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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시나리오/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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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511회 작성일 08-02-27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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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藝人의 소리


김남석|부경대 계약교수






# 1. 진주 촉석루
천하의 세도가 김병기의 생일 축하연 자리. 사위는 어둡지만 사방에 촛불이 켜져 있다. 상석에는 김병기가 앉아있고, 그 옆에 기생 맹렬이 앉아 있다. 좌우로 늘어진 축하객 자리에는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참석해 있다. 끝자리에 다 떨어진 도포를 걸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흘리는 이하응의 모습도 보인다. 김병기의 주위에는 이른바 명창들이 옹립하듯 늘어서 있는데, 그중에서 어두운 안색의 가왕(歌王)도 보인다. 축하연 가운데 대자리가 마련되어 있고, 모동지가 노래하고 있다. 카메라 주위의 풍광을 포착하며 움직일 때, 모동지 소리가 B.G.로 깔린다. 타이틀 자막 오르는 동안, 모동지의 소리가 실내를 울린다.

모동지        여보 도련님 여보 도련님
        날다려가오 날다려가오
        나를 어쩌고 가랴시오
        쌍교도 싫고 독교도 싫네
        어리렁 충청 거는단 말게
        반부담 지여서 날다려가오
        저건네 느러진 장송
        깁수건을 끄너내여
        한끝은 낭기 끝 끝에 매고
        또 한끝은 내목 매여
        그 아래 뚝 떠러져 대롱대롱
        내가 도련님 앞에서 자결을 하여
        영이별을 하제 살여 두고는 못나니.

모동지의 음악이 끝나면, 카메라 김병기에게 다가간다.

김병기        과연 모동지요. 시대를 울리는 명창이라 할만하오. 그럼, 품평을 들어봅시다.
맹렬        모동지의 이름이 헛되이 전한 것이 아니군요. 안계를 높인 소리였습니다. 하지만 춘향이 비록 기생이오나, 어찌 체신이 이리 없을 수 있겠습니까. 제 비록 수청기생이오나, 소녀의 체신을 돌보아주지 않겠다는 뜻이오니, 오늘 밤을 허락하기는 힘들 줄로 아뢰옵니다.

김병기        과연 영웅호걸에 어울릴만한 대답이구료. 맹렬이 안 된다니, 내 어찌할 강요할 도리가 있겠소. 다른 명창의 도전을 받아 봅시다.

멀리서 전갈을 가져온 하인이 다가가, 누군가가 당도했음을 알려준다.

김병기        귀한 손님이 찾아 주셨군요. 운봉 비전리의 최진사가 몸소 이렇게 찾아주시다니.
최진사        (다리를 절며 들어오면서) 늦었습니다. 대감께 세상에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을 준비하느라고 늦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김병기        허언을 할 수 사람이 아닌데, 허허. 뜸을 들이는 것을 보니 더 궁금하구료.
최진사        틀림없이 만족하실 겁니다.

좌중 흥겹게 웃는다. 기대에 찬 표정을 지으며
송흥록에게 찾아드는 기억들

# 2. 운봉 비전리
백운산이 멀리 보이는 마을.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요로이기 때문에 마을에는 주점과 활기가 가득하다. 그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이 보이고, 카메라 이동하면 시장이 보인다. 물건 사는 사람, 몰려드는 사람, 한쪽에서 노래하는 사람 등이 흥성스럽게 엉켜 있는 그림. 그 그림을 지나면 몇 개의 골목을 지나게 되고, 그 중 한 골목에 나란히 붙은 두 개의 초가집. 두 집은 마을에서 작은 집에 속하지만, 화목한 기운이 넘친다. 오른쪽 초가집은 한 밤 중인데도, 불이 환하다. 카메라 접근하면 내부 풍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송첨지의 발걸음이었다.

송첨지        아빠가 돌아왔다.

잠이 빠져있던 두 아들과 한 딸이 눈을 비비고 일어나, ‘아부지’ 하며 일제히 매달린다. 달려오던 세 아이 중 하나는 자리에 서서 바라보기만 한다.

송첨지        마루야, 왜? 이리 온.

마루, 송첨지에게 다가가지만 안기지는 않는다. 대신 “아버지 다녀오셨어요?”하고 인사를 한다.

마루        훈장님께서 아버지가 멀리 나가셨다가 돌아오면 이렇게 인사하라고 하셨어요.
송첨지        (대견한 기색으로) 그래, 우리 마루가 다 컸구나.
마루 동생(바우)   아부지, 선물?
송첨지        여기 있다.

두 아이에게 선물을 나누어준다. 그러나 마루의 몫은 없다.

아내        여보, 마루 거는 없어요?
송첨지        마루야, 선물 갖고 싶니?
마루        아니요. 저는 없어도 돼요.
송첨지        왜지?
마루        그냥, 저는 없어두 돼요.
송첨지        훈장님의 말씀이 있으셨던 게로구나. 하지만 아빠가 선물을 준비했지. 그것도 세상의 둘도 없는 선물로.
마루 누나․바우   뭔데요?
송첨지        뭐냐 하면 말이지. 삼득 선생이 우리 집에 오실게다. 마루를 보려고. 마루를 데려다가 소리를 가르치실 거야.
마루        (의외로 기뻐하지 않는 표정)
송첨지        왜? 기쁘지 않니?
마루        아니요, 기뻐요. 하지만 우리 집은 가난한데, 어떻게 해요?
송첨지        그건, 걱정하지 마라. 삼득 선생은 그럴 분이 아니다. 그 분이 내게 약속했다. 가르칠만한 가르치겠다고. 너는 틀림없이 삼득 선생 마음에 들 거란다. 니가 누구니, 운봉골 최고의 소년 명창 아니니. 하, 하, 하.

초라한 집이지만 행복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 3. 다음날 아침, 서당 가는 길
마루가 일찍부터 서당 갈 준비를 한다.

마루        아버지, 서당 다녀오겠습니다.
바우(동생)   (눈 비비고 일어나) 성, 나도 갈래.
마루        너는 아직 어려.
바우        나도 갈 거야. 가서 글도 배우고, 소리도 배우고, 삼득 선생 따라갈 거야.
송첨지        그래라 그러자. 나중에 바우도 글을 배워야지. 하지만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바우        뭔데요?
송첨지        북을 배우는 거다.
바우        (실망한 듯) 북이요?

송첨지, 마루 보고 가라는 손짓을 한다.
서당으로 향하는 바우의 등 뒤로, 부자간의 대화가 들린다.

송첨지        형은 소리를 배우니 너는 북을 배워야지. 형제는 떨어지면 안 되니, 바우는 북을 배우는 거다. 손재주가 좋으니 천하 고수가 될게다.
바우        싫어 싫어, 나도 소리 배울 거야.

# 4. 서당
바우의 싫다고 떼쓰는 소리가 글 읽는 소리로 바뀐다.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다. 훈장이 침착한 목소리로 글을 읽으면, 아이들이 따라 읽는다. 갑자기 읽던 글을 멈추고 아이들을 본다.

훈장        무슨 뜻인고?
아이들        (말이 없다)
훈장        왜, 말이 없느냐? 무슨 뜻인고?
아이들        (더욱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다)
훈장        최기문. 대답해 봐라.
최기문        (일어나지만, 대답하지 못한다)
훈장        어허, 그럼, 마루.
마루        (역시 일어나) 노래는 모든 말의 근본이니, 노래를 청아하게 부를 줄 안다면 세상을 정갈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훈장        (흐뭇한 표정으로) 어째서 노래가 청아해지면 세상이 깨끗해지는고?
마루        노래를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가 마음속에 노래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훈장        왜 기억하게 되는고?
마루        노래는 차별과 불평들을 넘어서고, 신분과 직책을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훈장        잘 했다. 너희들이 진정으로 노래를 부를 수만 있다면 마음의 때를 벗겨낼 수 있을 것이다. 원한과 증오의 노래는 듣는 이들에게 원한과 증오를 심어줄 것이고, 기쁨과 성의의 노래는 듣는 이들에게 편안함과 즐거움을 전해줄 것이다. 이 점을 명심하도록 해라.
아이들        (해방되었다는 듯이) 네.

마루를 보는 최기문의 눈초리 매섭다.
아이들이 돌아간 뒤.

훈장        아까운 애지. 양반으로 태어났다면 한 세상을 울릴 만한 애인데.
손님        양반으로 태어나서 뭐하게.
훈장        자네는 특별하지 않나. 그 애와 자네 사이에도 공통점이 있네.
손님        (아무렇게나 누우며) 뭔데?
훈장        소리.
손님        소리?
훈장        그래, 소리. 그 애는 이 고을이 알아주는 소리꾼이네. 나이는 어리지만 소리를 들으면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걸세.
손님        이 고을에는 어린 소리꾼이 많구만. 나도 어린 소리꾼을 찾아 왔는데.
훈장        이 고을이 세상으로 통하는 길목이기 때문일세. 소리를 아는 사람들은 길을 찾고, 길을 찾던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가지 않을 수 없을 걸세.

손님, 대답이 없다.

훈장        자네, 자나? 벌써 잠들었구먼. 참 사람도. 몇 년 만에 불쑥 나타나서는 자기 집처럼 잔단 말이지. 누가 천하의 삼득 선생이 아니랄까봐.

# 5. 집에 가는 길
마루 혼자 걷고 있다. 마루가 집으로 가는 길에, 분이가 기다리고 있다. 마루가 오는 길 저편으로 일군의 무리들이 달려온다. 아이들이다. 그중에서 험상궂고 체격이 큰 아이가 씩씩거리면서 달려오더니, 마루를 밀어 넘어뜨린다.

큰 아이(돌이)   경고했을 텐데, 잘난 척하지 마.
마루        (표정의 변화가 별로 없다)
큰 아이        어쭈! 노려보면 어쩔 건데. 얘들아!

어느새 몰려왔던 애들이, 일제히 마루에게 덤벼든다. 마루 절체절명의 위기. 그때 분이 뛰어와 마루 위로 몸을 던진다.

큰 아이        너, 저리 안 비켜.
분이        오빠나 저리 비켜. 이게 무슨 짓이야. 이웃집에 살면서, 그것도 매일.
돌이        맞을 짓을 하니, 때리는 거지. 계집애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분이        때리려면 나부터 때려야 할 걸. 아빠에게 이를 거야. 최씨 댁 도련님 말만 듣고 매일 마루만 괴롭힌다구. 오빠가 서당에 다닌 것도 송씨 아저씨 때문인데……. 아빠도 분명 좋아하지 않을 거야, 분명.
돌이        (당황한다) 조그만 게 뭘 안다구.

그때, 멀리서 최기문 바라보고 있다가, 다가와, 부드럽게 위로한다.

기문        (분이에게)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지. 나는 이 일과는 관련이 없는데 (돌이에게) 그만 하도록 해라.
돌이        (어안이 벙벙한 듯 그러나 이내 복종하며) 네 도련님.
기문        이제 알았지. 이 일과 나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구. 그나저나 저 산에 이상한 남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 그 사람이 짐승소리와 새소리를 그렇게 잘 낸다는데.
분이        도련님, 저는 할 일이 있어요. 아부지가 마루를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요.
돌이        거짓말, 도련님 거짓말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어요.
분이        이따 들어와서 직접 확인해. 내 말이 맞으면 아빠한테 혼날 걸.
최기문        그래, 오늘은 집에 들어가요. 나중에 같이 가고.

마루와 분이 일어나서 걷기 시작한다. 멀어지는 그들을 보면서 최기문, 눈빛이 가늘어진다.

돌이        도련님, 산으로 갈까요.
최기문        너희들이나 가. 난 할 일이 있어.

# 6. 마루의 집이 바라보이는 언덕 길
분이        마루야 다 왔어.
마루        나 할 이야기가 있어.
분이        다쳤으니, 내일 하자.
마루        오늘 해야 돼. 나 내일 떠나야 할 거야.
분이        나? 어디로? 왜?
마루        아버지가 그러는데, 삼득 선생이 오기로 했데.
분이        삼득 선생?
마루        유명한 소리꾼이야. 옛날 아버지가 따라다닌 분이야. 그분이 나를 보고 마음에 들면 데려간데.
분이        정말? 잘 됐네.
마루        잘 돼?
분이        잘 됐지! 너도 그러면 이제 훌륭한 소리꾼이 되는 거야.
마루        너는 나와 헤어지는 게 좋니? 언제 올지 모르는데?
분이        내가 좋아할 것 같아. 하지만 너는 가야 해. 가서 넓은 세상을 보고 훌륭한 소리꾼이 되어야 해. 나는…… 나는…… 여기서 기다릴 거야. 올 때까지. 너 올 거지! 난 믿어. 넌 돌아올 거야. 꼭 훌륭한 소리꾼이 되어서. 그리고 나 데려갈 거지.
마루        (조용히 분이를 끌어안는다) 그래, 그럴 거야.

일군의 사람들이 마루의 집안으로 쏟아져 들어가며, 송첨지를 찾는다. 불길한 느낌에 자신의 집을 보는 마루. 바우에게 북을 가르치고 있던 송첨지, 사람들에게 끌려간다. 송첨지의 비명과 바우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깜짝 놀란 마루와 분이 뛰어 내려간다.
마루, 사람들에게 달려든다. 사람들 마루를 떼어내어 길옆으로 팽개친다. 끌려가던 송첨지, 정색을 하며 마루에게. “마루야, 놀라지 마라, 최진사 댁에 가는 거야, 난 죄가 없으니 곧 풀려날 거야. 엄마에게 알리고, 이웃집 분이 아범에게도 알리고, 어서.”
마루, 송첨지를 쳐다보다가 엄마를 부르며 집으로 뛰어간다. 분이 역시 아빠를 부르며 자신의 집으로 뛰어간다.

# 7. 시간이 지나 어둑해진 송첨지의 집
사람들이 모여 있다. 송첨지의 처와 분이 부모, 그리고 송첨지의 동생들과 분이. 돌이도 함께 있다. 그는 좌불안석이다.

송첨지 처  왜 이렇게 안 올까요.
분이 부            별일 없을 겁니다. 빌린 돈 때문에 물을 것이 있어, 데리고 갔다고 했으니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송첨지 처  왜 갑자기?
분이 부           그 어른 하시는 일이야,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분이 부친도 못마땅한 안색이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소리가 들리면서, “송첨지가 돌아왔다.”는 소리가 들리자, 동네 사람들이 뛰어나간다. 이어 비어 있는 카메라로 거적에 쌓인 송첨지가 들어온다. 얼굴이 시퍼렇게 부어 있고 온몸은 매질을 당한 흔적이다. 간신히 정신이 드는지. 마루를 찾는다.

송첨지        마루야, 마루야…….
마루        네, 아버지 저 여기 있어요.
송첨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삼득 선생을 따라가라. 알았지? 꼭이다, 꼭
마루        (울먹이며) 제가 어딜 가요. 아버지 곁에 있겠어요.
송첨지        안 된다. 꼭 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가야 할 곳이 따로 있다.

마루, 짚이는 것이 있는 듯, 돌이를 쳐다본다. 돌이, 마루의 눈길을 피한다.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송첨지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갈 때. 마루, 부엌으로 가서 무언가를 들고 돌이를 한 구석으로 끌고 간다. 어둠 속으로.

# 8. 최진사 댁        
한밤중에 최진사 댁, 담을 넘는 그림자. 작고 날렵하다. 손에는 칼로 보이는 흉기를 들었다. 경험이 별로 없는 듯, 서툰 기색. 그러나 들키지 않고 담을 넘어, 안뜰로 잠입한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사람 그림자를 찾아낸다. 안에서 남녀가 떠드는 소리.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여자 아이가 나온다. “오라버니,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말하고 또박또박 걸어 나간다. 잠입한 그림자, 혼자 남은 아이의 방문을 연다.

최기문        권삼득 이야기는 내일 해준다니까. (그제야 고개를 들고 그림자를 본다 놀란다)
그림자        (흉기를 들고 말없이 손짓한다)

손을 묶고 재갈을 씌우는 그림자.

그림자        너를 용서할 수 없다. 넌, 죄도 없는 아버지를 해쳤다. 이제 나도 너의 아버지를 해칠 것이다. 그래야 세상이 공평하지.
최기문        (말을 하고 싶은 눈치이다)
그림자        묻는 말에 대답해라. 우리 아버지를 해친 것이 너지. 너의 아버지에게 우리 아버지를 잡아가라고 한거지. 너를 죽이던가, 너의 아버지를 죽이던가.
최기문        (벌벌 떤다)
그림자        (재갈을 벗겨주며) 말해라, 누구냐?
최기문        난 아니다. 난 모른다.
그림자        누구냐? 말해라. 변명하지 말고.
최기문        난, 아니다. 난…… 난…… 아니다. 그러지 마세요. 우리 아버지가 한 일이에요. 나하고는 관련 없어요.
그림자        하하하, 이런 비겁한 자식.

그림자, 최기문을 마구 때리기 시작한다. 밖에서 보이는 매질 장면. 어느새 돌아온 여동생, 문 밖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다.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판단할 때쯤, 소리를 지른다. “도둑이야, 도둑이야.” 최기문 길게 비명을 지른다. 그림자 도망가기 시작한다. 여동생, 도망가는 그림자 옆으로 피한다. 길을 피해주지만, 무서워하는 기색이 아니다.

여동생        빨리 도망가요. 그래도 오빠를 죽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림자        (잠시 보다가 도망간다)

# 9. 어두운 골목
그림자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어두운 골목만 뛰고 있다. 여기저기서 관솔불. 골목 여기저기가 밝혀지며, 포위망이 좁혀든다. 그림자, 고민하다가 오히려 마을 가운데로 뛰어든다. 어렴풋하게 서당이 보인다.

# 10. 서당, 밤
친구        그래, 이 사람은 어디 갔나?
훈장        글쎄, 자네 올 때까지는 오겠다면서 나갔는데. 워낙 종적을 찾을 수 없는 인물이니. 오겠지 뭐. 그래, 자넨 이렇게 술 마셔도 되는가? 승려가.
친구        승려는 무슨 승려. 모두 마음의 구속이라네. 삼득은 소리한다고 양반신분도 버렸는데, 이깐 승려가 대수겠는가.
훈장        세상이 그리 만만치 않을 걸세.
친구        그래도 오늘은 마음껏 취하기로 하지.
훈장        하긴 누가 이 밤중에 술 마시는 중을 찾으러 오겠는가.

밖에서 ‘훈장님, 훈장님’ 하는 소리가 들린다.

친구        이게 무슨 소리인가?
훈장        무슨 소리? 술을 먹으니 엉뚱한 소리가 들리나보지!
친구        신음소리 아닌가?
훈장        조금 있으면 여자를 숨겨두었다고 하겠네 그려.
친구        아니야, 들어 봐. 신음소리 맞아.

그때, 밖에서 횃불이 오르면서 왁자지껄한 소리. “이곳이 틀림없느냐.” “네.” 등의 추적자의 소리. “훈장님, 훈장님, 최진사가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우렁찬 소리.

훈장        (당황한 눈초리로) 빨리 치우게, 나는 시간을 끌 테니.

방에서 밖으로 나갈 때, 카메라 따라 나간다.

훈장        무슨 일이요?
최진사        도둑 하나가 이리로 도망을 갔는데, 어서 피하시지요. 도둑은 저희가 잡겠습니다.
훈장        초저녁부터 홀로 있었는데, 도둑은커녕 사람 기척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곳을 찾아보시지요.
최진사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저희 아이를 맡아 주시는 분인데 살펴드려야지요. 저라도 둘러보게 해주십시오.

최진사의 공손하지만 강압적인 행동을 막 못하고 엉거주춤 따라 들어오는 훈장. 널려 있는 술병, 한 구석에 잠든 중 운강선사. 최진사, 흥미롭다는 듯, 밖에 들으라는 듯

최진사        과연 아무도 없군요. 혹시 의심이 생기면 바로 기별하십시오. 즉시 달려오죠. 그럼 쉬십시오. (최진사 문을 닫고 나가면서 외친다) 흩어져서 찾아라. 꼭 찾아라. 꼭 잡아서 내 앞으로 끌고 와라.

그때, 저 멀리서 소리 들린다. “잡아라, 저쪽이다.”
몰려 있던 사람들 우르르 뛰어나간다. 훈장, 그들을 보다가 방으로 들어오면, 방 안의 풍경은 바뀌어 있다. 운강, 어느새 일어난다. 병풍 뒤를 보며, “갔다 나와라.” 병풍 뒤로, 그림자(마루) 쓰러진다.

훈장        마루야, 마루야…….

멀리서, “잡아라.” “후려라.” 하는 소리가 들린다.

# 11. 현실, 진주 촉석루
        제비 후리러 나간다
        복희씨 맺힌 그물을
        에후리쳐 둘러매고
        망당산으로 나간다.

염명창의 <제비가>가 들려오고 있다. 회상에서 깨어나는 송흥록에게, 최진사 다가와서 인사한다.

최진사        온 나라에 송대부의 이름이 파다하더니, 이렇게 만나게 되는구려. 나 최기문이요.
송흥록        안녕하십니까. 송흥록입니다.
최진사        우린 처음일 텐데, 낯이 익군요. (사이) 이름을 하도 들어서 친근하게 느껴서 그런가 보외. 잘 해봅시다. 세상이 다 알다시피, 당신은 어른의 오른팔이고, 나는 왼팔이니, 두 팔이 힘을 합쳐야 하지 않겠소.
송흥록        과찬이십니다. 천한 것이 어찌 정치를 알겠습니까. 어른 옆에서 소리나 하는 사람입니다. 어려운 말씀 거두어 주십시오.
최진사        세상이 다 아는 일을 어찌 나에게만 숨긴단 말이오. 두고 보시오. 자시에 이 안뜰에서 세상이 놀랄만한 일을 할 것이오. 우리 둘이.
송흥록        자시오?
최진사        그래 자시요! 자시는 은밀한 일을 꾸미는 시간이죠. 송대부도, 이 안뜰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 12. 자시, 백운산, 금수사 말사 안뜰
월강        자시에는 안뜰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인 일이냐?
상좌        스님, 다름이 아니오라…….
월강        이 시간은 너희들이 관여해서는 안 되는 시간이라고 그리 일렀건만.
상좌        스님, 저희들은 그저 본사에 손님이 왔다는 말씀을 드리려 했을 뿐입니다.
월강        뭐? 그래 누구라 하더냐?
상좌        운봉 비전리에서 온 최진사라 하옵니다.
월강        최진사?
상좌        네! 스님을 뵙겠다고 해서, 제가 모시겠다고 했습니다.
월강        그래. 내 내려 가봐야겠다.
상좌        하온데 그게, 기다리는 것보다 슬슬 올라오겠다고 해서 지금 올라오는 중입니다.
월강        그래?

돌아보면 청년이 된 마루 서 있다. 승복을 입었지만 머리는 깎지 않았다.
월강, 마루를 보고 ‘흥록’이라고 부른다.

월강        들어가 있거라. 꼼짝하지 말고 그 안에 있어야 한다.

흥록, 말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말사로 들어간다. 두 사람의 다급한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는 승록(상좌). 가까이서 최진사의 발걸음이 보인다. 최진사 뒤에는 최기문이 따르고 있다. 최기문 옆에는 곱게 화장한 분이, 그리고 늘어 선 장정들

최진사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그만.
월강        훈장으로부터 그날의 일을 들었습니다. 너무 허물치 말아주십시오.
최진사        인간 살아가는 것이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스님의 모습을 보니, 인간사의 번뇌가 한꺼번에 느껴지더군요.
월강        부끄럽습니다. 이 멀리는 어인 일로?
최진사        내 아들과 며느리입니다.

숨어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흥록(마루), 큰 충격을 받는다.

최진사        조용히 머물 방 하나가 필요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훈장님께서는 이 산사가 시끄럽다고 하시지만, 제 마음이야 짐승소리, 새소리가 충만하다는 이곳 보다 더 좋은 곳을 구할 수 있어 야지요. 내, 섭섭하지 않게 시주는 하겠소. 여기는 특히 산수가 빼어나고 주위가 조용하니 두 아이가 묵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을 것 같습니다.
월강        이미 묵는 사람이 있어 힘들 것 같습니다. 저 아래 본채를 쓰시죠. 이렇게 올라오셨는데, 다시 내려가시라 해서 죄송합니다.
최진사        이미 묵는 사람이 혹시 청년이 아닙니까. 소리 공부 한다던.

늘어선 장정들의 눈에 힘이 들어선다.

월강        소리 공부하는 사람은 맞지만, 청년은 아닙니다. (상좌를 가리키며) 여기 있는 이애 입니다. 제가 젊은 날 소리를 공부했었는데, 심심풀이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최진사        (의심스러운 듯 상좌를 보며) 그런데 아래 본사에는 왜?
월강        이곳은 규율과 수행은 근본입니다. 일과에는 당연히 참석해야지요? 자 내려가시지요?
최기문        저와 분이는 여기서 잠시 둘러보고 가겠습니다.
최진사        그래라, 그럼 선사와 나는 먼저 아래로 내려가 묵을 방을 정해두겠다.

선사,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일행과 함께 내려간다.

# 13. 흥록, 문틈으로 엿보고 있다
문틈으로 두 사람을 보며 괴로움에 빠져 있다. 멀리 보이는 분이는 근심스러운 기색이다.

최기문        (다리를 절며 주위를 둘러본다) 여기서 애를 낳아.
분이        저를 이제 놓아주세요.
최기문        안 돼, 넌 내 여자야. 그 놈을 잡을 때까지는 넌 내 곁에 있어야 해. 왠지 그놈이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틀림없어 우리는 곧 만나게 될 거야.
분이        당신에게 난 노리개에 불과하잖아요. 그만큼 했으면 이제…… 절 놓아주세요.
최기문        안 돼, 그 놈을 잡을 때까지는.

흥록, 뛰쳐나가려는 자신을 끊임없이 붙잡는다.

분이        안 돼요. 당신이 이런 식으로 해서 그이를 잡을 수는 없어요. 그이는 이곳에 없어요. 억지 부리지 말아요.
최기문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분이        전 알아요. 이 절에 그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당신이 여기에 오자고 했다는 것을. (사이) 그이는 없어요. 그이는 삼득 선생을 따라간다고 했어요. 괜한 사람들 쓸데없이 고생시키지 말고 나오라고 하세요.

멀리서, 최진사 “그만 가자.” 하는 소리와 풀숲에서 움직이는 장정들의 소리

최기문        여기는 아닌 것 같군

최기문,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전각이 수상하다는 듯 슬그머니 접근한다. 분이 “조심해요.” 일갈. 기문, 갑자기 문을 열어보지만 흥록은 없다. 안도하는 분이, 하지만 곧 섭섭한 표정으로 바뀐다. “여기는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에요. 함부로 굴지 마세요.”

최기문        틀림없이 근처에 있는 느낌이야.

기문과 분이가 내려가는 모습이 열린 문틈으로 보일 때, 흥록 불상 뒤에 숨어 있다.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흥록을 건드린다. 깜짝 놀라는 흥록

# 14. 현실. 진주 촉석루
김병기가 흥록을 부르고 있다.

김병기        아우님, 왜 이렇게 얼굴색이 안 좋은가? 오늘 무슨 일이 있는가?
흥록        아닙니다. 판서 어른. 생신 축하드립니다.
김병기        짐승소리, 새소리, 사람소리에 이어 귀신소리까지 능통하다던 아우님, 소리 한 번 듣고 싶은데. 이 늙은이가 생일을 핑계로 한 번 청해도 될까.

어느새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듣고 기대에 차는 좌중. 멀리서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최진사(기문)의 모습도 보인다. 이항응의 복잡한 시선도 감지된다.

흥록        제 어찌 이 즐거운 자리에서 노래 부르지 않겠습니까. 모자라더라도 허물치 말아 주십시오.

흥록, 춘향가 중 <이별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흥록의 노래에 따라 좌중에는 귀기가 서리기 시작한다. 촛불들이 넘실대며, 흔들리는 분위기. 좌중은 춘향의 아픔에 공감하면서도, 귀기서린 목소리에 오싹하는 기분을 느낀다.

# 15. 청아한 달빛 아래, 켜 놓은 몇 자루의 초, 금수사
흥록, 달빛을 거울삼아 <이별가> 연습을 하고 있다. 단장이 찢어지는 아픔을 표현하고 있다.

# 16. 현실, 진주 촉석루
흥록의 <이별가>를 맹렬이 지켜보고 있다. 남다른 감회를 담은 맹렬의 눈빛

# 17. 금수사 대웅전, 달빛 아래
어디선가 <이별가>가 들려오고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한 분이, 뜰을 서성이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란다. 산중턱 암자에서 들리는 소리.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이다. 감회에 젖어 있다가 눈물이 흐른다. 그녀의 흐르는 눈물을 따라, 달빛 퍼지면서

# 18. 달 아래, 금수사 말사
흥록의 소리를 지켜보고 있는 눈. 복잡한 심회. 카메라 뒤로 물러나면 월강의 모습.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려

월강        그만 하거라. 이제 떠날 시간이다.
흥록        (말이 없다)
월강        최진사가 돌아갔지만, 곧 다시 올 거다.
흥록        여기 남겠습니다. 그녀는 고초를 당하고 있습니다.
월강        그 애는 그 애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그 애 때문이라면 괘념치 말아라.
흥록        뭐라구요?
월강        너와는 관계없다. 그 애는 그 애의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최씨의 첩이 되었다.
흥록        이럴 수가. 스님은 알고 계셨군요. 그러면 아버지는……,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었나요?
월강        네 누이가 소리로 이름 높은 김씨 집에 출가했다는 것만 안다. 내려가거든 강경에 있는 김성옥의 집을 찾거라. 하지만 지금은 일단 피할 때다. 처음부터 최진사는 포위망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뒷길로 빠져나가 남원 용추골로 가라. 용추골에 가서 월강이 시켰다고 하고, 삼득 선생을 찾아라.
흥록        (말이 없다가) 소리마저 하게 해 주십시오.

# 19. 현실, 진주 촉석루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소리하던 흥록, 소리를 멈추고 갑자기 서 있다. 기행에 경험한 바가 적지 않은 김병기도 의아스러움을 느낄 정도로 긴 정적. 송흥록, 느닷없이, “소리마저 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하고, 소리를 이어간다. 흥록의 <이별가>가 더욱 애잔하게 무르익을 무렵

# 20. 금수사 대웅전
말사를 바라보고 있는 또 하나의 눈. 그 눈은 지금 증오로 불타고 있다. 주변에서 신속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풀숲이 동요하며 신속하게 산을 오르는 장정들, 날렵한 인상이다. 불타는 시선으로 말사를 바라보고 있는 기문. 그 옆에서 덜덜 떨고 있는 분이

# 21. 현실, 진주 촉석루
지그시 눈을 감고 소리하는 흥록. 흥록을 불타는 눈동자로 쳐다보는 최기문(최진사). 그런 두 사람을 염려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맹렬. 세 사람의 눈동자 사이로 끼어드는 과거의 장면들

# 22. 산길 insert
쫓기는 흥록의 신. 거친 산길에서 넘어지는 흥록. 추적자의 소리. 뒤쫓는 자들의 다급한 소리. 흥록 뒤를 돌아본다.

# 23. 현실, 진주 촉석루
흥록을 바라보고 있는 최기문. 흥록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본다. 그들의 시선이 얽히고 있을 때, 흥록의 소리 끝난다.
조용한 정적. 뒤이어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 좌중들의 연호가 이어진다.

김병기        과연…… 과연. 명창이야. 과연 내 아우일세. 정적까지 그의 편이군.
최기문        가히 가왕(歌王)이라고 할만합니다.
김병기        가왕, 가왕이라…….
모동지        가왕, 그거 좋은 표현입니다. 송대부의 소리를 듣고 내, 오늘 부끄러움을 알았습니다. 사득선생이야말로 가왕의 칭호를 들을 만 합니다.
김병기        그래, 가왕. 그대는 이제부터 가왕일세.
최기문        김판서 어른은 인의로움으로 당대의 으뜸임으로 인왕(仁王)이고, 사득선생은 소리로 당대의 으뜸임으로 가왕(歌王)이며, 저기 계신 이하응 대감께서는 구걸로 으뜸임으로 걸왕(乞王)이라고 할만합니다.
김병기        (속으로 흐뭇해하면서도) 그 무슨 그런 말을. 주상 전하가 있는데 내 어찌 왕의 호칭을 받을 수 있겠소. 이하응 대감이야말로 왕가의 자손이면서도 미천한 신하의 자리를 빛내 주셨으니 응당 인의로움에 있어 당대의 으뜸이므로, 그분이 인왕의 호칭을 받아야 하나, 지금 주상전화의 환후가 심각하니 그 역시 조심할 바가 적지 않소. 다만 내 아우 흥록만큼은 가히 ‘가왕’의 칭호에 부끄럽지 않소. 흥록의 <이별가>는 삼득 선생의 <이별가>에 지지 않을 거요. 그야말로 사람소리지.
염명창        내 일찍이 삼득 선생와 ‘새소리’를 놓고 겨루는 인연을 얻었지요. 그분은 남을 잘 가르치지 않는 분인데, 어찌 가왕께서는 세 가지 소리를 다 배웠소. 내 평소 궁금하던 터인데, 속 시원하게 한 번 털어놓으시지요.

# 24. 쫓기던 흥록
산길을 쫓기던 흥록. 추적자의 집요한 추적에 만신창이다. 용추골로 접어들었으나, 기력이 쇠해 더 이상 걷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입구에서 쓰러진다. 추적자의 발걸음이 다가온다.

# 25. 쫓는 최씨가의 사람들
최기문, 본능적으로 상대가 가까이에 있음을 알고 있다. 먼지를 일으키며 용추골로 접어들 때, 멀리 다 떨어진 옷을 입은 사람이 쓰러져 잠들어 있다. 그들은 목표물을 확인하고 주위로 포위망을 구축한다. 목표물에 접근해서 엎어져 있는 사람을, 뒤집어 보는 순간, 늙은이의 모습이다. 권삼득이다.
실망하는 안색들. 그들은 권삼득을 깨워, 옷의 경위를 묻는다. 권삼득, 손짓발짓해가면서, 용추골 초입에서 남원 어귀에서 한 사람에게 옷을 빼앗기고 강제로 이 옷을 입게 되었다고 알려준다. 추적자들, 무언가 잘못 된 것을 알고, 길을 되짚어 간다. 그들이 사라지면, 권삼득 웃으면서 폭포 쪽으로 간다. 폭포 뒤 동굴에 쓰러진 흥록이 있다.

# 26. 위봉 폭포에서
흥록, 소리를 연습한다. 그는 비전리에서, 그리고 금수사에서 수련했던 소리를 독학으로 갈고 닦는다. 그가 소리하는 모습 위로 권삼득 닭다리를 뜯고 있는 모습이 겹쳐진다. 흥록, 그런 권삼득의 모습에 이골이 났다는 듯, 가르침을 구할 생각도, 물을 생각도 없이, 묵묵하게 소리 연습만 한다.

권삼득        원한만 가득해서야 어찌 소리라고 할 수 있겠느냐.
흥록        (말이 없다)
권삼득        노래는 원한을 증오를 담는 그릇이 아니다. 너처럼 해서야 누가 소리를 듣겠느냐.
흥록        제 마음속은 복잡합니다.
권삼득        소리꾼은 자기 마음을 노래하지 않는다. 듣는 이의 마음을 노래해야지, 진정한 소리꾼이지. 원한을 요구할 때만 원한을 줘라. 원한을 요구하지 않으면 즐거움을 줘라.
흥록        선생님의 가르침은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제 마음 속에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권삼득        소리꾼은 포목장수와 다를 바가 없다. 비단을 원하면 비단을 주고, 무명을 원하면 무명을 줘야 한다. 비단을 원하는데, 너는 무명만 사라고 채근하는 꼴이다.
흥록        세상은 아름답지 못한 곳입니다. 소리는 비단처럼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무명이 제격입니다.
권삼득        허허, 소리는 한이 아니라도. 너라면 노력하면 짐승소리, 새소리는 터득할게다. 세상의 명창이라고 하는 자들은 그 중에 하나만 터득해도 그 이름을 얻는다. 하지만 사람 소리는 한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소쩍새 소리가 왜 애간장을 태우느냐? 그것이 소쩍새의 마음이냐? 소쩍새는 인간의 마음으로 노래한다. 그래서 듣는 이들은 그 소리에 마음 아파하는 게다.
흥록        선생님은 사람 소리가 짐승소리, 새소리 윗길이라고 말하시는군요.
권삼득        아무래도 넌, 나와 인연이 없다. 짐승소리, 새소리는 더 가르칠 것이 없다. 있다면 사람소리인데, 너는 증오로 가득 차서 배우려 하지 않으니. 스스로 배워라, 세상에 나가서. 아픈 사람들로부터 배워라. 아픈 사람들에게 어떤 소리를 들려주어야 하는지. 그러기 위해서는 네가 먼저 아파야 할 것이다. 넌 따라하지 않는 아이이다. 스스로 배우는 수밖에.
흥록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사람 소리 다음은 무엇입니까.
권삼득        나도 가보지 모했다. 하지만 그 다음도 분명 있다. 나는 그것을 귀신 소리라고 이름 붙였다. 이름만 붙였다.
흥록        구해주신 은혜에 깊이 감사합니다. 한 번도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늘 감사했습니다.
권삼득        너와 나는 꽤 질긴 인연을 맺고 있다. 우리는 어디선가 또 만날 것이다. 가르칠 수 없는 아이를 만나서 나도 기뻤다. 잘 있거라.
흥록        안녕히 가십시오.

권삼득, 길을 가면서 심봉사 눈 뜨는 대목을 부른다. 흥록, 감았던 눈을 뜨면서, 멀어지는 스승의 모습을 쫓는다.

# 27. 현실, 진주 촉석루
염명창        (아쉬운 듯) 그분이 한동안 용추골에 계셨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흥록        예, 하지만 그 뒤로는 뵙지 못했습니다.
모동지        그러면, 사람 소리와 귀신 소리는 어떻게 터득하게 되셨는가?
김병기        속세의 사람들은 자네가 귀신을 만나고 와서 그들로부터 배웠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맹렬        제가 듣기로는 십장바위에서 수련했다고 하시더군요.
흥록        소문이 헛된 것만은 아니군요.

# 28. 고향 마을 어귀
남루한 행색으로 귀향하는 흥록.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 마을은 조용하고 흥성거리는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 음악과 상업으로 번성하던 동리의 풍경이 씻은 듯이 사라졌고, 사람들은 무언가를 의식하는 듯 굳은 얼굴로 생업에만 종사한다. 장이 서던 곳도 마찬가지, 소리 죽여 움직이는 사람들은 생기가 없다.
그때 맞은편에서 적막을 깨고, 고함 소리 들린다. “물렀거라.” 혈기 왕성한 외침. 장정이 앞서고 가마가 뒤따르는데, 사람들 그들 일행을 보자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로 피한다. 흥록 머뭇거리는 사이에 장정이 다가와, 길옆으로 밀친다. 흥록, 넘어질듯 밀려나면서 그를 알아본다. 과거에도 달려와서 그를 밀곤 했던, ‘돌이’다. 그러나 어릴 때와는 달리 지금은 넘어지지 않는다.
돌이의 뒤로 가마가 지나가면서 주렴이 살짝 들추어진다. 그 안의 한 여인, 흥록을 본다. 눈에 이채가 빛난다. 가마가 지나가자, 사람들 너도나도 한 마디씩.
“돌이, 참 많이 변했어.” “어디 갔다 오는 길인가 보네, 요즘은 부쩍 바깥나들이가 잦아.” “소리 들으러 갔겠지. 이러다가는 소리꾼이 씨가 마르겠네, 그려.” “그 속을 누가 알겠나.”
사람들과 엇갈려 가며, 흥록 그들의 말을 기억한다.

# 29. 그리던 옛 집에서
다 쓰러진 집. 인적이 끊어진지 오래인 듯 폐가나 마찬가지이다. 그 앞에서 상념에 잠기는 흥록. 언젠가 흥록에게 선물을 주겠다는 아버지의 영상이 지나간다. 흥록, “아버지.” 하고 불러본다. 스치지나가는 바람.

# 30. 분이 집으로
흥록        어른신…… 어르신…….
안에서        누구요? 콜록콜록
흥록        접니다. 마루.
안에서        누구라구요?
흥록        마룹니다.

문이 열리며, 황급히 나오는 분이 부친.

분이 부        어서 들어오게, 어서…….

# 31. 방안
흥록                절 받으십시오.
분이 부        절은 무슨 절, 어서 앉게.

흥록, 절을 하고 앉으며

흥록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분이 부        소식 못 들었나. 이곳은 자네가 머물 곳이 아니네.
흥록        하지만 이곳에 와야 했습니다.
분이 부        부친 소식이 궁금하겠지. 돌아가셨네. 모친도. 혼자 계시기가 어려웠겠지.
흥록        누굽니까?
분이 부        그걸 알아 뭐하나.
흥록        전, 알아야 합니다.
분이 부        (사이) 최진사가 고발을 했으니 최진사라고 할 수도 있고, 관아에서 고문을 했으니 관아라고 할 수도 있고, 우리 모두가 보고도 아무도 말하지 못했으니 우리 모두라고도 할 수 있겠지.
흥록        (조용히 땅을 친다)
분이 부        떠나게. 이곳은 위험한 곳이야. 누이를 찾아가게.
흥록        떠날 수 없습니다.
분이 부        혹, 딸애 때문인가? (사이) 잊게, 인연이 아니야.
흥록        최진사 집에 있겠죠.
분이 부        이곳은 최씨의 땅이 되었네, 젊은 최진사는 조정의 실력자와 손을 잡고 더욱 강하졌네. 보아서 알겠지만 이 마을은 죽었어. 모든 것이 최씨 마음대로지. 오늘은 최진사 생일이라서 좀 나은 걸세. 이곳은 최씨의 허락 없이는 소리 한 자락 들을 수 없는 곳이네. 자네가 있을 곳이 아니지. 빨리 떠나게.

# 32. 떠나는 흥록
흥록, 마을을 떠나고 있다. 흥록과는 반대 방향으로 사람들이 몰려간다. 사람들은 아까와는 달리 다소 생기를 되찾은 얼굴이다. 흥록, 그들을 거슬러 움직이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군중들의 무리로 합류한다. 카메라 부감으로 꾸역꾸역 몰려가는 군중들을 잡는다. 꽤 많은 사람들이다.

# 33. 최진사 집 앞
돌이,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사람들 불만에 찬 얼굴이지만, 감히 소리치지 못하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 담장 안에서 은근한 풍악소리가 들린다. 훈장 안으로 들어간다.
돌이, 인사한다. 그러나 뻣뻣한 모습. 훈장, 못마땅한 어조로 말한다. “살살하게, 다치지 않게. 소리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나.” 돌이, 마지못해, “훈장님, 저도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진사님이 분부를 내려서……. 더 다가오지 마시오. 마을 사람들은 오늘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습니다.” 고압적인 음성. 훈장 머리를 흔들며 들어간다. 멀리서 지켜보던 흥록, 외부 사람들의 물결 속으로 끼어들어가 안으로 들어간다.

돌이        잠깐, 어이.

무사히 지나가는 가 싶었는데, 흥록, 돌이에게 잡힌다. 돌이, 흥록을 유심히 보더니 얼굴이 일그러진다.

돌이        우리 전에 본 적이 있지 않나?
흥록        (당황한다)
돌이        그렇지 아까 길가에서……. 앞으로는 조심하슈.

들어가라는 손짓.
흥록, 일순 당황했다 안으로 들어간다. 그를 유심히 보는 돌이.

# 34. 최진사 집 안뜰
주안상이 차려져 있다. 저 멀리 최진사, 그 오른쪽에 아들 기문, 그 옆에 분이. 분이를 더듬는 흥록의 시선이 아련해진다. 손을 잡고 마루의 집을 바라보던 정경이 스쳐 지나간다. 그때 말소리. “모동지의 소리가 일품이라는 데 한 번 청할 수 있겠습니까?” 모동지 일어나 인사하고 소리한다.

모동지        여보 도련님 여보 도련님
        날다려가오 날다려가오
        나를 어쩌고 가랴시오
        쌍교도 싫고 독교도 싫네
        어리렁 충청 거는단 말게
        반부담 지여서 날다려가오

최진사의 왼쪽에 앉은 딸이다. 어느덧 장성했다. 딸은 멀리서지만, 흥록을 알아본다. 흥미로운 인상이다. 딸 옆에 훈장의 얼굴도 보인다.
흥록, 소리를 들으며 구석에 앉아 있다. 그의 시선은 분이에게 못 박혀 있다. 헤어지던 날의 정경이 흘러간다.

모동지        저건네 느러진 장송
        깁수건을 끄너내여
        한끝은 낭기 끝 끝에 매고
        또 한끝은 내목 매여
        그 아래 뚝 떠러져 대롱대롱
        내가 도련님 앞에서 자결을 하여
        영이별을 하제 살여 두고는 못나니.

흥록, 눈에 눈물이 고인다. 소리 그치며 모동지 조용히 인사한다. 모동지, 앞으로 떨어지는 수고비. 모동지 얼굴 위로 모멸감이 스치지만, 안색을 바꾸어 최진사에게 아첨한다. “만수무강하옵소서.” 하지만 수그린 그의 얼굴은 밝지 않다.
고수에게도 지전이 떨어진다. “옛다. 수고했다.” 고수는 표정 없이 일어나 돈을 집고, 감사를 표한다.
이제야 고수를 알아보는 흥록. 북을 안 배우겠다고 떼를 쓰던 바우이다. ‘바우가 고수가 되었구나.’ 동생, 흥록의 시선을 느끼는지 못 느끼는지, 최진사로부터 잔을 한 잔 받고, 다음 창자를 기다린다.
흥록, 비애를 느낀다. 종이를 꺼내 무언가를 쓴다. 그가 무언가를 쓸 동안, 염명창 소리한다. 소리하던 염명창에게 카메라 이동했다가 팬(PAN)해서 돌아오면, 흥록 자리 비어있다. 종이 한 장만 달랑. 상을 치우던 하인, 종이를 들고 간다. 흥록의 빈 자리를 더듬는 시선이 하나 더 있다.

# 35. 최진사 집 바깥
사람들이 작게 들려오는 소리에 매달리고 있다. 돌이 사람들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돌아가시오, 이제 돌아가시오, 대감마님께서 엄명을 내리셨소. 내일까지 추수를 끝내라는 엄명이오. 돌아가시오. 잔치는 끝났소.”
사람들 감히 대꾸는 못하고 발을 돌리면서도 아쉬운 표정이다. 돌이, 나오는 흥록을 보고 “어이, 젊은 양반, 왜 벌써 나오시오?” 흥록, 대꾸하지 않고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그들은 말을 잃은 사람들 같다. 흥록,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들을 따라가며 나지막이 소리하기 시작한다.
사람들, 느닷없는 소리에 깜짝 놀란다. 흥록, 점점 크게 소리한다. 안에서 은은히 들리던 소리와 경쟁을 하려는 듯.

# 36. 염명창의 소리
소리하던 염명창, 담장 바깥의 우렁찬 소리에 일순 흔들린다. 당황하는 염명창.

# 37. 전달된 편지
최진사, 하인이 가져온 편지를 읽는다.

# 38. E. 편지 읽는 흥록의 소리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金樽美酒 千人血 옥반가효 만성고라 玉盤佳肴 萬姓膏

# 39. 최진사 집 바깥, 군중들
군중들, 흥록의 소리에 흥분하기 시작한다. 옆에서 돌이가 아무리 흩어지라고 말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은 낯선 소리꾼의 소리에서 희열을 느낀다.

# 40. 염명창의 고초
억지로 소리하던 염명창, 느닷없이 높아지는 담장 밖 소리에 당황하기 시작한다. 은근히 밀리는 염명창의 소리. 전열을 가다듬고 싸우려 하지만, 담장 안의 청중도 이미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염명창, 바깥에서 들리는 민중의 소리에 기죽기 시작한다.

# 41. E. 편지 읽는 흥록의 소리
최진사가 읽고 있는 편지 위로 흥록의 소리 지나간다. “촉루락시에 민루락이요 燭淚落時 民淚落 가성고처에 원성고라 歌聲高處 怨聲高.”

# 42. 최진사 집 바깥, 군중들
기죽었던 군중들, 흥록의 소리를 듣고 공감하듯 들뜨기 시작한다. 얼쑤 하는 추임새가 들어가고, 흥이 서리기 시작한다.

# 43. 염명창의 악전고투
담장 안의 사람들도 바깥의 소리와 군중들의 웅성거림을 듣고 있다. 염명창 자신의 소리가 호소하지 못함을 알고 슬그머니 멈춘다. 아무도 그의 소리가 그친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

# 44. 구겨지는 편지
화가 난 최진사의 손이 편지를 구긴다. 옆에 있던 딸이 그 편지를 집는다.
담장 밖에서, ‘암행어사 출도’를 외치는 흥록의 소리 들린다. 민중들 큰 소리로 환호한다.

# 45. 흥겨운 군중들
군중들, 흥겨워서 들썩이고 있다. 돌이, 어쩔 줄 모르다가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 46. 최진사 집 안뜰
붉으락푸르락하는 최진사.

최진사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저 놈을 당장 잡아와라

뛰어 들어오던 돌이, 그 명을 듣고.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최진사        뭣이라고. 내 당장…….

딸, 옆에서 뭐라고 최진사의 귀에 속삭인다. 흥분을 가라앉히는 최진사, 곧 낯빛을 바꾸며,

최진사        내 잠시 농해 보았소. 아랫것들이 노는데 내 어찌 막겠소. (염명창에게) 수고했소. 시골 무지랭이들이 명창의 소리를 모르고 익숙하던 것에 날뛰는 것이니 너무 흉보지 마오. 오늘은 실컷 놀게 합시다. 자 내 술 한잔 받으시오.

손님들, 최진사의 기색이 풀어지자, 표정이 밝아지며, 너도나도 최진사의 아량을 칭찬하기 시작한다. 옆에서 구겨진 종이를 펴 보던 훈장, 속이 시원하다는 듯. 대견하다는 듯. 밖에서는 암행어사 출도에 혼쭐나는 육방관속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47. 멀리서 지켜보는 송기문
송기문, 문가에서 지켜본다. 군중들이 휩싸고 있는 소리꾼의 뒷모습이 낯익다. 앞에서 확인하고 싶지만, 불편한 걸음걸이로 무리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무리는 지금 흥분 상태이다. 군중들이 호위하듯, 소리꾼을 몰고 멀어진다. 멀리 마루와 분이의 집으로 향하는 골목이 보인다. 그 사이로 해가 지고 있다. 그 사이로 낙엽이 진다.



김남석․현 부경대학교 계약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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