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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신작시/함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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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순례
지독한 열반
밑동이 잘린 그루터기
누르스름한 단면을 쓰다듬다가 나는
가슴을 맞대고 돌아나간 쌍나이테를 보았다
폭설과 장마에 그만 중동이 부러진 느티나무였다
갈래갈래 가지가 벋어나가고
별처럼 피어오르는 이파리들 사이로 새들이 날아들고
물끄러미, 수백 년, 낮과 밤이 흐르고
아침마다 그의 둥치에
불면의 밤을 퉁퉁 쳐대는 짐승들이 흘려놓은 하품 같은 거
돌이끼 피고 닳고 닳은 우주의 틈새에서
층층이 쌓아 올린 두 개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 여기에 탑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
뛰어올랐다
불심은 불의 심장에 닿는 일이듯
허공을 뚫고 느티나무를 뚫은
저 기나긴 사릿빛 묵언
지상에 풀어낼 일이 많은지
느티나무 몸돌은 천천히 궁리 중이었다
슬픈 도라지꽃
철시한 상점 밖
두 노인네 평상 위에 앉아
도라지 다듬고 있다
수북이 쌓이는 젖은 껍질들이
빗속을 걸어온 내 사랑 같다
그 껍질 벗기는 칼에 어리는
도라지 흰빛 눈부시다
빗줄기 이마를 두드리자
일순간 불어난 계곡물
도라지 도라지, 낡은 옷 껴입은
산사를 돌아든다
절터 찾아 헤매던 자장율사가
삼나무 빼곡한 이곳을 찾았을 때
걸음을 멈춘 어디쯤일까
세속의 허물을 벗지 못해서
슬픈 도라지꽃, 나는
날 잡아 사랑의 칼날을 죽이고 있다
흐린 날엔 노을도 보랏빛이다
함순례․
1966년 충북 보은 출생․1993년 ≪시와사회≫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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