불운의 신파가 눈물 한자국 없이 무감하기만 한 것은 이 때문이다. 태원 역시도 아버지의 사고와 엄마의 고단한 삶을 지켜보는 사이에 삶에 대해 진작에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렸다. 그 또래의 남자애들이 가질 법한 성에 대한 호기심도 집 밖의 세계에 대한 열망도 없다. 언니의 자궁을 찢어버린 언니의 애인도 비록 서투르고 나약하기는 했을지 몰라도 악하지는 않다. 의사라는 직업을 무기로 언니의 청춘을 유린한 것도 아니고 집안의 반대를 핑계로 언니를 버리지도 않았다. 그러니 통속이나 신파가 자리 잡을 곳이란 이 서사 속에는 없다. 시장 사람들은 짝이 기우는 언니와 주인집 둘째아들을 두고 수군거리기보다는 한없이 착한 눈으로 그들의 미래를 기원하고 하다못해 부추전에 떡볶이라도 더 얹어 주는 사람들이다. 거친 삶을 살아 왔어도 태원의 엄마는 근본부터 착한 사람이어서 아들의 여자친구와 술과 담배를 나누고 ‘나’의 선머슴 같은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기만 하는 것이다. 가치관이 달라서,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서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으니 그저 착하기만 한 사람들로 서사는 진행된다.
3.
이렇게 착하기만 한 사람들로 세상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데도 언니가 죽고 나는 홀로 남겨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성격화된 개인에 의한 갈등이 전혀 드러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견디기 힘들고 소리없는 불길함으로 가득 찬 세상이 이미 소설 속에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언니를 죽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는 그래서 분명치 않다. 아마도 언니의 애인은 집안에다 언니를 드러내기 두려웠기 때문에 언니의 자궁에 익숙지도 않은 수술 기계를 들이댔을 텐데, 그 집안의 반대는 소설 속에 아예 등장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소설의 갈등은 맞서 보거나 버틸 수도 없는 이미 결정된 견고한 반대, 그래서 소설 속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서도 위력을 발휘하는 견고한 구조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맞서지도 못할 적대는 더 큰 두려움으로 존재를 위협하는 법이다. 세계는 소설 밖과 소설 안의 세계로 이분화되어 있다. 소설 안의 사람들은 한없이 불행을 견디고 불행에 적응하며 ‘작은 토끼’들처럼 서로의 품을 파고들 뿐이며 그것으로 하나의 세계는 완결된다. 그들을 위협하는 존재들은 누구인지도 분명치 않은 이름으로 소설 바깥에 고스란히 남겨져 그저 짐작될 뿐.
겹겹이 가중되는 불행과 고통, 한없이 악랄하게 인물들을 괴롭히는 악의 화신들이라는, 관습만 남은 통속과 신파보다 이 착하고 무감한 서사가 훨씬 성숙한 것이기는 하다. ‘작은 토끼’처럼 서로를 보듬는 착한 사람들의 이해와 소통이 억지눈물과 분노로 과장된 카타르시스보다 한결 따뜻한 위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선량한 위안은 소설 바깥으로 사라져 버린 거대한 공포의 실체와 아직 만나지도 못했다. 통속과 신파의 관습은 소설 속에는 없지만, 작가는 착한 눈으로 그 관습의 속살을 끌어내지만, 그것은 소설 바깥에서 여전히 소설을 규정한다. 밀쳐놓은 불안과 맞서지 않고 불행한 사람들끼리 서로 기댈 것인가, 뻔한 결말의 악다구니로 남더라도 우선은 뒤엉켜 싸울 것인가. 혹은 또 다른 제3의 길이 있을 것인가. 갈수록 불투명해지는 삶의 전망 속에 놓여 있는 우리 소설의 고민거리를 다시 읽는다.
서영인․
2000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평론집 충돌하는 차이들의 심충
․현재 경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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