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20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이정석
페이지 정보

본문
|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
장정희의 「푸르른 기억-앵무새」
(≪문학과경계≫ 2005년 가을)
낭만적 허위와 소설적 진실
문학평론가|이정석
「푸르른 기억-앵무새」가 페미니즘의 지평에서 해석될 수 있을까. 언뜻 보기에도, 페미니즘 비평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책으로 여겨진다. 여성을 옥좨는 가부장제의 위선과 억압이 있고, 그로 인해 신음하는 슬프고 공허한 여성의 내면풍경이 있으니 말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주부다. 남편은 너무 바쁜 것이 탈이지만 비교적 가장의 역할에 충실하고, 아이도 별 문제 없이 잘 자라고 있다. 그러나 남부러운 것 없어 보이는 일상의 연속이 그녀에게는 공허한 날들의 연장으로만 느껴질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여자는 그동안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든 자신은 행복하다고 말하곤 했다. 남편은 여자가 들어가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새장을 마련해주었고 시어머니는 철조망으로 엮인 남편의 새장에 금칠을 입혀 주었다. 여자는 새장 바닥에 노랗게 피어나는 금잔화를 심었고, 알을 낳아 부화할 수 있는 금으로 된 철조망 둥지도 엮었다. 여자는 자신의 깃털을 바라보며 노랗고 빨간 깃털을 벗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남편은 철조망 바깥으로 나 있는 창문에 빗장을 지른 후, 안에 든 여자를 향하여 말을 가르쳤다.
나는 행복해. 나는 행복해. 나는 행복해.
문제는 안락한 가정이 그녀에게는 감옥과 같은 공간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가정이라는 편안한 휴식처가 필요”하다며 청혼을 했던 남편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의 토대를 제공하는 대신 그녀가 가정에만 충실하기를 은근히 종용한다. 또한 시어머니는 바깥 일로 바쁜 자신의 집안일을 돌봐주는 그녀이건만, “집안에 정물처럼 박혀 있는 여자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이가 그녀를 가정의 테두리에 강하게 옭아매고 있다. 이쯤 되면, 이 작품이 가부장제의 폐해를 문제삼고 있는 페미니즘 작품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가부장제의 모순과 억압을 드러낸다고 해서, 이 작품을 페미니즘의 테두리에만 가둘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가부장제의 억압과 모순이 드러나 있으되, 페미니즘적 의식의 각성이 없다. 그러므로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적 색채를 농후하게 담아내고 있지만 대항담론으로서 페미니즘을 주창하지 않는 「푸르른 기억-앵무새」를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약간 달리해서 보면, 이 소설은 이미지와 상징을 적절하게 배치하며 평화로워 보이는 중산층 가정의 이면에 존재하는 균열과 위기의 징후를 차분하게 성찰하고 있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대학의 구내은행에서 창구 일을 보던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이 오히려 흡반처럼 빨려들게 만드는, 이상한 마력을 가진” 그 대학의 정외과 교수를 만나 “불같은 열병에 휩쓸린 사람처럼” 결혼을 한다.(하지만 생활을 책임질 테니 인생의 내조자가 되어 달라는 남편의 제안에 흔쾌히 응한 걸 보면, 온통 낭만적 열정에 이끌려 결혼을 했다는 그녀의 고백과 달리 거기에는 어떤 영악한 계산이 끼어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뜬 열정이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마약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남들이 부러워 마지않는 안락한 가정이 그녀에게는 어느새 “화려한 깃털과 아름다운 목소리에 감춰진 악취”를 짙게 풍기는 새장 같이 여겨지기 시작한 것. 더구나 조루증세를 보이는 남편이 여자를 가정이라는 새장 안에 가둬두고 감시 아닌 감시를 행하자, 그녀는 채울 수 없는 욕망에 목말라 한다.
힘을 가하느라 사내의 목과 팔에 굵은 힘줄이 도드라졌다. 황갈색으로 태워진 그의 팔뚝에 여자의 팔이 언뜻 스치기도 했다. 단단함. 여자는 순간순간 전신을 훑고 내려가는 전율감에 몸을 떨었다. 사내의 굵은 팔뚝을 한 번 만져보고 싶었다. 손끝으로 눌러도 누른 흔적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저 탱탱함. 부드럽고 여린 여자의 손이 자꾸만 사내의 손등 위로 올려질 것만 같은 예감에 여자의 가슴이 떨려왔다.
“엉터리 같은 섹스를 끝내놓고” 혼자 잠들어 버리는 남편 등 뒤에서 몰래 자위를 해보기도 하지만 욕구불만이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결국 억눌린 욕망은 그녀를 무작정 낯선 사내가 있는 호수로 차를 몰게 하고, 거기서 그녀는 사내한테 ‘자발적 강간’을 당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이 소설은 공공연히 드러내 놓고 말하기를 꺼려하는 부부간의 성을 중심으로 해서, 가부장적 사고가 지배하는 가정에서 개인의 자유와 욕망이 중시되는 가정으로 변모하는 상황의 단면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 된다.
어떤 측면에 더 비중을 두고 바라보는가에 상관없이, 「푸르른 기억-앵무새」가 중산층 가정의 내부에 도사린 억압과 결핍을 드러내는 작품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그와 같은 문제가 아니다. 정작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여성 주인공에게서 엿보이는 퇴행적인 정신세계의 징후적 표출이다. 제목에 강하게 암시되어 있는 바대로, 이 작품은 가정을 여성을 가두고 억압하는 부정적 공간으로 의미화하는 반면, 그 대척점에서 결혼 이전의 세계를 자유와 행복의 시간으로 채색한다. 그러나 “손톱 끝에 남아 있는 봉숭아꽃물을 들여다보며 사랑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설렘에 몸을 떨”던 그 시절이 실제로 행복감으로 충만했던 나날들이었던가는 의문으로 남는다. 혹 그것은 현재의 불만족과 결핍이 만들어 낸 상상의 기억이 아닐는지. 그렇다면 나르시시즘으로 덧씌워진 과거에 대한 향수에서 일종의 정신적 퇴행현상을 읽어낼 수 있다. 호숫가에서 자연과 여자가 어울러져 빚어내는 낭만적 에로스 역시, 그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불안과 무의식적 갈등으로부터 도피하려는 퇴행적 징후를 어쩌지 못한다.
「푸르른 기억-앵무새」는 호숫가에서 펼쳐지는 낭만적 에로스의 장관이 낯선 사내와의 거친 정사로 이어지다, 다시 장면이 전환되어 남편과의 맥 풀린 섹스 후 여자가 혼자 베란다에 나와 어둠을 응시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아마 그녀의 내면도 그 어디쯤에서 서성이고 있으리라.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간을 과감하게 박차고 나가는 모험이 아닐 듯싶다. 당장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좋았던 옛날-공허한 현재’라는 낭만적 허위의 감옥에서 벗어나 현실의 실상을 정면으로 마주 대하며 문제의 해결을 도모하는 것이리라.
이정석․
200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이전글20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정재림 08.02.27
- 다음글20호 지난계절 작품읽기(소설)/고인환 08.02.2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