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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신작단편/김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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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60회 작성일 08-02-29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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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단편|


숙직전담원 방씨

김혜정



안주라고는 달랑 쥐포 하나뿐인 술상 앞에 앉은 방씨는 감회가 새로웠다. 오년 전 기관지확장증으로 피를 한 됫박 쏟은 후부터 끊었다가 다시 마시기 시작한 지 일년쯤 되는 술이었다. 색전술로 간신히 막아놓은 혈관이 다시 터지면 치명적이었다. 술을 마시면 혈관에 무리가 간다고 했다. 하지만 밤잠 안 올 때는 물론이고, 세상사가 손가락 사이로 물 빠져나가듯 할 때 술만 한 벗이 없었다. 이 쏠쏠한 낙도 내일부터는 그만이다 싶으니 술맛은 더 기막히고 가슴은 벌써부터 답답했다.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방씨는 오늘따라 취기가 빨리 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누라와 자식 생각이 간절했다. 정유회사의 저유소에서 임시직으로 일하다 만난 마누라와는 애옥살림에도 정 하나만은 남부럽지 않게 돈독했다.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고생만 하다 간 마누라와 태어나 세상 구경 한 번 못 하고 죽은 자식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게 되었다. 성치 않은 잇몸 때문에 곧 뱉어내면서도 방씨는 연신 쥐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방씨는 환갑 줄에 가까운 나이로 보아 이번 일자리가 마지막일 것 같았다. 어떻게든 오래 버텨야 했다. 그러나 학교의 첫인상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어? 교장 선생님과 꼭 닮으셨네요. 행정실의 사환 애가 키득거렸다. 정말이네요. 주사가 맞장구를 쳤을 때만 해도 아무리 숙직전담원이기로서니 첫 대면하는 어른에 대한 태도가 좀 지나치다 싶었다. 교장이 들어섰을 때야 비로소 방씨는 그들이 이해되었다. 교장은 감기에 걸렸는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행정실장이 방씨를 소개하자 교장은 거드름이 잔뜩 실린 눈빛으로 고개만 까딱했다. 그 눈빛만 빼면 그가 보기에도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것처럼 자신과 교장의 외모가 닮았다. 방씨는 그때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허리를 굽실거렸던 것이 떠올랐다. 갑자기 술맛이 뚝 떨어졌다.
엊그제 용역회사에서 학교에 숙직전담원 자리가 났다는 말에 방씨는 김이 새는 듯한 기분과 동시에 기대도 되었다. 기왕이면 고층빌딩에서 근무를 하고 싶기는 했다. 학교는 오후 다섯시에 출근을 해서 다음 날 오전 아홉시까지 일을 하지만 고층빌딩이나 상가보다 임금이 터무니없이 낮아 기초생활비에도 못 미쳤다. 게다가 학생들을 상대하다 보면 자질구레하고 성가신 일이 많을 터였다. 또한 일반 기업의 간부들이 체면치레로 쥐어주는 푼돈조차 선생들에게서는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연배가 비슷한 사장이 거들먹거리는 것을 보아내기보다는 오랜 교직생활을 해온 교장을 대하기가 나을 것 같았다. 또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이니 나이 든 사람에 대한 공대는 하겠거니 싶었다. 아무려나 이 불황에 그만한 일자리가 어디 있겠나 싶어 위안을 삼았다.
방씨는 출근 첫날이니만큼 사우나를 다녀와서 양복을 입어 보았다. 마누라 생전에는 경조사에라도 더러 입었지만 마누라 가고 난 후에는 거의 입어본 적이 없던 것이었다. 유행이 지난 것은 둘째 치고 장롱 속에 오래 묵혀 있던 것이라 군데군데 곰팡이가 핀 데다 좀약 냄새가 풀풀 났다. 물걸레로 슥슥 문지른 후 걸쳐 입었으나, 안 그래도 추레한 입성이 더 후줄근해 보였다. 방씨는 넥타이를 몇 번이나 맸다 풀었다 하다가 결국 매었다. 적어도 교장이 퇴근하기 전에 인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러나 하필 버스를 잘못 타는 바람에 방씨는 다섯시가 다 되어서야 학교에 도착했다. 헐레벌떡 교문을 들어서는데 교문 옆 주차장에서 막 승용차에 타려던 교장과 마주쳤다. 교장은 여전히 마스크를 쓴 채였다. 방씨를 쳐다보는 눈빛이 어제보다 더 거만했다. 방씨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굽혔다. 교장이 탄 승용차가 교문을 빠져나가자 방씨는 자신이 또 지나치게 굽실거린 것이 후회가 되었다. 터덜터덜 현관 쪽으로 걷고 있는데 등 뒤에서 여학생들이 조잘대는 소리가 들렸다.
“야, 문어대가리다."
킥킥대는 학생들이 자신을 교장으로 착각하는 듯해서 방씨는 얼떨떨했다. 그 기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젊은 남선생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교장 선생님.”
급하게 결재를 받아야 할 게 있다며 서류부터 내밀었던 그는 얼른 죄송하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돌아서는 것을 보면서 방씨는 슬그머니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학교여서 그런지 숙직실은 쾌적하고 장롱 속의 침구도 깨끗했다. 무엇보다 숙직실 뒤편에 달린 샤워실이 방씨는 마음에 들었다. 사우나 한번 가려면 만원은 족히 드는데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방씨는 용역회사로부터 받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의자에 앉았다. 퇴근을 하는 선생들이 방씨를 향해 목례를 했다.
“한상국이라고 합니다.”
삼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멀끔한 외모의 남선생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소문대로, 교장 선생님과 쌍둥이 형제분 같으십니다.”
말쑥한 차림새에 어울리는 목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억양이 과장되고 어색하여 꼭 연극배우 말투 같았다. 방씨는 왠지 겸연쩍어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렸다. 맨들맨들한 머리의 감촉이 별로 좋지 않았다.
보충수업에 야간자율학습까지 한 학생들은 열시가 훌쩍 넘어서야 하교를 했다. 방씨는 교내 순찰을 한 후 교문을 걸어 잠갔다. 텅 빈 교정의 고적함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하나 없는 하늘에 바람은 삽삽한데도 마음만은 왠지 푸근했다. 이럴 때 마누라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가 방씨는 무인보안시스템을 작동시켰다. 실수 없이 해야 한다는 생각에 버튼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긴 숨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이 건물에 혼자 남았다 싶으니 건물주라도 된 것 같아 짓눌렸던 가슴이 펴졌다. 그러나 곧 벌떡증이 솟구쳤다. 이십년을 일하고 받은 퇴직금과 집을 몽땅 날린 것이 건물 때문이었다. 택지개발지구의 땅값이 서너 배로 뛰면 그 옆의 상가건물값도 덩달아 뛸 거라는 부동산업자의 말에 솔깃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죽으려고 들면 영락없이 귀신이 씐다더니 꼭 그 짝이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말리는 마누라를 윽박지를 때만 해도 방씨는 마누라 몸에 암 덩어리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이엠에프가 터지고 건설경기가 침체되는 것과 맞물려 건물주가 부도를 맞아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마누라가 대장암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적금과 보험금마저 해약한 후였다.
한번 시작된 벌떡증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그 병에는 술이 약이었다. 하지만 방씨는 첫날부터 술을 먹다가 무슨 실수라도 하게 되면 낭패이지 싶어 꾹꾹 눌러 참았다. 그냥 잠을 자는 게 상책이지 싶어 자리에 누웠지만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정유회사 야간근무로 이십년 남짓, 아파트와 건물 경비생활이 오년 가까이 되는데 이번에는 숙직전담원이었다. 반평생은 밤낮을 거꾸로 산 셈이니 올빼미 팔자가 따로 없었다. 그런 터에 낮잠을 자지 않은 날에도 밤잠을 자는 것은 늘 고역이었다. 방씨는 천장을 보다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다섯 평 남짓한 이곳에서 날마다 토막잠을 자야 한다는 데 정체모를 쓸쓸함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텔레비전을 켤까 하다가 내키지 않아 그만두었다. 전화기를 보자 작년에 같은 아파트에서 경비를 했던 최씨 생각이 났다. 분리수거를 하는 날이면 교대를 한 후에도 일을 거들어주고 퇴근을 했던 이였다. 주민들이 어쩌다 주는 음식도 먹지 않고 방씨 몫으로 남겨두었다. 방씨는 늘그막에 속을 트고 지낼 벗이라고는 그 이밖에 없지 싶었다. 안부라도 묻고 싶었는데 최씨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눈을 감은 채 한동안 더 누워 있었지만 잠은 오히려 멀리 달아날 뿐이었다.

일곱시가 조금 넘자 교장이 출근을 했다. 교장의 양복바지 주름이 그의 성격만큼이나 날카로웠다. 방씨는 서너 겹 주름이 잡힌 자신의 양복을 떠올렸다. 괜히 주눅이 들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세탁소에 맡겨 다림질을 해야지 생각했다.
“방씨, 오늘 시간 좀 있어요?”
“예? 아, 예.”
“저기 공터에 쓰레기 좀 치워야겠는데요.”
“아, 예.”
“아참, 어젯밤 제일 늦게 퇴근한 선생님이 누구죠?”
“잘 모르겠는데요.”
“모르다니, 말이 돼요?”
“순찰을 돌고 와 보니 모두 퇴근하시고…… 저기, 근무상황부를 보시면…….”
“아, 누가 그걸 모르나. 시간 외 수당을 제대로 달았는지 그걸 알자는 거 아뇨. 앞으로 순찰은 모두 퇴근하고 난 다음에 해요.”
“아, 예. 교장 선생님.”
“참, 오늘 교직원조회 때 상견례합시다.”
“예. 교장 선생님.”
방씨는 거들먹거리는 교장의 행태에 소태 씹는 기분이었다. 일부러 말끝마다 교장 선생님, 하며 이기죽거렸다.
교사 뒤편에는 잡다한 쓰레기와 고철 나부랭이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두 시간을 꼬박 치웠는데도 일한 티가 나지 않았다. 교사 신축할 때부터 쌓인 것이라는데, 이런 식으로 한다면 서너 달이 걸려도 다 못 치울 것 같았다. 방씨는 일도 일이지만 하인 부리듯 하던 교장의 말투 때문에 속이 부글거렸다.
학교 앞 도로변에는 학생들을 등교시키는 학부모들의 승용차가 즐비했다. 방씨는 십리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던 시절이 떠올랐다. 새삼 학교에 바래다줄 자식이라도 하나 있었더라면 삶이 이렇게 적적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세월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아들을 살리고 봤을 거라는 자책감이 가슴을 후벼 팠다. 회사식당에서 일하던 마누라를 만났을 당시 방씨는 집 보증금을 마련할 형편이 못 되었다. 하루치씩 방값을 내며 여관에서 지내자고 했을 때 마누라는 극구 반대했다. 하지만 혈기는 왕성한데다, 정을 통한 후인데 따로 지낼 수는 없었다. 여관 주인 눈치를 보며 밥을 해 먹기는 했어도 먹는 것이 변변할 리는 만무했다. 마누라의 몸무게가 급격히 줄었지만 원체 허약체질이라 그런 줄만 알았다. 달거리 주기가 일정치 않은 마누라는 임신한 지 다섯 달이 될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 임신 사실을 알고도 마누라는 애오라지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는 일념으로 식당일을 계속했다. 결국 온몸이 퉁퉁 부어서야 병원을 찾았다. 그때는 이미 산도가 열려 조산의 위험이 닥쳐 있었다. 자궁경부를 묶어주는 수술을 하고 두 달을 병원에서 누워 지내다가 입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 퇴원을 했다. 퇴원한 다음날 바로 진통이 왔다. 태어난 아기는 체중 미달로 인큐베이터에서 살아야 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무슨 수로 그 비용을……. 방씨는 그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결국 아이가 인큐베이터에서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죽자 자신의 무능은 물론, 그 말 때문인 것만 같아 자괴감으로 술독에 빠져 지내다시피 했다.
방씨는 교직원조회 시간에 맞춰 다시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넥타이를 매며 자신을 소개할 말을 생각해 보았다. 방판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것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워낙 주변머리가 없기도 했지만, 나이 들면서 점점 어려운 것이 말이고 줄어드는 것이 말수였다.
방씨가 막 계단을 오르려는 참에 여선생 하나가 다가왔다. 엉덩이에 착 달라붙은 미니스커트, 번쩍거리는 귀고리가 그녀의 얼굴보다 먼저 보였다. 살살 눈웃음을 치는 것이 영락없는 반 여우였다. 생김새나 옷차림 못지않게 말씨 또한 오뉴월 버들잎에 스미는 바람소리 같았다. 방씨는 얼이 나가 여선생이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예?”
“오늘 조퇴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집안에 일이 생겨서요.”
“예? 저…….”
“어머나!”
여선생은 자기가 착각을 했다는 걸 금방 깨닫고는 호들갑스럽게 물러섰다.
교직원조회가 시작되었는데도 출근을 하지 않은 선생들의 빈 자리가 서넛 눈에 띄었다. 교장의 목소리에 빡빡하게 힘이 실려 있었다. 선생들은 하나같이 교장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것 같았다. 립스틱을 바르는 선생이 있는가 하면 뭘 쓰거나 컴퓨터를 두들겨댔다.
“에, 여선생님들! 거 애들 교육상 좋지 않은 복장은 삼가세요. 애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
조금 전에 현관에서 마주친 여선생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그 여선생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교장은 작정을 했던 듯 일사천리로 초과 근무시간을 정확히 기재할 것과 근무 중 이석 금지, 근무태만 근절을 경고했다. 수첩을 들여다보며 교실 청소상태 미비와 부실한 시건장치, 허술한 학급경영에 이르기까지 조목조목 따져 지적했다. 무엇보다 교원평가제에 대해서는 정색을 하고 목청을 높였다.
“교감 선생님. 교육청에서 온 공문 회람하셨겠지요? 때는 바야흐로 우리 교직원도 정당한 평가를 통해 개인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나아가…….”
교장은 득의만만하여 이천만 원에 달하는 지원금과 승진 가산점 혜택을 강조하면서 교원평가제 시범학교 운영안의 개요까지 밝혔다. 그때까지는 움쩍도 않던 선생들이 순식간에 동요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교장은 모르쇠하며 잽싸게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방씨는 교장이 자신을 불러놓고 인사도 시키지 않은 채 나가버리자 당황스러웠다. 선생들은 교장의 시범학교 운영 조치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한상국이 일어나 평가대상 우선순위가 누군지는 다 아시죠? 하자 누군가 그야 물론 장이요, 했다. 또 누군가가 그거 참 짱이요, 하고 건들댔다. 야유가 터지자 교감이 슬쩍 일어나 꽁무니를 뺐다. 한눈에도 똑 부러져 보이는 남선생이 시범학교 운영 거부 대책위원회 어쩌구 하는데 교장의 기침소리가 났다.
“내가 참, 정신이 없어서 깜박했네. 방씨, 이리 와서 인사해요.”
“저는 방판수라고 합니다. 훌륭하신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방씨는 자신의 목소리가 식은 죽 한 그릇 못 얻어먹은 것처럼 기어들어간다는 것을 느끼면서 가까스로 말을 마쳤다.

“야야, 새로 오신 숙직아저씨 말야, 문어대가리랑 꼭 닮지 않았냐?”
“맞어, 맞어. 규창이가 어제 복도에서 뛰다가 문대한테 걸렸대. 근데 이 맹추가 문대를 숙직아저씬 줄 알고, 아저씨가 왜 참견이냐고 대들었다는 거야. 그랬더니 문대가 글쎄…….”
“어떻게 됐는데?”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조용히 타일렀다구.”
“왜, 덥석 껴안지는 않았대?”
방씨가 뒤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학생들이 배를 잡고 깔깔댔다. 방씨는 알사탕이라도 하나 깨문 것 같았다. 하지만 학생들마저도 자기를 만만히 보고 있다 생각하니 곧 익모초 씹는 기분이 되었다. 때마침 교장실에서 나오던 교장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교장이 어이, 하듯 손짓으로 방씨를 불렀다. 방씨는 교직원조회 때 자신의 이름을 빼고 방씨라고만 소개한 걸 생각하면 교장의 낯짝이라도 한 대 갈기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 집 똥개라도 부르듯 하다니. 방씨는 그래, 똥이 무섭냐, 더럽지. 속으로 곱씹으며 부아를 삭였다.
“오늘 낮에 시간 좀 있어?”
“예?”
“서 기사 일이 좀 많아서 말야. 별건 아니고, 교실에 달려 있는 선풍기 좀 떼서 창고에 넣고, 고장 난 건 손을 좀 봐야겠어.”
“아, 예.”
“참, 교장실에 있는 난 잎도 좀 닦았으면 좋겠는데…….”
이제는 아예 반말지거리로 나오는 교장의 태도에 방씨는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사람 좋아 보이는 서 기사를 도우라는데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할 일까지…….”“집에 가봐야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별로 할 일도 없는데요, 뭐.”
선풍기를 다 떼고 나자 서 기사가 발간실에서 차나 한잔 하자며 앞장섰다.
“교장 선생님, 좀 깐깐하시죠?”
방씨는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서 기사도 대답을 바라고 한 말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꾹 참고, 오래 계세요.”
서 기사에게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방씨는 뜨끔했다. 서 기사의 말에 의하면 교장의 꼬장꼬장한 성격을 견디지 못하고 올해만 해도 숙직전담원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고 했다.
“근데 웃기는 일이 있었어요. 한 사람이 그만두면서 교장이 사용하는 문이란 문의 손잡이를 죄다 거꾸로 바꿔놓고 갔어요. 저 딴엔 교장에게 심술을 부리느라고 그랬을 테지만 그거 다시 돌려놓느라 저만 고생했다니까요."
숙직실에서 샤워실로 연결된 문도 그렇게 돼 있어 방씨는 안 그래도 언제 되돌려 놓아야지 하고 있던 참이었다.
노크 소리가 나자 서 기사는 얼른 문을 열었다. 교원평가제 시범학교 운영 거부 대책위원회 운운했던 선생이 떡 접시를 들고 들어섰다.
“두 분 다 여기 계셨네요. 이거 저희 반 학부모님이 손수 만들어 보내신 떡인데, 좀 드세요.”
“뭘 이런 걸 다……, 잘 먹겠습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인건비 아끼자고 두 분을 이렇게 혹사시키는 건 도리가 아니죠. 너무한다 싶으면 딱 잘라 못하겠다고 하세요. 관리자들 생리라는 게 이쪽에서 강하게 나가야 겁을 낸다니까요.”
서 기사는 교장에 대한 선생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며, 방금 나간 유영민이 그 대표 격이라고 귀띔을 했다. 전교조 조합원으로 입바른 소리를 잘해서 교장이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면서도 은근히 그를 겁낸다는 거였다. 그래도 교장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인 거라며 씁쓸하게 덧붙였다. 또 교장이 자린고비처럼 굴어도 판공비를 아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걸 보면 천생 선생님이라고도 했다.
“공터의 쓰레기만 해도 포크레인 비용을 절약하려는 것이니 너무 고깝게 생각지 마세요. 선생님들도 틈날 때마다 하시거든요.”
애써 위로를 하려는 듯한 서 기사의 말이 방씨는 별로 가슴에 와 닿지가 않았다.
한숨 돌리는 차에 교정이나 구석구석 익혀두자 싶어서 교사 뒤편으로 가던 방씨는 주차장 앞에서 놀라 멈춰 섰다. 범퍼에 오물을 뒤집어쓴 채 서 있는 승용차는 분명 교장의 차였다. 주택가 골목도 아니고 교내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오물세례라니. 누군가 고의적으로 한 것이 분명했다. 방씨는 서 기사의 말을 떠올리며 선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사사건건 시비를 따진다는 유영민, 음흉한 구석이 있다는 한상국이 가장 유력했지만 왠지 그들이 그런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또한 학교에서 명이 난 장난꾸러기라 해도 그 정도로 뱃심 두둑한 녀석은 없지 싶었다. 하필, 교장이 뒷짐을 진 채 가까이 오고 있었다. 방씨는 교장 차가 그렇게 된 것이 마치 자신의 잘못이나 되는 것처럼 움찔했다.
“거기서 뭐 하는 거요?”
“아니, 저…… 아휴, 이게 어찌된 일이죠?”
“아, 보면 몰라요?”
교장은 방씨를 범인 닦달하듯 눈에 날을 세웠다.
“아, 그렇게 보고만 있을 테요?”
“예?”
“그렇게 섰지만 말고 당장 세차부터 해야지, 뭐 하냐니까!”

방씨는 몇 번을 망설이다 기어이 술을 사 왔다. 근무 중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건만, 온몸이 욱신거리는 데다 울화가 치미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일을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다시 일자리 구할 생각을 하면 아득했다. 술기운이 퍼지자 긴장이 풀어지면서 그간의 일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했지만 아이들 때문인지 생각했던 것보다 학교에 정이 갔다. 다만, 끊임없이 사람을 들볶아대면서 오만하게 구는 교장만은 용서가 안 되었다. 방씨는 무심코 열쇠꾸러미를 바라보다 별안간 교장실에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카펫이 깔린 바닥, 고급품으로 보이는 오디오와 벽걸이 텔레비전, 세면대에 정수기까지 설치된 교장실은 어지간한 회사 사장실에 댈 것이 아니었다. 쳇! 고양이 뿔말고는 다 있으니 산 호랑이 눈썹도 안 그립겠군. 방씨는 비아냥대면서도 은근히 부러웠다. 질감도 좋고 푹신해 보이는 소파에 앉으려다 말고 사무용 책상 앞으로 갔다. 회전의자에 한번 앉아보고 싶었다. 커다란 책상 위에는 명패와 책, 각종 공문서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수북이 쌓인 공문서를 보자 선생들이 왜 잡무에 대한 불평을 그리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공문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모두 일거리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서류마다 오른쪽 상단에는 교장의 사인이 들어 있었다. 교장의 성질머리는 고약해도 글씨는 제법 번듯했다. 방씨는 자기도 왕년에 글씨 하나만은 수준급으로 썼던 터에 대서방을 차리라는 말도 가끔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고등학교만 나왔더라도 무엇인들 못했으랴 싶으니까 새삼 세상사가 원망스러웠다.
방씨는 심심풀이로 서랍을 열었는데 자질구레한 필기도구와 사무용품들이 사열대의 병사들처럼 한 방향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순간, 서랍을 빼서 확 엎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치밀었다. 흥, 유별난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닌데 책상이 이리 호사스러울 건 뭐야. 속이 배배 꼬여 서랍마다 툭툭 열었다 닫는데 손이 절로 멈칫했다. 수박만한, 아니 절구통만한 젖통과 검고 울창한 숲을 훤히 드러낸 서양여자가 음탕하게 혓바닥을 빼물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잡지책을 보는 것이 교장의 취미인 듯 서랍 안에는 엇비슷한 잡지들이 가득했다. 방씨는 손에 잡히는 대로 잡지를 꺼내 들추었다. 잡지의 장장마다 가관이었다. 해괴망측하게 얽혀 있는 남녀가 내지르는 교성이 귀에 달라붙는 듯했다. 방씨는 정신이 아뜩한데도 잡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갑자기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기어이, 몇 년 동안 잠잠했던 물건이 벌떡 일어섰다. 바짓가랑이가 곧 터질 듯이 팽팽해졌다. 방씨는 아랫도리를 부여잡은 채 안절부절못했다.
간신히 물건을 잠재운 방씨는 황급히 냉장고문을 열었다. 냉장고는 각종 음료수로 가득 차 있었다. 개중 가장 비싸 보이는 홍삼엑기스를 꺼내려다 밀어 넣었다. 다시 원기가 돌면 곤란할 터였다. 정수기로 달려가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내친김인데, 기왕이면 푹신한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고 싶었다. 곧장 숙직실에 가서 소주와 쥐포를 가져와 탁자 위에 펼쳤다. 과연 술맛이 한결 좋았다. 한잔 두잔 술이 들어가자 정신이 알딸딸해지는 것이 몸을 움직이는 것도 귀찮았다. 잡지를 펼쳐 그 중 가장 크고 넓더래한 젖가슴을 베개 삼아 소파에 누웠다. 자신도 모르게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들었던 노래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잰잰잰, 시계 차고 가는 신사 너만 잘났냐. 수갑이나 차고 가는 나도 잘났다. 잰잰잰, 양주 먹고 취한 신사 너만 잘났냐. 소주 먹고 취해버린 나도 잘났다. 잰잰잰…….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놀라 방씨는 잠에서 깨었다. 무인보안시스템이 작동한 것을 깨닫는 순간, 아찔했다. 누군가 침입했다면 큰일이었다. 그새 날이 훤히 밝아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아침 일곱시였다. 방씨는 허둥지둥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교장이 길길이 뛰면서 기차화통 삶아먹은 듯한 소리로 악을 써댔다.
“이봐요. 아직 문도 안 열어놓고 뭐 하는 거야?”
방씨는 한달음에 교장실로 들어가는 교장을 주춤주춤 뒤따랐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감히…….”
교장은 한참을 선불 맞은 호랑이 뛰듯 하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벼락같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여기 학굔데요. 출동하실 필요 없게 됐어요……. 아, 사정이 그렇게 됐다니까요.”
무인보안시스템 회사에서 벌써 출동을 한 모양이었다. 한참 실랑이를 하던 교장이 휴대폰을 냅다 집어던졌다. 방씨는 숨소리마저 죽인 채 교장을 흘끔거렸다. 교장은 독이 올라 체머리까지 흔들며 몇 번이나 앉았다 일어섰다 했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이번에는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오두발광을 했다. 잠시 조용하다 했는데 교장이 오디오 앞에서 멈춰 서 있었다. 느닷없이 ‘콰콰콰 쾅’ 소리가 크게 울렸다. 방씨는 움찔했으나 그것이 음악소리라는 것을 알고는 안심이 되었다. 그 음악은 다름 아닌 ‘운명교향곡’이었다. 음악은 잘 몰라도 그 곡만은 귀에 익었다. 교장은 한동안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부아를 삭이는 듯했다.
언제 교장의 불호령이 떨어질는지 몰라 방씨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탁자에 쓰러져 있는 소주병과 쥐포, 제멋대로 나뒹구는 음란잡지들이 지난밤 자신의 행적을 고스란히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이 한 일인데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제 끝장이구나 하는 절망감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았다. 방씨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잡지들을 주섬주섬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아무리 봐도 음란잡지와 운명교향곡은 거적문에 금구슬 짝이었다. 방씨는 그 와중에 이상스레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그만 나가봐요.”
“죄송합니다.”
똬리 튼 독사처럼 앉아 있던 교장이 주먹으로 탁자를 쳤다.
“아, 됐다니까요.”
“한 번만 봐주십시오. 교장 선생님.”
“아이, 됐다니까 그러네.”
어차피 깨진 쪽박,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지 싶으니 방씨는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마음만 먹으면 교장 따위 한방에 날려버릴 힘도 있지 않은가. 방씨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추슬렀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예. 그럼, 이만. 그런데 저, 교장 선생님. 이거…….”
방씨는 약이나 올려주자 싶어 슬쩍 음란잡지를 들어 보였다. 교장의 얼굴은 물론, 귀까지 벌게졌다.
밖으로 나온 방씨는 담배부터 한 대 물었다. 인기척이 나서 돌아보니 교장이 숙직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방씨는 작자가 거긴 뭐 하러 가나 궁금했다. 문득, 작자가 홧김에 자신의 소지품이라도 내동댕이치는 것은 아닐까 불안했다.
교장은 장롱문이며 서랍을 모조리 열어놓은 채 개처럼 코를 큼큼거리고 있었다.
“뭘 찾으세요? 교장 선생님.”
교장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턱에 걸치고 있던 마스크를 확 벗어재꼈다. 얼떨결에 방씨는 교장이 내두른 팔에 턱을 받혔다.
“죄송합니다. 교장 선생님.”
턱이 얼얼한데도 방씨는 바닥에 떨어진 마스크를 얼른 주워 교장에게 내밀었다. 교장은 마스크를 받아들기는커녕 방씨를 향해 송곳눈을 치뜨고는 곧장 샤워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숙직실과 샤워실을 잇고 있는 문이 ‘꽝’ 소리를 내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방씨는 맥이 빠졌다. 순간, 거꾸로 달린 손잡이의 잠금쇠가 눌러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방씨는 자신의 머리가 고속으로 회전하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더불어 한 선생의 연극 대사 같은 말이 떠올랐다. 교장 선생님과 쌍둥이 형제분 같으십니다. 그 말은 아저씨가 교장 선생님이었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선생들도 교장이 오죽 꼴 보기 싫었으면 그런 생각을 다 하겠나 싶었다. 그래, 운명. 이것도 운명일는지 모른다. 하필이면 이 학교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나, 또 이런 일이 일어난 것도 우연만은 아닌 것이다. 방씨는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골탕이나 한번 먹이고 갈까? 하는 충동이 솟구쳤다.
“이봐요, 방씨. 아, 방씨…….”
‘콰콰콰 쾅’, 새로운 운명의 시작을 알리는 교향곡이 방씨의 머릿속에서 크게 울렸다. 방씨는 얼른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세탁소에서 다림질을 해서 그런지 양복의 모양새가 꽤 그럴싸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이층에서 내려오던 학생 몇이 방씨를 향해 정중히 인사를 했다. 방씨는 최대한 자애로운 미소를 띠며 인사를 받았다. 그러고 나니 정말 교장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방씨는 교장의 마스크를 쓰고 교장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다른 건 다 좋은데 머리 모양이 영 아니었다. 방씨는 머리칼을 가닥가닥 잡아서 가지런히 두피에 붙인 후 물을 살짝 축였다. 이 정도면 귀신도 속아 넘어가겠지? 하며 회전의자에 앉았다. 의자를 뱅그르르 한 바퀴 돌리자 한층 마음이 느긋해졌다. 의자에 깊숙이 앉아 한껏 기지개를 켰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인생의 하루쯤 교장으로 살아보는 거다, 하며 방씨는 눈살에 힘을 주었다.
사환 애가 차를 들고 들어왔다. 방씨는 얼른 의자를 돌려 벽을 보고 앉았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되도록 얼굴 보이는 건 삼가야 했다. 사환 애는 차만 놓아두고 바로 나갔다. 방씨는 교장이 매일 아침 이런 서비스를 받는다 생각하니 은근히 배알이 뒤틀렸다. 하지만 그 애가 감쪽같이 속았구나 싶어 불안감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숙직전담원은 당연히 퇴근한 줄 알 것이고 이 시간에 숙직실을 기웃거릴 사람은 없을 터였다. 호박에 대못 치듯이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가슴이 벌렁벌렁했다. 다시 노크 소리가 났다. 방씨는 잠시 갈등하다 이번에도 역시 의자를 돌려 앉았다. 마스크를 콧잔등 위로 끌어올리고는 한 손으로 목을 감싼 채 한 손으로 가슴을 팡팡 쳤다.
“어휴, 교장 선생님. 많이 편찮으신가 봅니다.”
방씨는 몸을 더 수그려 몹시 괴롭다는 시늉을 했다. 때맞추어 기관지도 놀란 듯 발작적인 기침이 터져 나왔다.
“저, 오늘 저번에 말씀드린 학부모들이 기어이 들이닥칠 것 같은데 어쩌지요?”
방씨는 무슨 일인가 해서 가슴이 철렁했다. 학부모와 대면은 둘째치고라도 우선 저들과 말을 섞어서도 안 되었다. 우선 급한 불부터 끌 셈으로 방씨는 기침 때문에 만사가 귀찮다는 듯 그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나중에 오시라고 말은 넣어보겠습니다만, 워낙……. 교장 선생님 건강이 먼저지요.”
방씨는 다시 억지 기침을 했다. 두 사람은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방씨는 한 십년은 감수한 것 같았다. 숨이 차고 머리가 무거웠다. 사환 애가 가져다놓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무슨 차인지 구수하고 쌉싸래한 것이 입맛에 딱 맞았다. 방씨는 시원스레 트림을 했다.

방씨는 교장실문을 빠끔 열어 바깥의 동정을 살폈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지금쯤 똥줄이 탈 교장을 생각하니 고소하기 짝이 없었다. 제깟 놈이 샤워실 안에서야 털 뜯긴 꿩이요, 종이호랑이 신세지 별수 있나. 암암, 험한 꼴을 당해봐야 남 어려운 사정도 아는 법이지. 그동안 호색한처럼 음란잡지나 훔쳐보았으니 제 마누라 귀한 것도 알게 될 거고. 어쨌거나 이 방판수를 홀대한 대가는 치러야 할 것 아닌가.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자 아이들이 복도에서 소란스레 뛰어다녔다. 그 생생한 울림에 방씨는 가슴이 설렁였다. 생각 같아서는 밖으로 나가 아이들 뛰어노는 걸 보고 싶었다. 갓 태어난 아들이 죽은 후 마누라는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날로 여위어가는 마누라를 팽개쳐둔 채 방씨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술추렴을 했다. 그 즈음에 화물운송용 트럭 기사의 수입이 짭짤하다는 말을 들었다. 어깨 넘어 배운 운전 실력이 있어 면허증을 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수입도 수입이지만, 여가시간이 없어지면 술도 덜 마실 테고 아들을 잃은 고통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덜컥 그 일을 시작했다. 문제는 낮에도 일을 하다 보니 잠이 턱없이 부족한 거였다.
그날은 공장으로부터 삼만 톤이나 되는 유조선이 저유소로 들어왔다. 그만한 유조선의 기름을 지상탱크에 받으려면 못 잡아도 스무 시간은 걸렸다. 물론, 주야간 근무조가 풀가동되어야 했다. 하필, 주간 근무조 중 한 사람이 맹장수술을 하는 바람에 방씨의 교대 시간이 반나절이나 앞당겨졌다. 방씨는 전날 야간근무를 하고 나서 바로 장거리 운전을 한 터에 몹시 피곤했지만 눈 붙일 짬도 없이 회사로 달려갔다. 저녁도 거른 채 기름을 받았는데도 자정이 넘도록 탱크 수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새벽 세시쯤 되자 방씨는 밀려오는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대타를 구하기도 어려운 시간이었다. 새 탱크에 송유관을 대어놓은 후 방심을 했던지 그만 깜박 졸고 말았다. 탱크에서 넘쳐난 벙커C유가 삽시간에 바다로 흘러들었다. 바다가 형편없이 오염된 것은 물론이고 회사의 손실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회사가 발칵 뒤집혀 본사로부터 소환장이 날아왔다. 방씨는 이미 체념을 한 상태로 소환에도 응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때 마누라가 방씨도 모르게 본사까지 찾아가 울며불며 통사정을 한 거였다. 결국 방씨는 평소의 성실성과 자식을 잃은 고통의 정도, 무엇보다 고의가 아니었다는 점이 정상 참작되어 가까스로 퇴직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정유회사에서 이십년을 근속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마누라의 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받은 퇴직금을 홀랑 날렸으니 마누라 몸에 혹 아니라 바윗덩어리라도 달렸을 거였다. 수술을 하면 얼마간은 더 살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방씨는 방부터 내놓았다. 그러나 보증금을 빼서 수술을 시키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마누라는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방씨 혼자 남아 다시 여관방을 전전하는 꼴은 못 본다며 병원에서 도망쳐버렸다. 결국 방씨는 길거리에서 반 주검이 되어 있는 마누라를 발견했지만 며칠을 넘기지 못했다. 방씨는 그렇게 보낸 마누라를 생각하면 칼로 가슴을 썸벅썸벅 도려내는 것만 같았다.
노크 소리가 나자 방씨는 거의 반사적으로 의자를 돌려 앉았다. 그러나 지나치면 의심을 살까 싶어 다시 의자를 돌렸다. 능구렁이 한상국이 들어오자 방씨는 바짝 긴장이 되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만은 피하자 싶어 최대한 고개를 수그리고 서류를 들여다보는 척했다. 급식비 면제 학생 명단이라는 제목만 눈에 들어올 뿐 내용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교장의 사인을 눈여겨 보아두었던 터라 흉내를 내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안전한 게 최고지 싶어 도장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에 힘을 주어 도장을 꾹 눌러 찍는데 손끝부터 가슴까지 짜릿했다.
방씨는 고개를 숙인 채 서류를 앞으로 밀었다. 그런데 한상국이 서류를 집어 드는 기척이 없었다. 방씨는 느낌이 이상해서 슬쩍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무언가에 골몰했던 듯 흠칫 놀라며 자세를 바루었다.
“교장 선생님. 오늘 넥타이가 돋보이십니다.”
후줄근한 넥타이가 멋있어 보일 리 만무했다. 능구렁이가 뭔가 냄새를 맡고는 일부러 딴청을 부리는 것 같았다. 방씨는 가슴이 덜컹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공손히 인사를 한 후 나갔다. 펑퍼짐한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걷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방씨는 가슴이 조여들었다. 아무래도 한상국의 유들유들한 표정과 눈빛이 꺼림칙했다. 이쯤에서 이 놀음도 그만두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교장실을 막 나서려는 순간, 이렇게 끝내기에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다시 발목을 잡았다. 용역회사에서는 얼토당토않은 사고를 친 데 대한 응징으로 당분간 일자리를 알선해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게다가 유기, 감금죄로 교장이 고소라도 하는 날이면 꼼짝없이 곤혹을 치를 게 아닌가. 어차피 그르친 일인데 끝까지 가보자 싶었다. 제깟 놈이 아무리 개코라 해도 이런 일을 상상이나 할 것인가. 방씨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다시 의자로 돌아가 몸을 깊이 묻었다.
“교장 선생님. 식사하셔야죠.”
방씨는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일부러 숨이 넘어갈 듯이 억지 기침을 한 후 쇳소리를 내어 생각이 없다고 했다. 행정실장이 인터폰을 내려놓는 소리가 가슴에 철컥 걸려들었다.
인터폰을 내려놓은 지 얼마 안 되어 방씨는 배가 슬슬 고파왔다. 어젯밤에 먹은 술 탓에 속은 진작부터 쓰렸다. 라면 생각이 간절했다. 환경호르몬이 어쩌느니 해도 속 쓰린 데는 역시 라면이 최고였다. 뜨끈한 국물에 고춧가루를 쳐서 들이키는 생각을 하자 뱃속이 요동을 쳤다.
방씨는 연신 꼬르륵거리는 배를 쓸어내리며 창문에 바싹 붙어 서서 운동장을 내다보았다. 점심을 먹고 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와 운동장은 왁자했다. 운동장을 점령하다시피 한 축구패를 비롯하여 농구며 줄넘기, 배드민턴을 하는 아이들의 열기로 운동장은 한껏 달구어졌다. 방씨는 국민학교 운동회 때 닭싸움하던 광경이 떠올랐다. 선수 모두 장갑을 끼어야 한다는 별스런 규칙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은 경기였다. 방씨는 분명히 이겼는데 졌다는 판정을 받았다. 상대편의 손이 발을 놓치는 순간, 이겼구나 했는데 바로 역습을 당했다. 방씨는 아무도 결정적인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억울해도 참아야 하는 이유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상대 아이가 육성회장 아들이니 어쩌겠냐. 다음 날 방씨는 그 아이를 찾아갔다. 좋은 말로 할 때 솔직히 자백해라. 아니꼬우면 니네 아부지보고 육성회장 하라고 하지? 방씨는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람을 개 패듯이 팼다.
똑 똑 똑 똑 누군가 문을 찬찬히 두드렸다. 방씨는 또 뭔가 싶어 얼른 의자부터 돌리고 앉았다.
“교장 선생님. 따끈한 국물 가져왔습니다.”
“식사도 못하셨다고 해서 저희가…….”
“가사실에서 특별히 만들었어요. 솜씨는 없지만 정성껏 만들었으니 꼭 드세요. 몸이 안 좋으실수록 식사는 챙겨 드셔야죠.”
여선생 둘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번갈아가며 말했다.
방씨는 꼭 귀신에라도 홀린 것 같았다. 고기가 둥둥 뜬 미역국에 참기름 냄새가 고소한 나물을 보자 금세 군침이 돌았다. 방씨는 누가 불쑥 들어올까 봐 얼른 문부터 걸어 잠갔다.
김이 폴폴 나는 차진 밥 한 술을 뜨자 방씨는 그 간의 모든 조바심이 일시에 달아나는 듯했다. 음식말고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치웠다. 세상사가 다 밥그릇 안쪽이지 싶었다. 밥풀 하나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싹 비운 그릇에 신문을 살짝 덮어 교장실 문 밖에 내어놓았다. 내일은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오늘 일은 후회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졌다.
인삼차까지 한 잔 마시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교장이란 작자는 하루 종일 여기 앉아서 도장이나 몇 개 꾹꾹 눌러주고 그 많은 월급을 받아간다는 말인가. 밤이면 토막잠 신세요, 번번이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어깃장 한 번을 놓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새삼 한심했다. 방씨는 탁자 위에 놓인 책을 뒤적거렸다. 어젯밤에 보았던 음란잡지는 교장이 그새 감췄는지 보이지 않았다. 교양 있게 사는 법, 사람을 다루는 몇 가지 방법, 행복한 미래 어쩌구 하는 책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방씨는 건성으로 책장을 들추었다. 책갈피 속에 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다. 무심코 내용물을 꺼내 보았는데 뜻밖에도 장기기증 서약서였다. 방씨는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작자가 생각 외로 쓸 만한 구석이 있구나 싶다가 생색이나 내려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갔다. 아이들에게 장학금입네 하고 주는 것도 다 제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판공비라고 하지 않았던가.
밥도 먹었겠다 낮잠이나 한숨 잤으면 딱 좋겠다 싶은데 갑자기 밖이 떠들썩했다.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와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뒤섞여 쩡쩡 울렸다. 기어이 문제의 학부모들이 들이닥친 듯했다.
“아, 글쎄 교장 선생님을 만나러 왔다니까요.”
“죄송합니다. 지금은 교장 선생님께서 출장을 가시고…….”
교감의 거짓말에 방씨는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우선 교장실 문부터 잠근 후 문에 바짝 귀를 갖다대었다.
“애들이 싸움을 하면 선생이 말리지는 못할망정 되레 각목을 휘두르다뇨?”
“각목은 아니고, 그 지휘봉으로…….”
“아니, 그래서 지금 책임을 회피하시겠다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고…….”
여자는 따따부따 연판장이 어떻고 인터넷에 띄우니 마니 하더니 당장에 선생의 목을 잘라야 한다고 핏대를 세웠다. 나중에는 철밥통 운운하면서 교원평가제까지 들먹였다. 교감과 교무부장은 죽을죄를 졌습니다, 하듯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방씨는 상황이 대충 짐작은 되었지만 판단은 서지 않았다. 어서 그들이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한 이십 분쯤 지났을까. 당장 교장실로 쳐들어와 집기라도 부술 듯하던 이들의 기세가 조금 꺾이는 듯했다.
그들이 돌아간 것을 확인하자 방씨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긴장을 한 탓인지 목도 뻐근하고 아랫배까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한번 시작된 통증은 걷잡을 수 없이 심해졌다. 곧 배변의 기별이 왔다. 방씨는 헐레벌떡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 위에 걸터앉았다. 벽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방씨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나 여깄어…….’ 혹시나 했는데 교장의 구조요청 신호가 분명했다. ‘교장 여기 있다니까요.’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 또렷하게 들렸다. 토끼가 제 방귀에 놀란다더니 내가 꼭 그 짝이네, 하면서도 방씨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에게 들리는 소리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화장실에 들렀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교장의 말을 들었을 텐데 수습을 하지 않다니. 하지만 방씨는 이런 때일수록 침착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물을 내리고 막 일어서려는데 누군가 화장실로 들어서는 소리가 났다. 방씨는 조금 빨리 일어서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렇게 나대더니 꼴좋게 됐지 뭐.”
“그래도 좀 안 됐어.”
“안 됐긴, 뭐가? 그동안 우리한테 한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약과지.”
“조용히 좀 해. 누가 들으면 어떡하냐?”
“듣긴 누가 들어? 그리고 그 까이꺼 들어봤자지. 모두가 공모한 건데. 안 그래?”
공모, 방씨는 불에 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완전히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도박 같지 않냐?”
“도박이면 어떻고 게임이면 어때? 우리는 아무 소리 말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고.”
“근데, 이번 일로 좀 달라질라나?”
“글쎄, 모르지. 사람이 그렇게 빨리 달라진다면 세상이 아직 요 모양이겠냐?”
“첫애 낳아 놓고 바로 사모님이 돌아가셨다며? 혼자 힘으로 아들 잘 키워 명문대 보낸 걸 보면 꽤 괜찮은…….”
“지금 그런 얘기할 때냐?”
“아니, 그게 그렇다는 얘기지. 근데, 한 선생님말야. 좀 느끼하긴 한데 머리하난 끝내주는 것 같지 않냐?”
“그 아저씨가 다 차려놓은 밥상에 자기는 수저만 올려놓은 거래잖아.”
“결재를 받으러 갔다가 그 아저씨 손 보고 필을 받다니, 참. 결재는 나도 받았구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잖아. 그렇게 벼르더니 대박 치는 거지 뭐. 그나저나 그 아저씬 지금쯤…….”
“쉬, 쉿.”
방씨는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선생들이 빨리 나가주기만을 기다렸다. 간간이 신호를 보내던 교장은 제 풀에 지쳤는지 잠잠했다.
두 선생은 잠시 더 시시덕거리다 나갔다. 방씨는 화장실 문을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변기 옆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종소리가 났다. 곧 교실에서 아이들이 쏟아져 나올 텐데,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방씨는 문을 살짝 열어 주위를 살폈다. 마침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방씨는 잽싸게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방씨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추슬러 교장실로 돌아왔다. 어설프게 일을 벌였다가 단단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어젯밤까지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는데 일이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조금 전까지와는 또 다른 상황, 새로운 국면이었다. 방씨는 자신의 거취에 대해 쉬이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일이 좀 꼬이기는 했지만 선생들도 공모를 했다니 대세로 보아 불리할 것도 없을 듯했다. 선생들이 다 공모했다는 걸 알면 그 심정이 어떨까. 저도 이것저것 따져볼 테지. 일을 까발렸다가는 저한테도 이로울 게 없는데, 그냥 지나갈지도 몰라. 선생들 화장실 벽을 그리 두들겨댔으니 체면이 말이 아닐 테고 말이지. 나도 들었는데 선생들이 못 들었을 리 없고. 교장이 그 정도도 모르진 않을 거야. 무턱대고 교원평가제 시범학교 한다고 설쳐댔을 때는 저도 이쯤은 각오했어야지. 나만 부려먹은 게 아니라 선생들도 종 부리듯 했다니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모르는 빙충이 같은 놈. 어쨌거나 저도 이제 좀 뜨끔하지 않을까? 그래, 갈 데까지 가 보는 거다. 교장 하는 꼬락서니도 지켜보고…….
막상 그렇게 마음을 먹었는데도 방씨는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신의 처지도 그렇지만 세상에 못해 먹을 게 교장이구나 싶었다. 교장에 대한 연민까지 일기 시작했다. 교장이 그렇게 끔찍하게 여긴다는 아이들조차 교장 흉을 보는 것도 그렇고, 선생 중 누구 하나 교장을 존경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존경은커녕 합세해서 도박인지 게임인지를 하고 있지 않는가. 게다가 학교에 무슨 일이 터졌다 하면 뒷감당은 교장이 도맡아 해야 하고. 교장이 젊은 나이에 상처를 했다는 것은 방씨로서도 뜻밖이었다. 그 긴 세월을 혼자서 아들을 키우며 살아왔다니 그 삶은 오죽 고달팠을까. 방씨는 길게 한숨을 토했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이지 싶고 모든 게 허망했다. 숨어서 음란잡지를 보고 있는 교장의 모습마저 왠지 처량하게 떠올랐다.
어렸을 적 닭싸움을 했던, 그 아이가 전학을 가기 전날 밤에 방씨를 찾아왔다. 이미 둘 다 중학생이 된 다음이었다. 그 아이가 손을 내밀었을 때 방씨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 아이의 손가락은 세 개뿐이었다. 어른들은 모두 알고 있었던 걸 애들이랑 너만 몰랐던 거야. 다섯 손가락을 가진 너하고는 처음부터 게임이 안 되었던 거지. 내가 이겼다고 했을 때 내 기분은 어땠을 것 같아? 하지만 그때 내가 가만히 있었던 건, 그리고 네가 날 찾아왔을 때 억지를 부렸던 건……. 그 아이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아 방씨는 그 아이의 눈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라도 위로하려 했던 걸 알았기 때문이야. 그 후로 방씨는 다시는 닭싸움을 하지 않았다. 씨름이나 말타기, 다방구도 하지 않았다.
방씨는 물색없이 코끝이 찡했다. 때마침 한상국이 결재를 받으러 왔다. 방씨는 노크 소리를 듣고도 자신이 놀라거나 주눅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했다. 드디어 이곳에서 나갈 때가 온 것 같았다. 방씨는 한상국을 보며 슬쩍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나 나나 어차피 공범이라는 생각에 한결 마음이 편했다.
“조금 전에 보니까 방씨가 좀 시원찮은 것 같은데 숙직실에 좀 가 보세요.”
방씨는 목에 손을 대고 쇳소리를 섞어 말했다. 한상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나 애써 태연한 척 교장실을 나섰다.

오전에는 쨍 소리가 날 것처럼 하늘이 맑고 쾌청하더니 오후 들면서 날씨가 꾸물꾸물했다.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결도 제법 스산했다. 방씨는 자꾸 움츠러드는 어깨에 힘을 주었다. 일이 잘 되면 교장하고 닭싸움이나 한판 붙어볼까? 하며 방씨는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두 팔을 쫙 벌려 기지개를 켠 후, 보무도 당당하게 교문을 들어섰다. 교장이 막 현관을 나서고 있었다. 방씨는 그 어느 때보다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별고 없으셨습니까? 교장 선생님.”
교장의 헛기침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렸다.


김혜정․
여수 출생
․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창작집 󰡔바람의 집󰡕 등 ․장편소설 󰡔달의 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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