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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특집/고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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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691회 작성일 08-02-29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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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000년대의 새로운 가족모델들


나는 고아다

고봉준|문학평론가



1. 왜 가족인가?
90년대 문학에서 ‘가족’은 온갖 사회적 모순의 결절점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페미니즘 이론의 등장은 가부장적 가족 제도의 폭력성과, 그 속에서 여성들이 감당해야 했던 질곡의 시간을 서사화하는 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90년대 여성문학의 중요한 근거였던 ‘가족’은 IMF라는 새로운 국면의 등장으로 인해 새롭게 굴절되기 시작했다. IMF라는 새로운 현실은 전통적인 가족 구조 내에서의 성역할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구조조정이나 명예퇴직 같은 경제적 현상은 가부장적 가족모델 내에서의 성역할을 바꿔놓았으며, 경제적 조건에 따른 이혼의 급증은 편부/편모의 이중핵가족화 현상으로 이어졌다. 물론 가족 제도의 분열과 재조합은 산업화 시대를 특징적 현상이다. ‘돈’이라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가족의 모습을 형상화한 이명랑의 「까라마조프가의 딸들」이나, 해체의 위기에 직면한 가부장적 가족모델을 희화화한 김영하의 「오빠가 돌아왔다」 등은 ‘보호’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우리 시대 ‘가족’의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옛 것이 가고 새 것이 오지 않은 상태가 ‘위기’라면, 지금 ‘가족’이야말로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는 셈이다. 연일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는 가족의 해체 현상은 거의 병적 징후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보수적 논객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위기에 처한 우리 시대의 가족에 대해 심각하게 사유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여전히 ‘가족’이라는 제도가 우리에게 불편한 대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IMF를 전후하여 새로운 가족모델들이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혼율이 급증하면서 편부/편모 가족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개인’의 욕망에 대한 긍정은 독신의 유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전통적 가족 제도의 해체와 재구성 외에도 공동체 가족이나 다세대 가족, 이중핵가족, 동거가족, 개방가족 등의 대안적 가족모델이 실험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가족 관념은 여전히 가부장과 핵가족이라는 구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동성가족 역시 저널리즘의 관심의 대상은 될지언정 새로운 가족모델로 정착하지는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등장으로 인해 자본은 민족국가 단위를 넘어서 전 지구적으로 확장되고, 자본의 흐름을 따라 노동력의 이동 역시 세계적인 규모로 진행되고 있다. 여전히 단일민족의 혈통적 순수성이 강조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직장생활을 해야 한다거나, 삶을 마감하겠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더 이상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한편 국가 간의 자유로운 이동과 경계의 해체는 이주노동자 가족이나 국제결혼의 급증으로 이어지고 있다. 농촌에서 동남아 및 중국 여성들과의 국제결혼은 더 이상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다. 그러나 아직 이들에게는 문학적 시민권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또 주어질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인다. 한편 조기 유학열풍은 ‘기러기아빠’를 양산하고 있다. 기러기아빠의 죽음이나 탈선에 관한 이야기는 종종 매스컴을 통해 우리의 안방으로 흘러든다. 최근 발표된 몇몇 작품들에서 ‘기러기아빠’의 존재가 목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조기유학은 특정한 계층에 국한된 이야기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문학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90년대 후반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가족모델들은, 그 사회적 실체화는 별개로 아직 문학(시)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2. 새로운 가족모델은 가능한가?
90년대 이후, 시에서 가족은 대략 두 가지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나는 실존적 안식처로서의 가족이며, 다른 하나는 무의미한 도시적 일상이 영위되는 세계로서의 가족이다. 비교적 최근에 등단한 젊은 시인들의 등단작이나 첫 시집에서는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되는데, 그것이 바로 가난으로 얼룩진 유년의 가계를 시적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문학이 한 개인의 실존적 상처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할 때, 유년의 상처와 기억은 종종 한 시인의 문학적 원적이 된다. 그래서 대다수의 시인들에게 유년은 비록 가난으로 얼룩졌을지언정 현재적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원동력이거나 그의 영혼이 편히 쉴 수 있는 이상적 세계로 그려진다. 특히, 유년이 이상적 세계로 인식될 때, 대개 그 세계는 ‘아버지’라는 가부장적 질서가 아니라 ‘할머니’나 ‘어머니’와 동일시되는 모성적 세계로 형상화된다. 이처럼 유년이 이상적 세계로서 자리 잡을 때, 지금-이곳의 현실은 언제나 결핍의 시․공간으로 그려지며, 이 과거와 현재의 간극으로 인해 그리움의 정서가 표출된다. 그러나 유년 또는 기억 속의 ‘가족’은, 과거가 아무리 현재의 투영이라고 할지라도, 지금-이곳의 가족 관념이나 모델을 대신할 수는 없다. 한편 90년대를 지나오면서 ‘가족’ 관념은 상당한 굴절을 겪었다. 특히 개인의 욕망이 최고의 가치로 평가되는 현실에서 제도로서의 ‘가족’은 한 개인에게 어떠한 위안도 되지 못한다. ‘가족’적 가치와 질서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가족’이 개인의 욕망을 충족․실현하는 데 있어서 장해물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 불편한 감각이야말로 90년대 문학의 ‘가족’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진은영, 「가족」 전문(󰡔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진은영의 시는 위기에 처한 ‘가족’의 모습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에서 가족(집)은 거대한 죽음의 공간으로 인식된다. ‘밖’에서 아름다운 것이란, 문맥상으로는 ‘꽃’과 ‘화분’을 가리키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집’에서는 죽어버린다. 중요한 것은 밖에서 빛나는 것의 정체가 아니라 ‘집’이 죽음의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통상적으로 ‘죽음’이 검고 탁한 무채색의 세계라면, 죽음 바깥, 즉 집의 외부는 빛나고 아름다운 ‘생’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욕망과 생을 잠식하는 ‘집(가족)’이라는 관념을, 그러나 2000년대의 새로운 가족모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듯하다. 가족적 질서와 가치가 개인의 욕망 실현을 가로막는 장해물이거나, 집이 생을 소진시키는 죽음의 공간이라는 상상력은 다분히 90년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가족’ 모델을 중심에 놓고 본다면 2000년대의 시는 여전히 90년대의 그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생각된다. 물론, 2000년대 이후의 시에 새로운 가족모델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다음의 시를 보자.

‘달 밝은 가을밤에 기러기들이
찬 서리 맞으면서‘

집으로 간다.
지난겨울 어린 보리 잎 쪼아 먹고
날갯죽지 파릇해진 선배들도
줄지어 퇴근한다.

두고 온 깃털이나, 떠나보낸 부리들
먼 곳에서 흔들리며 춥지 말라고
바삐 바삐 둥지에 닿아
온몸으로 군불 지피는 사람들.

온돌이 조금씩 데워지는 동안
깨금발로 처마 끝 바라보는 모습 뒤로
거울 속 나무 기러기 한 쌍
찡긋하며 마주 보고 눈을 맞춘다.
―고두현, 「기러기 나라」 전문(󰡔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인용시는 90년대 중반 이후 조기유학 열풍으로 인해 생겨난 ‘기러기 아빠’를 소재로 하고 있다. 굳이 가족적 관점에서 보자면, 기러기 가족이나 기러기 아빠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가족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조기유학을 떠나고, 또 중년 이상의 기러기 아빠들의 죽음/자살, 외도 등이 이따금씩 매스컴을 통해 소개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기유학은 여전히 일부 계층․계급에 한정된 이야기일 뿐이다. 소설에 비해 현실대응력이 높은 시 장르에서 ‘기러기 가족’이 소재로 다뤄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시인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에서 발화되기는 쉽지 않은 현실이다. 그것은 시가 주관성의 장르이기 때문이다. 시에서 사회적 현실은 화자의 시적․주관적 변용을 거칠 수밖에 없는데, 자신의 체험과 결부되지 못하는 사회적 현상은 자칫 소재를 대상화할 위험을 지니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많은 시인들이 ‘기러기 가족’을 모티프로 한 시를 쓴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단순한 사회적 현상이나 세태의 묘사에 그친다면, 그것이 시에서 새로운 가족모델의 등장을 알리는 징후라고 평가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고두현의 「기러기 나라」는 중년에 접어든 한 가장의 쓸쓸한 내면 풍경을 형상화하고 있지만, 그 쓸쓸함이 직접적으로 가족과의 이별에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동요의 한 구절을 인용한 서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이 시에서 중년의 쓸쓸함은 “지난겨울 어린 보리 잎 쪼아 먹고/날갯죽지 파릇해진 선배들도/줄지어 퇴근한다”라는 공동의 운명에서 비롯된다. 이 쓸쓸함의 정체가 가족과의 이별에서 발생하는 것이든 그렇지 않든, 중요한 것은 화자의 눈에 비친 ‘선배’들의 모습이다. 화자는 지금 그 옛날 날갯죽지가 파릇했던 선배들이 줄지어 퇴근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익숙한 풍경에서 모종의 회한을 느낀다. 화자는 선배들의 퇴근 풍경 속에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 이 쓸쓸한 퇴근 풍경과 “두고 온 깃털이나, 떠나보낸 부리들”에서 암시되는 이별의 정서가 겹쳐짐으로써 쓸쓸함의 정서가 증폭된다. 화자를 포함한 그들 모두의 발길이 향하는 곳은 텅 빈 집일 것이다. 그들은 하루의 고된 노동에도 불구하고 “바삐 바삐 둥지에 닿아” 체온으로 집을 데운다. 집에 돌아온 화자는 깨금발로 처마 끝 어딘가를 응시하는데, 그때 거울 속으로 나무 기러기 한 쌍과 시선이 마주친다. 이 시에서 가을밤을 날아가는 동요 속의 기러기와 이미 생기를 잃어버린 날개로 퇴근하는 선배들의 모습, 그리고 거울 속의 기러기가 하나의 시적 연쇄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국민 국가의 주권이 쇠퇴와 자본의 전지구화 현상은 국제결혼의 확산을 야기했다. 신자유주의의 등장으로 인해 자본은 잉여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전 지구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국민 국가의 경계가 느슨해지면서 노동력 역시 전 지구적 단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본과, 자본의 움직임에 연동되어 있는 노동력의 움직임은, 마치 물이 그렇듯이, (잉여가치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그것은 다시 몇몇 자본과 노동의 거점을 형성하게 된다. 신흥 공업국가인 한국이 아시아 시장에서 하나의 거점으로 부상되고 있는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한 통계에 의하면, 90년대 이후 한국에 입국한 외국인 부부가 8만 쌍 이상이며, 한국에서 국제결혼을 통해 새롭게 생겨난 가정은 약 20만 쌍에 달한다. 50만에 육박하는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으로 입국한 외국인의 숫자를 합치면 100만을 훨씬 넘으며, 이러한 추세는 꾸준하게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아니 농촌의 경우에는 이미 현실이 되었는데, 국제결혼으로 인해 생겨난 코시안(kosian)들과 다문화가정 2세는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주체로 등장할 것이다. 도시와 농촌의 극단적 양극화는 농촌에 거주하는 미혼남성이 동남아 및 중국 여성들과 결혼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조건을 양산했다. 이는 단일 민족 국가의 혈통적 순수성을 강조해 왔던 지난날의 모습과는 매우 상이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주노동자의 등장과 국제결혼의 증가가 시에서 새로운 가족모델의 등장으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는 ‘작가’의 사회적 위치와도 관계가 있다. 시가 주관적 장르라는 할 때, 이중노동자 가족과 국제결혼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기 위해서는 그들 스스로가 문학의 주체로 등장해야 한다. 그러나 이주노동자의 문학 행위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상황에서 이들 새로운 가족은, 최근 발표된 하종오의 「외국인노동자병원 가는 길」(≪현대시학≫ 2005년 11월호)이 보여주듯이, ‘타자’로서 대상화될 뿐이다. 여전히 이주노동자라는 존재는 사회의 부조리와 자본의 억압적 성격을 보여주는 증거에 머물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시민권/주권을 부여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한, 그들의 삶의 형태가 새로운 가족모델로 담론화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3. 우리는 모두 고아다
2000년을 전후해서 등단한 젊은 시인들의 시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족’이 어떤 의미인가를 한층 명확하게 보여준다.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는 ‘가족’에 자의식이 충만하다. 산업화 시대 이후에 태어난 이들 시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정체성을 확인/확보하는 문제이다. 소설가 김경욱이 “상처 없는 세대는 아프기 위해 글을 쓴다.”고 말했듯이, 이들 새로운 세대에게 문학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물론, 이들이 보여주는 정체성의 논리는 프라이버시(privacy)라는 근대적 관념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때 ‘나’의 범위는 가족 구성원과 어떠한 외연도 공유하지 않는다. 많은 시인들이 가족(집)을 ‘불편’한 세계로 간주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가족’이라는 제도가 ‘나’의 정체성을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감각 때문이다. 프라이버시라는 자기-세계로 무장한 현대인들에게 가족은 위기의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젊은 시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목격되는 <고아 의식>은 오늘날의 ‘가족’의 위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유형진의 「피터래빗 저격사건-목격자」에서의 ‘고향-없음’(“나에겐 고향이 없지”), 배용제의 「엄마, 이름이 엄마인 엄마」에서 엄마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행위(“애를 써도 엄마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승원의 「회현소녀대」(≪세계의 문학≫ 2005년 겨울호)에서의 ‘엄마 없음’(“어머니가 없다”), 김이듬의 「뒤주 속의 아리아」에서의 ‘계모’(“고분고분 할게/머리만은 잘라 끓이지 말아요/아 어머니라 부를게”), 이민하의 「가면놀이」(≪문학과 사회≫ 2005년 겨울호)에서의 ‘가면’(“당신이 내 엄마인가요?”) 등이 단적인 예이다. 이들 시의 화자가 고아인지, 고향이 없는지, 또는 그가 실제로 엄마의 이름을 잊었는지, 그의 엄마가 계모인지를 확인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족’ 내부에 자신을 위치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 즉 고아 ‘의식’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화장대 앞에 앉은 엄마가 달군 다리미로 주름살을 펴고 있습니다 나는 ZIPPO 라이터로 어항 속에서 건져낸 금붕어들의 부레에 불을 붙이고 있습니다 이 썩을 년들아, 나 왔는데 문 안 여냐? 현관 열쇠 구멍 속에 죽은 아빠의 핏발 선 눈알이 낄낄거리고 있습니다 여보, 오늘은 5분 일찍 도착이네요 달군 다리미를 슬쩍 브래지어 속에 감춘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있습니다 슬라이스 치즈처럼 네모나게 썰린 죽은 아빠의 몸이 조간신문에 찍혀 들어오고 있습니다 엄마가 홀짝홀짝 신문을 펼칠 때마다 헛둘헛둘 죽은 아빠가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이 썩을 년들아, 나 왔는데 인사도 안 하냐? 죽은 아빠가 엄마의 볼따구니를 고기작거려 고김살을 늘리고 있습니다 여보, 또 오셨군요 엄마가 몰래몰래 달군 다리미의 온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죽은 아빠가 내 팬티 속에 손을 넣어 클랙슨을 눌러대고 있습니다 죽은 아빠, 안녕? 내가 몰래몰래 ZIPPO 라이터에 오일을 들이붓고 있습니다 여보, 진지 드시죠 엄마가 죽은 아빠의 놋요강에 밥을 퍼 담고 있습니다 죽은 아빠, 물 말아먹어 내가 밥이 담긴 놋요강에 오줌을 누고 있습니다 죽은 아빠가 아이 고소해, 아이 고소해, 후루룩 짭짭 밥을 떠먹고 있습니다 엄마와 나는 금붕어가 물어다 준 진자주색 꽃방석 위에 앉아 회칼을 갈고 있습니다 죽은 아빠가 후다닥 밥숟가락을 집어던지며 화투를 치차고 조르고 있습니다 엄마와 내가 살래살래 고개를 내젓고 있습니다 죽은 아빠가 엄마의 입술과 내 잠지를 한번 더 꿰매버리겠다고 링거바늘을 찾고 있습니다 엄마와 내가 갈던 회칼로 잇속을 쑤시고 있습니다 죽은 아빠가 삽날 같은 고드름 수염이 난 음경을 뚝 떼서 엄마와 내게 맡기고 있습니다 진자주색 꽃방석이 방실방실 돌아가고 있습니다 죽은 아빠와 엄마와 내가 송편 빚는 사람들처럼 등허리를 꼬부리고 앉아 있습니다 패를 돌리는 죽은 아빠가 히죽거리며 자꾸만 뒤패를 뒤집어보고 있습니다 죽은 아빠가 쓰리 고에 피바가지 쓰더니 화투가 널려 있는 진자주색 꽃방석을 뒤엎어버리고 있습니다 에이 씨발, 내 끗발 다 물어내 나는 태우다 만 금붕어들을 죽은 아빠의 입 속에 꾸역꾸역 쑤셔넣고 있습니다 죽은 아빠가 뒤집어진 물방개처럼 발발거리고 있습니다 엄마가 씩 웃으며 달군 다리미로 죽은 아빠의 몸을 주름 잡아 다리고 있습니다 나도 따라 씩 웃으며 ZIPPO 라이터로 죽은 아빠의 주름 잡힌 몸을 지글지글 지져대고 있습니다 죽은 아빠가 뻐끔뻐끔 금붕어 물 빠는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엄마와 내가 죽은 아빠를 번쩍 들어올려 어항 속에 처넣고 있습니다 죽은 금붕어들이 어항 속에 빠져 죽은 아빠를 뱅뱅 돌려가며 뜯적뜯적 뜯어먹고 있습니다 배 터져 죽은 금붕어들이 또 배 터져 죽어가고 있습니다 방실방실 돌아가는 진자주색 꽃방석 위로 화투패가 나눠지고 있습니다 엄마와 내가 고-고-고 금붕어 사내기 맞고를 칠 때의 일입니다
―김민정, 「매일매일 놀러오는 우리 죽은 아빠」 전문(󰡔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가족’에 대한 불편함의 정서는 김민정의 시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표출된다. 김민정의 시세계는 분열된 ‘나들’을 ‘완전한 나’로 통합하는 정체성 찾기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검은 나나의 추억」의 ‘나나’는 <나+나>로, 「두 겹의 好好」의 ‘好好’는 <女+子+女+子>로 읽을 수 있다. 그의 시를 읽을 때 느끼는 정서적 불편은 분열된 주체의 병적 상태를 드러내는 특유의 장치에서 기인한다. 김민정의 시에서 주체의 분열은 대부분 <엄마-아빠-나>라는 가족 삼각형에 투사된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가족 구성원 모두는 이미-항상 죽은 존재들로 명명된다. 근대성의 내밀한 장소인 집은 어느덧 ‘죽은 아빠’와 ‘죽은 엄마’, 그리고 ‘이미 죽은 나’가 함께 살아가는 시체공시소(morgue)로 바뀐다. 그러나 망자들의 집합소인 ‘모르그’와 달리, ‘집’은 생(生)을 사(死)로 바꿔버리는 공간이다. 즉, 집은 죽은 자들의 집합소가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공간인 것이다. 가족(집)에 투사된 죽음의 흔적은, “이 썩을 년들아”나 “에이 씨발”처럼 욕설과 비어로, 또 “ZIPPO 라이터로 죽은 아빠의 주름 잡힌 몸을 지글지글 지져대고 있습니다” 등이 절단 이미지로 표현된다. 특히 대상-인간을 절단하고 해부하는 등의 폭력적 이미지는 그의 시적 특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폭력적 이미지 속에서 ‘엄마’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엄마’가 화자의 판타지 속에서 자유롭다면, 화자의 분열은 직접적으로 남성적․가부장적 세계와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가부장적 세계에서 ‘엄마’는 ‘아빠’의 공모자이거나 닮은꼴일 수도 있지만. 김민정의 시에서 ‘엄마’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의 자유로움은, “아버지는 오늘도 쥐약 먹은 개처럼 날뛰었다”(「그러나 죽음은 定時가 되어야 문을 연다」)나 “下官은 이제 끝났어요, 아버지 그만 아가리 닥치고 잠이나 퍼자요”(「마지막 舌戰」)처럼 공격의 대상이 ‘아버지’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해질 무렵 어머니가 엽총을 들고 돌아왔다 겁에 질린 아버지가 기다란 꼬리를 끌며 구석을 옮겨 다닐 때마다 미역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총을 가진 여자가 두려워하는 이름도 얻지 못한 아이를 옷장 속에 처넣고 제길 제길 붉은 발자욱들을 지웠다 어머니 어서 한 방 갈겨버리지 그래요 달도 꽉 찼는데 노란 방을 흔들며 나는 그렇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아버지가 지그재그로 날뛰었다 입 닥쳐 다음은 네 차례야 총구를 겨누고 있던 어머니가 소리치자 옷장 속에서 더벅머리의 벌거숭이 사내아이가 뛰쳐나왔다 놀란 어머니가 휘청거리며 방아쇠를 당기고 창문이 날아가고 화약 연기 속으로 부리나케 달아나는 아버지 우물쭈물하는 어머니에게서 총을 빼앗아 든 사내아이가 개머리판을 휘둘러대었다 이 에미 애비도 없는 자식 어머니가 방문을 박차고 아버지를 뒤쫓는 어둠 속 달이 기울고 있었다
―황병승, 「벤치 스텝핑(Bench Stepping)」 부분(󰡔여장남자 시코쿠󰡕)

황병승의 「벤치 스텝핑(Bench Stepping)」 역시 가족 내부의 불화를 폭력적인 판타지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절단’이라는 하위문화적 상상력은 비단 황병승만의 특이성은 아니다. 이러한 하위문화적 상상력은 김민정․김이듬․이민하 등의 시에서 동일하게 반복된다. 김민정의 시가 ‘나’를 ‘절단’의 주체로 상정하고 있는 반면, 인용시에서 그 주체는 ‘엄마’로 설정된다. 엽총을 든 엄마와 겁에 질린 아버지가 연출하는 살벌한 풍경은 그들의 전도된 위상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 폭력은 하나의 계열을 이루고 있다. 겁에 질린 아버지는 총을 든 엄마의 위협으로 인해 극도의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지만, ‘총을 가진 여자’인 엄마는 ‘나’가 두꺼운 책을 덮고 자궁 밖으로 밀어낸, ‘이름도 얻지 못한 아이’를 두려워한다. 이로써 <이름을 얻지 못한 아이-총을 가진 여자-겁에 질린 아버지>는 폭력의 계열을 형성한다. ‘네 발로 걷는 아버지’와 개머리판을 휘둘러대는 ‘사내아이’가 연출하는 시간의 전도, 그리고 어느새 스무 살이 된 더벅머리 사내아이가 생일을 맞은 화자의 머리를 겨냥하고 있는 모습은 이 시가 비단 가족 내부의 폭력만을 형상화하고 있는 게 아님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이 시를 이해하는 핵심은 ‘이름을 얻지 못한 아이’가 이름을 얻은 모든 이들을 제압한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리라.
이름이 없다는 것은 곧 정체성을 부여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체성이 없다는 것은 동일성의 세계 바깥에 위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시는 동일성과 타자성의 충돌이라는 맥락에서 읽을 수도 있다. 문제는 동일성과 타자성이 ‘가족’이라는 제도 속에서 정면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황병승은 「스위트」에서 가족 구성원들이 연출하는 한 장면을 이렇게 형상화했다. “콧김을 뿜어대는 열두 사람이 한 집에 살면서/서로를 흉내내지 않으려고 웃지도 않았다 여행 온 사람들처럼/매일매일 일박을 묵었다”(「스위트」) 불을 가진 열두 사람이 만드는 한 편의 거대한 침묵은 ‘가족’을 여행객으로, ‘집’을 ‘일박’의 공간으로 바꿔놓는다. 그러나 「주치의 h」에서 시인은 이 거대한 침묵마저 시끄러워 “나는 입의 나라에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침묵의 식탁을 향해/‘제발 그 입 좀 닥쳐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주치의 h」)고 말한다. 이 침묵 너머의 침묵, 이것이 황병승 시의 화자가 지향하는 가족적 세계는 아닐까? 장경린은 「가족」에서 “나는 그곳에서 추방되었다/내가 그곳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그곳은 파괴되지 않고/원만하게 잘 돌아갈 것이다”(「가족」)라고 말했지만, 황병승은 가족 구성들에게 절대적 침묵을 강제함으로써 그들을 추방시켜버린다.

4. 가족, 그 참혹한 풍경

옛날이라면 두 손 잡고 걸었을 낙엽 길을/각자의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네//그림자는 길고 길어/각자의 시선 또한 멀고 멀어/무릎 관절이 알아서 찾아가는/우리 둘이 사는 집//현관문을 따고 들어가/너는 테레비를 켜고/나는 컴퓨터를 켜고//밥 먹을래?/누가 먼저 말 건넬 때까진/뒤통수와 뒤통수만이/다정하게 마주하는 저녁
―김소연, 「백년해로․3」 부분(≪문학사상≫ 2005년 12월호)

아들놈은 제 방에 나는 내 방에/남편은 남편 방에 제각각/문 닫고 면벽하는 날들이 늘어간다/온갖 문들은 꽝꽝 닫히고/벽들만 줄줄이 스크럼을 짜고 쳐들어온다/앞날이 닫힌 문의 저쪽처럼 아득하다/전자 벽시계만//솨아아/솨아아아아아//파도친다/들어보니 저쪽에서 아까부터 끊임없이 무슨 기계음 들린다/아들놈(님?)이 무슨 게임이라도 하는지/따가닥따가닥따가닥따… 소리가 끝이 없다/죽은 피붙이들이 조막만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소리 같기도 하고/어디 베가성쯤으로 날리는 모스부호 같기도 하다,/나도 손가락으로 톡 톡 톡/책상을 두드려본다 가라앉았던 공기가 톡 톡 톡/튀어오른다 가라앉았던 마음이 톡 톡 톡/일어나고 톡. 톡. 토톡./잊혔던 슬픔이 튀어오르고 툭…투툭/잊기로 했던 쓸쓸함도 분연히 일어선다//저쪽에서는 계속 따가닥따가닥따가닥/말들이 뛰어다니고 모스부호가 날아다니고/왠지 나는 자꾸 처연해져 톡…톡…툭…툭…/죄없는 책상을 두드려보는 것인데……//그래, 한생의 저녁나절이 이렇게/따가닥따가닥 톡 톡 툭 툭…/이라면!
―이경림, 「톡톡 토톡」 전문(≪창작과비평≫ 2005년 겨울호)

김민정과 황병승의 시가 보여주듯이, 젊은 시인들에게 ‘가족’(집)은 종종 추방하는 주체와 추방당하는 주체가 폭력적으로 부딪치는 공간으로 묘사된다. 반면 김소연과 이경림의 시에서 ‘가족’(집)은 최소한의 부딪침마저 사라져버린 무미건조한 공간이다. 프라이버시라는 근대적 개념의 등장과 개인의 욕망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는 ‘집’을 ‘방’들의 집합으로 바꿔놓았다. 개체의 욕망만을 숭배하는 현대인들의 프라이버시는 ‘집’이 아니라 ‘방’이라는 공간을 단위로 구획된다. 김소연의 「백년해로․3」은 제목이 암시하듯이 청춘의 열정을 상실한 한 중년 부부의 이야기이다. 시인은 ‘옛날’과 ‘지금’이라는 상이한 시간의 풍경을 보여줌으로써 성찰 없는 일상의 무의미함을 반추한다. 현대인들에게 ‘집’이란 하루의 일상이 시작되고 끝나는, 출발지이자 종착지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귀가는, 집을 나가는 행위가 그렇듯이 “무릎 관절이 알아서 찾아가는” 습관적 행위에 속한다. 어디 그뿐인가. 거실이라는 공동의 공간을 제외하면, 집에서의 일상이란 대개 “너는 테레비를 켜고/나는 컴퓨터를 켜고”처럼 “뒤통수와 뒤통수”만의 다정함으로 귀결된다. 이 참혹한 풍경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가족’의 모습이다.
한편 이경림의 「톡톡, 토톡」에서 “뒤통수와 뒤통수”의 다정함은 새로운 관계로 형상화된다. 김소연이 ‘부부’라는 2인 관계를 통해 일상의 무미건조함을 드러내고 있다면, 이경림은 ‘아들-남편-핵가족의 표상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상실한 가족생활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경림의 시에서 형상화되는 가족의 풍경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가족 구성원들은 ‘집’이라는 공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공간은 여러 개의 ‘방’으로 분할되어 있다. 분할의 단위인 ‘방’은 곧 프라이버시의 경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느 순간 가족구성원들은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소리를 내며 살아간다. 아들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따가닥따가닥따가닥따”와 화자의 손톱 끝에서 생성되는 “톡…톡…툭…툭”이 바로 그것이다. 시인은 각각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이 소리에 “어디 베가성쯤으로 날리는 모스부호 같기도 하다”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의미 부여를 통해 건조한 일상의 상징인 ‘소리’는 새로운 맥락을 형성한다. 시인은 이 각각의 소리에서, 파편화된 상태로 고립된 현대인들의 구조 요청을 듣는다. 그것이 컴퓨터에서 들려오는 기계음이든, 손톱 끝에서 울려 퍼지는 자연음이든, 모든 소리에는 타자와의 단절을 극복하려는 소통에의 의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파편화된 채 일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내는 ‘소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단절 너머를 상상한다. 그러나 시인의 이러한 상상력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가족의 참혹한 풍경을 확인시켜 준다.




고봉준․
1970년 생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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