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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특집/임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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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000년대의 새로운 가족모델들
부모 없는 시대의 가족신화
―2000년대의 가족소설
임영봉|문학평론가
1. ‘기원’으로서의 가족 이야기
소설이란 문학형식의 본질적 성격 중 하나는 자유로움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듯이, 소설이 다룰 수 없는 문제는 이 세상에 없다. 그것은 마치 굶주린 거지처럼 자기 앞에 놓인 세계를 게걸스럽게 끝없이 먹어치우면서 자기 증식을 계속해 나간다. 거기에는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자기 확장적 성격 때문에 소설은 모든 문학 형식 가운데서 가장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미래를 향해 활짝 ‘열려있는’ 장르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우리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설명하고 규정하는 온갖 종류의 문법과 규범들을 알고 있지만 그 이야기 형식들은 자신에게 부과된 구속과 제한을 넘어 항상 ‘새로움’을 과시한다.
소설의 생명이 끊임없는 자기 혁신에 있는 만큼 그것이 들려주고 있는 이야기의 세계 또한 마땅한 분류의 기준을 정하는 일이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 다양한데 가족 이야기는 그 모든 소설적 상상력의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 가족 이야기가 소설적 상상력의 원천에 해당한다는 판단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족은 인간과 세계 존립의 근본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에게 있어 가족이란 징표는 자의나 타의에 의한 선택의 문제가 결코 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단지 자신에게 이미 부여되어 있는 가족에 귀속될 뿐이고, 그때 가족이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인 삶의 조건임을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삶의 절대적 조건으로서의 가족 문제-가족 이야기는 마르지 않는 소설의 샘인 것이다.
가족 이야기의 역사가 무궁무진한 변이체들의 생산과정인 것처럼 가족소설의 범주 또한 탄력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가족소설의 개념은, 넓게 볼 때 ‘가족사(연대기)소설’을 포함하고 좁게는 ‘가정소설’ 혹은 ‘결혼소설’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의 가족소설이 우리 소설사 속에서도 하나의 뚜렷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음은 염상섭의 삼대와 채만식의 태평천하에서 출발하여 전후의 손창섭과 황순원, 최근의 박완서와 신경숙 등의 작가에 이르는 과정으로 계보화될 수 있다.
가족 이야기 형식으로서의 가족소설이 가진 특별한 의미와 가치에 대한 최초의 발견은 프로이트에 의해 이루어졌다. 프로이트는 한 개인의 성장과정에서 벌어지는 한 가지 사건에 주목하고 그 이야기에 ‘가족 로망스’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다. 프로이트의 가족 로망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어린아이이다. 처음에 어린아이에게 있어 부모는 유일한 권위자이자 믿음의 근원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점점 자라나면서 부모의 권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어린아이가 스스로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 드라마는 부모와의 성적 경쟁, 형제자매들과의 애정 경쟁에서 비롯된 것으로 어린아이는 이 과정에서 스스로 자신이 ‘입양아’이거나 ‘의붓자식’이라는 생각을 가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에 어린아이가 자신을 낳고 기른 부모를 대신하여,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자신의 진짜 부모라는 거짓된 ‘상상’을 한다는 점이다. 프로이트가 설명하고 있는 이 어린아이의 상상, 공상적 성격의 ‘이야기 지어내기’는 가족 서사의 전형을 이룬다.
프로이트의 생각을 이어받은 마르트 로베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족 이야기의 형식을 ‘기원의 소설’로 규정하고 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가족 이야기는 소설적 상상력의 ‘원천’이자 ‘원본’에 해당하는데, 왜냐하면, 소설적 욕망이란 근원적으로 어린아이가 최초에 생각했던 이상적인 가족관계-목가적인 가족적 삶을 연장하기 위한 몽상적․환상적 상상력의 발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업둥이 계열’과 ‘사생아 계열’로 나누어지는 이 가족소설의 형식은 어른이 되어버린 어린아이의 ‘불평’이자 스스로에 대한 ‘위로’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세상을 상대로 하는 ‘복수’의 수단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와 로베르가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가족소설은 가족적 삶의 방식에 한편으로 저항하면서, 또 한편으로 순응해나가는 인간적 욕망의 내밀한 회로-‘무의식’의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이후’라는 사회문화적 이행단계를 염두에 둘 때 우리 시대의 가족소설은 불변하는 인간적 욕망의 표현인 동시에 (탈)근대적인 ‘가족 이데올로기’의 굴절된 반영 형식임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2. 부서지기 쉬운 집에 대한 추억
세상은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변화’를 요구하는 각계각층의 목소리에 둘러싸인 채, 2000년대 한국 사회는 어느 시기보다 빠르고 광범위하게 자신의 모습을 탈바꿈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와 무관하게 우리 모두는 여전히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가족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 또한 지속적으로 씌어지고 있다.
2000년대의 가족소설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윤성희의 「레고로 만든 집」이다. 「레고로 만든 집」에는 세 사람이 살고 있다. 그 세 사람은 병석에 누워있는 아버지, 장애를 가진 오빠, 그리고 가장의 역할을 떠맡고 있는 ‘나’이다. 어떤 이유에서 아버지는 집을 날리고 쓰러져버렸으며 그날 이후 어머니 또한 집을 나가버렸다. 이런 상황 때문에 ‘나’는 집안 살림과 경제활동까지 도맡아야만 하는 처지에 떨어져 있다. 「레고로 만든 집」이 그리고 있는 것은 가족 질서의 상실로 인한 비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이다. ‘오빠’는 항상 아버지로부터 등을 돌린 채 놀고 있고, ‘아버지’는 말문을 닫아버렸으며, ‘나’는 칭얼대는 오빠를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다.(18-19쪽) 이 작품에서 비정상적인 가족의 모습, 그러니까 가족적 삶의 붕괴를 초래하고 있는 가족질서의 상실은 궁극적으로 병을 앓는 아버지와 가출한 어머니라는 ‘부모의 부재’에서 비롯되고 있다.
「레고로 만든 집」은 지금 우리가 망각하고 있거나 점점 잊으려고 애쓰는 현실의 어떤 국면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붕괴된 이 가족적 삶의 배후에 경제적 궁핍, ‘가난’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버지가 쓰러지자 어머니는 가출해버렸고 그래서 ‘나’는 집안을 돌보면서 돈까지 벌어야만 한다. ‘나’는 대학 근처의 복사가게에서 휴학생 행세를 하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녀는 대학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가끔씩은 남의 신분증으로 도서관에 들어가 학생들의 책을 훔쳐와 읽기도 한다. 「레고로 만든 집」은 소비가 미덕인 이 풍요의 시대에 가난의 문제가 여전히 단란한 가족적 삶을 허물어뜨리는 요인임을 일깨우고 있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 ‘나’가 보여주는 위기의식은 ‘가족과 개인’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여기서 붕괴된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나’는 자기 존재에 대한 증명 불가능성에 직면해 있다. 이야기 전편에서 그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나는 과연 누구인가, 있기나 한 것인가.’라는 성질의 회의적 의식이다. ‘나’가 드러내고 있는 이 위기의식의 넓고도 깊은 내면화 양상은 선명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어느 날 ‘나’는 옆집 옥상의 어두컴컴한 굴뚝 속에 떨어진 고양이 새끼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는데 “가늘게 떨고 있는 울음소리에는 간절함이 배어 있다.” 그 간절한 고양이 새끼의 울음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애절한 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 굴뚝 속으로 돌들을 밀어 넣는다.
가만히 굴뚝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낮에 보았던 내 얼굴, 복사기에 찍힌 내 얼굴이 굴뚝 속에 있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검게 찍힌 눈자위가 보인다. 검은 눈자위 사이로 흰 눈동자가 보인다. 흰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꽉 다문 아래턱이 서서히 지워진다. 그리고 코가, 눈이, 귀가 서서히 지워진다. 지워지는 게 아니라, 불타고 있다. 다 탈 때까지 눈동자는 나를 노려보고 있다. 내 얼굴이 지워지자 오빠가 만든 레고 집이 보인다. 그 집이 서서히 무너진다. 2층 방이 무너지고 아래층 창문이 하나 둘씩 떨어진다. 정원에 매달려 있는 그네가 위태롭게 흔들린다. 현관문이 무너지기 전에 나는 굴뚝에서 눈을 거둔다.
―윤성희, 「레고로 만든 집」(레고로 만든 집, 민음사, 2001, 29쪽)
주인공이 자신의 얼굴을 복사하고 그것을 들여다보는 이유는 삶 속에서 그녀가 자신의 존재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기 존재와 정체성을 찾아 헤매지만 삶의 어디에서도 자신의 존재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나는 어디에도 없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이 주인공은 자신의 운명을 저 어두컴컴한 굴뚝 밑바닥에 떨어져버린 새끼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통해 겨우 의식할 뿐이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나’의 고양이 죽이기가 ‘자기 살해’를 의미하고 있음을 떠올릴 때, 이 얼마나 끔찍한 이야기인가!
「레고로 만든 집」에서 오빠의 집 만들기 놀이는 정상적인 가족적 삶에 대한 열망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열망은 실현될 수 없는 불가능성으로 자신을 드러낼 뿐이고, 끝내 ‘나’는 가족적 삶의 이상을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나’의 집 부수기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가족적 삶에 대한 이상이란 오빠가 만든 장난감 집처럼 너무나 쉽게 부서져버리는, 허망한 꿈에 불과하다. 불에 타서 ‘사라지는 나’와 ‘무너지는 집’에 대한 주인공의 환각이 말하고 있듯이, 가족의 붕괴는 종국적으로 개인의 파탄을 의미한다.
가난한 상고생(商高生) 주인공이 등장하는 박민규의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에서도 가족질서의 상실과 가족적 삶의 붕괴 양상을 목격할 수 있다. 방학 때면 늘 주유소나 편의점을 돌아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해온 ‘나’는 현재 지하철 푸시맨으로 일하고 있다. 물론 그런 ‘나’에게도 집과 가족은 있다. 병석에 누워계신 ‘할머니’, 변변치 않은 직장에 나가는 ‘아버지’, 청소부로 일하는 ‘어머니’가 그들이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의 주인공 ‘나’가 이렇게 여러 가지 일터를 전전하는 ‘고학생’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역시 가난 때문이다. ‘나’는 이 엄혹한 현실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최소한의 돈을 벌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일찍이 터득한 경우이다. ‘나의 산수(算數)’란 바로 그런 의미의 생존술에 다름 아니다. 문제적인 것은 이 ‘나’가 자신만의 산수, 그러니까 돈의 필요성을 깨닫는 순간 ‘조용한 소년’으로 변해버렸으며, 이에 대해 자기 스스로 “그것은 슬픈 일도 기쁜 일도 아니었으며, 누구를 원망할 성질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72쪽)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산수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물론 세상엔 수학(數學) 정도가 필요한 인생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삶은 산수에서 끝장이다. 즉 높은 가지의 잎을 따먹듯-균등하고 소소한 돈을 가까스로 더하고 빼다보면, 어느새 삶은 저물기 마련이다. 디 엔드다. 어쩌면 그날 나는 <아버지의 산수>를 목격했거나, 그 연산(演算)의 답을 보았거나, 혹 그것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즉 그런 셈이었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는다. 도시락을 건네주고, 산수를 받았다. 그리고 느낌만으로 <아버지 돈 좀 줘>와 같은 말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박민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카스테라, 문학동네, 2005, 73쪽)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가 보여주는 가족관계 또한 정상적이지 않다. 「레고로 만든 집」이 그러한 것처럼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가족 질서 내부의 자기 위치에서 벗어나 있다. ‘무능력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에게 있어 부모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자 궁극적으로는 온전한 가족적 삶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버지에 대해 일정한 유대감을 간직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있으나 마나한’ 아버지일 수도 있지만 ‘나’는 결코 그런 아버지를 비난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버지에 대한 ‘나’의 그런 태도는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이에 대한 의혹은 “어느 날 거울을 보다가, 그런 잿빛의 눈동자를 나는 보았다. 아버지와 색이 같은 두 개의 동심원, 나는 결국 아버지의 연산(演算)이었다.”(85쪽)는 구절에서 어느 정도 밝혀진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질 때 ‘나’의 아버지 수용방식은 허약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스스로 아버지가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는 의사(擬似) 아버지인 셈이다. 자신이 처해 있는 냉혹한 현실세계를 묵묵히 인정하고 착실한 고학생의 삶을 살아가는 ‘나’는 그런 의미에서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의 ‘나’와 「레고로 만든 집」의 주인공은 비슷한 것 같지만 서로 뚜렷하게 구별된다.
이 가족 드라마는 어느 날 출근길에 나선 아버지가 실종 처리되고 할머니 또한 복지시설에 보내짐으로써 막을 내린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가 그리고 있는 가족 이야기는 자본주의의 냉혹한 얼굴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흔들리는’ 가족과 ‘허약한’ 아버지의 배후에 드리워져 있다는 것. 자본주의라는 비정한, 또 한 명의 아버지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그 아버지는 결코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법이 없지만 모든 질서의 한복판에 서있다. 그는 ‘나’에게 돈과 산수를 가르친 장본인으로서 그 ‘돈-산수’ 자체가 아버지임을 주지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나’는 이 허약한 아버지와 비정한 아버지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아버지의 존재는 ‘나’에게 자주 혼동을 불러일으키고 종국에 가서는 부재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우주적 차원의 패밀리에 대한 주인공의 황당무계하고 생뚱맞은 꿈꾸기는 바로 그런 자신의 방황과 혼동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야기 속에서 ‘나’는 자주 인류를 향한 연민의 감정을 표하면서 화성인 금성인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주적 차원의 삶을 상상한다. 그러나 그 상상은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 말 그대로 한갓 몽상에 그칠 뿐이다. ‘지구 탈출’이라는 ‘나’의 이 황당무계한 꿈은 가족붕괴의 기억에서 유래하는 그 자신의 심각한(!) ‘소외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레고로 만든 집」과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에 비교할 때 김영하의 「오빠가 돌아왔다」는 가족 붕괴의 또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경우이다. 「오빠가 돌아왔다」의 주인공 ‘나’는 열네 살의 여중생이다. 사기꾼과 다름없는 ‘아빠’, 집 나가서 식당일을 하는 ‘엄마’,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 가출해 버린 ‘오빠’가 ‘나’의 가족 구성원들이다. 「오빠가 돌아왔다」에 등장하는 이 가족 공동체는 결손가정의 전형으로 볼 수 있으며, 그런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나’ 역시 ‘문제아’로 그려지고 있다. 이 가족 구성원들 각각에게 있어 가족 혹은 가족적 삶은 거의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는 이미 가족의 ‘해체’를 경험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가족은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제목이 그러하듯이 「오빠가 돌아왔다」는 해체된 가족의 복귀 과정을 스토리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할 뿐만 아니라, 그런 가족 재건이 ‘오빠’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움을 더한다.
오빠는 열여섯까지 아빠한테 죽도록 맞고 자랐다. 아빠가 오빠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함께 사는 것만도 다행이다. (중략) 개새끼, 씨발새끼, 좆같은 새끼. 내가 가만두나 봐라. 그 예언은 열여섯이 되자 현실이 되었다. 오빠는 술에 취해 달려드는 아빠를 주먹으로 때려눕히고는 줄넘기줄로 꽁꽁 묶어놓고 집을 나갔다. 아빠는 줄넘기줄에 묶인 채로 아들을 저주하다 모로 쓰러져 잠이 들어버렸다. 그 후로 4년 동안 오빠는 집에 한 번도 들어오지 않다가 스무 살이 다 되어서, 그러니까 올해 초에, 마치 점령군처럼 당당하게 입성했다. 너 이 자식, 감히 어딜 기어들어 오냐며 달려들던 아빠는 오빠의 발길질 한방에 나가떨어졌고 그때부터 오빠가 법이었다.
―김영하, 「오빠가 돌아왔다」(오빠가 돌아왔다, 2004, 창비, 49쪽)
「레고로 만든 집」과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통해 우리는 가족붕괴를 다루고 있는 2000년대의 가족 이야기들이 부모의 문제, 특히 ‘아버지의 부재’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이러한 측면은 「오빠가 돌아왔다」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아빠를 대신하고 있는 오빠가 명백하게 하나의 ‘법’으로 대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오빠는 「레고로 만든 집」의 ‘여성’ 주인공처럼 그 자신이 아버지의 자리에 설 수 없거나,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의 고학생 ‘어른아이’처럼 아버지 상(像)에 대한 혼동을 일으키거나 하는 등의 경우와 다르게, 현실세계 속에서 ‘무능한’ 아버지를 내쫓고 자신이 아버지임을 선언하고 있다.
「오빠가 돌아왔다」에 등장하는 ‘오빠’의 아버지에 대한 태도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하다. 아버지에 대한 부정의 태도에서 ‘나’는 오빠와 모종의 동맹관계를 맺고 있으며 굳건한 ‘형제애’를 보여준다. ‘나’는 자신의 아버지를 ‘구제불능’이라고 하거나, “저 아빠라는 인간은 똥개보다도 지능지수가 낮은 게 아닐까.”(44쪽)라고 스스로 묻기도 한다. ‘나’ 앞에서 아버지는 그저 “식충일 뿐이다.”(45쪽)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의 가난한 고학생이 ‘무덤덤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오빠가 돌아왔다」의 여중생 ‘나’ 또한 조숙한 ‘어른아이’로서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아빠한테 어른스러움을 기대한다는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조숙’할 뿐만 아니라 ‘노회’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생각할 때 「오빠가 돌아왔다」가 그리고 있는 가족의 복귀와 가정의 회복은 역설을 의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 가족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기 때문이다. 한 지붕 아래 다시 모인 그들 가족이 ‘야유회’를 가고 ‘기념사진’을 찍는 일처럼, 그들에게 있어 단란한 가정-행복한 가족적 삶이란 ‘현실’이 아니라 단지 ‘추억’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어떤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3. 가족 해체와 봉쇄된 미래
윤성희의 「레고로 만든 집」과 박민규의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그리고 김영하의 「오빠가 돌아왔다」가 다루고 있는 가족 붕괴 이야기의 배경에는 ‘가난’이라는 요소가 자리 잡고 있다. 이들 이야기 가운데서 경제적 빈곤-가난은 정신적으로 ‘부모의 부재’ 현상을 야기시키거나 현실적으로 ‘무능한 가장’을 만들어내는 문제의 원점이다. 그러나 이 단편적 이야기들의 먼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 가난의 문제는 인물의 심리학을 탐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거의 가려져 버린다.
공선옥의 연작소설 유랑가족은 핍진한 사실적 묘사를 통해 이 가난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는 경우이다. ‘한국판 가난의 현재적 형상’(방민호의 「발문」, 262쪽)이라는 의의를 부여할 수 있는 이 작품은 가족소설적인 측면에서도 눈길을 끌고 있다. 가족 이야기라는 관점에 설 때 유랑가족이 보여주는 서사의 폭은 대단히 넓은 것으로 나타난다. 유랑가족은 가난으로 인한 가족 붕괴 이야기를 한 개인이나 한 가족이 아니라, 복수의 ‘가족들’이라는 차원에서 그려나가고 있는 장막극에 해당한다. 「겨울의 정취」, 「가리봉 연가」, 「그들의 웃음소리」, 「남쪽 바다, 푸른 나라」, 「먼 바다」 연작으로 이루어진 유랑가족에는 수많은 인물 군상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가난한 사람’이라는 데 있다. 그들은 대부분 몰락 농민이거나 공사판 노동자, 고물상, 식당 잡부, 노래방 도우미들로 살아가고 있다.
이 가난한 민중의 이야기 가운데서 가족은 붕괴 과정에 있다기보다는 이미 완전히 무너져버린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가난은 이미 그들의 가족적 삶을 철저하게 파괴시켜 버렸다. ‘달곤’과 ‘기석’이 그렇듯이, 그들은 고향땅을 떠나 공사판을 전전하면서 자신의 아내를 찾아 헤매는 식의 유랑민적 삶을 살아간다. 그들에게 있어 삶이란 ‘돈을 벌어야 한다.’는 단 하나만의 비정한 목표를 가진다. 그러나 냉엄한 현실의 노예가 되어버린 그들 앞에서 삶이란 불행과 비극의 연속일 뿐이다. 밤길에 칼을 맞고 쓰러지는 ‘명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연순’과 ‘종만’의 비극적 삶이 그러하다. 유랑가족은 자기 삶의 근거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유랑 집단이 되어버린 민중계급의 현실과 그들이 겪고 있는 가족 해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다. 이 거대한 가족 해체의 드라마 속에는 ‘한’이라는 ‘예외적’ 성격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작가는 그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난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는 모습을 무수히 보아온 한이었다. 가난은 사람을 황폐하게 만들기도 하고 난폭하게 만들기도 했다. 가난은 다양한 형태로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렸다.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의 가정을 지켜낼 수 있는 마지막 무기는 사랑뿐이었다.
―공선옥, 유랑가족(실천문학사, 2005, 74쪽)
여기서 작가는 ‘휴머니티’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정녕 사랑은 가족을 지킬 수 있는 힘인가. 그러나 유랑가족 전편은 오히려 그것이 어림없는 하나의 소망임을 말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아이러니는 독자에게 짙은 페이소스를 남긴다. 유랑가족이 가진 의미는 그런 아이러니를 빚어내는 냉혹한 우리의 현실, ‘사실’ 자체를 돌아보게 한다는 데 놓여 있다.
이재웅의 장편소설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에서도 가족 해체의 모티프를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열두 살 ‘소년’이다. 엄마의 가출과 아빠의 죽음으로 인해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 소년은 그동안 자신을 보살펴준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자 누나와 함께 살아간다. 소년의 유일한 혈육인 ‘누나’, 어린시절 집을 나간 그녀는 매춘부가 되었다. 소년은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 ‘늙은 소년’이라고 부르며 그런 자신의 스승이 ‘가난’임을 밝히고 있다. 가난을 스승으로 삼고 있는 이 늙은 소년의 가족에 대한 기억은 이런 것이다.
아빠나 할머니의 죽음도 그랬다. 그들의 삶도 그랬다. 그들의 삶은 너무도 작고 보잘 것 없어서 세상은 그들이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남겼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열두 살짜리 자전거 타는 소년을 남겼다. 그리고 그 소년 역시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미래에도 그의 생은 세상이 조금도 주목할 가치가 없는 인생일 것이다. 물론 학교에서는 그 반대로 가르친다. 꿈을 이룬 자는 세상을 움켜쥔다! 꿈이 인생을 바꾼다! 하지만 늙은 소년은 그 확률이 너무 작으며 자신이 그 확률에 포함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안다.
―이재웅,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실천문학사, 2005, 111쪽)
해체된 가족에 대한 소년의 이 기억 속에서 그 자신의 미래의 삶 또한 봉쇄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작가는 유랑가족의 유랑민들을 자살로 이끌었던 바와 같은 현실의 냉혹함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현실세계를 낯선 장소로 바꾸어놓고 있는 ‘늙은 소년’의 시각이다. 세계를 낯설게 만드는 ‘카프카적인 상상력’과 세계를 단순하고 친근하게 만드는 ‘동화적 상상력’이 기묘하게 결합된 이 늙은 소년의 시선 앞에서, ‘돈’과 ‘성욕’의 교환으로 충만해 있는 ‘성보아파트 307호’와 그 공간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중년의 사내 ‘곽문호’는 차츰 그 자신의 의미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착취하고 억압하는 기계-‘자본주의’의 음침한 그림자를 떠올리게끔 한다.
공선옥의 유랑가족과 이재웅의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에서 가족은 그 자신을 지탱시키는 물질적 토대를 이미 상실하고 ‘해체’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런 가족 해체의 이야기는 정이현의 「소녀시대」에서 새로운 양상으로 대두하고 있다. 「소녀시대」의 주인공은 열여섯 살의 여고생 ‘나’이다. ‘아버지’는 국립대학의 교수이고, ‘어머니’는 부잣집 고명딸로 자라난 경우이다. 세 식구가 전부인 단출한 ‘나’의 가족은 서울 강남의 고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소녀시대」의 주인공 ‘나’의 집안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성장과 안정을 대변하는 서울 강남의 중산층 가정이다. 이야기는 ‘나’의 이런 선언에서 시작되고 있다. “엄마 아빠가 죽었을 때 내가 스무 살이면 좋겠다. 스무 살 넘은 어른을 고아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쓸데없는 동정은 딱 질색이다. 혼자가 되면 나는 우선 이 집을 팔 거다.”(65쪽) 서울 강남의 중산층 가정에서 외동딸로 자라난 한 여고생이 자신의 부모와 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는 이 가족 이야기 속에서 문제는 더 이상 가난이 아니다.
「소녀시대」가 드러내고 있는 가족 붕괴의 양상은 가족적 이상의 상실에 기인한다. ‘나’의 가족은 이 과정에서 모두가 공범자로 참여하고 있는데 일단 ‘나’의 부모에 대한 태도부터 문제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나’는, “도대체 도움 되는 게 하나 없는 부모다.”(66쪽)라는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부모에 대한 ‘나’의 지독한 ‘불신’은 그들이 가진 위선과 허위의식의 목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겉과 속이 다른 이중인격자들임을 일찍이 깨달아버렸다. 그러니까 「소녀시대」에서 ‘나’의 부모가 보여주는 무능함은 경제적 측면이 아니라 정신적 의미의 ‘권위 상실’에서 비롯되고 있다. 소통불능 상황에 떨어진 이 가족은 그래서 각자 자신만을 돌보는 생활에 빠져 있다. 그들은 제각기 자기 삶을 살기에 바쁜, ‘나’가 보기에도 “정말 대단한 집구석이다.”(81쪽) 이와 같은 삶 속에서 공동체로서의 가족적 이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철없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비정한 세상의 슬픈 진실을 알아버린 고독한 영혼”(88쪽)으로 변해버린 ‘나’는 포르노 사진의 모델로 기꺼이 나서고, 남자친구와 공모하여 자신의 부모를 상대로 납치극을 연출하여 돈을 뜯어내기까지 한다.
용이오빠는 우리 아빠한테 받은 돈으로 중고 오토바이를 샀다. 뿅카라나 뭐라나, 자동차가 안 부러운 오토바이라는데 내가 보기엔 그냥 양아치들 장난감 같다. 오빠한텐 처음에 차를 사주겠다고 약속했었기 때문에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방법이 없었다. 아빠가 범인한테 보낸 현금은 5백만 원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수표였는데, 내가 약 먹었냐, 수표를 쓰게. 용이오빠와 깜찍이에게 2백만 원씩 선물하고 나니 매 몫으론 백만 원이 남았다. 어떻게 써야 뽀대가 날까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다가 나는 불쑥 저금통장을 만들었다. 열라 유치하다는 거. 나도 다 안다. 하지만 다음에 진짜로 집을 떠날 때는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돈은 꼭 필요했다.
―정이현, 「소녀시대」(낭만적 사랑과 사회, 문학과지성사, 2003, 94쪽)
「소녀시대」의 ‘나’는 「오빠가 돌아왔다」의 오누이와 똑같은 ‘패륜아’이다. 이 패륜아의 세계는 「오빠가 돌아왔다」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듯이, ‘양심’의 부재-윤리 도덕적 기준으로서의 ‘아버지라는 법’의 훼손에서 비롯되고 있다. ‘나’는 친구의 부모가 “우리 엄마 아빠보다는 어쨌든 훨씬 양심적인 부모”(77쪽)라는 생각을 드러내기도 한다. 「소녀시대」에서 부모에 대한 ‘나’의 부정은 가족적 이상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고 결국 가족의 해체라는 결과에 이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소녀시대」의 이와 같은 가족 해체 양상이 가족 질서라는 ‘이념’을 대신하는 주체 각각의 ‘욕망’에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4. 가족 이야기, 그 이후
프로이트에 의하면 우리는 결코 가족 이야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가족이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절대적 조건이면서 우리가 사는 또 다른 차원의 삶의 근거, ‘상상적 삶’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상상적 삶 속에서, 자신을 에워싼 세계와 투쟁을 벌이면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입양아’이거나 ‘의붓자식’들로 살아간다. 이 입양아 혹은 의붓자식의 이야기들은 영구적인 인간적 갈망의 모험담으로서 소설적 상상력의 근원에 다름 아니다.
우리 시대의 가족 로망스는 스스로 집과 가족을 버리고 상상적인 ‘고아’ 혹은 ‘미아’로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이야기 속에서 반복되고 있는데 이들 주인공이 보여주는 고아의식 혹은 미아의 길찾기는 특히 젊은 작가들의 상상력을 근본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이와 같은 우리 시대 젊은 작가들의 가족 이야기는 새로운 차원의 아비 부재 경험을 내면화한, 부모 없는 세대의 대두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 세대가 가진, 자신의 부모를 부인하는 ‘업둥이’이거나 스스로 아버지-되기를 갈망하는 ‘사생아’적 욕망은 ‘어른-아이’ 주인공의 형상에 집약되어있는데, 그 인물들은 때때로 「오빠가 돌아왔다」의 오누이나 「소녀시대」의 ‘나’처럼 가족 자체를 부인하는 극단적인 ‘패륜아’로 행동하기도 한다. 우리 시대의 가족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러한 주인공들은 스스로 ‘고아 되기’ 혹은 ‘미아 되기’의 차원에서 패륜아의 세계를 향해 점점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패륜아들의 일그러진 모험담 속에서 우리 시대의 집과 가족은 ‘위기’에 처해 있다. 이들 이야기 가운데서 가족은 자신을 지탱하는 질서를 상실하고 목하 붕괴 과정에 있거나 이미 해체되어 작동불능의 상태에 떨어진 것으로 나타난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는 가족의 형태가 인류의 발전 단계에 따라 진화를 거듭함을 주장하고 있는데 여기서 가족은 사유재산이나 국가처럼 하나의 억압 장치, 이데올로기이다. 안락함을 보장하는 집과 가족을 마다하고 거짓된 가짜 삶을 살아가는 가족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현재 우리 시대의 ‘가족 이데올로기’가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가족을 통해 꿈꾸는 것은 정녕 무엇일까. 그 꿈의 진정한 정체를 캐는 일은 유랑가족과 「소녀시대」 사이에 놓인 먼 거리만큼이나 아득하기만 하다.
임영봉․
경남 김해 출생
․1997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저서 늪에 빠진 언어의 표정 한국 현대문학 비평사론 등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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