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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새책읽기/박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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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051회 작성일 08-02-27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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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읽기|


■ 오창은 비평집, 󰡔비평의 모험󰡕(실천문학사,2005)



실천적 ‘힘’과 윤리학의 비평

박대현|문학평론가



1. 몰락한 80년대를 복원하는 ‘힘’의 비평
오창은의 첫평론집 󰡔비평의 모험󰡕은 80년대의 에토스(ethos), 다시 말해 ‘운동으로서의 문학’을 지향하고 있다. 80년대는 억압된 정치적 상상력의 분출로 인하여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이 적극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시대이며, 특히 87년의 민주화운동이 광주민주항쟁의 질곡을 딛고 일어선 정치운동의 절정이자 상징으로 자리잡은 ‘위대한 각성’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변혁과 혁명의 기운마저 감돌던 투쟁의 시대는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몰락해버린 거대담론에의 짙은 향수와 좌절, 그리고 ‘환멸’은 ‘적이 사라진’ 90년대를 사인화(私人化)된 공간 속으로 밀어 넣고 말았다. 그리하여 90년대 문학은 80년대의 흔적을 소제함으로써 ‘내성’(內性)을 향해 더욱 깊이 침잠했던 것이다.
오창은은 90년대 ‘내성의 문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그는 내성의 문학을, 첫째, 공적 영역에서 탈각한 개인의 문학, 둘째, 내면 심리의 세밀한 결만을 추적하는 탐미의 문학, 셋째, 정치적 허무주의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사적인 문학으로 규정한다.(23) ‘내성의 문학’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그의 비평이 80년대의 문학적 신념에 기반한 데에 기인한다. 80년대 운동 문학의 최전선이었던 정도상을, 내면성에 기원을 둔 근대소설이 비로소 “공동체의 운명을 재현하는 서사시로 대우받”(44~45)은 한 예로서 상찬하는, 다소 상기된 평가 역시 80년대의 문학이념에서 비롯됨은 물론이다.
정도상을 통해 80년대에 가능했던 “공동체의 기억과 일체감”(45)을 환기하고자 하는 오창은의 비평작업은 80년대의 유토피아적 비전을 회복하고자 하는 고투에 다름 아니다. 문학의 윤리적 비판과 비전을 통한 사회의 변혁은 공동체의 결집에 의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며, 바로 이곳에서 ‘힘’의 문학이 탄생함을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유토피아적 비전의 상실과 내면화된 체념을 이겨내기 위한 문학의 ‘힘’과 ‘용기’가 그의 비평 속에 건강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식의 결여와 빈곤의 문제는 그의 비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공적 사안이다. 울리히 벡(Ulrich Beck)의 말을 빌리자면, 개인화가 진행되면서 계급적 공동운명체는 사라지고 개인적 무능과 실패라는 ‘각자의 일대기’를 써내려가야만 하는 ‘개인화의 저주’가 시작된 것이다. 만인에 의한 만인(萬人) 및 만사(萬事)와의 투쟁의 가속화! 따라서 개인적 무능감은 “사적 자유를 중심으로 사회체제가 합리화됨으로써” 개인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한 양태”(28)임을 오창은은 정확하게 지적한다. 바로 이러한 위기의식이 오창은 비평의 윤리적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소멸해버린 80년대의 길을 새로운 미래의 길로 회복함으로써 인간의 기본권과 평등이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우리 사회에 ‘개혁’과 ‘변혁’의 불을 다시 지피고자 한다. 이처럼 그의 비평은 아직 달성되지 못한 우리 사회의 평등과 재분배의 문제를 재차 환기하고 실천적 의지를 내비친다는 점에서 건강하고 올곧은 ‘힘’의 비평이라 할 수 있다.


2. ‘사적 자유’의 경계와 ‘사회적 자유’의 옹호
대개 비평집은 주문 제작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비평가의 본질적인 비평관점은 권두의 비평문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권두에 실린 「사적 자유의 가면과 ‘힘’의 문학」은 󰡔비평의 모험󰡕의 전모를 밝혀준다. 90년대를 ‘내성의 문학’ 시대로 규정하고, “내성의 문학이 갖고 있는 긍정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사적 자유에 대한 예찬’으로 고착화되는 것에는 비판적”(18)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문학적 소명의 근거를 ‘사적 자유’가 아닌 ‘사회적 자유’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80년대 문학의 흔적을 지움으로써 문학적 헤게모니를 쥐려 한 ≪문학동네≫를 달갑지 않게 바라보고, 신경숙, 장정일, 윤대녕, 정이현, 천운영의 문학적 한계를 “‘사적 자유’에 대한 탐닉적 추구”로 인해 발생하는 “세계에 대한 주관적 인식”(40)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주관적 경험을 절대화하는 닫힌 세계관은 타인에 대한 의도하지 않은 폭력일 수도 있다”(40)는 것인데, 결국 ‘내성의 문학’은 그 긍정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사적 자유에 탐닉하는 ‘닫힌 미학’으로서 타자에 대한 폭력성을 방기하고 있다는 결론이다.
오창은은 빈곤문제를 토포스(topos)로 한 윤성희, 배수아를 비중 있게 다루면서, “일상의 보수화 경향과 빈곤에 대한 숙명적 체념에 대항하는 것이 바로 공론 영역에서 행해야 할 문학의 도리이기도 할 것”(32)이라는 문학의 정향점을 제시하고 있다. 빈곤의 문제는 한국사회가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임에 틀림없으며, 따라서 소외계층이 당면한 생존 문제의 문학적 형상화는 작가의 지적․도덕적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 특히 오창은의 지적처럼 사적인 영역으로 고립된 빈곤의 문제가 개인에게 가하는 ‘합리적 폭력’이 신자유주의적으로 강화되고 체제화 됨에 따라, 빈곤 문제의 공적 이념화는 매우 중요한 시대적 사안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는 90년대 이후 과잉된 사적 자유를 경계하면서 사회적 자유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오창은의 비평은 이런 점에서 매우 비판적이고 윤리적이다. 이러한 미덕은 80년대의 비평적 자산을 상속받음으로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비평의 윤리성은 ‘경직성’의 한계를 노출하기도 한다. 천운영의 󰡔명랑󰡕(2004)이 “현대사회에 대한 심도 깊은 탐구일 수도 있지만, 현실에 박은 탐침(探針)이 무디어지는 순간 개인만을 드러내는 글쓰기에 멈춰버릴 수도 있다”(23)는 식의 부정적 평가는 ‘내성의 문학’에 대한 편견이 작용한 비평의 경직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천운영의 󰡔명랑󰡕이 지니는 가능성에 대한 평가는 유보한 채, “현실에 박은 탐침(探針)이 무디어지는 순간”이라는 ‘가정’을 통해 천운영의 글쓰기를 “개인만을 드러내는”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성급함은 ‘내성의 문학’에 대한 단순한 우려의 수준을 넘어선 지나친 편견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그리고 오창은이 제시한 비평적 관점으로서의 ‘사회적 자유’는 두 가지 난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사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의 개념이 매우 추상적으로만 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회적 자유의 범주 설정 문제는 그다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모든 인문학적 개념의 경계가 끊임없이 미끄러지듯이 사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의 경계 또한 다분히 착종적 영역이 광범위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경계는 상보적이면서, 상대적이다. 부르디외 식(式)으로 말해서, 사적 자유는 그 장을 구성하는 외적 구속 사이의 타협의 결과이기 때문에 사회문화적 상황에 따라 사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의 경계는 얼마든지 유동적일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자유’의 이념이 내포하는 당위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오창은이 말하는 ‘사회적 자유’는 그 구체성이 확보되지 않은 채 비평적 잣대로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사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의 긴장”(26)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논리 없이 행해지는 비평은 ‘재단비평’(裁斷批評)으로 전락함으로써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단순한 ‘선언적’ 문제제기로만 머물 우려가 있다.
둘째, 사적 자유의 극단적인 폐해만 부각시킴으로써 ‘내성의 문학’이 지니는 문학적 가치를 의도적으로 폄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적 자유’의 ‘탐닉적’ 추구에 대한 비판과 경계는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내성의 문학이 공적 이념으로부터 전적으로 탈락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레비나스의 말을 빌리자면, 내면에 대한 깊은 철학적 성찰은 공동성으로서의 죽음을 통과할 때, 타자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이해에 다다르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성의 문학은 타자의 형이상학을 통해 사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를 포괄하는 내적 통찰의 기회와 실천의지를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이다. 80년대 문학의 두드러진 한계는 바로 사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를 아우르는 형이상학의 부재였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는 공적 이념에의 과도한 집착이 낳은 한국문학의 기형적 모습이기도 하다.

3. ‘비평의 모험’과 ‘신성한 숲’
오창은의 󰡔비평의 모험󰡕은 남진우의 󰡔신성한 숲󰡕(1995)을 필연적으로 환기시킨다. 꼭 10년의 간격을 두고 간행된 이 두 비평집은 오창은의 어법대로 한다면 각각 사회적 자유와 사적 자유에 근거한 비평집이다. 󰡔비평의 모험󰡕은 90년대 내성의 문학에 대해, 󰡔신성한 숲󰡕은 80년대의 거대담론에 대해 대타의식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진우는 “문학은 때로 시대적 청원을 외면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시대에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소유”한 시인들에 대해 천착한다. 그리하여 “일상경험을 초월한 초역사적 정신세계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시인들이 “지상에서 발을 떼기를 두려워했던 1980년대 다양한 비평 세력들의 공동의 표적이 되어 집중포화를 받고 공중 분해된 뒤 수장된” 생생한 사례를 폭로한다. 80년대의 현실논리에서 ‘내성의 문학’은 배제되고 억압되고 소외되었던 타자임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90년대 문학이 “개인의 사적이고 말단적인 엄살”(방현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술은 ‘내성의 문학’에 대한 80년대의 억압 논리의 연장인 것이다. 이는 또한 황석영이 말한 바 있는 한국문학에 내재된 ‘이중의 억압’을 떠올리게 한다. 문학에 대한 군사독재의 억압이 개인의 내면과 감성에 대한 리얼리즘의 억압을 낳았다는 것이다. 피억압이 새로운 억압을 발생시키는 아이러니는 한국문학의 불행이자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오창은의 󰡔비평의 모험󰡕은 남진우의 󰡔신성한 숲󰡕의 대척점에 서 있다. 그것은 전복의 힘으로 충일된 상태다. 그는 ‘신성한 숲’이 지니고 있는 형이상학적 내면성을 가능하게 하는 ‘사적 자유’를 유보하고 ‘사회적 자유’를 향해 나아가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적 소명을 따르기 위해서, 한국 문학의 사적 자유는 반드시 유보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오창은은 사적 자유의 부정적 측면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상호 연관돼 있는 사건의 고리를 끊음으로써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려는 것은 개인의 왜곡된 무의식이다. 때로는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필연성을 가장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렇듯 내면화된 폭력은 어떤 죄의식도 없이 무의식적이면서 지속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로는 억압받고 있는 타인에 대한 연민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연민은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수준에서만 관용적일 뿐이다. 이러한 연민은 숨겨진 경멸을 가리는 교묘한 화장술(make-up)일 수 있다.(41)

오창은은 사적 자유의 문학이 곧 사회적 실천의 결여로 귀결됨을 확신하고, “상호 연관돼 있는 사건의 고리를 끊음으로써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려는 개인의 왜곡된 무의식”이 사적 자유의 문학적 현실태임을 주장하고 있다. 더 나아가 사적 자유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내면화된 폭력”이며, 연민이나 동정조차도 “사적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수준에서만 관용적일 뿐”임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문학의 사적 자유와 사회적 실천은 그 층위가 다른 문제임을 오창은은 간과하고 있다. 다시 말해 문학의 사적 자유와 사회적 실천이 반드시 ‘배타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님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내성의 문학이 작가 스스로의 정치적․역사적 타락을 은폐하는 데 교묘하게 악용돼 왔던 일부 문학사적 사례들에도 불구하고, ‘내성의 문학’을 향유하는 작가와 독자가 필연적으로 사회적 실천에 무감하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사적 자유’의 문학에 흠결이 있다면, ‘사회적 자유’의 문학에도 흠결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울리히 벡(Ulrich Beck)이 갈파했듯이, 사회적 자유를 주장하는 이른바 ‘공동체주의자’들 또한 본질적으로 화장술에 만족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공동체 정신이라는 윤리적 명예를 과시하지만 그들 역시 아무런 희생과 비용을 들이지 않고 달콤한 ‘진보의 정당성과 명예’를 누리려는 성향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지 않겠는가? 문제의 핵심은 문학의 ‘사적 자유’니 ‘사회적 자유’라는, 이른바 리얼리즘이냐 모더니즘이냐의 문학내적 논쟁이 아니라, 문학을 떠난 ‘사회적 실천’의 진정성 문제가 아니겠는가? 사회적 실천은 외면한 채 문학의 수족관 안에서만 유영(遊泳)하는 리얼리즘 작가들이 분명 존재하듯이, 개인의 내면성에 깊이 침윤된 작가라 할지라도 ‘사회적 실천’에 고군분투하는 작가군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내면 탐구의 욕망은 인간의 보편적 성정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사회적 역사적 상황에 의해서 추방당하거나 억압되어야 할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내성의 문학을 통해서도 ‘공존재’로의 존재론적 전환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내면적 성찰을 통해 사회적 자유에 대한 감성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타자’를 향한 배려와 연대의식을 더욱 고양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내성의 문학’이 왜곡된 ‘사적 자유’에 고립적으로 탐닉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이를 사회적 자유의 잣대로서 재단할 것이 아니라, 보다 깊고 넓은 내면탐구와 형이상학적 성취를 이룰 수 있도록 비판하고 독려하는 것이 비평가의 몫이 아니겠는가? 형이상학의 한 경지인 박상륭을 사회적 자유의 잣대로서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내성의 문학’이 지닌 궁극적 가치 때문일 것이다. 계도적인 비평가의 전횡과 재단(裁斷)은 또 다른 억압과 문학의 타자를 생산할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 시반(屍班)의 문학과 비평의 길
오창은은 문학의 진정성이 여전히 사회변혁의 동력학을 구성하여 자본주의의 전횡과 소외를 타파하리라는 80년대의 에토스(ethos)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김영하의 소설이 예술가라는 가면을 쓴 ‘편안한 일탈’과 유희적 성격에 집착하는 탐미적 개인의 형상화일 뿐임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일부 단점에도 불구하고 “당대현실에 대한 실천적 대응의 가능성”(65)을 여전히 환기해주는 정도상의 작품을 높게 평가한다. 그리하여 문학적 주체는 “생활과 유리되어서도 안 되고, 현실에 대한 실천을 포기해서도 안 된다”(65)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힘’의 문학이다.
그러나 과연 ‘힘’의 문학은 가능한가? 문학의 죽음이 거론된 지 이미 오래인 지금, 변혁의 추동력을 상실한 문학은 이제 단지 ‘오락’으로 전락해버린 징후가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문학이 현실개조의 힘은 물론이고 현실대응력마저 현저히 상실해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말’을 선언하기까지 했으며, 자본주의의 전횡을 막기 위해서는 오히려 문학을 떠나라고까지 말한다. 문학은 이제 현실대응력을 상실함으로써 단순한 ‘오락’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고진의 주장은 단순한 허무주의적 태도로 넘겨버리기엔 너무도 뼈아픈 진단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김영하의 자유주의를 지지할 것인가.”(189)라는 도발적 질문과 ‘실천적 자유’의 의지조차 문학의 수족관을 떠도는 미망(迷妄)의 유령처럼 느껴지고 마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의 문학은 현실과의 탄탄한 긴장성을 유지하고 있을지라도 현실의 개조로 이어질 징후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문학은 단순한 언어의 차원에서 휘발해버리고 말 ‘놀이’로서의 운명에 접어들고 만 것이다.
그러나 오창은에게 문학은 여전히 변혁을 실현할 가능성으로 존재하며, 이러한 신념 위에 그의 비평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 그의 ‘친일문인 문학상’에 대한 통렬한 비판(「문학사의 뒤안길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 ‘친일문학상’」)은 바로 실천적 비평정신의 소산(所産)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문학의 육체에 퍼져가는 시반(屍班)을 제거할 건강한 희망으로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창은의 󰡔비평의 모험󰡕은 사회적․역사적 진보와 윤리학을 위한 또 하나의 매우 소중한 비평의 입각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더 나아가 문학의 종말이라는 위기의식을 더욱 가중시키는 자본주의의 문화적 전략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문학의 미래를 향해가는 비평적 자의식의 구체성과 치열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학적 원리로만 존재하는 ‘사회적 자유’가 아닌, 사회적 실천력을 담지한 문학의 ‘힘’을 위한 비평의 탐험을 지속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서만 그의 비평은 한낱 ‘선언’에 불과한 비평적 ‘도로’(徒勞)의 운명을 비껴가는 동시에 지속적인 생명력을 담지할 것이며, ‘80년대의 뜨거운 실천적 자유’의 뚜렷한 부활과 갱신의 징후로서 읽힐 것임에 틀림없다.



박대현․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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