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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새책읽기/박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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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춘 시집, 귀(시와시학사, 2005)
이경림 시집, 상자들(랜덤하우스중앙, 2005)
유정임 시집, 봄나무에서는 비누 냄새가 난다(리토피아, 2005)
생명을 향한 몇 가지 시선들
박남용|시인
최근의 신작시집 세 권을 함께 읽었다. 서정춘의 귀, 이경림의 상자들, 유정임의 봄나무에서는 비누 냄새가 난다 등이다. 이 시집들을 읽으면서 시인들이 만들어 내는 시의 빛깔이 시의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해주고 있음을 느꼈다. 푸른 가을 하늘 속에 붉은 단풍이 10월의 가을날을 수놓는 이 처연한 풍경 앞에서 시의 빛깔도 자연과 경합을 벌이기라도 하듯 그윽한 눈길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인들이 세상과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며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과 음성으로 이중 변주를 울리고 있었다. 시인들이 꿈꾸고 상상하는 세계의 이미지 속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의 끊임없는 내적 충돌과 변화의 몸부림을 읽을 수 있었다. 어디에선가 울릴 듯한 그리움의 빛깔들로 채워질 시의 나무에 귀를 대고 있고, 상자들의 안과 밖을 들여다보며 생명과 죽음의 향기를 맡으며 시의 이미지들이 꿈틀꿈틀 땅으로 기어가고 있다.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치며 자기만의 독특한 감각의 촉수로 세상을 끌어안으며 토해내는 시실처럼 풀어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시란 무엇인가라는 자기 물음 속에서 나이와 성별을 초월한 자기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서정과 순간의 절제된 미학
서정춘의 귀는 시인의 세 번째 시집으로 첫 시집 죽편과 두 번째 시집 봄, 파르티잔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짧은 서정시 위주로 서정과 순간의 절제된 미학을 추구하는 서정춘의 시의 무게는 상당히 무겁다. 시 한 편을 쓰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이며 함축적인 언어로 세상의 무늬와 소리를 잡아내는 시인의 날카로운 감각과 상상력 앞에서 서정시의 참맛을 느끼게 해준다. 서정시가 세상과 자아의 끊임없는 대화와 소통 속에서 빚어내는 자기내면에 대한 자기 성찰적 통찰이라고 한다면 서정춘의 시는 여기에 가장 부합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시집을 통해 서정춘은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세상의 소리를 듣기 위해 몸을 낮추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하늘과 땅 사이의 꿈과 현실에서 익어가는 시의 보물상자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내며 고운 옥석을 다듬고 고른 흔적이 물씬 풍기고 있다. 세상을 이순(耳順)하게 살아가야 할 나이에 귀를 대고 들어보는 세상, 그 어느 것이 순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 세상의 귀가 되어 우리에게 들려주는 시의 울림의 장력은 이미 우리 영혼의 뇌파를 강력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서정춘의 이번 시집에는 하늘과 낮달의 이미지, 그리고 세상의 소리를 듣는 귀의 청각적 이미지가 자주 나오고 있다. 하늘과 낮달과 귀로 구성하는 서정춘의 시의 심상적 공간 속에는 그리움과 세월의 무상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밤에 뜨는 달도 아닌 낮에 뜨는 달, 한쪽 곁에는 붉은 태양이 떠 있지만 한쪽 곁에는 소리 없이 하얀 낮달이 떠있는 하늘을 생각하면서 시적 자아의 상황을 형상화하고 있다. 세상의 중심에서 한켠으로 나앉아 세상을 두루두루 살피면서 자기만의 아름다운 시세계를 가꾸어 나가려는 시인의 의지가 엿보인다. 이 시집의 첫 번째 작품 「귀」에서 “하늘은 가끔씩 신의 음성에겐 듯 하얗게 귀를 기울이는 낮달을 두시었다”라며 세상의 소리에 기울이기 위해 하늘에 떠 있는 낮달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낮달은 세상과 나를 매개하는 중간물이 되어 낮달은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낮달의 이미지는 시인의 작품 여러 작품 속에서 그 나름의 독특한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낮달을 헹구다」에서는 “올라라/홀어미/설거지에/씻긴/달/시렁 위에/올라라/白磁 접시의/달/홀어미의/달/올라라”라며, 홀어미 설거지에 씻긴 달, 白磁 접시의 달, 홀어미의 달로 낮달을 헹구고 있는 어머니의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낮달을 올리다」에서는 “통 큰 소리/사람이 하늘이다/외쳐 부른 소리에/파르르 떠오르는/저기 거기 소금빛/조선낫 한 자루”라고 표현하며, “사람이 하늘이다”라고 외칠 수 있는 조선낫 한 자루로 표현하고 있으며, 「산창(山窓)」에서는 “산창에 물색 좋은 낮달이 떠서 …… 귀머거리 다 됐는지/반쪽의 여백만 기울둥했다”라고 표현하며 어느 산창에 물색 좋은 낮달이 떠서 귀머거리로 반쪽의 여백만 기울둥했다며 마치 시인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처럼 낮달은 세상의 하늘에 떠서 세상을 거리 두고 바라보며 세상과 하나 되어가는 시적 자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적 자아의 모습은 현실에서 초월한 저 너머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본질적인 존재를 추구한다. 그러한 모습은 「낮달을 찍다」라는 장자에 관한 시에서 잘 드러난다.
꿈 깬 팔랑나비
莊子의 늙은 무덤
한 행이 한 연이 되고 있는 아주 짧은 시이지만 장자의 호접지몽(蝴蝶之夢), 즉 장자가 자신이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는지 꿈속에서 장자가 된 나비인지 모르는 현실과 꿈의 경계가 헷갈리는 가운데, 장자의 꿈이나 나비의 꿈은 도(道)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풍경을 접하게 된다. 꿈 깬 팔랑나비와 장자의 늙은 무덤을 바라보고 있는 낮달, 곧 인생의 꿈에서 깨어난 시인은 팔랑나비가 되었고 곧 장자의 늙은 무덤을 이야기하듯 자신이 가야 할 마지막 궁극처인 무덤은 죽음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시인의 방식은 이렇듯 꿈과 현실의 관계가 역전되어 자연의 영원성과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그리하여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자주 들어나는 만년의 황혼 같은 이미지들이 자주 등장하며 죽음을 예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만년의 삶으로 기울어가는 노년의 풍경을 11월의 모습으로, 가을 기러기의 이동으로, 서산 해질녘 또는 서녘 하늘의 풍경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가운데에서 특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느낄 수 있는 「기러기」라는 시를 들 수 있다. 곧 어머니는 자신이 돌아가야 한 고향이자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빨랫줄에/빨래를 걷어가는/분주한 저물녘/먼/어머니”라고 표현하며 늦가을 기러기의 행렬을 통해 분주하게 저물녘 빨래를 걷는 어머니의 모습을 찾고 있다. 어머니를 부르는 시적 자아의 모습은 ‘홀어미의 달’에서 느낄 수 있는데, 어렵게 자신을 길러 주신 어머니에 대한 향수는 이 시집을 읽는데 또 다른 진한 감동을 준다. 그러나 시인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과 가까웠던 지인들에 대한 그리움을 표출하고 있는 시들도 있다. 임강빈 시인을 그리면서 ‘물 좋은 날’ 하늘빛 우러르니 청빈에 물들겠거니 하는 표현에서, 박용래를 “훗승에서 개구리가 되었을라”고 하며 죽은 홍래 누이 그립다가 그리고로 울었을라 하는 표현에서, 림효림 스님을 ‘차 달이는 달마’로 표현하며 난청을 기울이며 티끌세상을 차 달이고 있다고 하는 등 지인들을 그리워하는 많은 시들을 쓰고 있다.
이밖에도 이 시집은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비록 시행이 짧지만 시적 대상에 대한 치밀한 사고와 관찰이 무엇보다 눈에 띈다. 그것은 시인이 대상을 향해 깊이 고민한 흔적이며 대상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통찰 속에서 나오는 울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시들로 우리는 다음의 작품들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시적 대상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통찰 아래 미학적 성과를 올리고 있는 작품들로 「달팽이 약전(略傳)」과 「거미」, 「묘비명-갈대」 등을 들 수 있다.
내 안의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를 들쳐 업고 명부전이 올려다 보인 젖은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가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生이 있었다.
―「달팽이 약전(略傳)」 전문
얼마나 좋으냐
너의 오만함이 붕 뜬 로맨티시스트라구
너는 선율보다 가느란 바큇살을 타는 生
너는 은륜을 굴리는 별난 벼슬아치?
―「거미」 전문
나는 늙으려 세상에 왔으나
이미 천년 전에 죽었다네
하늘 아래 서서 우는 미이라를 남기고
―「묘비명-갈대」 전문
이 시들은 자신의 온몸으로 세상을 향해 오체 투지해 가는 삶과 생명의 노래를 보여준다. 달팽이, 거미, 갈대 등 하찮은 미물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자신의 온몸으로 세상의 무늬를 엮어내는 솜씨는 시인의 언어로는 따라갈 수 없는 듯 시인이 바라보는 시적 대상들에는 처절한 삶[生]과 죽음의 모습이 드러난다. 자신의 뼈를 녹여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를 들쳐 업고 뜨락을 슬몃스몃 핥아가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생(生)으로 노래하는 달팽이의 운명이나, “선율보다 가느란 바큇살을 타는 生”이나 “은륜을 굴리는 별난 벼슬아치?”로 묘사하며 로맨티시스트 거미를 노래하는 것이나, 하늘 아래 서서 우는 미이라를 남기고 천년 전에 죽었다는 갈대의 묘비명을 생각하는 등 시인의 상상력은 놀라우리만큼 깊고 치밀하다. 이러한 서정춘의 시세계는 다른 시인이 범접할 수 없는 뛰어난 이미지를 구사하고 있으며, 시어 하나하나에서 풍겨 나오는 내공의 소리가 가을 낙엽을 띄우며 따가운 햇살에 반짝이는 깊은 계곡물 같은 늦가을의 정취를 울려주고 있다.
상자들에 관한 몽상의 기억들
이경림의 상자들에서는 ‘-상자들’이란 부제가 달린 연작시들을 통해 꿈과 현실, 삶과 죽음의 이미지가 지배적으로 드러난다. 상자들의 정체가 무엇일까 가장 궁금해 하며 시집을 읽을 수밖에 없다. 이경림의 지난 시집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창작과비평사, 1997)에서는 ‘저 건물’ 연작시를 통해 존재의 집을 지으며 여성의 육체, 몸에 대한 담론의 시학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시작에 대해 아버지의 말을 빌어 “시는 계산하면 안 된다. 공부하듯 시를 쓰면 그건 시가 아니야. 시는 교훈도 아니야. 철학도 아니야. 시(詩)는 시(詩)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야 해. 시(詩)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 그것이 좋은 시(詩)야”라고 말하고 있다. ‘시 아니고는 아무것도 아닌 시’ 한 편을 쓰기 위해 이경림은 새벽마다 귀신들이 제 집으로 돌아가는 소리에 무서워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경림의 시집에서 상자들이 의미하는 것을 보면 여러 가지로 압축해 볼 수 있다. 「이 상자」에서 “아버지가 두고 가신 이 상자/시커멓고 물렁물렁한 의문들로 가득 찬/희멀겋고 히쭈그레한 해답들로 가득 찬” 상자에서부터, 「어처구니 상자들」에서 보이는 상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을 이야기하는 두 개의 상자를 품은 둥그런 흙무덤으로 등장하고 있다. 「상자와 상자 사이」라는 작품에서는 상자가 “화물 창고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상자들”이 되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아버지가 책상머리에 앉아 쓰던 네모난 원고지 칸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무덤 속의 관, 창고의 상자, 원고지 칸, 부엌, 공장, 가방…… 등 다양한 상자들이 제시되면서 자신이 몽상하는 과거의 꿈과 기억에 대한 원초적인 회상들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현재의 부재와 결핍에서 비롯되는 결과로,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재한 현실은 시인으로 하여금 상상력을 추동시키는 힘의 원천이 된다. 그래서 상자들에 대한 시인의 몽상적 상상력은 아버지와의 상관성에서 먼저 찾아볼 수 있다.
이제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는 아버지 밖으로 사라졌다
본시, 세상은 아버지와 아버지,
또 아버지와 아버지들 사이에
사실적으로, 사실, 적으로 있었다
사실적인 아버지는 뜨거웠으나 사실, 적인 아버지는 얼음 같았다
나는 그런 아버지들 사이에서 사실적으로 아니,
사실, 적으로 갈팡질팡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죽었다
아버지는 아버지 이후로 스며든 것일까
아버지 이전으로 돌아간 것일까?
생각해보니 사실적도, 사실, 적도 아니었던 아버지!
아버지가 지고 나니 세상이 사실적으로 캄캄하다
나는 밤마다 사실적인 아버지를 헤맨다
누르면 쑥쑥 들어가는 묵 같은 아버지, 검은 안개 같은 아버지,
아아 사실적이 아닌, 사실, 적도 아닌 아버지는
왜 이리 슬픈가?
나는 눈물을 흘리며 사실적이 아닌 아버지 품에
사실, 적이 아닌 딸이 되어 안긴다
―「사실적인, 사실, 적인—상자들」 전문
이경림에게 있어 아버지는 사실적인 실제의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적인’ 아버지를 지나 적이 아닌 딸이 되어 아버지에 대한 몽상과 기억으로 존재한다. 여성주의의 담론에서 아버지는 터부의 대상이자 극복의 대상으로 쉽게 시인들의 그물망에 포착되어 부정의 대상으로서의 아버지의 이미지가 강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이경림의 시에서는 아버지는 부정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나의 환상과 의식 속에서 상자들 안과 밖을 넘나드는 존재로 늘 내 기억을 주물거리는 모티브가 된다.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은 “백열등 불빛 아래 원고지의 빈 칸”을 메워가며 일생을 쓰고 지웠다를 반복하며 “자식들의 신발을 사고 쌀을 사는” 아버지의 모습은 여느 아버지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아버지가 부재한 지금, 아버지는 언제나 이경림의 시 속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환상 속을 넘나들고 있다. “아버지의 등에는 희고 투명한 날개가 돋아 있었다”는 환상적인 요소는 아버지의 부재와 죽음을 알려주지만 아버지의 고서 번역과 아침나절의 화투 패를 떼는 행위는 지금 너무도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 나타난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추억을 다시 되살리며 “아버지, 무섭다” 하며 아버지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아버지,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하고 말을 붙이기도 하며 부재한 아버지와의 대화는 끝없이 적으로서의 아버지가 아니라 적이 아닌 딸로서 아버지와의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
이경림은 이제 아버지도 어머니도 부재한 상황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여성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가운데 “가방장사를 때려치우고 시인이 되었다”고 하며 지난날을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 속에서는 나는 불면증 환자였고, 가방장수였고, 서른여섯,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였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가방장수가 된 지난날의 시인의 기억에서 바람이 불고 덤프트럭이 해안도로를 질주하는 인생 현실과 자신의 정체성과의 대립이 환상적 요소와 결합하여 현실의 무게를 더해 주고 있다. 이러한 중년여성의 몸부림치는 정신분열적 증세는 언어적 장애와 환청적 목소리를 등장하여 인간 내면의 무의식적 세계를 표현해 주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서 자신의 여성적 정체성을 깨달아가며 정신적 추구를 통해 다시 깨어나는 여성의 정체성을 느끼게 된다.
그때 그녀는 거기 머무르는 허공들처럼 아주 조용한 환자였다 매일 반복되는 한 가지 일만 빼고는
일은 대개 새벽녘에 터졌다 내가 잠든 틈을 타 그녀는 조용히 공격해왔다
(중략)
―엄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어딜 가긴. 부엌에 가지. 빨리 밥을 지어야지
―아이구 엄마두 여긴 병원이에요 부엌은 없어요
―무슨 소리냐 부엌이 없다니 그럼 넌 뭘로 도시락을 싸가고 너희 아버진 어떻게 아침을 드시니?
(중략)
얘야, 정말 어리석구나 저 복도를 지나 저 회색 문을 열고 나가면 더 큰 부엌이! 정말 큰 부엌이 있단다 저기 봐라 엄청나게 큰 밥솥을 걸고 여자들이 밥하는 것이 보이잖니? 된장 끓이는 냄새가 천지에 가득하구나
(중략)
엄마는 입술이 점점 파래지더니 까무러쳐서 오래 깨어나지 못했다 그때 그녀가 기어이 그 긴 복도를 걸어 나가 엄청나게 큰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엄마의 청국장 냄새가 중환자실에 가득했다
―「부엌—상자들」
이 시는 중환자실의 병든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회복해 가며 어머니와의 화해를 꿈꾸는 시라고 할 수 있다. 병원에 입원한 병든 어머니가 새벽녘에 나를 공격해 온다고 한다. 새벽이 되면 일어나 부엌에 가서 밥을 지어야 한다는 여성의 일상성의 반복을 보여주는 가운데, 남편과 자식을 위해 평생 동안 밥을 지어 온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의 여성의 비극적인 운명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운명 앞에서 어머니가 “복도를 지나 저 회색 문을 열고 나가면 더 큰 부엌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그 큰 부엌은 어쩌면 죽음인 동시에 여성의 자궁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생명의 끝이자 새로운 시작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엌에서의 여성의 운명은 곧 죽음을 통해 해방됨과 동시에 새로운 승화가 이루어진다. 결국 “긴 복도를 걸어 나가 큰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이자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다. 이러한 가운데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새롭게 변화되어 딸의 시선 속에서도 “엄마의 청국장 냄새가 중환자실에 가득했다”는 화해의 목소리를 던지고 있다. 이처럼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자신의 내밀한 세계를 발견해 가는 이경림의 시적 감각과 상상력은 뛰어난 여성시의 시적 성취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시란 무엇일까? 깊이 들어갈수록 멀기만 한 그 상자의 정체는 무엇일까?”라는 물음 속에서 이경림의 시의 세계는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생명을 향한 자아의 시선
온몸으로 뒹굴고 있는 자아를 보듬으며 늦둥이 자식으로 세상으로 밀어낸 유정임의 첫 시집 봄나무에서는 비누 냄새가 난다는 시인이 걸은 많은 세상의 길 위에서 여성의 몸과 마음을 응시하고 있다. 유정임은 이 시집을 통해 “성한 몸이 아프다”고 하며 아직 불구의 몸으로 존재하는 자신의 시에게 완성된 존재의 옷을 입혀주고 있다. 그녀의 시처럼 햇볕 속에 노출되어 온몸으로 뜨거운 햇살 속에 뒹굴어야만 하는 시의 길 위에서 유정임 시인이 걸어가야 할 길은 아직 멀고 험하다. 그 길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으며 당당히 시의 길을 걸어가겠노라고 하는 시인의 결연한 의지는 참으로 대단하다.
유정임의 시는 이동을 꿈꾸는 시의 건축물처럼 땅 끝으로, 낙산사로, 안면도 꽃지로, 양수리 두물머리, 월미산으로, 신기촌 시장으로 끊임없이 시선을 돌리는 가운데 순간의 감각에 온몸을 내던지고 있다. 그래서 유정임의 시에서는 “봄나무에서는 비누냄새가 난다”고 하듯 세상의 풍경들이 그리움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런 그리움으로 가는 길 위에서 시적 자아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해 가며 세상을 바라보는 유리창을 마주하게 된다.
너무 청명한 날은
유리창에 얼룩이 유리보다 더 선명하다
한번 지워진 흔적까지
다시 살아난다
그럴 땐
내 안의 얼룩이 유리 밖으로 번진다
마른 눈물 자국 같은
상처로 더께 진 딱지 같은
엷은 그늘로도 쉽게 숨길 수 있는
미세한 먼지 같은 것들이
살아서 고물댄다
유리 속에 얼룩으로 내가 있다
유리는 이제 유리가 아니다
우주의 커다란 얼룩인 세상이 유리 밖에 있다
―「유리 속에서 얼룩지다」 전문
여기에서 유리는 나를 바라보는 거울로서 유리 밖의 내가 유리 속으로 들어오며 내 안의 얼룩이 유리 밖으로 번지며 유리 속에 얼룩으로 내가 있다고 한다. 시적 자아가 처한 존재의 상황이 이제 유리 밖이 아니라 유리 안이 되어버린 지금, 유리 밖에는 우주의 커다란 얼룩인 세상이 있게 된다. 시선의 위치에 따라 존재의 이동이 옮겨지는 순간 유리를 매개로 한 나는 우주적 존재로 승화되어 미세한 먼지처럼 살아서 고물대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자각은 유정임의 다른 시들 속에서도 자주 보이는 부분으로 이것은 자기 자신의 참모습에 다가서고자 하는 시인의 부단한 시적 열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그 여자만 보이지 말고
그 여자 마음속 지나
뻥 뚫린 허공이거나
천공에 고인 슬픔이거나
지독한 더께 앉았을 미움이거나
불씨 하나 겨우 남아 있을 법한 사랑이거나
기쁨이거나 그런
다른 것을 보게 해 달라
―「거울을 보기 전」 전문
거울 앞에서 시적 자아는 여성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 여자’만 보이지 말고 마음속 지나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허공, 슬픔, 미움, 사랑, 기쁨 등 다른 것을 보게 해 달라고 마법의 주문을 외우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이 만나는 여성적 자아들의 모습은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며 땅 끝으로 가는 대둔사 길목에 핀 동백꽃 속에 “홀랑 벗고 서 있는 그녀가 있네/눈밭에 초경처럼 點 點 . . .” 하듯 “끝에다 등을 대고 보니/끝이 없었네” 하며 무한한 여성의 몸을 찾고 있다. 그리하여 유정임의 시집 속에는 여성의 근원적 삶을 알려줄 수 있는 이미지로서의 여성의 몸의 일부인 젖가슴과 관련한 시적 이미지들이 자주 등장한다.
젖가슴이 뭉텅 잘려나간 어머니를 만나다
가운데로 길이 나 있다
그 속으로 들어간다
생살 잘라낸 상처가 너무 깊다
아물지 않은 상처에선
아직도 살점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다
흐르던 피가 햇볕에 바래 허옇게 말라 있다
나 지금, 그 길로 간다
성한 몸이 자꾸 아프다
―「잘려나간 산」 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인 나는 지금 젖가슴이 뭉텅 잘려나간 산 같은 어머니를 만나며, 가운데로 길이 나 있는 속으로 들어가며 성한 몸이 자꾸 아프다고 한다. 어머니의 딸로서 또다시 어머니의 길로 들어서며 자신의 몸도 어머니의 젖가슴이 뭉텅 잘려나간 것처럼 온몸이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여성의 모성성을 발견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화자가 모성을 느끼는 어머니의 젖가슴 이미지는 다른 시에서도 자주 보이고 있다.
그가 온종일
벚나무 아래서
옹알이하고 있는 벚꽃들을 세고 있다
하나 둘 열 백, 천, 천하나……
그놈이 그놈 같다
다시 센다
다시 센다
보다 못한 바람이
옹알옹알
꽃잎을 떨어
그의 품안으로 집어넣는다
그의 몸이 젖내로 향기롭다
―「벚나무 아래 쓰레기통」 전문
벚나무 아래 쓰레기통이 옹알이하는 벚꽃들을 그의 품안으로 집어넣으며 그의 몸이 젖내로 향기롭다는 이미지적 표현은 쓰레기통 같은 몸에서도 젖내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이 있기에 가능하며 그의 몸에 대한 관찰이 아주 세밀하고 섬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의 갈 곳 없는 더러운 것들을 모아 넣는 쓰레기통은 어쩌면 어머니의 모습과도 유사할 텐데, 이러한 어머니의 만신창이가 된 쓰레기통 같은 모습을 통해 모든 것을 감싸주고 받아줄 수 있는 어머니의 넉넉한 품을 연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계속해서 나타나는 젖가슴의 이미지는 생명의 에너지로서의 젖으로 비릿한 후각적 이미지로서 나타난다.
「수국」이란 작품에서는 수국의 모습을 마치 “탱탱 불은 젖가슴”에 비유하고 있다. 이 시에서 “두 손 가득 품으면/환하게 꽃으로 웃는다”는 것을 보았을 때 꽃의 탄생은 비릿한 젖을 먹고 자란 생명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모성의 힘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으로 원초적인 생명의 역동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인의 주체적인 시적 열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철쭉제」라는 시에서도 철쭉꽃 속에서 계집의 “깊게 파인 옷깃 사이로 꽃잎 같은 유두 보인다/확 피어나는 두 개의 젖무덤/담홍색이다”라고 하며 유난히 젖무덤의 이미지에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는 시인의 의식 속에서 모성성의 강한 회귀 본능과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여성 주체에 대한 자각과 발견은 유정임 시인의 인생을 활력 있는 긍정적인 생으로 변화시켰으며, 세계를 바라보는 자아의 시선이 생명의 경외감으로 충만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유정임의 봄나무에서는 비누 냄새가 난다 시집 속에 묻어 있는 시의 향기 속에 가을은 저만큼 멀어지며 깊어지고 있다.
박남용․
1968년 충북 옥천 출생
․1998년 ≪시세계≫로 등단․≪미네르바≫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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