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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새책읽기/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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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종 작품집 너는 마녀야(민음사, 2005)
이재웅 작품집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실천문학사, 2005)
가벼움과 냉혹함에 맞선 글쓰기
박진영|문학평론가
1. 세상의 온도(溫度), 냉정과 냉혹
벤야민은 삶 속에서가 아니라 문학적으로 구성된 언어를 통해서만 정신의 순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때 정신의 순수성이란 사회적 실천이 아닌, 냉철한 언어를 통해 접근 가능한 ‘천둥과 번개’의 순간을 의미한다. 반짝 빛나며 여운을 남기는 신비한 체험의 순간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을 뒤집어 삶 속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일까. 자본의 논리가 가속화되고 있는 21세기에 ‘순수성’이란 말은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 걸까. 후기자본주의로의 질주를 계속하는 롤러코스터 위에서 그러한 경험은 매우 낯선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말해보자. 아이의 천진난만함은 어떠할까? 아니면 자신을 해방하려는 열정의 힘은? 어린아이와 예술가와 광인은 흔히 순수성을 체현하는 자들의 상징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현종과 이재웅의 신간을 통해 볼 때 상황은 여의치가 않다.
너는 마녀야(민음사, 2005)와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실천문학사, 2005)는 각각 ‘소설가’와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다. 두 작품에는 소설가와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이 둘은 ‘연애’와 ‘가난’을 소재로 다루면서, ‘가벼움’과 ‘무거움’의 상반된 문체적 특징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은 소설가소설이나 성장소설의 전통적 소설문법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소설은 유예되며 성장은 미완되는 현실. 혹은 성장 불가능한, 직업적 글쓰기가 부재하는 현실. ‘나’의 글쓰기가 환전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무직”으로 취급당할 때, ‘나’는 마녀가 될 수밖에 없다(너는 마녀야). 그리고 열두 살짜리 소년이 스스로를 “늙은 소년”이라 부를 때 소년은 성장할 수 없다(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 문학에 모든 것을 건 ‘나’에게 이철수는 좀더 실용적인 한의대 공부를 해보라고 충고하고, 소년은 “눈물을 흘려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난 열 살 이후부터 울어본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오현종과 이재웅의 소설집은 소설가와 아이의 정체성을 위험에 내모는 ‘바깥’의 현실에 질문을 던짐으로써 반(反)소설/반(反)성장의 의미를 탐구하는 텍스트가 된다.
소설이 픽션인 동시에 팩트(fact)에 기반한 장르라 할 때, 이들이 주목하는 사실적 요소는 ‘세상의 온도(溫度)’와 관련을 맺고 나타난다. 너는 마녀야가 세상의 가벼움과 쿨(cool)함에 맞선다면,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는 세상의 냉혹함에 맞선다. 소설이 시대를 반영한다는 말은 너무 진부한 명제가 돼버린 듯하다. 그러나 모방에 입각한 재현론의 관점이 아니더라도 소설엔 시대의 아우라가 드리워져 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이를테면 오현종과 이재웅은 당대의 온도(溫度)를 측정한다. 오현종의 소설이 젊은 세대의 발랄한 화법을 통해 세상의 ‘냉정함’을 이야기한다면, 이재웅의 소설은 차갑고 건조한 문체를 통해 세상의 ‘냉혹함’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떻게, 냉정하고 냉혹한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가벼움’은 우리 시대의 익숙한 아이콘이 되어 왔다. ‘쿨(cool)함’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젊은 세대의 감수성을 대표하는 명사로, 때로 스타일과 태도의 세련됨을 뜻하기도 한다. 진지함이 대상에 밀착된 단일한 태도를 환기한다면, 가볍고 쿨함에는 대상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가짐으로써 그에 구속되지 않으려는 태도가 표방되어 있다. 너는 마녀야의 이철수는 이러한 태도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런데 너는 마녀야에서 주목할 점은 이것이 개인의 차원이 아닌 당대의 특징으로 보편화된다는 점이다. 쿨한 연애를 조장하는 가벼움의 시대가 그것이며, 돈 못 버는 소설가를 “비실용적인 인간”으로 규정하는 “냉정한 한국 사회의 현실”이 그것이다. 이에 비해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는 물질적 풍요로움의 시대에 절대적 빈곤에 처해 있는 아이를 통해 가난의 문제를 천착한다. 상품물신에 붙들린 소비자본주의시대에 가난은 오히려 낯선 소재일 수 있다. 이재웅은 감상이 틈입하지 않는 냉철한 시선으로 가족제도를 통해 유전되는 빈부의 문제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희망 없음의 냉혹한 현실을 고통스럽게 주시함으로써 환상적 소설이 다수 창작되는 흐름 속에서 사실주의의 계보를 이어간다.
2. ‘가벼움’의 시대에 마녀-되기
오현종의 두 번째 작품집 너는 마녀야는 사랑에 관한 소설이자 소설에 관한 소설이다. 작가 특유의 가볍고 경쾌한 문장을 통해 사랑에 대한 여러 에피소드들이 감각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연애서사의 다른 한편엔,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이 빈번히 드러난다. 그러나 너는 마녀야는 연애와 소설 자체를 겨냥하는 소설은 아니다.
서른 살의 ‘나’는 이철수를 사랑하지만 ‘나’의 사랑은 늘 퇴짜를 맞는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는 늘 그의 눈치를 살피고 백번 싸워 백번 지는 싸움을 한다. 또 때로는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철수가 소개시켜 주는 다른 남자를 만나기도 하고, 일부러 치과에 가 아프지도 않은 사랑니를 뽑는다. 그러나 사랑 앞에서 기꺼이 노예가 되는 ‘나’에 반해, 이철수는 “난 누가 부담 주는 거 싫어”라고 단호히 말하는 인물이다. “일에 있어 완벽하고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에게 있어 연애와 결혼은 별개의 것이다. 작가는 그런 이철수를 통해 “서로 상처 받지 않을 만큼만 가까운 사이가 가장 매력적인 관계로 여겨지는, 섹스는 자유로워도 사랑은 자유롭지 않은 세상”을 그린다.
보편화의 위험을 무릅쓰자면, 최근의 문화적 흐름은 이러한 ‘쿨함’이 숭상되어 온 시대적 분위기와 발을 맞추고 있다. 1990년대는 흔히 개인의 일상과 욕망이 새로운 키워드로 부상한 시대였다. 그 속에서 가벼운 쿨함은 이전 시대의 ‘무거움’에 대한 반대급부로 자리하면서, 얼마간 조장되어 온 측면도 없지 않다. 소설에서 역시 1990년대적 ‘댄디’나 2000년대적 ‘쿨걸’의 출현이 목도되어 왔다. 윤대녕과 정이현 소설의 주인공들이 이들을 대표한다. 그런데 오현종은 ‘댄디’와 ‘쿨걸’이 표상하는 이러한 ‘냉정함’에 대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다. 오현종은 궁극적으로 시대의 ‘가벼움’에 문제를 제기한다. 자신을 구속하는 부담스러움은 딱 질색인 이철수의 사랑이 그러하며, “가볍지 못한 것은 신파로 간주되는 세상”이 그러하다. 이때 ‘나’는 “차가운 피”가 흐르는 “냉혈한 이철수”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또한 ‘나’는 재능이 없더라도 글쓰기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아니라고 말해주면 글 쓰는 걸 그만두겠어요? 널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하면 그래 안녕, 하고 바로 물러나겠어요?”라고 묻는 메메 양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쓰기에 “모든 걸 걸고 싶은 내 의지”는 결국 이철수에 대한 ‘나’의 사랑과 평행하는 열정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볼 때 너는 마녀야에서 사랑과 소설은 결국 하나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하나의 ‘열정’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것은 쿨한 가벼움에 저항한다. 삶의 실제 모습 또한 쿨하기보다는 너절하고 비루하며, 가볍기보다는 지겹도록 무거운 것에 가까운 것인지 모른다.
“그럼, 사랑이 절대적인 게 아니라면 소설이 무슨 의미야. 사랑조차 절대적인 게 아니라면 어떻게 소설을 써.”(100쪽)
미칠 듯한 사랑과 미칠 듯한 증오, 마니아를 모르는 사람들을 경멸해. 그 경멸이 끝까지 나를 살게 하겠지.(103쪽)
이러한 “절대적인”, “미칠 듯한” ‘뜨거움’은 마녀의 이미지를 불러온다. 이 세상엔 마니아적 열정이 결핍되어 있다. 마녀는 그런 세상을 경멸한다. 그런데 이러한 메시지는 단편 「세이렌」(세이렌, 이룸, 2004)에서 이미 선보인 바 있다. 동명의 주인공과 동일한 상황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너는 마녀야는 「세이렌」이 확장된 장편이라 할 수 있다. 「세이렌」의 ‘김율미’ 역시 이철수를 “심장이 없는 남자”로 표현하며, 이철수는 “터무니없는 너의 열정이 부담스러워” “너를 식혀주겠”다고 말한다. 작가의 목소리는 너는 마녀야의 다음 대목에서 좀더 분명해진다. “사람들은 모두 가벼운 것을 바라지만 나는 그런 거라면 원하지 않는다”가 그것이다. 이제 ‘마녀’는 글을 쓴다. 환전 가능한 실용성만이 최고덕목으로 인정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경매에 못 내놓을 금 간 항아리”로 자조하면서도 글을 쓴다. 너는 마녀야에는 오현종이 실제 발표한 단편들의 제목이 ‘나’의 글로 삽입되어 있어 흥미롭다. 마녀가 원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뿐이다.
사람들은 모른다. 내가 많은 것을 원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내가 원하는 건 나를 이해해 줄 단 한 명, 그리고 늙은 장인이 생(生)의 끝에 얻은 날렵한 단검처럼 견고한 한 권의 책이라는 걸.(176쪽)
마녀의 글은 창조자의 권능과 기억(기록)하는 자의 영원성을 추구한다. ‘마녀’는 결국 ‘세이렌’의 다른 이름이다. 뱃사람을 유혹하는 세이렌의 영원한 노래. 세이렌의 노래는 목숨을 걸지 않고는 듣기 힘든 치명적인 것을 상징한다. 너는 마녀야를 통해 오현종이 제시하는 이러한 마녀성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시대를 넘어 다음과 같은 도전적 선언으로 이어진다. “좋아. 나는 마녀야. 너의 피를 쪽쪽 다 빨아먹을 때까지 물러나지 않겠어.” 마녀가 탄생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마녀는 피를 먹는다. 마녀는 ‘너’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녀는 현재의 찰나적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아무것도 잊지 않는다.” 그녀의 꿈은 “계속 살아 있게 하는 자”를 지향한다. 글로써 기록하는 자. 망각에 저항하는 자. 이는 마녀의 글쓰기가 기원하는 또 다른 의미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3. 소년은 자라지 않는다
이재웅의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는 가난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사실주의적 문체에 기반해 독자를 가난의 극한상황으로 데려간다. 집 없는 고아, 혹은 가난이 지긋지긋해 가출하는 사람들이 그 예이다. 그러나 극단적 상황의 설정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과장되지 않은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다. 세상의 진실을 이미 알아버린 ‘늙은 소년’의 담담한 고백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나’의 조로함은 물론 가난에 기인한다.
누구에게도 말은 안 했지만 난 이미 늙은 소년이었다. 나는 믿어야 할 말과 믿지 않아야 할 말을 구분할 줄 알았고, 항상 그러려고 노력했다. 누가 그것을 가르쳐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배웠다. 굳이 그 스승을 지명해야 한다면 ‘가난’이었다. 할머니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할머니와의 삶이 싫었다. 그녀는 도시 빈민들 중에서도 가장 극빈자에 속했다. 정부의 보조금이나 물품 따위로도 그녀의 가난을 해결해줄 수 없었다.(17쪽)
작가는 단순노동 대신 문화산업이 팽배한 21세기에도 가난이 여전히 상존함을, 그리고 증대된 빈부격차 속에서 상대적 빈곤의 박탈감은 오히려 배가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에서 가난은 단순한 경제적 조건에 한정되지 않는다. ‘나’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왕따”가 된다. “학교에서의 나는 유령과 같았다.” 친구가 있다면 “난 가난해! 가난해! 가난해! 가난해서 미칠 것 같아!”라고 외치는, 창녀가 돼 돈을 벌겠다는 완주와 고아원에서 탈출한 후 영양실조로 손바닥 껍질이 하얗게 떨어지는 태호가 있을 뿐이다. 작가가 주목하는 가난의 현실은 무엇보다 세상으로부터의 철저한 소외를 야기하는 일상적인 것에 속한다. ‘나’는 할머니가 죽은 후 누나와 살게 되지만, 매춘부인 누나와 정부이자 포주인 곽호 아저씨가 함께 지내는 ‘성보아파트 307호’에서 낯선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다. 변태성욕자를 위한 기구를 갖추고 전문적인 성매매를 하는 그곳은 ‘나’의 집이라기보다는 ‘나’를 떠돌게 하는, 아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다. ‘나’의 경우 “어린 시절은 인생의 황금기”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증오를 배우는 형벌의 시절이 된다. 그리고 뒤틀린 증오의 감정은 ‘나’를 세상으로부터 더욱 고립시킨다. “난 갈 곳이 없어. 할 것도 없구. 여기 앉아 있는 것밖엔 할 게 없어.”라는 태호의 말 역시 세상과 철저히 차단된 상황을 보여준다. 이들에게 있어 가난은 세상과의 모든 통로를 차단하는 절대적인 조건인 것이다.
태호는 “난 굶어죽을지도 몰라.”라고 말한다. 공원에서 노숙하며 빈병을 모으는 태호는 더 이상 ‘집 없는 천사’가 아니다. 집이 없으면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 가족이 없으면, 돈이 없으면 아이는 ‘아이다움’을 보장받지 못한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러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사회의 냉혹함, 자본주의의 그것을 환기한다. 때때로 작품에 빈/부에 의해 선악을 평가하는 작가의 이분법적 인식이 노출되기도 하지만, 가난의 의미를 탐구하는 작가의 시선은 전방위적이며 가열차다. 또한 가난을 본격적으로 다루면서도 감상과 신파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서늘한’ 문체로 인해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현실의 냉혹함을 직시하도록 이끈다. 작가의 해석이 가급적 배제된 건조한 단문의 문장들이 그것이다.
우리는 소설의 처음부분과 마지막에 나오는 동화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서로 다른 이야기로 구성된 한스의 동화는 현실의 알레고리 역할을 한다. 그것은 또한 아름답고 희망적인 이야기에 대한 작가의 저항을 담고 있다. 결말부분에 제시된 “한스의 밤의 여행”은, 한스가 집을 나와 만난 무서운 동물들에게 “착한 마음” “따뜻한 마음” “즐거운 마음” “기쁜 마음” “행복한 마음”을 나누어줌으로써 집에 무사히 돌아오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거짓말이야, 순 거짓말이야.”에서 드러나듯, 현실의 거짓된 조작일 뿐이다. 세상은 ‘마음’이 아닌 ‘물질’을 요구한다. 할머니와 영등포 쪽방에 살 때 ‘나’는 영양실조에 걸렸지만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너무나 풍요로워서 그 말을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들에게 무관심하며 동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차츰 증오로 가득 찬 악마로 변해간다. 누나는 문호를 찌르고 도망가지만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알기에 다시 그에게 돌아간다. 그들은 모두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 작가의 암울한 진단은 다음 인용을 통해서도 반복된다.
미래에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십 년 후에도 그의 인생은 세상이 조금도 주목할 가치가 없는 인생일 것이다. 물론 학교에서는 그 반대로 가르친다. 꿈을 이룬 자는 세상을 움켜쥔다! 꿈이 인생을 바꾼다! 하지만 늙은 소년은 그 확률이 너무 작으며 자신이 그 확률에 포함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안다.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아이들은 언제나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학교에 나와 좋은 점수를 받고 선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아이들이다. 그는 송봉권처럼, 달수 아저씨처럼, 곽호 아저씨처럼, 아빠처럼, 할머니처럼 늙을 것이고, 죽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그의 죽음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늙은 소년은 그 모든 것을 알고, 그 운명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안다.(111쪽)
그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소작농이었다. 친엄마는 소작농의 아내로 죽어갔다. 아빠와 새엄마는 도시 빈민이었다. 새엄마는 가난이 싫어 도망갔다. 자신도 가난이 싫어 도망쳤다. 열네 살이었다. 십 년이 흘렀다. 하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가난했다. 빚이 그녀를 구속하고 있었다.(210쪽)
결국 다른 미래가 없는 암울함이 이 작품의 전체 분위기를 지배한다. 이러한 출구 없음은 작가의 비관적 세계인식을 대변하는 동시에, 가난이 유전되기에 변두리의 소외된 삶 역시 극복되기 어려운 시대의 우울한 자화상이 된다. 이처럼 빈곤의 악순환이 중단되지 않을 때 가난은 운명으로 주어진다. 제2의 유전형질이 되듯 대물림되는 가난은 자본주의사회의 그늘을 이룬다. 사유재산의 안전한 전승을 담당하는 가족의 울타리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가난이 운명적 조건이라면 ‘나’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우리는 나쁘지 않아요. 세상이 더 나빠요.”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비관론은 작가의 냉정한 시선에 의해 독자의 고통을 촉발한다. 이재웅의 작가적 관심은 ‘거짓 희망’에 있지 않다. 그는 수많은 가벼운 욕망들이 부유하는 현실의 외진 구석, 한없이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그래서 그는 동시대의 많은 젊은 작가들 속에서 낯설고 외롭게 존재한다. 해피엔드의 동화를 ‘가짜’의 것으로 뒤집는 잔인한 리얼리즘이 그것이다. 이것이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의 잔혹함인 동시에, 작가가 바라보는 현실세계의 잔혹함을 입증해준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현실의 냉혹함을 과장 없이, 감상 없이 직시하게 하는 이 작품의 힘으로 기능한다.
박진영․
1974년 서울 출생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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