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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신작단편/홍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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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151회 작성일 08-02-29 01:45

본문

|신작단편|


포푸리를 만드는 남자

홍양순



영욱은 귀를 바짝 세우고 창구 안쪽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매달린다. 아마 이 순간 다른 지점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자신만은 오늘의 불운에서 비켜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꼼짝없이 전화벨 소리에 붙들려 있다. 오늘 따라 창구가 한산해 영욱은 몸에 들러붙은 긴장을 떼어낼 기회가 없다. 그 긴장감이 창구 안을 촘촘하게 조여든다. 차라리 월말 정산이나 공과금 마감일로 정신없이 바쁜 하루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전화벨이 울리자 모두들 화들짝 놀란다. 선뜻 전화를 받으려는 사람이 없다. 이윽고 여행원 하나가 주춤거리며 수화기를 집어 든다.
“네에, 그럼 계좌번호 불러보시겠어요?”
고객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임을 확인한 동료들이 팽팽한 눈빛을 풀며 전화기에 쏠려 있던 시선을 거둬들인다. 너무 긴장한 탓에 영욱은 속이 다 울렁거린다. 아, 이럴 때 라벤더가 있었으면, 온종일 불안에 시달릴 것만 염두에 두어 진정 효과가 있는 캐모마일과 클라리세이지만 챙긴 게 아쉽다. 영욱이 오늘 이렇듯 멀미증까지 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캐모마일과 클라리세이지, 두 가지 향유를 앞에 두고 망설이다 캐모마일을 손수건에 한 방울 떨어뜨려 깊숙이 흡입한다. 달콤한 과일향이 부드럽게 코 안으로 퍼진다. 바짝 곤두서 있던 머리끝이 수굿이 가라앉으며 금세 안도감이 피의 흐름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그것을 들키기라도 한 듯 영욱은 얼른 김 차장을 돌아다본다. 다행히 김 차장은 책상 위에 놓인 모니터에 코를 박고 있다. 그는 창구 안을 억누르는 긴장감에 너무도 초연해 보인다. 그래, 넌 자신 있다, 이거지? 김 차장의 여유 있는 표정을 보며 영욱은 더욱 더 쫓기는 마음이 되어 돌아앉는다. 입사 동기인 김 차장은 그보다 진급이 빨랐다. 연줄 덕분인지 능력 때문인지 그는 해외 근무와 연수를 두루 거친 자타가 공인하는 인재이다. 부장 진급을 코앞에 두고 있으니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려고 전전긍긍하는 만년 과장 영욱의 입장과는 사뭇 다르다.
은행에서는 이차 합병을 공시하면서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 삼 년치 월급을 내걸고 신청 기간을 두 번이나 연장했지만 모두 꿈적도 하지 않았다. 목이 터져라 합병 반대만 외쳐댈 뿐이었다. 사측에서 대주는 학원비를 받는 조 대리와 황 대리조차 공인중개사 수업이 끝나면 밤 열한 시에라도 철야 농성장으로 뛰어갔다. 조 대리는 몇 달 전 학원비의 반을 대 주겠다는 사측의 제의를 황 대리와 함께 받아들였던 참이다. 그때 그는 그 제도가 단순히 사원복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사부에서 자격시험에 꼭 붙어야 한다고 은근히 압력을 넣는다며 조 대리는 성급히 내린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 걱정을 뒷받침하듯 철야 농성이 계속되는 중임에도 얼마 전 대대적인 인원 감축안이 발표되었다. 퇴출 대상자가 정해졌다는 소문도 돌았다. 끝내 오늘 중으로 각 지점의 해당자에게 본부에서 전화 통보가 올 것이라고 했다.
영욱은 창구 안을 둘러본다. 이 점포에서 아직 그런 내용의 전화를 받은 직원은 없다. 대신 그 유예 기간을 견디느라고 모두 얼굴이 꺼칠하다. 다 그렇겠지만 영욱 역시 퇴직은 할 수 없다고 도리질을 친다. 지난번 악조건에서도 살아남지 않았는가. 그는 캐모마일을 한 번 더 코 안 깊숙이 들이마신다. 김 차장처럼 인재는 못 되지만 영욱은 필히 이번에도 살아남으리라고 다짐한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져 있다. 그로서는 그 점수를 확인하는 일만 남아 있다. 이 점포에는 지점장을 비롯해 관리직으로 차장 하나, 과장이 둘, 대리가 둘 있다. 이들이 타겟이다. 여행원들은 모두 일차 합병 때 계약직으로 대체되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은 이십 퍼센트에 불과했다. 이번에는 누가 남고 누가 떠나게 될 것인지, 또 몇 명이나 남게 될지 영욱은 초조해지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손수건만 계속 코에 갖다 댄다. 그도 예전처럼 무조건 버티기식이 어림없다는 것을 잘 안다. 속이 울렁거려 견딜 수가 없다. 영욱은 손수건을 코에 댄 채 정수기 쪽으로 간다. 물을 마시려는데 또 요의가 느껴진다. 소변은 왜 이리 자주 마려운지, 마치 불안을 소변으로라도 내보내려는 듯 달려드는 요의가 오히려 불안을 더 부채질하는 것 같다. 그냥 이 길로 집으로 달려가 향기에 온몸을 푹 담그고 싶다.
허브 향기에 집착하는 그에게 진저리를 내던 아내도 요즘은 묵묵히 그의 아로마테라피 전신욕을 도왔다. 어젯밤에도 목욕물을 받아 놓고 그를 불렀다. 욕조 머리맡에는 뿌연 김 사이로 아내가 피워 놓은 라벤더 향초가 타고 있었다. 영욱은 불안감을 한 겹씩 벗겨내듯 천천히 옷을 벗었다. 욕실 벽을 거의 메운 커다란 거울에는 아직은 젊은 마흔 살 먹은 남자의 몸이 엉거주춤 서 있었다. 꺼벙한 모습에 가슴 한쪽이 무지근해 왔다. 눈자위께로 뜨거운 것이 몰리고 이내 눈에 붉은 빛이 돌았다. 그는 거울 속의 젊은 사내를 외면하고 라벤더 아홉 방울과 일랑일랑 여섯 방울, 캐모마일 로먼 세 방울을 섞어 더운물이 가득한 욕조에 떨어뜨렸다. 한 손으로 욕조의 물을 가볍게 휘젓자 향기가 온몸으로 따스하게 감겼다. 그는 욕조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삶의 거친 순간들이 무심한 듯 그 옆을 스쳐가고 곧 평온에 젖어 들었다. 멀고 먼 여로를 끝내고 돌아온 안도감 같은 것이 향기와 함께 피어올라 근심 걱정이 가뭇없이 사라져 갔다. 그럴 때는 오직 따스함과 부드러움만이 세상의 전부인 양 모든 것은 평화로웠다. 영욱은 지난밤의 안온함에 짜릿한 전율을 느끼며 화장실로 향한다. 요의가 요도 끝까지 내려와 있다.
“정 과장님, 인력관리방안 지침 내려온 거 봤어요?”
화장실에서 마주친 서너 살 아래의 조 대리가 굳은 얼굴로 묻는다.
“버티는 사람한텐 재택대기발령을 낸다면서요?”
영욱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만 나오라는 소리지, 뭐. 용케 살아남는다 해도 관리직도 이젠 계약직으로만 남게 된단 말이 있던데 나같이 꺾어진 말년은 정말 걱정이다.”
“정 과장님은 여유도 많으시네요. 그건 그야말로 차후 문제죠. 우선 조정의 칼날을 피해야, 하기사 과장님은 지점장님이 인정하는 실적파시니 분명 따놓은 영순위일 거예요.”
“김 차장은 눈감고 있냐, 아무튼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
“가슴이 방망이질하는 게 죽겠네요. 몇 명 정도나 남게 될까요?”
거울에 비친 조 대리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그의 아들은 심장마저 선천적으로 기형이라 병원을 제 집처럼 드나든다고 했다. 지금 그의 심정이 오죽할까 싶다. 물론 그 동안 둘 다 살아남으려고 나름대로 발버둥치기는 했다. 힘내자는 뜻에서 영욱이 조 대리를 향해 싱긋 웃는데 거울에 비친 얼굴은 자신의 의도와 달리 잔뜩 일그러진다. 순간 눈앞이 어른어른해지며 그의 모습이 흐릿해진다. 돌아서 나가는 조 대리의 뒷모습도 안개 속처럼 아득하다. 그 뒤로 헤벌어진 입에 혀를 내민 그의 아들이 풀죽은 듯 따라가고 있다. 내가 왜 이렇지? 머리를 흔들어 보지만 몽롱함이 가시지 않는다. 그저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어서 집으로 돌아가 제라늄이나 라벤더를 욕조에 풀고 고단한 몸을 푹 담그고 싶을 뿐이다. 따스한 향기의 미세한 입자들이 몸의 보이지 않는 틈을 찾아 스며들 때 영욱은 마음이 아주 찹찹해진다. 하지만 이 시간을 피할 도리는 없다. 모두 손끝의 경련을 감추고 지옥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영욱은 주저앉을 것 같은 몸을 가까스로 세면기에 기댄다. 손을 늘어뜨리는데 불룩한 클라리세이지 향유병이 그를 일깨운다. 자, 어서 맡아, 더 강한 향기를 맡으라구. 언제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는지 기억에 없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급히 그것을 꺼내 손수건에 세 방울을 떨어뜨린다. 곧바로 강한 약초향이 알싸하게 콧속으로 퍼진다. 운전 중이나 수험생들은 사용하지 말라는 강한 진정 작용이 있는 아로마이다. 혹시, 이것으로 아내가 진저리 치는 가수면 상태의 시간을 겪게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긴 하다. 집에서라면 몰라도 직장에서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아내는 그가 가수면 상태에 빠질 때마다 이제 지겹다고 제발 그만 하라고 소리 지르며 집 밖으로 나가버리곤 했다. 그런 아내도 요즘은 별수 없나보다.
아로마는 그에게 없어서 안 되는 산소 같은 존재이다. 필요에 따라 적절히 향을 바꾸고 배합을 달리 하면, 그것은 언제라도 무너질 것 같은 그의 삶을 단단히 묶어 일으켜 세운다. 오늘을 견딜 수만 있다면 몽유병자처럼 보인들 대수이랴 싶다. 뭔가 뜨거운 기운이 안에서 솟구친다. 곧 그 기운이 눈가로 올라온다. 영욱은 아마도 자신이 울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제 그것들 없이는 한 걸음도 못 움직인다. 영락없이 향기에 사로잡힌 꼴이다. 향기에 사로잡힌 남자라니, 아내의 비난이 아니더라도 그 역시 자신을 납득할 수가 없다. 영욱은 갑자기 요도 끝이 찔리는 듯한 통증 때문에 바지 앞자락을 움켜쥐며 화장실 바닥에 쪼그린다. 독충한테 쏘인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이다. 그는 통증을 잊기 위해 눈을 감는다. 통증이 조금씩 사그라진다.
눈을 뜨자 바로 눈높이에 타일 벽을 따라 기어오르는 적갈색 노래기 한 마리가 눈에 잡힌다. 가늘고 작은 발의 쉴 새 없는 움직임이 가슴을 파고든다. 서늘한 기운이 온몸으로 빠르게 퍼진다. 기를 쓰고 발발 기어오르는 발놀림이, 가녀린 몸짓이, 마치 자신의 안간힘을 엿보는 것 같다. 어지럼과 함께 통증이 또 한 번 요도 끝을 스친다. 그는 두 눈을 꾹 감는다.
삼년 전 일도 정말 끔찍했다. 영욱이 다니던 은행이 퇴출되고 지금의 은행과 합병하는 과정에서 은행 측은 나가라는 통지 대신에 개인별로 ‘인사고과표’를 돌렸다. 알아서 나가 달라는 통보였다. 그 전초전은 그보다 앞서 이미 벌어져 있었다. 어느 날 지점장이 영욱에게 한 기업의 재무제표를 건네주며 당좌계좌를 바로 개설해 주라고 했다. 지점장님, 이 회산 곤란하겠는데요. 아무리 매출액과 수익 구조를 맞춰봐도 은행에 기여도가 없어 부도 위험이 높습니다. 아니, 그 정도도 알아서 못해요? 적당히 보완하면 되잖아요. 그래도 앞이 뻔히 보이는 걸 어떻게……. 물론 영욱은 지점장에게 ‘지점장 전결 한도’라는, 기업이 신용도가 떨어지거나 담보가 모자라도 임의로 대출해 줄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더욱이 행장이나 지역 본부장이 정치권 등으로부터 청탁을 받을 경우 알아서 잘 처리하는 지점장에게 그것을 떠넘긴다는 것도.
영욱은 그때 지점장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했어야 했다. 다음날 영욱은 외환계로 보직이 옮겨졌고 그 기업은 다른 직원을 통해 그날로 당좌가 개설되었다. 영욱이 그해에 받은 고과 점수는 형편없었다. 지점장의 비위를 거스른 게 화근이었다. 그 결과가 구조 조정 바람과 맞물리며 영욱을 조였고 그에게는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동료들은 알아서 퇴직원을 내거나 영욱처럼 버텼다. 영욱은 사방이 콱 막힌 움짝달싹 못할 철벽 안에 갇힌 기분이었다. 그리고 고과표라는 것이 마치, 넌 이제 낙제 인생이야,라고 몰아세우는 것 같았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버티는 일 뿐이었다. 당신, 그러다 말라죽겠어. 차라리 은행 그만둬라. 아내가 먼저 내팽개치듯 체념했다. 그만두면? 퇴직금도 몇 푼 안 되는데 아파트 사면서 대출 받은 거 갚고 나면 얼마가 남는지나 알아? 누군 와이프랑 피씨방이나 호프집이라도 내겠다더라만은 우린 어림도 없어. 애들도 자꾸 커 가는데 어떻게 할 거야? 이제 퇴출은행 주식도 휴지 조각이 될 테고. 그치만 여보, 우선 사람이 살아야 할 거 아냐. 아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당신 눈이 퀭하다 못해 이젠 눈빛이 섬뜩해. 월차를 내서라도 어디 가서 잠깐 머리를 식히고 왔음 좋겠어.
아내가 여행사에 예약을 해놓았다며 소매를 잡아끌었을 때는 어이가 없었다. 남편이 퇴직하느냐 마느냐 막다른 길에 몰려 있는데 팔자 좋게 무슨 여행이냐고 화를 냈지만 아내는 막무가내였다. 여보, 수타사라는 오래된 절이 있는데 거기 가서 마음도 다스리고, 오는 길에 허브농원에 들러 찜질도 하자. 허브 찜질이 스트레스에 그렇게 좋대. 아내의 간청에 할 수 없이 툴툴거리며 따라나서자 아내는 고마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강원도로 향하는 버스는 속절없이 흔들리고, 여행객들은 아랑곳없이 즐거웠다. 영욱은 차창 밖에 시선을 둔 채 자신의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누려보는 호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어느 순간 이 길로 영원히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기도 했다. 영욱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삶은 모두가 가득 차고 넘쳐 보이는데 영욱과 아내만이 세상 바깥에서 그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 같았고 이제 영원히 그 곳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만 같았다. 머물지 못하는 바람처럼 세상을 휘돌게 될지도 모른다는 어두운 예견이 그를 억눌렀다. 아내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아내로서도 안간힘을 쓰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가슴이 찡했지만 영욱은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주변의 눈총을 이기고 퇴직원을 내지 않는 것이었다. 사실 퇴직한 선배 대부분은 공인중개사 시험에 매달리거나 분식집을 냈고, 더러 아내의 부업에 의존하거나 집 평수를 줄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끝내 가족이 뿔뿔이 헤어지고 만 선배도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세상에서 밀려났다. 영욱은 훤히 내다보이는 그 길을 그들처럼 내딛을 수는 없었다. 매일 밤 고작해야 이삼 분, 한숨보다 짧고 얕은 잠 속으로 가위눌린 현실이 뒤틀린 그림처럼 일그러졌다. 도저히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의식 저 밑의 그림자들이 밤마다 그를 흠씬 두들겨 팼다.
아내는 선뜻 그를 찜질방 안으로 안내하지 않고 건물 앞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아까 영욱이 수타사 대적광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려는 아내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친 일 때문이었다. 불상 앞에 눈감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 봐. 혹시 기대했던 것보다 마음이 많이 가라앉을지 모르잖아, 응? 영욱은 순간 이유 없이 화가 뻗쳤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영욱은 아내에게 빽 소리를 지르고 성큼성큼 그 절을 돌아 나와 버렸다. 이제 허브농원이고 뭐고 그만 집에 가고 싶었다. 그는 모든 일이 못 견디게 화가 났다. 대체 뭐가 잘못되었는지, 그는 자신이 비교적 성실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산다고 자부했다. 그래서 뻔하게 은행에 손실을 끼칠 기업과 거래를 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그뿐이었다. 그 일로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이렇게 내몰릴 줄 알았다면 약간 마음이 불편해지더라도 얼마든지 지점장과 손을 잡았을 것이다.
아내가 슬쩍 영욱의 손을 잡았다. 아내의 손바닥은 더운 날씨임에도 서늘하고 축축했다. 영욱은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웃을 듯 말 듯 아내의 표정에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내내 영욱의 지청구를 들으면서 허브농원을 돌고 난 참이었다. 가이드는, 허브란 라틴어의 ‘푸른 풀’을 의미하는 ‘허바’에서 출발했으며, 잎․줄기․뿌리 등이 식용이나 약용에 쓰이거나 향기나 향미가 이용되는 모든 식물이라고 설명했다. 영욱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고 뭔가에 속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어 이 여행을 주도한 아내에게 어깃장을 부렸다. 허브농원이라더니 완전히 사기잖아. 산책길을 따라 조성된 밭에는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생화와 풀들이 지천이고 깻잎, 생강, 부추까지 심겨 있었다. 저쪽 온실에 가면 진짜 허브가 많이 전시되어 있을 거야, 아내가 말했다. 됐네, 난 여기서 담배나 한대 피우려니까 당신이나 실컷 보고 오시게. 아내는 일행들이 구경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영욱 옆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렸다. 그러나 찜질방 앞에서는, 이번만은, 하는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그래, 들어가. 아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사실 영욱은 어딘가에 등허리를 대고 눕고도 싶었다. 몸이 고꾸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자꾸만 휘우뚱했다. 순전히 담배 탓이야, 이젠 담배를 끊어야 할지도 모르겠군. 영욱은 혼자 중얼거리며 아내를 좇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내가 시키는 대로 찜질용 가운을 입은 영욱은 라벤더, 로즈마리 등의 이름을 붙여 각각의 이벤트로 꾸며진 방 중 아무데나 들어가 구석에 드러누웠다. 갖가지 마른 식물들이 천장에 벽에 제멋대로 매달려 있거나 세워져 있었다. 후끈한 열기와 독한 향기가 코로 입으로 거침없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이내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뭔가 아득한 공간이 그를 끌어당겼다. 여기저기 부딪치며 인파 속을 걷고 있었고, 늪 같은 데서 허우적거리다가 어느새 산들바람이 나부끼는 평원을 걷고 있었다. 수평선이 멀리 보이는 바다 한가운데에도 떠 있었고 흰눈이 펑펑 쏟아지는 창가에도 서 있었다. 몸은 둥실 가벼웠다. 바람에 실린 민들레 꽃씨처럼, 활강하는 새의 날개처럼 차분하고 평화로웠다. 그 와중에도 시간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여보, 일어나. 눈이 떠지지 않았다. 일어나, 여보. 영욱이 억지로 눈을 뜬 것 같기도 했다. 한참 버르적거리다 겨우 옷을 갈아입고 버스를 탄 것도 같았다. 가이드가 마이크를 들고 뭔가를 한참 주절거리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영욱은 곧 또 인파 속을 헤맸고, 바다 속을 천천히 유영하였으며, 헉헉 산을 올랐다. 결코 끝나지 않을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잠깐씩 아내의 손길이, 흔들리는 차체가,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이 사실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곧 무한히 뻗은 아스팔트길을 맨발인 채로 달리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발바닥에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얼마나 잤는지 알아? 배는 안 고파? 아내가 아픈 아기 들여다보듯 영욱을 내려다보았다. 주위를 둘러보자 태양 문양이 금박으로 수놓인 얇은 망사 커튼과 비둘기 빛 세로무늬 벽지가 낯익었다. 영욱은 그제야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당신, 찜질방에서부터 지금까지 내리 잔 거야. 그래도 내가 시키는 대로 잘 하드라. 옷 갈아입으라면 탈의실 가서 갈아입고 오고, 버스에서 내리라면 내리고 타라면 타고, 말을 얼마나 잘 듣는지 우리 서방님 이뻐 죽을 뻔했네. 저녁밥은 먹어야 할 거 아니냐고 했더니 싫다고 그냥 잔다고, 그땐 말까지 하던데, 이제 정신이 났으면 얼른 아침 먹고 출근해.
그때의 일을 영욱으로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이후로 영욱이 허브에 대해, 그것들의 각종 아로마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에 몰두해 있는 동안 영욱은 동료들의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강인할 수 있었고, 합병된 지금의 은행에서 새로운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아로마테라피는 향유 요법으로 한방에서 허약한 기를 보하듯 영욱은 그것에서 허든거리는 자신의 마음을 붙잡았다.
그 이후로 집안은 온통 찜질방의 벽처럼 마른 꽃다발로 채워졌다. 향기가 강하게 남는 라벤더나 민트, 로즈, 레몬밤 등의 주재료를 만들기 위해 영욱은 주말마다 허브 농원을 순례했고, 그것들은 그릇이나 주머니에 담겨 방과 거실은 물론이고 현관이나 욕실, 더러는 싱크대 서랍에도 들어앉았다. 제발 여보, 어느 정도만 해. 저것들의 냄새가 이젠 뒤죽박죽 섞여 머릿속이 다 마비되는 것 같아. 이젠 음식에서조차 향기가 나는 것 같아 난 뭘 먹을 수가 없단 말야. 식탁 위의 포푸리 바구니를 꼼꼼히 손질하던 영욱은 그녀의 얼굴을 한참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순간 아내가 아주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보, 왜 그래?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아내는 내 눈빛이 두렵다고 했다. 그런 아내의 말이 영욱을 조여 왔다. 그래서 소리쳤을까. 왜 내가 미치기라도 한 것 같아? 그래, 나 미쳤어, 어쩔 테야? 아내를 윽박질렀지만 그 역시 두려웠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그것이 없으면 금방이라도 자신이 잘못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또 찾게 되고, 더욱이 잠깐 꿈을 꿨는지 잠을 잤는지 깊은 향기에 취했다가 깨었을 때의 기분은 참혹하기까지 했다. 그런 그를 아내는 몽유병 환자 같다며 그만하라고 사정했다. 모든 게 다 잘 되어가잖아! 영욱은 아내의 말을 떠올리고 피식 웃는다. 시시각각 쫓기며 곧 모든 것이 와해될 것 같은 불안감을 이제 아내도 알게 된 걸까. 그럴 때마다 갖가지의 독특한 향기로 자신이 지탱된다는 것도, 영욱이 견뎌내고 있다는 것도, 어쩌면 이제 아내도 알게 되었는지 모른다. 목욕물을 받아 라벤더 향초까지 켜놓은 것을 보면 영욱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내도 어떻게든 그가 지금의 자리를 잘 지켜내기를 바라는 게 역력하다. 그간 몇 년 버텼다고 해서 형편이 더 나아진 건 없었다. 합병하면서 퇴직금은 이미 중간 정산했고 오히려 중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들의 사교육비 부담만 늘어 있을 뿐이다.
영욱은 속이 느글느글한 데다 요도 끝의 통증 때문에 일이 영 손에 잡히지 않아 책상 위의 작은 접시 안에 담긴 포푸리만 검지손가락 끝으로 이리저리 뒤적인다. 마침 어제 한 방울 떨어뜨려 놓은 라벤더향이 코끝으로 희미하게 퍼진다. 그는 반가운 마음에 코를 접시에 가까이 대고 그 향을 오래 빨아들인다. 자신의 몸이 이완되기를, 시간이 날개를 달아 포푸리의 장미 꽃잎처럼 붉은 저녁노을 속으로 잽싸게 빠져들기를, 어두운 밤의 기운이 환한 정령이 되어 피어나기를 기다린다. 장미꽃을 식기 건조기에 바싹 말려 소금에 재우고 나면 이렇듯 손쉽게 포푸리의 주재료가 되어 그를 위로한다. 꽃잎을 천천히 뒤섞는 손길에 한 갈래 마음 길이 차분해진다. 그때 누군가 영욱이 앉아 있는 브이아이피 창구를 톡톡 친다. 영욱이 고개를 들자 우수 고객인 민 여사가 창구 앞 의자에 앉아 있다.
“정 과장님, 무슨 생각에 그리 골몰하세요?”
“참, 제가 적금 만기되었다고 전화드렸죠? 우선, 커피 드실래요?”
민 여사가 손을 내저으며 사양한다.
“마실 건 됐구, 나 그거나 처리해 줘요. 당장 필요하지 않은데 금리 좋은 거 있어요?”
“민 여사님 아시다시피 요즘 그게……. 대신 이번 건은 액수가 높으니까 제가 위에다 말해 재량껏 더 받아드릴게요, 기간을 일 년 이상 예치하는 걸로 해서.”
“중간에 필요하면 해약할 순 있죠?”
“중도 해지하면 이자는 거의 없을 거고, 원금은 원하실 때 출금 가능한 걸로 할게요. 참, 민 여사님 보험 필요한 거 없으세요? 새로운 상품 여러 개 나왔는데…….”
“나 딴 데 다 들어 있어요. 주변에 보험설계사 안 걸린 집 있나? 매번 들어주기도 벅차지.”
사실 영욱은 그녀의 말에 동감한다. 그 흔한 직업 중 하나가 보험설계사 아니던가. 이제 은행까지 보험 업무에 뛰어드는 판인데……. 그러나 실적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다면 민 여사처럼 여유 있는 사람은 더 가입해도 괜찮다고 재빠르게 자신을 설득한다. 그녀의 눈을 피해 얼른 라벤더 향을 한 번 더 흡입하고 영욱이 본격적으로 나선다.
“에이, 그러시지 말고…… 민 여사님, 보장도 받으면서 만기확정금리로 목돈을 마련하는 상품 참 좋은데, 자녀분들 보장혜택이나 만기축하금이 나오는 것도 있고요. 여사님은 목돈 마련하는 게 더 낫겠네. 부탁드립니다.”
영욱은 가입 서류를 민 여사 앞에 내놓는다.
“이젠 막 어거지로 떠맡기네. 근데 이거 무슨 향기에요?”
“아, 여기 포푸리요, 요즘 이런 거 많이 보셨죠? 여러 가지 마른 꽃잎들.”
영욱은 옆자리 여행원의 눈치를 살피며 포푸리 접시를 창구 위로 올려놓는다. 동료들은 처음엔 너도나도 그의 포푸리 접시를 원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책상 위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냄새가 역겹고 머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하나씩 치워졌다. 영욱이 섭섭한 나머지 결재 서류마다 향유를 슬쩍 묻혔더니 그것마저 싫다고 야단이었다. 그 뒤부터 영욱은 포스트잇에 향유를 발라 그들이 보지 못할 만한 곳에 몰래 붙여놓는 방법을 택했다. 매일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서 사람에 따라 그 즈음의 기분에 따라 향유를 고르는 일은 그에게 묘한 흥분을 전해 주었다. 동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향기가 사라지지 않는다며 영욱 쪽을 힐끔거렸지만 그는 시치미를 뚝 떼었다. 하루는 서랍 밑에 붙여놓은 포스트잇을 발견한 김 차장이 어느 미친놈이 이 짓을 하는 거냐고 영욱 쪽을 쳐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황 대리가 그 옆에서 실실 웃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얼른 자기 책상 밑을 샅샅이 훑더니 포스트잇 두 장을 찾아냈다. 그의 손에 들린 분홍빛 종이가 서글프게 팔랑거렸다. 황 대리는 계속 포스트잇을 흔들며 실실 웃었고 영욱은 아침에 그의 것에 뿌려놓은 민트향을 떠올리며 가슴을 졸였다. 곧이어 동료들이 보물찾기라도 하듯 포스트잇을 찾느라고 벌인 소동은 끔찍한 일이었다. 그날 영욱이 끝까지 모르는 척 버텨 더 이상 시끄러운 일은 생기지 않았지만 야속한 하루였다. 평소에도 향기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지 공들여 설명해도, 그들은 오히려 짜증을 내거나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거나 간혹 그만하라며 노골적으로 손사래를 치니 참으로 해괴할 노릇이었다. 스트레스에 미치겠다고 아우성이면서 명약을 가르쳐줘도 마다하는 건 또 어떤 어리석음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욱으로서는 그것이 갖다 준 평안함과 혼몽한 희열을 정말 가르쳐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도 조 대리만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이건 너무 독해요,라거나 이건 냄새가 이상하네요, 정 과장님은 이제 허브에 대해서 논문 쓰셔도 되겠어요, 하면서 영욱의 호의를 슬며시 물리쳤다. 영욱은 그가 다른 동료들처럼 대놓고 포푸리에 반감을 품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어느 날인가 회식이 끝나고 영욱은 조 대리에게 이차를 청했다. 그 동안의 친분도 그렇고 그날 웬일인지 조 대리가 울적해 보이기도 해서였다. 영욱은 그와 호프집을 찾았다. 시원한 생맥주가 탁자에 놓이자 기다렸다는 듯 조 대리가 영욱의 잔에 자기 잔을 부딪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는 게 참으로 힘들어요. 조 대리의 첫말은 의외였다. 무슨 일 있어? 업무야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어찌 기분이 별로인 거 같은데? 모르겠어요. 요즘 그냥 힘들다는 생각이 부쩍 들어요. 사실 은행원을 사무직의 꽃이라 하던 시절은 다 옛날 얘기였다. 이젠 예전처럼 평생직장도 못 되었고, 때로는 뙤약볕 아래 동전교환기를 밀며 시장도 돌아다녀야 하는 하루살이 인생이나 다름없었다. 비라도 오고 추운 겨울이라도 되면 그 짓도 정말 못할 일이었다. 더욱이 언제 또 본부에서 정리 해고한다고 칼날을 들이댈지는 아무도 몰랐다. 신입사원은 계약직으로만 뽑을 것이라는 둥 앞으로 전산 업무는 아웃소싱으로 처리할 것이라는 둥 이런 저런 말들이 나도는 분위기도 예사롭지 않았다. 조 대리는 취하는지 고개를 잠시 숙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장사치도 아니고 맨날 고객들에게 신용카드 하나 만들어 달라 주접떠는데 이젠 핸드폰까지 팔아내라니 이거 원, 은행원이 은행 어렵다면 대출까지 받아서 우리사주도 사줘야 되는 판이고, 그렇다고 목숨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영욱이 얼른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대체 왜 그래? 은행 돌아가는 일이야 하루 이틀 얘기가 아닌데. 조 대리가 눈을 치켰다. 내 말이 어디 틀렸어요? 은행 부실해지는 게 왜 우리 때문이에요? 다 관치 금융 때문이지. 결국 그게 비리를 몰고 오는 거잖아요. 그래, 그건 조 대리 말이 맞아. 나도 전에 지점장한테 부실기업이라 대출해 주면 안 된다고 틀었다가 고과 낙제 받을 뻔했어. 살아남느라고 똥줄 빠진 거 생각하면 치가 다 떨린다. 그때 허브향을 알지 못했더라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걸. 그러니까 조 대리도 힘들 땐 그거 도움 받아 보라고 권했잖아. 정 과장님도, 됐어요. 근데 늘 불안한 게 사실이에요. 어쩜 우리 애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그날 영욱은 조 대리의 아들이 다운증후군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그래서인지 조 대리는 은행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지면 몹시 초조해진다고 했다. 우리 애는 오 분 대기조처럼 병원이 꼭 필요하거든요. 그것도 대학병원 응급실로요. 만일 저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결국 조 대리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다른 동료보다 친하게 지냈지만 여태 영욱이 눈치 채지 못한 일이었다. 조 대리는 언제나 활달한 편이었다. 영욱은 불행한 그에게 또 다른 불운이 따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한편 조 대리가 허브향을 가까이 하면 지내기가 훨씬 수월할 텐데 하고 몹시 안타까웠다.
어쨌거나 동료들에게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포푸리 바구니는 이제 점포 입구의 번호표 기기 위에만 달랑 하나 놓여 있다. 영욱은 화초를 가꾸듯 매일 그것을 정성스레 돌본다.
“여기에다 허브 오일을 몇 방울 떨어뜨리면 이렇게 향긋하거든요. 장식용도 되고 종류에 따라 건강 예방에도 좋고, 또 치료에도 쓰이니까 취미 삼아 해보심 정말 괜찮아요. 향유는 매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제가 만드는 법을 가르쳐 드릴 수도 있어요.”
영욱의 이 말만큼은 그녀를 볼 적마다 켕기는 어떤 일과는 달리 민 여사에게 진심이다. 영욱은 작년에 그녀에게 여유 자금이 많은 걸 알고 그녀의 주거래 은행에 부실 여신이 많다는 말을 슬쩍 건네 목돈을 그의 점포로 유치했다. 물론 부실 여신 부분은 사실과 달랐다. 그런 일들은 종종 영욱이 미리 예측하지 못한 사이에 돌연히 일어났다
“자동 이체 여러 건 하시면 이번에 사은품 있는데 번거롭게 자꾸 나오시지 말고 저희에게 맡기세요. 공과금뿐 아니라 매달 타 은행 이체도 좋고, 지로, 보험 다 됩니다.”
“그런 것도 정 과장님한테 도움 되나요?”
영욱이 멋적은 웃음으로 대신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창고에 양식을 준비하듯 사소한 것이라도 차곡차곡 채우다 보면 득이 되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일에는 아내도 한몫 거든다. 여보, 내가 가끔 말하던 십칠층 엄마 있잖아. 우연히 은행에 따라가게 되었는데 직원들이 그 엄마더러 창구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녹차도 갖다 주고 대접이 극진하드라. 내가 그이한테 말해 거래를 우리 점포로 돌려 달랠까? 그 인연을 기회로 영욱은 그녀 남편의 사업체와도 거래를 트게 되었다. 탄탄한 재무구조를 가진 그 중소기업은 자금 회전이 빨라 지점장에게 효자업체라고 칭찬까지 받았다.
그 당시 영욱이 맡은 일은 예금 업무도 아니고 대부 담당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주어진 업무 외에 전천후 직원이나 된 듯 삼백육십오 일 뛰어다녔다. 신상품이 나오면 가계상품이건 기업상품이건 동원할 수 있는 곳은 사돈에 팔촌까지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들쑤시고 다녔다. 물론 그때마다 향유병이나 포푸리 주머니와 함께였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아니면 거래할 상황에 따라 알맞은 아로마를 몸에 지녔다가 향기를 맡곤 했다. 그러면 이상스레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친절했고, 그는 어떠한 일에도 두렵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상품들은 언제나 자신감으로 넘치고 빛이 났다. 영욱이 아로마를 통해 동료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동료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에게서 모종의 영업비법만을 기대했다. 모종의 비법, 영욱에게 비법이 있다면 아로마의 묘약 같은 영험과 포기하지 않는 성실함뿐이었다. 그 결과 제법 큰 사냥감을 물고 오기도 했다. 연중무휴 실시되는 온갖 증강 운동마다 목표액이 모자라면 대출을 받아 가면서까지 그 목표액을 채웠고, 친척의 이름으로 단위금전신탁을 만들기도 했다. 가끔 그런 억척스러움에서 비롯한 성과가 상사들의 질시와 찬사를 끌어내기도 했지만.
작년 말쯤에도, 김 차장이 다가와 책상 위의 포푸리 접시를 한쪽으로 툭 밀어내며 언짢은 투로 물었다. 성진기업 대출 건 초안 다 끝났나? 영욱은 동갑내기인 김 차장의 어투에 비위가 상했지만 미처 초안을 작성하지 못한 터라 아직, 하며 얼버무렸다. 빨리 안 끝내고 뭐해? 영욱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이미 대출된 금액도 많고, 재무제표에 문제가 좀 있는 거 같아 검토 중인데, 혹시 대형사고라도 치르게 될까봐서. 왜 그리 부정적으로만 봐? 대신 고부가 사업이고 경영 형태가 좋잖아. 그리고 성진은 지점장님이 특별히 지시한 거니까 알아서 작성해! 지점장의 특별지시, 그것은 영욱이 검토하고 말고 할 문건이 아니었다. 정책 판단에 따라, 기업 회생의 명분으로, 여신 심사 기준 상 사십 점짜리에도 지원하는 경우가 있잖은가. 영욱이 즉시 처리하겠다고 그에게 말하려는 참에 지점장이 김 차장을 부르며 다가왔다. 성진 건 급한 건데 어떻게 됐어? 제가 섭외 다녀오느라고 아직 못 끝냈습니다. 검토 중이라는 말은 쏙 빼고 영욱이 급히 지점장 앞에 나서서 변명했다. 김 차장이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영욱을 쳐다보았다. 일이 그렇게 되었군. 정 과장은 워낙 이리저리 바쁘게 뛰는 사람이라, 참, 이 참에 아예 보직을 바꾸지. 저기 황 대리가 대부 맡고 정 과장은 영업하고. 오히려 그게 낫겠어. 김 차장, 성진 건 황 대리한테 오늘 중으로 마무리하라고 해. 영욱은 지점장의 업무 교체 지시가 조금 아쉬웠다. 그야말로 삼박하게 지점장의 마음에 쏙 들도록 서류를 만들어낼 수가 있는데, 특별 지시라고 미리 귀띔하지 않은 김 차장이 조금은 괘씸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영욱은 자신이 지금껏 잘 해내고 있다고, 별것 아니라고 아쉬움을 달랬다.
삼년 전의 형편없는 고과표를 떠올리면 영욱은 지금도 피가 머리로 솟구친다. 아내가 없었다면 그 위기를 극복했을까 싶다. 그 기막혔던 시간들이 오늘 또 새삼스럽다. 요새는 그래도 그럭저럭 잠을 자는 편이다. 다 아내의 덕분이다. 매일 전신욕을 끝내고, 레몬밤 잎을 압화해 놓은 향초에 불을 붙여 비록 값싼 와인일지라도 아내와 나누고 있을라치면 세상이 가벼운 걸음으로 살며시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세상은 그에게 부드럽게 속삭인다. 모든 것이 다 잘될 거야, 이제 그만 긴장을 풀어. 영욱이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영욱은 클라리세이지를 서너 번 더 흡입하고 나서 또 창구 안을 둘러본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누구 하나 일어설 기미가 안 보인다. 그는 멀미증에다 요도의 통증이 극심해져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바깥 공기라도 쏘이면 나을까 싶어 옆 창구를 이용해 달라는 표지를 세우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동료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본다. 마치 모두 일거수일투족을 서로 감시하는 것 같다. 차마 일어설 수 없어서, 일어서기만 하면 그대로 퇴출일 것 같아서, 모두가 눈치를 보며 붙박아 놓은 듯 꼼짝 않는다. 영욱은 조 대리 옆을 지나다가 그에게 일어나라고 눈짓한다.
영욱은 점포를 나와 장마 끝의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문다. 어느새 조 대리가 옆에 달라붙는다.
“정말 숨 막히네요. 이러다 우리 점폰 무사히 넘어가는 거 아닌가?”
“제발 그랬음 얼마나 좋겠어.”
“일단 점심을 먹고 보죠? 이미 운명은 정해진 거고. 에구!”
조 대리가 한숨을 날린다. 영욱도 덩달아 한숨을 날리는데 와락 또 속이 메스껍다.
“난 못 먹겠다. 왜 이리 속이 울렁거리냐? 오줌소태까지 심한 게 죽겠어.”
“정 과장님은 그 이상한 향기 때문에 더 그러시는 거 아녜요? 어쨌거나 어디든 가요. 그냥 저기 갈까요?”
조 대리가 길 건너편을 가리키며 횡단보도가 아닌 도로를 성큼성큼 가로지른다. 영욱이 급히 그 뒤를 따라가며 아로마 요법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한다. 조 대리가 기운 없는 얼굴로 웃으며 그의 말을 받는다.
“알았어요.”
조 대리 역시 밥을 못 먹겠는지 음식을 앞에 놓고 젓가락으로 이것저것 께적거리기만 한다.
“대상자는 어떤 방식으로 결정된대요?”
“뻔하지 않겠어? 인사고과나 나이, 뭐 승진 여부도 있을 거고, 실적이라든가 좀 인간적으로 고려한다면 부양가족 정도겠지.”
“구조 조정이 행원 숫자만 줄이면 다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게 문제들이라니까요. 선진 금융 체계에 필요한 스페셜리스트로 재배치하는 프로그램 같은 건 개발하지 않고……, 정부나 일부 경영진에서 잘못해 놓고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행원들에게 은행 정상화시켜야 되니 합병시키겠다, 이젠 나가라, 그게 어디 말이 돼요? 그 많은 사람들이 길바닥에 나앉아서 어떻게 하라구요? 은행원이 나가서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뭐겠어요? 공부해 보니 부동산중개인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겠더라구요. 괜히 시작했어요. 인사부에 빌미만 준 거 같고 후회 막심예요.”
영욱은 그의 말에 그렇겠다고 깊이 공감하지만 대꾸할 기력은 없다. 조 대리가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영욱은 몇 번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요도 끝은 불에 덴 것처럼 아프고 속은 영 제 속이 아니다. 고맙게도 조 대리가 영욱을 챙긴다.
“병원에라도 들르든가 아님 약국에라도 들러보죠.”
“아냐, 어떻게 돼 가는지 빨리 들어가 보자.”
“그럴까요?”
조 대리가 서둘러 음식값을 치르고 영욱을 따라나선다. 영욱이 길 위에 서자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강한 햇살이 바로 요도로 내리꽂히는 것 같다. 걸음을 내딛는 그의 얼굴이 절로 찡그려진다. 조금 전까지 은행원이 나가서 뭘 할 수 있겠냐고 하던 분기는 어디로 갔는지 조 대리도 얼굴을 푹 숙이고 묵묵히 그의 뒤를 따른다.
점포 안으로 들어서자 단박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전해진다. 동료들이 상기된 얼굴로 김 차장 주위에 둘러서서 그의 통화를 주시하고 있다.
“그래, 그 귀책사유라는 게 뭐예요? …… 뭐라구? 성진기업 건 부실 대출이라구요?”
김 차장이 얼른 머리에 잡히는 게 없는지 성진, 성진, 하면서 되뇐다. 성진기업! 그 이름이 순간 영욱의 머리를 친다. 바로 그때 김 차장 옆에 서 있던 황 대리가 악, 소리친다.
“거기 담당 나였는데…… 왜, 지점장님이 정 과장님과 보직 바꾸면서 나한테 넘긴 거…….”
그제야 김 차장도 그 일이 떠올랐는지 소리를 지른다.
“그건 위에서들 미리 얘기되어 있던 거 아녜요? 그런 문제야 밑에 사람들은 그냥 관례대로 하는 거지, 이제 와서 그 책임을 물리는 게 어딨어요?”
김 차장이 수화기를 집어던지듯 내려놓고 지점장실로 달려간다. 그와 동시에 지점장이 문을 홱 열어젖히며 나온다. 누군가 말을 붙이면 금방 한 대 날릴 기세로 찬바람이 돌고 있다.
“지점장님…….”
김 차장이 한쪽으로 비켜서며 말을 잇지 못한다. 지점장은 휑하니 바깥으로 나가 버리고 김 차장은 넋을 잃고 제자리에 서 있다. 그때 또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린다.
“황 대리님, 전화…….”
여행원이 마지못해 건네는 수화기를 황 대리가 머뭇머뭇 받는다.
“네, 알겠습니다.”
황 대리가 창백한 얼굴로 전화를 끊더니 울상을 짓고 김 차장을 쳐다본다. 그 모습을 본 조 대리가 겁먹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영욱을 돌아다본다. 영욱은 그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고, 나는? 나는? 이번에도 무사히? 속으로 쾌재가 올라오는 걸 애써 누르는데 또 전화벨이 울린다. 이번엔 영욱이 직접 뛰어가 수화기를 집어 든다. 웬일인가, 본부에서 영욱을 찾는 전화이다.
“예, 본인인데요.”
“이거, 참 송구스럽지만 실적은 참 좋으신데 평가서에 정신 병리 증상이 의심된다고…….”
영욱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허겁지겁 클라리세이지를 손바닥에 쏟아 붓고 정신없이 흡입하기 시작한다. 쉴 새 없이 벌름거리는 그의 콧구멍으로 들숨 날숨이 가쁘게 들고난다. 점차 동공이 커지며 흰자위가 드러나는 그를 조 대리가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그 순간 영욱이 뒤로 벌렁 넘어지고, 모두들 어, 어, 소리와 함께 영욱을 부르며 달려든다. 까무러지는 영욱 주위로 클라리세이지의 심한 약초향이 알싸하게 퍼진다.




홍양순․
제주 출생
․199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설집 󰡔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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