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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특집/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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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2000년대의 새로운 가족모델들
대안 가족은 과연 대안이 될 수 있는가?
―2000년대 이후 영화에 나타난 가족주의 고찰
강성률|영화평론가
1. 가족주의는 만악(萬惡)의 근원?
새삼스럽지만, 한국에서 가장 큰 문제는 항상 가족주의 문제에서 발생했다. 적어도 모든 문제의 근원은 가족주의에서 출발했다. 가족주의만 없으면 한국사회의 문제점 가운데 많은 부분이 해결된다. 너무 과장된 표현 아니냐고 의문을 가질 분들이 계실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의 현실을 냉정하게 다시 한번 둘러봐야 한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가부장제 문화라고 필자는 굳게 믿고 있다. 일명 군대 문화, 조폭 문화, 보스 문화인 것이다. 한 명의 가부장이 집단을 완벽히 통치하는 사회가 바로 한국 사회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기원은 유교 문화가 강성했던 조선에서 왔다. 가부장에게 모든 권한을 통째로 주면서 철저하게 상명하복의 사회를 만들었던 것이 지금까지도 유구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군부독재의 강력한 상명하복의 명령식 행정 문화의 영향이 컸음은 부정할 수 없다.
황우석 교수의 황당한 거짓말이 통할 수 있었던 원인 가운데 하나도 가부장적인 대학 사회의 폐해 때문이다. 교수의 말 한마디가 연구원과 후배 교수들의 진로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에서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제안을 거절할 경우 박사과정을 마치기까지 연구해 온 터전을 하루아침에 떠나야 한다. 그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도저히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가정 폭력의 문제는 또 얼마나 심각한가? 남편에 의한 가족의 구타는 물론이거니와 형이라는 이름으로 동생에게 행해지는 육체적․정신적 폭력, 부모의 보호라는 명목 하에 행해지는, 자녀에 대한 폭력에 가까운 간섭과 구속은 어떠한 변명을 하더라도 용납될 수 없다. 그것은 애정의 표현이 아니라 명백한 구속인 것이다.
이러한 폭력적인 가부장적 가족 구조 외에도 가족주의의 문제점은 많다. 신자유주의 이후 빈익빈부익부의 양극화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한국에서, 가족은 부와 가난을 공식적으로 세습하는 도구가 되었다. 운이 좋아 부모를 잘 만나면 그는 좋은 집에서 풍족하게 자라면서 좋은 교육을 받아 좋은 대학을 졸업한 후 좋은 직장을 가지게 된다. 게다가 부모가 물려준 재산도 많아 한평생 편히 살 수 있다. 반면 가난한 집의 자식은 가난을 대물림하면서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이제는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가족의 폐해도 만만찮다. 그나마 지금은 좋아졌지만, 여성을 여성으로 길들이는 곳이 바로 가족이었다. 집안 청소와 집안일을 잘 하지 못하면 가정교육을 잘 받지 못한, 고로 집안을 욕보이는 행위로 직결되었다. 때문에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교양과 소양을 교육 받아야 했는데, 그것은 남성을 봉양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필자는 그나마 상황이 호전된 지금도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성에게 얼마나 불리한지 절감한다. 그 무슨 상황과 핑계를 나열하더라도 지금의 결혼제도는 절대적으로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특히 명절이 되면 자기와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편 쪽 사람들을 위해 여성들은 하루 종일 중노동에 시달려야 한다. 요즘은 사회가 그나마 나아져서 ‘新모계사회'가 열렸다고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아기를 양육하는 데 시댁보다 친정 쪽이 더 편리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양육의 중심에 있는 여성이 보기에는 시댁보다 친정이 더 편한 것이다. 이는 권력이 친정으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부담이 친정에 가중된 것이다.
이렇게 한국의 가족주의는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유교적 가부장 구조가 그대로 존재하면서 신자유주의의 양극화 시대로 향해 가고 있는 지금의 한국에서 가족주의의 폐단을 넘어서지 못하면 인간다운 삶이 구현되는 세상을 바라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많은 이들이 가족주의를 문제 삼으면서 대안 가족을 형성하려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2. 2000년대 이후에도 가족주의는 완고하다
이제 논의를 영화로 좁혀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영화에서는 가족주의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 것일까? 2000년을 넘어선 이후 한국영화에서 그려진 가족은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일까? 한국영화의 주 관객층이 10대 후반과 20대 초․중반의 여성 관객층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고통스런 지금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영화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면, 현실만으로도 괴로운데 누가 비싼 관람료 내고 시간 투자해서 영화를 보려 하겠는가.
영화에서 가족의 현실을 어떻게 그리는지 살펴보기 전에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는 언제나 현실보다 한 발 앞서 나간다는 것이다. 영화는 절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는다. 현실 속의 판타지를 영화 속에 그려 나간다. 그러나 영화는 단지 ‘한 발만’ 앞서 나가지 절대 ‘두 발’은 앞서 나가지 않는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현실에서 있음 직한 사건을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핍진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말이다.
가령 대학생들의 동거 문화를 다룬 드라마가 있다고 해보자. 이 드라마를 보면 대학의 동거문화가 아주 일상화되어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지만, 현실은, 대학생들의 동거문화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일반화되어 있지는 않다. 동거를 하는 이들도 가급적 동료들에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대중문화는 이런 소재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 현실보다 한 발 앞서 나간 사건을 통해 대중들의 호기심과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속의 가족은 어떻게 드러날까? 피상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가족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대안 가족을 모색하는 것이 활발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가족에게는 부정적이지만 가정에는 긍정적인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아니, 많은 이들은 가정의 정서적 안정과 평안을 추구한다. 때문에 가정의 평안을 그리는 영화들이 생각보다 꽤 많이 등장한다.
이런 경향의 영화들은 사회적으로 어려운 시기일 경우에 더욱 자주 등장한다. IMF 구제금융이 실시되면서 한국 경제가 파탄 났을 때 실제로 우리 주위에는 불안한 가정이 많았다. 수많은 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이때 영화는 이런 현실을 잊게 하면서 가정의 안정과 행복을 추구하는 내용으로 나아갔다. 자신을 지극히 사랑해 주던 남편과 사별했지만 여전히 그를 기리는 순애보 <편지>(이정국, 1997), 나약한 아버지를 이해하고 감싸 안는 가족 순애보 <아버지>(장길수, 1997), 무능한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불륜을 행한 부인을 처절하게 응징한 치정극 <해피엔드>(정지우, 1999) 등은 IMF 구제금융 시기의 환란을 가족의 봉사와 헌신, 이해와 역할에 치중하고 있는, 가족주의의 완고한 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영화들은 경제가 ‘거덜났기’ 때문에 무엇보다 가정의 평온을 추구했던 관객들로 하여금 가족주의의 문제점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이런 흐름은 사회가 차츰 안정화되기 시작한 2000년대 이후에도 등장했다. 2000년 이후에 등장한 영화 가운데 몇 편은 노골적으로 가족의 정과 화해, 용서를 다루고 있다. 특히 조폭 코미디 열풍이 조금씩 가라앉고 휴먼 코미디가 등장했을 때, 대부분의 휴먼 코미디는 가족주의의 화해와 가족간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불량 선생의 산골 학교 생활을 그린 <선생 김봉두>(장규성, 2003), 다방 아가씨와 소설가의 사랑을 그린 <불어라 봄바람>(장항준, 2003), 이복 형제의 교감을 그린 <오! 브라더스>(김용화, 2003) 등은 모두 비슷한 공식을 따르고 있다. 초반 60분은 코믹한 설정을 통해 ‘웃음’을 자아내다가 후반으로 넘어가면 멜로적 요소를 통해 ‘울음’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울음을 자극하는 요소가 바로 가족주의에 바탕을 둔 멜로적 요소였다. <선생 김봉두>에서 불량 선생이었던 김봉두가 반성하는 계기는 학교 소사였던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고, <불어라 봄바람>에서 소설가가 다방 아가씨를 이해하는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오해를 푼 것이었다. <오! 브라더스>에서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복동생을 이해하면서 자신의 아버지도 이해한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이런 영화들은 대부분 가족주의에 기대어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는 영화들이었다. 이 영화들이 모두 흥행에 성공했던 것도 가족주의에 대한 우리의 완고한 시선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조폭 코미디인 <조폭 마누라>(조진규, 2001)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폭의 부두목인 여성이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까지 가지려고 했던 이유가 단지 불치병에 걸린 언니의 소망이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설정은 이 영화가 지니고 있던 전복성을 모조리 엎어버렸다. 이 영화는 보기 드물게 가부장제의 틀을 완전히 뒤엎은 영화였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그런 전복성은 힘을 잃어버렸다.
2000년대 이후에도 가족주의에 기댄 영화들이 등장한 이유는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는 가족주의가 완고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가족주의의 부정적인 면을 알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가족주의를 대체할 만한 것이 없는 데다가, 가정이 지닌 따뜻한 정서를 통해 가족주의의 문제점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세상에 부모의 사랑만한 애정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을 자극한 영화가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문제는 부모의 사랑이 지고지순한 것과 가부장적 가족주의의 문제점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핏줄의 뜨거움과 가정의 정서를 강조하면서 가족주의의 문제점을 덮고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영화가 갈구하는 대안 가족의 형태
이제 2000년대 이후에 등장한 영화 가운데 가족주의의 문제점을 짚으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영화들을 살펴볼 차례이다. 가족주의의 대안을 찾는다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찾는다는 것인데, 그것이 그리 쉬운 작업은 아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영화 가운데 가족주의의 여러 문제점을 지적한 후 대안을 모색하는 영화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고 가족간의 유대가 예전 같지 않으며, 각자의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로 발전하면서 분명 가족주의의 틀에 균열이 나기 시작했다. 대중영화는 이런 것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대안 가족을 한 발 앞서 제기하고 있다.
대안 가족을 찾기 전에 먼저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영화 가운데 가족주의가 약화된 모습을 보인 영화들을 몇 편 살펴보기로 하자. 이런 영화들을 먼저 살펴보는 것은, 앞서 거론한 영화들과 비슷한 성향을 지니고 있지만 문제를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홀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고 떠돌던 딸이 결국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 내용을 다룬 <가족>(이정철, 2004)은 결국 가부장을 인정하는 영화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그런 면에서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이제는 절대적 권위를 지닌 가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영화 속에 그려진 아버지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다. 집에서도 권위가 없고 밖에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 아버지가 딸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순간 딸은 아버지의 진심을 이해하게 된다. 이 영화가 <아버지>와 갈라서는 지점은 ‘아버지의 방식’이 더 이상 보수적인 시각으로는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꼰대’는 없다.
<마이 제너레이션>(노동석, 2004)에서는 가족주의의 파탄을 그리고 있다. 부모와 자녀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은 영화 속에 아예 등장하지도 않는다. IMF 구제금융 이후 파탄 난 가족은 각자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20대 중반의 주인공은 아무런 희망 없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해 간다. 무엇이 되겠다는 어떤 희망도 없이 그냥 견딜 뿐이다. 그의 형이 진 카드 빚 때문에 그가 곤혹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는 묵묵히 견딜 뿐이다. 이 영화는 가족에 대한 보수적 정서를 전혀 그리지 않으면서 파탄 난 가족주의를 날카롭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가족주의의 대안을 그리지 못한다.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한계일 것이다.
<로드 무비>(김인식, 2002)는 한국영화계에서 매우 특이한 영화이다. 한국영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본격적인 게이 영화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게이인 줄 모르고 결혼을 했던 남자는 결국 가정을 버리고 부랑자가 되어 떠돈다.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산장을 경영하는, 부인과 아이가 있는 가정을 찾지만 결국 떠나고 만다. 이 영화 역시 가부장의 억압이 있는 가정을 그리지는 않지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마이 제너레이션>과 비슷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2000년대 이후 영화에 드러난 대안 가족의 형태를 살펴볼 차례이다. 이미 앞에서 거론한 그 숱한 가족주의의 문제점을 영화 속에서는 어떤 대안 가족으로 극복하고 있을까? 어떤 형태로든 대안 가족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 숨막혀 하는 관객들이 약간이라도 가벼운 호흡을 내쉴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 과정을 찾아보기로 하자. 본고에서는 2000년대 이후 나타난 대안 가족의 형태를 네 가지 패턴으로 나누어 각 패턴의 형태와 장단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가부장의 폭력과 상처를 딛고 여성들이 독립하거나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영화들을 들 수 있다. 이런 영화들은 현실에 나타난 가부장적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런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 재현을 통해 새로운 대안으로 가부장을 거부한 여성들의 독립을 주장한다. 이것은 더 이상 폭력적인 가부장 체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발언이다. 가부장의 피해를 가장 많은 입은 이들이 여성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타당한 대안인 것이다.
<바람난 가족>(임상수, 2003)은 이런 경향의 대표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는 충분히 부유하지만 정서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했던 여성이 그런 생활을 거부하고 결국에는 홀로 선다. 뱃속에 있는 다른 사람의 아이도 자신이 홀로 키우겠다고 결심한다. 이 영화가 중요한 것은 아버지 핏줄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부계를 정식으로 거부했다는 것이다. 중반부에 살해된 아이도 입양해서 키운 아이였다. 게다가 이 영화 속 여주인공은 남편의 외도도 이해하고,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생활도 이해하고 감싸주는 인물이다. 여성의 장점을 충분히 살린, (대안을 제시한) 영화인 셈이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이재용, 2003)도 마찬가지이다. 남성의 혈통을 강조하는 조선의 현실을 정면적으로 비판하면서 홀로 선다. <밀애>(변영주, 2002), <여자, 정혜>(이윤기, 2005) 역시 남성의 폭력적 삶을 거부하고 여성의 정체성을 찾는 영화이다.
그런데 이런 설정이 조금 강하게 나가면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복수를 다루는 영화로 바뀌게 된다. <여자, 정혜>에서 정혜는 자신을 성폭행했던 고모부를 찾아가 복수를 하려다 결국 머뭇거리고 마는데, <친절한 금자씨>(박찬욱, 2004)의 금자씨와 <오로라 공주>(방은진, 2005)의 주인공은 살인이라는 극단적 행위를 통해 남성적 폭력에 정면으로 대항한다. 이것을 발전으로 볼 것인지(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극단적 선택이라는 점에서), 퇴행으로 볼 것인지(남성과 같은 방식의 폭력을 구사하면서 결국 같은 단점을 지닌 존재가 된다는 점에서)는 관객의 선택에 달려 있다. 필자는 아무래도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편이다.
둘째, 가부장에서 벗어난 여성들의 연대를 그린 영화를 들 수 있다. 이런 경향의 영화들이 지니고 있는 장점은 가부장의 폐해에서 벗어난 여성들이 연대함으로써 더 이상의 절대적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때문에 더 이상 상명하복의 체계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남성들이 지니고 있던 폭력적인 체계에서도 벗어날 수가 있다. 여성들의 부드러움과 포근함을 이런 영화 속에서 느낄 수 있다.
이런 경향은 이미 <처녀들의 저녁식사>(임상수, 1998)에서 드러났다. 이 영화에 그려진 세 명의 여성은 세 부류의 여성을 나타낸다. 결혼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남성과 언제든지 프리섹스를 즐기는 성공한 사업가, 연인과 만족스럽지 못한 성관계를 유지하지만 여자는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 아버지도 모르는 아기를 낳아 기르고 싶어하고 또한 그것은 실천에 옮기기도 하는 과학도가 그들이다. 이것은 기존의 (여성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성 관념을 벗어난 여성, 기존의 성관념을 약간은 벗어났지만 기존 사고에 얽매여 있는 여성, 아예 여성의 가능성을 살리려는 여성을 대표한다. 그러나 세 여성은 모두 현실의 장벽 안에서 무너지고 만다. 사회의 벽은 그토록 깊었던 것이다. 그들의 연대도 결국 무너진다.
<싱글즈>(권칠현, 2003)는 이런 의식을 계승한 영화이다. 직장 내에서의 가부장적 성폭력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뛰쳐나온 여성이 자신의 친구와 우연히 잠자리를 갖게 되면서 임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여성은 당당히 아이를 낳아 키우려고 한다. 그녀의 절친한 친구 역시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주는 남성을 만나 그와 함께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지만, 그녀는 자신의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미혼모인 친구 아이의 대리 아버지가 되어준다. 그야말로 여성들의 연대를 그린 영화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연대가 과연 새로운 대안으로 성공한 모델인지, 아니면 현실의 벽을 무시한 영화적 환상인지는 관객들의 몫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후자의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아직은 현실 속에서 가부장의 권위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여성적 연대의 실패를 그린 <처녀들의 저녁식사>가 훨씬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그것을 그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혁신적이지만.
셋째,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고 화해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그린 영화이다. 첫째 부류의 영화들이 남성을 거부한다면, 셋째 분류는 영화에서는 폭력적인 남성성을 거부하면서 남성을 받아들이는 영화이다. 물론 이런 상황을 만드는 힘은 여성의 활동에서 나온다. 이런 영화에 나타난 가족은 절대 가부장적이지 않다. 오히려 가부장을 거부하면서 남녀의 조화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대안 가족으로 보인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민규동, 2005)에서 여의사는 사장인 남편과 이혼한 여성이다. 그녀가 이혼한 이유는 사업만 알고 있는 남편과 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통념적으로 매우 거친 것으로 알려진 형사와 연애를 시작한다. 그 형사는 유도 선수 출신이지만 사랑에는 서툴다. 정신과의사인 그녀는 자신이 리드하면서 사랑을 성취한다. 남성을 거부하지 않고 남성의 장점을 살려 남녀의 평등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 그녀의 전 남편은 동성애적 요소를 지닌 엄격한 남성으로 그려져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감독의 성향을 읽을 수 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유하, 2002)와 <와니와 준하>(김용균, 2001) 역시 우회적으로 가부장제를 비판하면서 남녀의 평등한 체제를 만들어간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여주인공은 가부장제 사회의 현실을 인정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거부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현실적 실리와 성적 욕망을 동시에 충족시킨다. 물론 그것이 언제까지 갈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와니와 준하>의 인물은 평안한 동거를 하고 있다. 그들의 동거는 전혀 어색하지 않고 평안하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동화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셋째 부류의 영화는 가부장적인 가족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안이다. 그러나 이런 대안이 현실이 되려면 가족주의의 모든 문제점을 넘어서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는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은 것이다. 실현 가능성을 염두에 둔 대안이었을 때 그것은 빛이 난다. 어느 날 갑자기 가부장제의 폐단이 없어지고 남성이 순해지면서 평등한 세상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과정이 생략되었을 때 그야말로 ‘영화 같은’ 대안에 그치고 말 것이다.
넷째, 권력이 없는 모계 사회를 그린 영화를 들 수 있다. 이런 영화는 남성을 아예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역시 여성의 품안으로 들어와 평안과 위안을 찾는다. 당연히 가부장적 폭력과 현실적 폭력이 없는 세상이 등장한다. 셋째 부류와 차이점을 찾는다면, 남성의 역항이 셋째 분류에 비해 현저히 약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섯은 너무 많아>(안슬기, 2005)는 도시락집에서 일하는 한 여성이 주인공이다. 우연한 기회에 그녀는 집을 나온 고등학생, 갈 곳 없는 조선족 동포, 사업에 실패한 라면집 사장과 자신의 좁은 자취방에서 어색한 동거를 시작한다. 가난하고 낮은 계급을 지닌 이들은 여주인공의 말에 순종하면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감싸 안아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어머니가 찾아와 돈을 집으로 부치라고 하자 완강히 거부하고, 결혼을 하자는 남성의 구애도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남성 중심의 가족주의를 정식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그 공간에서 각자의 진로를 찾기까지 서로를 이해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소년, 천국에 가다>(윤태용, 2005)는 미혼모에 대한 영화이다. 미혼모의 아들이 다른 미혼모를 사랑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가 넷째 부류에 들어가는 이유는, 미혼모가 다른 남성들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남성들을 포용하면서 자신의 삶을 꿋꿋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미혼모만큼 차가운 시선을 받는 여성도 드물다. 그러나 이 영화에 그려진 인물은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남성을 감싸면서 모계 사회를 그리고 있다.
물론 넷째 대안이 판타지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대안이 되려면 역시 현실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2005년 독립영화의 새로운 발견이었던 <다섯은 너무 좋아>는 깜직한 발상이 많은 찬사를 받았지만 새로운 대안이 되기에는 시간적 지속성의 문제가 있고, <소년, 천국에 가다>의 경우도 새로운 대안으로 자리 잡기에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렇게 네 가지의 대안이 있지만 이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타당한 방법인지에 대해서는 논의할 필요가 있다. 남성을 배제하고 여성의 독립과 연대를 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매우 설득력이 있는 방법이다. 여성들의 경제적 지위가 점점 높아지고 가부장제의 폭력적 구조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먼저 그들이 독립해서 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남성을 배제한 연대일 경우 힘을 잃고 만다. 특히 여성의 남성에 대한 복수라는 형태일 경우에는 더욱 공감을 받기가 어렵다. 반면 남녀의 평등한 사회와 모계 사회는 앞의 두 부류보다 설득력 있는 대안이지만, 현실적으로 제약이 따른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고 하겠다.
4. 문제는 현실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필자는 가부장적 가족주의의 문제점에 누구보다 동감하고 있기 때문에 가급적 그런 구조를 타파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갖고 있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벽을 자주 만나게 된다. 최근 그나마 신세대 부부들이 주로 드나드는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글을 보고 또 한번 절망한 적이 있다. 내용인즉슨, 크리스마스이브에 결혼한 친구 2명의 부부와 같이 1박 2일로 속초로 여행을 떠났는데 자신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전화가 왔더라는 것이다. 그곳이 거제도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남편이 가지 말자고 해서 못 가서 속이 상하더라는 것이었다.
댓글이 궁금했다.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당연히 가셨어야 하는데도…… 그런 태도를 보이신 신랑이 너무하신 거 같네요……. 서운할 만해요.” 대부분 이런 내용이었다. 단 한 명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상황에 따라 외할머니의 죽음이 무척이나 애석하고 안타까울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인간적 도리에 얽매이는 것이 완고한 가족주의를 만드는 첩경이다. 속초에서 거제도까지, 그것도 크리스마스이브에 친구들과 같이 간 여행을 포기하고 내려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다.
이렇게 가족주의는 완고하다. 신세대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뿌리 깊게 박혀온 유교적 사고방식은 아직도 튼튼하게 살아있어 온갖 의무와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옥죄고 있다. 자신이 정말로 사랑하던 분의 장례식이라면 당연히 가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의무감에 가는 것은 결코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남의 사정을 잘 모르면서 외할머니의 장례식이라면 만사 제쳐놓고 가야하며, 심지어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시댁의 제사가 있는 날이면 반드시 내려가 음식을 장만하고 일을 해야 한다는 사고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가족주의는 분명 느슨해졌지만, 그러나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영화 속에서 여러 가지 대안 가족을 제시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거나 매력적인 대안이 아닐 경우에 가족주의는 그대로 지탱한다. 오히려 그들은 대중의 욕망을 판타지로 살짝 바꾸어놓은 영화를 보며 그 허구성을 비판할 수도 있다. 지금의 대안이 진정한 대안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대안이 되지 못할 때는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뿌리 깊게 박힌 완고한 가족주의는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여전히 한국에서 가장 큰 문제는 가족주의이다.
강성률․
1970년 경북 안동 출생
․저서 하길종, 혹은 행진했던 영화바보 등
․한성대, 호서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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