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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새책읽기/김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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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29회 작성일 08-02-27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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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읽기|


■ 백가흠 창작집, 󰡔귀뚜라미가 온다󰡕(문학동네, 2005)


포르노그래피와 포에지 사이

김미정|문학평론가



하드코어와 극사실주의

근래, 감각의 직접성에 호소하는 듯한 소설들이 부쩍 눈에 띈다. 마치 엽기라는 이름이 풍미하던 시절이 재래(再來)한 것만 같다. 이들은 가히 신체의 유물론이라고 일컬을 만큼 몸(body)에 대한 인식론적 변화를 보여주고, 그만큼 새로운 감각론의 한 경지를 연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성스러움이나 고상함과 같은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거친 숨결의 정조가 지배적이다. 김숨, 편혜영, 김유진 등의 소설 세계를 특히 이 맥락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다.
백가흠의 소설 역시 감각론에 관한 한, 이와 비교하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횟감을 앞에 놓고 칼이 살과 닿는 선연한 느낌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부터, 성애와 폭력을 더없이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감각에 이르기까지, 백가흠의 감각론은 분명 읽는 이로 하여금 어떤 정서적․신체적 반응의 회로를 만들어낸다. 단, 앞서 언급한 작가들의 소설과 뚜렷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백가흠의 소설은 구체적인 현실에 밀착해 있으면서 서사의 골격을 뚜렷하게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즉, 근래 신감각론으로 묶일만한 소설들이 대개 추상적 시공간과 탈성화(desexualisation)된 캐릭터들을 토대로 그려지는 경향과 달리, 백가흠의 소설은 지극히 현실적인 시공간과 실제 일어날 법한(그리고 실제 현실에서 택한 소재인 듯한) 사건들 및 구체적인 캐릭터를 토대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으로 인해, 우리는 은밀한 무의식과 대면하게 되거나 그로 인해 불편한 정서적 교란을 체험하게 되기도 한다. 이 불편한, 그리고 감내해야 하는 정서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장면에서 연유되기도 한다.
“남자는 무릎을 꿇고 여자의 엉덩이 앞에 선다”는 문장과, “달구의 늙은 엄마가 달구에게 초저녁부터 매를 맞기 시작한다”는 문장(「귀뚜라미가 온다」)이 나란히 배열된 세계. 성교와 폭력이 동시에 나란히 결합하는 이 장면은, 근친상간의 상징성까지 함의하고 있다. 성교와 폭력의 결합, 그리고 금기시된 성적 코드가 범람하는 이런 구도는, 곧 포르노그래피의 한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구도뿐 아니라, 장애를 가진 약자들이 ‘멀쩡한 사람’에게 성적 착취를 당하는 일상의 반복(「배꽃이 지면」), 성기 절단과 피의 향연에 대해 “조화로운 음들을 뿜어내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세계(「2시31분」), 가족을 살해하고 자신마저 목숨을 끊는 비정한 가장(「구두」), 동성애와 매춘의 구체적인 현장(「밤의 조건」), 강간과 보복의 현장(「배(船)의 무덤」)을 연이어서 접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안의 최소한의 도덕률과 금기의 잠금장치가 퍽 허술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곧 어떤 당혹감과 팽팽하게 맞서게 된다. 게다가 이것은 단순한 포르노그래피라기보다 어딘가에서 풍문처럼 스쳐간, 신문 사회면 한 구석에서 간간히 보았던, 그러나 곧 귀를 막고 눈을 가리며 외면하고 싶은 어둡고 야만스런 현실들이기도 하다. 즉, 백가흠의 소설에서 느끼는 불편함과 당혹감은, 그의 하드코어적 묘사가 알레고리라는 수사나, 승화와 탈승화라는 정신분석학적 예술론의 성채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극사실주의적 소산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사실적인 너무나 사실적인…….

황폐한 세계, 황폐한 사랑
「배꽃이 지면」에서 성적으로 착취당하고 현대판 노예가 된 장애여성이나, 「구두」에서 생계 때문에 매춘하는 아내, 「밤의 조건」에서 공모한 매춘으로 생계를 잇는 부부, 「귀뚜라미가 온다」에서 불우한 공생 관계에 있는 모자(母子) 등은, 어둡게 활자화된 신문 한 귀퉁이를 찾지 않아도 지금 우리 사회의 어두침침하고 황폐한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 여자들이 대개 깊은 마음의 상처를 갖고 있거나 아프거나 밑바닥 인생들이라는 점, 그리고 남자 주인공들 역시 대개 마초적인 가학성과 거리가 먼 유약한 캐릭터라는 점. 유아적이기까지 하고 여자들에게 존대를 하거나 심지어 말을 더듬거리기까지 하는 소심한 인물들이라는 점만으로도, 이 소설의 가학과 피학의 구도가 단순히 남녀간 구도라기보다는 남성성으로 축조된 세계와 그 세계 속 무기력한 개인의 구도처럼 읽을 수도 있다.
아내의 매음을 주선하기 위해 손수 채팅을 하고 “조금 쉬었다가 돈 벌러 가라”(「밤의 조건」)고 하는 남편이나 술집 작부를 극진히 간호하는 횟집 남자의 모습(「광어」)은, 마치 식민지 시대 한 소설가가 매춘하러 가는 아내의 머리를 빗겨주는 남편을 보여주거나 ‘들병이의 철학’을 말하면서, 피폐한 당대 농촌 현실에 대한 애정을 우회적으로 보여준 것과 오버랩 된다. 밑바닥에서 어떻게라도 살아보겠다는 사람들에 대한 대변인(代辯人)의 모습. 즉, 이 어두운 세태에 어떻게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비정하게, 그러나 한편으로 연민의 시선을 놓지 않는 백가흠의 집요함은, 불편한 현실을 상기하거나 맞서고 싶어 하지 않는 우리의 정서를 불편케 한다는 의미에서, 어떤 사회학적 보고(報告)와 고발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효용론적 기능에 개재(介在)된 논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의 문제가 남는다.
포르노그래피의 형식에서 어떤 역학구도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포르노그래피 특유의 천편일률적인 역학관계를 재현하면서 재생산되는 어떤 진부함이란, 동의하기 힘든 것이기도 하다. 백가흠 소설의 가학과 피학의 구도는 분명 표면적으로는 남성의 가학적 권력과 여성 피해자 사이의 긴장 속에서 형성되는데, 여기에서 우울한 세태의 묘사나, 희망 없는 미래에 대한 변주만을 볼 뿐이라면 우리의 당혹감은 더 깊은 심연에 빠지게 될 듯하다. 이를테면, 아내의 성적 자율권을 대리해서 거래하는 남편(「밤의 조건」), 아내의 생계형 매춘을 정죄하고, 치매 노모 및 아이의 목숨까지 심판하는 남자(「구두」), 술을 빙자해서 노모를 폭행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아들(「귀뚜라미가 온다」)들이 보여주는 것은 ‘남성의 사랑’(김형중)의 일종이기도 하지만, 전형적으로 여성에 대한 성적 지배와 가족 구성원에 대한 배타적 소유를 보여주는 가감 없는 풍경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포르노그래피를 넘어선 포르노그래피, 현실 묘파를 넘어서는 힘에 관해 말할 수 있으려면, 이 폭력과 성교를 결합시키는 자의식에 관해 먼저 물어야 하지 않을까. 소유로서의 사랑, 혹은 연민/보호의 관계를 상정하는 사랑이 한편으로 여성에 대한 성적 지배를 근간으로 하는 가부장적 질서의 산물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우리는 점검해 두어야 할 것이다.
아들이 술을 마실 때마다 언제나 매 맞을 준비를 하고 있고, 폭행의 악몽을 무사히 견뎌낸 다음 날이면 다시 아들을 위해 아침상을 정성껏 차리는 도식화된 가학과 피학의 구도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극단적이고 황폐한 사랑의 방식이 아니던가. “더욱 강한 자극을 원하는 욕구에 대한 호기심”이나 “잃어버렸던 감각을 일깨”(「밤의 조건」)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감각론에 관한 이 낯선 경지는 더 큰 현실 돌파력과 감응력을 발할 수 있지 않을까. 포르노그래피가 우리 안의 부조리한 격률과 위선을 겨냥할 뿐 아니라, 고유의 미학과 정치성까지 내장하고 있을 때 우리는 당혹감을 기꺼이 자청하며 항유하게 되지 않을까.

포르노그래피와 포에지 사이
마지막으로, 하드코어적 감각론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희미할 수밖에 없는 어떤 세계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하드코어적 핍진성이나 지독한 산문정신과는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어떤 시적 섬세함의 일종인데, 지금까지의 테마와는 또 다른 축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침묵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고, 눈을 감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삶의 미세한 결이 있다.
이를테면, “물고기들이 죽기 전에 내뱉는 그 바람”(「광어」)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횟집 사내의 모습이나, “먼지와 때가 굳어 가죽의 일부가 되어버린 구두”(「구두」)를 어루만지는 눈먼 여인의 정서, “자신이 침묵하지 않으면 겨울 산중의 소란스러움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전나무숲에서 바람이 분다」)는 것을 말하는 정서는 분명, 하드코어적으로 묘파해내야 하는 번잡스러운 산문의 세계는 아니다. 그 세계는, ‘더 많은 자극’ ‘더 생생한 감각’을 가속적으로 요구하는 지금-여기와는 정반대의 세계다.
우리는 소설을 다 읽은 연후에야 “내 꿈은 시인이 되는 거였다”라는 작가의 소박한 목소리를 뒤늦게 발견할 터였으나, 숙연하고 가슴 서늘한 이 구절들은 일찍이 우리의 밑줄 목록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드코어적 묘파력 너머의 미학과 정치성(政治性)을 요구하는 반대편에는, 눈멀고 침묵할 때만 진정 보고 들을 수 있는 시(詩)의 세계에 대해 더 엿보고 싶어지는 복화술의 표정도 있을 것이다.
“불안하지만 희망 같은 것이 보이는 것 같다. 그것이 여자를 겁나게 한다”(「밤의 조건」)고 여기는 비관의 세계. 그 세계를 이미 보아 버렸을지라도, 세상의 미미함에 대해 귀 기울이는 애정과 섬세함은 어떤 다른 세계의 흔적을 계속 남겨둘 터이다. 그리하여 장차 하드코어 포르노그래피와 포에지 사이, 어떤 터닝 포인트가 찍힐지 사뭇 궁금하게 되는.



김미정․
2004년 ≪문학동네≫로 등단

추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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